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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의 중국날조 스크랩 농사와 언어의 전파를 통해 알아본 인류의 역사
매니아 추천 0 조회 58 13.08.18 23:59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2007년 8월 21일 (화) 05:30   연합뉴스

"쌀은 원래 붉은색..1만년전 돌연변이

 

한.미 연구진, 유전자연구로 벼 진화과정 규명

(서울=연합뉴스) 이주영 기자 = 쌀이 흰색이 된 것은 약 1만 년 전 붉은 색이었던 야생 벼의 한 유전자에서 돌연변이가 발생했기 때문이며 이후 흰쌀 벼는 초창기 농부들의 적극적인 재배로 전 세계로 확산됐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미국 코넬대 수전 R. 매코치 교수와 충북대 조용구 교수, 농업진흥청 농업생명공학연구원 박용진 박사팀은 21일 현재 재배되고 있는 흰쌀 벼 품종의 97.9%가 약 1만 년 전 야생 붉은 쌀 벼였던 자포니카종의 한 유전자에서 발생한 돌연변이로 인해 생긴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연구진은 또 이렇게 생겨난 흰쌀 벼 품종이 전 세계 재배 벼의 97.9%를 차지할 정도로 널리 확산된 것은 이 품종의 우수성을 발견한 초기 농부들이 적극 확산시켰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 연구결과는 온라인 국제저널 '공공과학도서관-유전학(PLoS-Genetics)' 8월호에 발표됐다.

연구진에 따르면 한국과 일본 등에서 주로 먹는 자포니카종과 동남아시아 등에서 재배되는 인디카종 모두 1만년 전 야생 붉은 쌀이었던 자포니카종의 한 유전자에서 일부 DNA가 제거되는 돌연변이가 발생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다.

연구진은 또 방글라데시 등에서 널리 재배되고 있고 전세계에서 재배되고 있는 벼의 2.1%를 차지하는 아우스(Aus)종도 같은 유전자에서 일어난 다른 돌연변이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 두가지 돌연변이는 모두 한가지 단백질의 길이가 짧아지는 변화를 일으켰다. 연구진은 이 단백질이 낱알의 색깔을 결정하는 분자 경로를 활성화하는 기능을 가진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돌연변이로 인해 쌀의 색깔을 붉게 만드는 단백질이 제 기능을 못하면서 흰색을 띠게 됐다는 것이다.

연구진은 또 초창기 농부들이 야생 붉은 쌀 품종보다 흰쌀 벼를 선호해 널리 확산시킨 것으로 추정했다. 벼 꽃가루는 자연상태에서 10m 이상 퍼지기 어렵기 때문에 인위적인 확산활동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널리 퍼지기 어렵다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다.

연구진은 초창기 농부들이 흰쌀 벼를 선호하게 된 데에는 흰쌀의 경우 수확 후 붉은 쌀보다 껍질 벗기기나 해충 골라내기 등이 쉽고 쌀알의 강도도 붉은 쌀보다 약해 더 적은 연료로 쉽게 요리할 수 있다는 점 등이 작용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연구결과는 앞으로 더욱 다양한 벼 품종을 개발하는데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연구진은 현재 야생 붉은 쌀에 있는 우수한 형질을 흰쌀 벼에 도입해 생산량이 더 많으면서 가뭄이나 해충 등에 견디는 힘도 더 강한 품종을 개발하는 연구를 하고 있다.

scitech@yna.co.kr

(끝)

<저작권자(c)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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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 2600년전 '절구공이'와 '농사용 인공 저수지' 발... 클릭참조>>

 

 

빗살무늬토기로 보는 한국인의 뿌리



빗살무늬 토기 (한국)

 



빗살무늬토기 문화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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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곡리 유적 30만∼35만년 전 것 - 네안데르탈인보... 클릭참조>>

 

 

1998년과 2001년 조사한 충북 청원군 옥산면 소로리 구석기유적이 그곳인데, 지금으로부터 약 1만 7000~1만 3000년 전의 토탄층(유적이 보존되어 있는 흙층)에서 모두 59톨의 볍씨(고대벼와 유사한 벼)가 발견되었다. 여러 학문분야의 공동연구를 진행하여 얻은 결과가 2002년 제1회 소로리볍씨 국제학술회의에서 발표되었다. 이듬해 워싱턴에서 열린 제5회 세계고고학대회에서도 그것이 소개되어 국제학계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영국 비비시(BBC) 방송을 비롯한 세계적 언론매체들도 앞을 다투어 특집으로 다루었다.

 

국내외가 인정하는 구석기전문학자인 이융조 교수는 발굴이후 꾸준한 국제학회에서의 활동으로 2001년 국제학술대회 발표이후, 올해 6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제5회 세계고고학 대회에서 발표한 ‘세계최고(最古)의 소로리볍씨의 발굴과 의미’라는 논문을 통해 1만5000년된 것 등 4개종의 볍씨 59톨을 발견했으며, 이는 지난 97년 중국황허(黃河)강변 장시(江西)성에서 발견된 선인동 볍씨(1만500년)보다 약 4500년 정도 오래된 것”이라고 밝혀 국제학계의 인정을 받았다. 22일 영국 BBC 방송이 보도되면서 세계적으로 공인을 확실히 받은 셈이다.
이 교수는 이 결과가 미국의 권위 있는 방사성 탄소연대 측정기관인 지오크론(Geochron)과 서울대의 AMS연구팀으로부터 동일하게 얻은 것이어서 국제적으로 공인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고고학 분야에서의 ‘볍씨’는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농경사회를 이루었던 아시아 민족들의 석기시대의 문화와 기원을 설명할 수 있는 핵심 자료일 뿐만 아니라, 또한 볍씨의 DNA 분석에 의하면 고대의 쌀은 현재 대량 생산되는 쌀의 것과 다르기 때문에, 벼의 진화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소로리 볍씨’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볍씨로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됨에 따라 이를 이용한 문화사업 및 추가 발굴작업도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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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와 언어의 최초의 전파 Farmers and Their Languages : The First Expansions

(논문 저자 - Jared Diamond and Peter Bellwood / 사이언스 2003년 4월 25일 자에 발표)

 

 

 

 

 

 위 그림은 홍산문명 한웅배달국과 요하문명 단군조선국의 특징적인 지역 분포를 잘 나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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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초기 인류, 아시아인 특성이 우세"

[연합뉴스] 2007년 08월 07일(화) 오전 09:17

 

(워싱턴 AP=연합뉴스) 유럽에 정착한 초기 인류의 출신지는 아프리카보다는 아시아가 유력해 보인다는 새로운 연구가 발표됐다.

 

현생인류의 조상인 초기 호미니드의 화석화된 치아 5천여 점을 분석한 스페인 국립 인류진화연구센터 등 국제 연구진은 유럽에 정착한 초기 인류는 아프리카로부터 한꺼번에 몰려온 대규모 집단이 아니라 보다 복잡하게 분포된 다양한 무리들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아프리카와 아시아, 유럽의 고대 인류인 초기 오스트랄로피테쿠스와 일반적인 호모속의 치아를 비교한 결과 초기 유럽 인류는 아프리카보다는 아시아인의 특성을 더 많이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혔다.

 

이는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를 포함한 호모속(屬)의 진화가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동시에 진행됐을 것이라는 가설을 뒷받침하는 것이기도 하다.

 

연구진은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인의 치아 구성과 크기, 형태가 차이를 보이는 것은 이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각각 별도의 진화 과정을 거쳐 왔음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이것이 아프리카와 유라시아 사이에 유전적 교류가 없었다는 의미는 아니며 오히려 유라시아인들이 아프리카를 떠난 고대 인류의 후손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이들은 강조했다.

 

스페인 정부 및 연구재단들의 지원으로 실시된 이 연구는 6일자 미국립과학원회보(PNAS) 온라인판에 발표됐다.

 

이에 대해 미시간 대학의 밀포드 월포프 교수는 "`인류 진화 역사의 대부분이 소규모의 비교적 고립된 집단을 이룬 아프리카 이주민과 여러 대륙간 이주민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연구의 논지는 고인류학자들의 해석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논평했다.  (끝)

 

youngnim@yna.co.kr

 

 

 

'헬리코박터균'의 분포로 본 과거의 인류이동

Traces of Human Migrations in Helicobacter pylori Populations

(출처 : 사이언스 2003년 3월 7일자에 실린 연구논문)

 

 

 

 

'헬리코박터균'의 유전적 분포 지도

 

노란색이 동아시아 고유의 헬리코박터균을 가진 사람들의 비율 

 

'헬리코박터균'은 사람의 위장 속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 동아시아의 어떤 인간(배달겨레)들이 어느 곳(바이칼호수 주변 추정)에서 오래도록 고립되어 살아서 생긴 

 

'동아시아 고유의 헬리코박터균(노란색으로 표시)'를  가진 사람들로

 

중원대륙 북부 및 동부와 몽골·만주·연해주·한반도·왜열도 등의 동북대륙에서 가장 많은 비율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들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가 인디언이 되었으며 (13번 , 14번)

 

더욱 내려가 남미 인디오들의 조상이 되었고 (16번 , 17번)

 

세계 각지로 퍼져 나갔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계 最古목선 발견 클릭참조>>   <<英 BBC “반구대 암각화는 고래사냥 기원” 클릭참조>>

 

<<제주문화의 뿌리를 찾아서 클릭참조>>   <<아메리카 인디언의 유래 클릭참조>>

 

그런데 그중에서도 한국인에게는 유럽이나 아프리카 고유의 유전자가 없고

 

오로지 동아시아형 고유 유전자만이 있다는 것이

 

같은 논문에 나오는 아래 표입니다.  

 




 

위의 표에 에 보면 1번이 한국인데, 특히 한국인들에게서는 오로지 동북아시아 고유 유전자만 나타납니다.

 

쥐나 짱골라족의 역사탐원(동북, 서북, 서남)공정의 목적은

 

배달 한민족(동이계, 흉노계, 융족계 등 수많은 배달겨레)으로부터

 

한웅배달국과 단군조선국 그리고 그 갈래왕조들의 모든 업적을 노리는 야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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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고대에 '시베리아~만주'에서 중앙아시아와 중동(아랍)으로 언어와 농사문명을 가진 사람들의 이동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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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 신화를 깨뜨린 수메르 문명 (출처 : 쥬피터님의 블로그)

 

인류 문명의 발상지 중 가장 그 기원이 오래된 곳은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다. 이곳에서 인류 최초로 수메르 문명이 꽃을 피웠고, 고고학자들이 그들의 설형 문자들을 발견하고 판독해 가면서 비로소 그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수메르 문명 :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 유역

수메르인들의 기록과 연대는 아브라함 시대보다 수세기 앞서는 것이며, 따라서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기 훨씬 이전에 인간 세상에는 이미 고도로 발전된 문명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의 문명은 기원전 3,000년 전까지 올라가며, 이로써 성서 고고학이 독점하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성서에 의하면 셈족이 수메르에서 나왔다고 쓰여 있지만 근래에 밝혀진 바로는 수메르인은 셈족이나 유태인과는 전혀 본질이 다른 민족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수메르인의 인종은 카탈휘유크를 건설한 고대 소아시아인이나 인도의 인더스 문명을 건설한 드라비다인과 근접할 것이라는 것이다. 최근 여러 유물, 유적 등을 근거로 수메르인들이 고대 동아시아로부터 이동해왔다는 설이 동아시아 배달겨레의 홍산문명과 요하문명 등의 발견으로 점차 힘을 받고 있다.  
 
 <<지구환경변화와 역사 - 기후 문명의 지도를 바꾸다 클릭참조>>

수메르에서 발견된 유적과 유물들을 판독해 나가는 과정에서 성서에 등장하는 야훼의 창조 이야기, 에덴 동산 설화, 노아 홍수 이야기, 욥기, 아가서, 바벨탑 사건 등의 수많은 내용들이 수메르에 그 기원을 두고 있음이 밝혀지자 성서 학자들은 충격과 참담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

 수메르인들이 가지고 있던 문명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급 문명이며,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문명보다도 무려 1천년 전의 문명이라는 데에 고고학자들은 당혹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수메르인들이 설형 문자를 사용하고, 직조 기술의 사용으로 옷을 물들여 입고 다닐 당시 유태인은 문자도 없었으며, 동물 가죽을 벗겨 입고 다녔었다.

  성서학자들은 인류 최초의 문명 발상지가 팔레스타인 지역이라고 여겼고, 에덴 동산도 그 지역 어딜 것이라 믿어 오던 터에 수메르 유적(지금의 이라크에 위치함)의 발견은 그야말로 전세계 크리스트교의 본질을 뒤흔드는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수메르에는 이미 에덴 동산 설화가 있었고, 에덴 동산과 남자. 여자가 등장하며, 동산의 열매를 따 먹지 말라는 금기까지 성서와 너무나 흡사한 설화가 있었고, 노아의 홍수와 흡사한 이야기가 있었다. 다만 노아라는 이름은 지아슈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전 세계인들이 보고 있는 성서가 수메르 문자의 판독으로 이제 한낮 휴지 조각에 처해지게 된 것에 성서학자들은 참담함을 감출 수 없는 것이다.
 
 성서는 이미 이집트, 바빌로니아 등의 역사, 종교에서 많은 것을 차용했음이 밝혀지고 있다.

 - 최초의 문명임에도 불구하고 건물 하나가 많게는 수백 개의 방이 있는 건물을 비롯해 굉장한 주거 지역을 이루며 살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당시에 이미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이 완비되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상수도와 하수도를 만들었습니다. PVC나 스텐 파이프는 아니고요, 도자기를 구워 상하수도 시설을 한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 그저 원숭이 비슷한 존재들이 아니고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살았던 것입니다.

 상하수도 시설을 제대로 갖춘 것이 이제 몇 년 되었습니까?

 그런데 인류 최초의 문명이 이미 완벽한 상하수도 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수메르 문명에 대한 가장 놀라운 발견 중의 하나는 수메르 문자의 발견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문자는 수메르 사람들이 쓰던 설형 문자입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런 수많은 점토판이 발견되었습니다.


기적은 기독교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종교에서도 일어난다.
 
 대홍수는 실제로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야훼와는 무관한 것이다. 신석기 4기 빙하기가 끝날 무렵 간빙기 기원전 1만년 경에 북반구의 빙하가 갑자기 대거 녹아내리면서 대홍수가 일어났고 실제로 이 사건으로 고대의 저지대 문명의 대다수가 멸망했다.
 
 이 대홍수 이야기는 수메르 신화에 적혀있고 이후에 유태인들이 바이블에 그것을 자신들의 일인냥 기록한 것이다.
 
 홍해 갈라짐 현상은 현재에도 지구에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이것이 과학적인 현상임이 입증되었다.

 

<<거짓으로 시작된 기독교의 한계 클릭참조>>

 

 

 

 

영지주의(靈智主義), 그노시즘(Gnosticism)

 

영지주의(Gnosticism)는 초기 기독교 당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한 해석을 두고 정통파 기독교와 대립한 기독교의 또 하나의 흐름이다. 영지주의(靈智主義)는 '앎'을 뜻하는 희랍어 그노시스(Gnosis)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영지는 단순히 지식이나 이성적인 지식이 아닌 경이로운 마법으로 빛나는 지식, 통찰을 지칭한다(『신비의 지식, 그노시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컬럼비아 대학의 일레인 페이젤스 교수는 영지의 비밀이란 곧 하느님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초대 기독교 간부들에 의해 이단으로 몰린 영지주의는 CE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후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된다. 교부들은 영지주의 복음서를 사악한 교사(敎師)들에 의해 쓰여진 비정통적인 가르침으로 간주하여 이를 파기시켰다. 이와 더불어 초기 기독교 당시의 수많은 영지주의의 가르침들이 사라져버렸다. 그 결과 몇 편의 문서만을 정경(正經)으로 확정한 소위 기독교 정통파는, 고대 종교 문헌 전체 중 극히 일부만 후세에 물려주는 우(愚)를 범하고 말았다. 따라서 초대 교부들이 남긴 문헌을 통해 정경이 성립되기 이전에 있었다고 하는 수많은 복음서들은 그 목록만이 알려져 있었을 뿐 그 구체적인 내용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그런데 이렇게 사라져버린 줄로만 알았던 영지주의 복음서가 지난 1945년 이집트의 나그 함마디(Nag Hammadi)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돌연 나타났다. 학자들은 영지주의 복음서에 나오는 문구들 중 상당수는 큐(Q)에서 따온 것으로 믿고 있는데, 이는 영지주의 복음서들이 신약의 복음서와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원래 마태ㆍ마가ㆍ누가복음은 '말씀들(logia)'이라고 하는 공통의 줄기에서 나왔다. 이 '말씀들'은 처음에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신도들 사이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다가, 그 일부가 훗날 복음서들로 고정되고 나머지는 사라져버렸다. 학자들은 복음서의 뿌리가 된 이 '말씀들'을 출처 혹은 자료를 뜻하는 독일어 쾰레(Qeulle)의 머릿글자에서 따와 큐(Q)라고 불렀다.

복음서의 편집자들은 이 '말씀들'을 각기 나름의 방식으로 배열하여 서로 모순되는 이야기들을 만들었던 것이다(『신의 가면Ⅲ : 서양신화』). 영지주의 복음서에도 신약의 복음서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동일하게 나오며, 신약의 내용이 그대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양자간의 차이점은 놀라울 정도이다.

첫 번째로 신약의 복음서를 믿는 정통파 기독교인들은 신과 인간 사이에는 영원한 심연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지주의자들은 이를 부인한다. 그들은 자신을 깨닫는 것이 곧 하느님을 깨닫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자아(自我)와 하느님의 신성(神性)은 동일하다고 믿는다. 이는 힌두교에서 말하는 아트만과 브라만의 합일을 방불케 하는 가르침이다.

두 번째로 영지주의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는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와는 달리 죄와 회개가 아니라 불교의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와 비슷한 교리를 설하고 또 깨달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즉, 영지주의자들은 동양의 구루와 비슷한 예수의 이미지를 상정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정통파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생각하기에, 예수 또한 인간과는 건널 수 없는 간격을 가진 존재로 믿는다. 그러나 영지주의 복음서에서는 예수 또한 인간들과 같은 근원에서 왔다고 말한 것으로 나온다.

세 번째로 기독교인은 구약의 야웨를 사랑의 하느님으로 생각하는 반면, 영지주의자들은 전쟁을 좋아하며 살육을 즐기는 구약의 신이야말로 고통으로 가득찬 이 세계를 만든 악마로 본다.

네 번째로 영지주의에서는 윤회를 인정하며 또한 위대한 어머니(태모)에 대한 숭배를 이야기한다.(『성서 밖의 예수』)

위와 같은 가르침은 『우파니샤드』같은 힌두 철학에서도 발견되지만, 많은 학자들은 특히 영지주의와 불교와의 관련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영국의 저명한 불교학자였던 에드워드 콘즈(Edward Conze, 1928~1979)는 불교도들과 남부 인도의 도마 기독교인 - 전승에 의하면 예수의 쌍둥이 동생이자 사도였던 도마는 예수가 못 박힌 후 인도로 건너가서 전도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 들과의 접촉을 이야기하고 있다.

또 로마제국에서 영지주의가 꽃 피웠을 당시(CE 20~ 200), 인도에서도 대승불교가 개화하고 있었으며 그 때는 인도에서 로마,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무역로가 한창 번성할 시기와 일치한다고 한다(『신의 가면Ⅲ : 서양신화』). 심지어는 이집트의 치유능력을 가진 현자들(therapeuti)도 불교로부터 근원했거나 아니면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최초의 문명은 고대 인도에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놓고 볼 때, 우리는 예수가 인도에서 구도생활을 했다는 『 보병궁복음서』의 내용을 단순히 허구로만 간주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많은 학자들은 영지주의를 1~3세기에 출현한 기독교 내부의 이단으로만 치부하지만, 영지주의를 단순히 그렇게만 볼 수 없는 문제가 있다.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지식은 신령스런 근원에서 흘러나온 인식이기 때문에, 단순한 믿음이나 이성적인 지식보다 우월할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 또한 동방의 모든 고대 종교들 중에 가장 핵심적인 요소들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특히 영지주의를 연구한 독일의 전문가들은 "엄밀히 말해서 기독교적인 영지는 기독교 내부에 존재하는 이단이 아니라,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 이전에 존재했던 또는 기독교와 원초적으로 이질적인 것이며, 그 본질에 있어 계속 이질적인 것으로 머물 사유와 기독교와의 만남의 결과이다"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리고 비교(秘敎)의 신봉자들은 이 영지주의를 '모든 종교의 원천에 존재하는 인간의 종교적 심성의 뿌리'로까지 보고 있다(『신비의 지식, 그노시즘』). 학자들은 이를 기독교 내부에 나타난 영지주의와 구별하여 원영지주의(Proto-Gnosticism)라고 한다.

세르쥬 위탱에 따르면, 이 영지주의가 가진 종교성은 근대적인 몇몇 열망, 예컨대 이성주의나 이신론(理神論) 등과도 밀접한 유사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것은 지중해 세계와 유럽에 사회적, 정치적인 위기 때마다 끊임없이 다시 대두되곤 하였다고 한다. 르네 게농은 특히 모든 종교에서 영지, 즉 "완전한 인식에 의한 인간의 형 이상학적인 해방의 개념이 나타난다"고 말한다(『신비의 지식, 그노시즘』).

간단히 결론만을 이야기하면 영지주의는 일면 기독교의 잃어버린 역사에 빛을 비춰주기도 하지만, 인류 태고적에 나타난 모든 종교의 뿌리였던 신교(神敎)의 가르침과 모든 인류를 만사지(萬事知)의 완전한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 제3의 초종교의 가르침과도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인도의 구루들 사이에서는 4000년이상 전에 배달겨레와 교류했다는 구비전승이 있다.
그래서 한민족의 교리나 자신들의 교리 등을 서로 나누었다는 말이 있다. 요가도 그 당시 생긴 것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 배달한겨레의 정신과 불교가 비슷한 것도 이것때문일 지도 모른다.

 

 

 

 

 

한국과 수메르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수메르 문명'이라고도 불린다.

 

'수메르'인들은 어디선가 홀연히 메소포타미아(현 이라크)지역에 나타나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킨 사람들. 

  

<역사는 슈메르에서 시작되었다(History Begins at Sumer)>의 저자로 유명한 사뮤엘 크레머 교수는 최초의 창조설화를 비롯한 교육제도, 사법제도 등 인류 최초의 39개 사건이 모두 슈메르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 슈메르인들이 살던 지역은 지금의 이라크 지역을 의미한다.

 

@ 펀주 : 수메르(메소포타미아)문명 ---> 에게문명(현 터키지역), 이집트문명, 그리스문명 @


초등학교 교과서에서부터 배우는 인류문명의 4대 발상지 가운데 하나인 메소포타문명은 말 그대로 'meso-potamia'로 양강(兩江) 사이란 뜻이다. 양강이란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을 두고 하는 말이다. 성서에 나오는 '에덴'동산으로 불리는 딜문동산도 바로 이 양강 사이에 있는 지역이다.

 

이라크 이란 북한은 모두 인류 초고대 문명의 발상지란 점에서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지금 북한 학자들은 '대동강문명'이라고 하여 검은머루 유적지 발견 이후 메소포타미아 문명보다 더 오래 된 문명이 대동강 유역에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한 무리의 인간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이 장면을 구약성서 창세기는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평야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창세기 11장 2절)라고 적었다. 이 한 무리의 인간들을 '슈메르인 Sumerian'이라고 하며 그 뜻은 '검은 머리'라는 뜻이다.

성서는 이 거대한 사건을 몇 줄로 처리하고 있다. 그러니깐 지금으로부터 7000여년 전의 사건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양강 지역에 올 때 문자와 학교제도와 법제도 등 고급문화를 이미 가지고 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도대체 어디서 있다가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 이주해 왔느냐이다. 지금 까지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남겨져 있는 이 슈메르인들의 유래 문제를 소위 '슈메르 문제 거리 Sumer Problem'라 할 정도이다.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문명도 슈메르보다 무려 1000년 이후의 것이며, 인도의 인더스강 유역 문명도 그와 비슷한 후기 문명이다. 이스라엘의 '셈 Shem'족의 유래도 'Shum'에서 유래했다. 슈메르인들이 가지고 온 문명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급문명으로, 그 당시 지금의 히브리인들은 말 그대로 'Habiru'로 그 말의 의미는 '떠돌이' 혹은 '산적'의 의미 등을 갖는다.

슈메르인들이 설형문자라는 것을 사용할 당시 히브리인들은 문자도 없었으며 옷이란 동물 가죽을 벗겨 입고 다닐 정도였다. 그러나 슈메르인들은 직조기술을 발견하여 이미 옷을 (염색)물들여 입고 다녔다. 건축술도 발달하여 2층 가옥을 지을 정도였다. 지금 발견되고 이번 이라크 전쟁으로 도난당한 토판들은 거의 경제거래 문서들로서 이는 거래를 한 다음 남긴 계약문서들이다. 그 당시 수메르인들은 이미 경제거래를 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의 강신택 교수는 예일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이 분야의 연구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

1830년대 처음으로 이라크에서 슈메르 문자가 발견되면서 가장 충격을 받은 곳은 기독교였다. 왜냐하면 가장 최초의 사건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생겼을 것이라 여겨져 왔고 에덴동산도 그 지역 어딜 것이라 믿어 오던 터에 창세기의 창조설화와 홍수 설화 등이 슈메르의 토판 속에 그대로 그 원형이 기록돼 있었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 남자와 여자가 있었고, 동산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는 금기, 그런데 슈메르에서는 여자가 아닌 남자가 먼저 따먹는 다는 둥 그리고 홍수가 사람들이 다 죽는 데 지아슈드라는 의인이 있어서 배를 만들어 사람들은 구제한다는 둥 놀라울 정도로 유사한 기록들이 쏟아져 나왔다.

여기서부터 성서학자들은 기독교를 보는 눈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으며 기독교 안에서도 성서의 역사를 다시 쓰자는 주장과 그것을 반대하는 주장으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한국의 기독교 장로교(기장)과 예수교 장로교(예장) 등이 갈라지는 이유도 바로 성서를 보는 이런 시각의 차이 때문이다.

기장은 고고학의 발견을 수용하는 입장이고, 예장은 그렇지 않는 입장이었다. 이것이 1950년대 한국 교회의 상황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누구나 슈메르의 유산을 성서의 한 유산으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다.

고급문화 슈메르에 대하여 히브리 문화를 저급문화로 분류한다. 서양문명은 그리스의 합리적 이성과 히브리의 감성적 신앙이라는 두 물줄기로 이루어진다. 이 두 물줄기는 고대 슈메르 문명에서 만난다.

 

@ 펀주 : 즉 그리스문명과 히브리(이스라엘)신앙은 수메르에서 갈라져 나간 것이다. @

 

기원전 2000년경 슈메르 우르 남무 왕국이 멸망하면서 슈메르 문명은 두 갈래로 갈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스의 올림푸스 신전의 원형이 슈메르의 딜문 동산의 그것이라고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히브리인들의 정신적 유산은 그대로 슈메르의 것을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슈메르인들은 과연 어디서 왔는가? 이것이 슈메르 문제의 화두이다. 그들의 유래를 알 수 있는 단서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남긴 문자이다. 토판에 세겨진 설형문자는 아무튼 인류 최초의 문자로 평가받고 있다.

 

 

보시는 바와 같이 이런 수많은 점토판이 발견되었다.

 

지금 전 세계 언어학자들은 어떻게든 슈메르어와 자기 모국어의 동일성을 찾아 자기들의 언어가 세계 최고의 언어임을 내세우려 하고 있다.

그래서 헝가리, 프랑스, 독일 등도 자국의 언어가 슈메르어와 그 유사성이 발견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극동으로 눈을 돌려보면, 1920년대 볼(C. J. Ball)이 이미 <중국어와 슈메르어(Chinese and Sumerian)>을 저술하였다.

방대한 분량을 통해 두 언어 사이의 유사성을 지적해 놓고 있다. 심지어 일본인 요시와라(R. Yoshiyara)는 1991년에 '슈메르어와 일본어'를 저술, 발간하였다.

어느 두 언어가 같은 계통이라면 먼저 언어의 특징이 같아야 하고, 문법 구조가 같아야 하고, 유사한 언어 특히 수사가 같아야 한다. 우리가 인도와 유럽의 언어가 같다고 하는 것은 영어, 독어, 프랑스어, 인도 샨스크리트어가 모두 이 세 가지 점에서 같기 때문이다.

물론 슈메르어와의 비교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생각키로는 이 세가지 점에서 거의 완벽하게 같은 언어는 우리 한국어가 아닌가 한다. 먼저 언어의 특징이란 슈메르어가 교착언어인데 교착언어란 우리말의 주어나 목적어 다음에 '은, 는, 이, 가' 등이 붇는 언어를 의미한다. 이는 우랄 알타이언어의 공통된 현상이다.

그런데 중국와 인도어는 일단 교착언어가 아니다. 그래서 슈메르어와는 그 특징에 있어서 같지 않다. 다음으로 문법 구조에 있어서 슈메르어는 '주어+목적어+동사'이다. 이는 영어 혹은 중국어와는 다르고 우리말과는 같은 구조이다.

마지막으로 수사(數詞)에 있어서 같아야 하는데 <삼국사기>에는 고대 우리말의 수사가 남아 있다. 필자는 슈메르 수사와 우리 고대 수사를 비교한 바 있으며, 최근 히브리대학에서 슈메르어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 온 조철수 교수가 더욱 심화연구 하여 발표 한 바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슈메르어는 처음 1을 '아스 as'라고 하는 데 이는 <삼국유사> 고(古)한국어의 그것과 일치한다. 처음 빨래를 '아시 빨래'라고 하며 아침은 '아사'라고 하는 것이며 해 뜨는 아침을 의미하는 Asis가 여기서 유래한다.

또 '밭'을 '받'이라 하고, '길'을 '길'이라고 한다.

아버지를 집에서는 '아바'라 하고, 남에게 말할때는 '아비'라 하며, 높은 분을 높여 부를 때는 이름 뒤에 '님'자를 붙인다.

'하늘'을 '아눌'이라 하고, 하늘을 높인 말 즉 '하늘님'을 '아눌님' 혹은 '아누님'이라 한다. 그러한 말이 아주 많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귀하게 숭상하던 꽃이 "Rose of Sharon".

 즉, "샤론의 장미"이다.

 예수의 별명도 "샤론의 장미"이다. 찬송가 89장에도 나오지 않는가?

 이 꽃의 학명은 '히비스쿠스 시리아쿠스(Hybiscus syriacus)'인데 그것은 바로 '무궁화'의 학명과 동일하다.


언어 이외에 슈메르 유래의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 '지구라트'이다. 지구라트는 벽돌로 쌓은 인조 탑이다. 물론 피라밋의 유래이며, 구약성서의 바벨탑의 전신이 다름 아닌 지구라트이다. 지구라트는 천문관측소, 고동 회의소, 제단, 무덤 등 다기능를 가지고 있다. 생각키로는 슈메르인들이 어느 고산지대에 살다가 양강 유역으로 내려 왔다고 보는 것이다.

지구라트의 기능들이란 산이 가지고 있는 기능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걸프 지역으로 통해 들어 온 해양족이 아니고 자고로스산맥을 타고 내려 온 고산족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라크 북쪽 산악지대와 그 너머 어디선가 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 다행히 고고학자들은 지금 터키 그리고 몽고 지역까지 슈메르의 유적을 찾아내고 있는 실정이다. 기원전 3500년경 과연 그 찬란한 고급 문명을 가지고 있던 지역은 과연 어딘가?

그밖에 슈메르와 한국은 묘장제도, 순장제도, 60진법, 최고지도자의 상징을 봉황으로 삼고 있는 점 등에 있어서 앞으로 두고두고 그 유사성이 연구의 대상으로 남겨져 있다.

 

고대 동아시아 배달겨레의 홍산, 요하문명 등 그 문화들은  몽골, 티벳, 수메르 등 세계로 전파된다.

수메르문명은 그 이웃지역인 지금의 터키지역으로 전해져서 유명한 "에게문명"을 이룬다.

 

 몽골에서 발견되는 수메르문명과 같은 유물은 사실은 수메르인들이 만주에서 건너간 사람들이라하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홍산문명 한웅배달국과 요하문명 단군조선국 등을 이룬 배달겨레들 중에 만주에 있던 "수밀리" 사람들이 메소포타미아(이라크)지역으로 가서 "수메르문명"이 일어나고, 고대 한국인들의 일부가 몽골 등으로도 이동해가서 그 곳 사람들에게 문명을 가르쳐 준 것이다.

 

"수밀리" 란 "소머리"라는 말을 한문으로 옮겨쓴 것으로 보인다.

 만주에 소머리강 즉 '牛首河(우수하)'가 지금도 있다.

 고조선의 뒤를 이은 "부여"의  5개의 큰 집안 중 하나가 "우가(牛家)" 즉 "소 집안" 이었다는 것은 교과서에도 나온다.   

 
<<"7천년 '슈메르 고대문명' 모두 끝났다" 클릭참조>>

 

이렇듯 문명이 서로 비슷하여, 잘 모르는 사람들은 수메르 문명이 동아시아로 들어온 것 아니냐 하는 어처구니 없는 오해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미 오래전에 수메르문명을 발굴한 '샤무엘 크래머' 등의 학자들은

" 두개골 등으로 보아 동아시아인들이 문명을 갖추고 갑자기 나타나서 세운 문명이 수메르 문명이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오해를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그 주위에 원래 없던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 살았다고 하여 크래머는 "인종의 섬"이라하는 표현을 쓴다.

 수메르문명(메소포타미아 문명)도 홍산,요하문명 등 고대한국문명들에게서 파생된 것으로 본다.

 

 

 

 

 

고대 한국의 문명 전파, 수메르

 

수메르(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어디선가 놀라운 문명(예를 들어 금속문명)을 가진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난 것으로 드러났고

 (당시 그 지역은 원시석기시대)

 그 사람들은 '검은 머리카락의 사람들(Black Headed People)'이었으며

 골격 등으로 보아 동아시아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영국학자 크래머 등의 발굴 결과 입니다.   

 


5천년전에 만들어진 수메르 왕조 지도자 '구데아(gudea)'의 인물상

(동북아시아인의 특성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나요^^)

수메르에서 발견된 씨름하는 사람들 유물

 

위 유물을 보면 원래 고대한국에서 수메르로 간 분들이

그 지방에 살던 사람들과 피가 섞이긴 했지만

씨름하는 풍습은 계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고대 수메르의 언어가 비교적 많이 남아있다는 시리아 등의 말은

고대 시베리아~만주에서 쓰던 알타이어에서 나온 말로 드러나고

이는 수메르의 말이 고대 시베리아-만주의 말과 같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수메르 말'은 '쥐나 짱골라말'과는 같은 점이 별로 없고

한국어와 상당히 비슷하다고 합니다.

 

영국학자 "크래머" 등의 발굴에 의하여 "머리가 검은 (Black Headed People) 동아시아인들"이 문명을 가지고 들어와 세웠다는 것이 밝혀진 수메르 문명...

 흔히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문명"이라고도 한다.

 

 수메르인들은 고대에 만주에 있었던 "수밀리" 사람들이 이동하여 세운 문명으로 보인다...

 그 증거로  메소포타미아 (지금의 이라크 바그다드 지역)에 문명을 가지고 들어온 수메르 사람들은

 머리카락이 검은 동아시아인들로 나타났다. (유적발굴~두개골 등)

 

 수메르어는 한국어와 유사하며 언어학자들은 서부 아랍의 "우랄어"와 동아시아의 "알타이어"를 합쳐서 "우랄-알타이어"라고도 한다.

(우랄어와 알타이어의 유사관련성)

 터키, 시리아 등 중동지역은 즉 '우랄 지역'은 몽골, 만주, 한반도 등 '알타이 지역'과 대단히 멀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수메르인들의 말은 한국어와 비슷한데 글자는 원시한자 같은 것을 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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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사적 측면에서 본 고구려어의 뿌리 클릭참조>>   <<훈민정음에서 말하는 '중국' 클릭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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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메르 격언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문명화된 땅(civilized land)"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그 주위에서 수메르가 최고 발달된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수메르의 도시는 상하수도 시설도 갖추고 있었고 심지어 수세식화장실도 이용했다.

이집트문명도 수메르에서 건너갔고, 바빌론과 그리스 문명도 수메르에서 배워 갔으니...

 

...수메르인의 격언을 하나 소개 (이 격언은 예수 탄생 수천년전에 이미 있었던 격언)

 

"진리와 함께 걷는 자는 항상 누구든지 생명을 얻을 것이다."

 

...........................................................................

 

수메르의 문물을 배워간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만든 바이블(성경)에 나오는 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펀주 : 현대 유럽 역사책에 보면 유럽 문명의 생성,이동은

 수메르문명 -> 에게문명 , 이집트문명 , 그리스문명.

 유럽문명은 그리스에서 시작.

 그 이전의 유럽은 석기 원시시대.

 그리스인들이 돌도끼 갈고 있을때

 고대 한국'에서는 금속(청동기,철기)으로 도구를 만들었고  진리를 논하고 있었음@

 

 

<<"태극기는 천손민족의 표시..중국보다 앞서"... 클릭참조>>   <<천문학으로 알아보는 역사 클릭참조>>

 

<<배달겨레의 유산, 한의학 역사에 대해 클릭참조>>   <<배달한겨레 복식 역사 클릭참조>>

 

<<국내 最古 천문도 따로 있다? 클릭참조>>   <<24절기 및 10간과 12지 클릭참조>>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 고인돌에 새겨진 천문도 클릭참조>>   <<한국 배(선박)의 역사 클릭참조>>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 천상열차분야지도 클릭참조>>   <<경주 첨성대 (慶州 瞻星臺) 클릭참조>>

 

<<한국 설날, 중국 설날 다른 해도 있다 클릭참조>>    

 

 

  

 

 

 

집요한 `역사공정` [중앙일보]

 

이젠 한반도 문화 뿌리까지

 

중국이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뿌리로 알려진 랴오허(遼河)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자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노력을 가속하고 있다. 선사(先史)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기존 학계가 주장해온 황허(黃河)와 창장(長江) 유역에서 여타 지역으로 확대하려는 이른바 '중화문명 탐원공정(探源工程)'에 따른 것이다.

17일 중국 언론에 따르면 국가문물국은 랴오닝(遼寧)성 뉴허량(牛河梁) 신석기 유적 등 35개를 세계유산위원회에 등재 신청할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 목록에 포함했다.

국가문물국은 적어도 10년에 한 번씩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 예비 목록을 수정해 제출하도록 한 '세계문화.자연유산 보호협약'에 따라 1996년에 이어 이번에 목록을 수정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뉴허량 유적을 랴오허 유역에 분포한 북방 신석기 문화의 대표적 유적의 하나로 분류해 왔다. 랴오허 일대 문화는 한반도와 만주 문화의 원류를 형성한 것으로 평가돼 왔다.

이번 조치에 대해 전문가들은 "고조선.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이들 문화의 원류인 랴오허 일대의 북방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로 파악하고 있다.

중국 사학계는 황허와 창장 유역을 중국문명권으로 분류하고 랴오허 일대는 중국문명과 뿌리가 다른 북방문명으로 파악해 왔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올해 선양(瀋陽) 박물관에서 '랴오허 문명전'을 여는 등 일련의 역사 왜곡을 진행하면서 북방문명을 중화문명권에 편입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한편 새로 작성한 예비 목록에는 뉴허량 유적 외에도 ▶대운하(大運河)▶실크로드▶장경동(藏經洞) 등이 포함됐다. 그러나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시 보하이(渤海)진에 있는 옛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 유적은 복원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이유로 목록에서 빠져 당분간 신청이 어려울 전망이다. 예비 목록에 오른 유산 중에서 2008년 32차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 등재 신청할 유산이 최종 선정된다.

장세정 기자

◆ 뉴허량 유적=랴오닝성 링위안(凌源)시 젠핑(建平)현 근교에서 1981년에 발굴된 신석기 유적. 북방 신석기 문명(기원전 7000년)의 하나인 훙산(紅山)문화에 속하는 유적으로 황허 유역의 중원 신석기 문명보다 일찍 발생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랴오허강 일대에 기원전 3500년 무렵에 형성됐다. 섬세한 옥기(玉器)와 돌무지무덤(적석총) 등이 발견됐다. 특히 흙으로 빚은 여신의 두상(頭像)은 전형적인 몽골 계통의 피부색을 하고 있어 중원문명과 확연히 구별된다.

◆ 탐원공정=상고사를 고쳐 써서 선사시대 중국문명의 판도를 확대할 목적으로 중국 당국이 벌이고 있는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에서 황허문명(기원전 3000년)보다 더 일찍 발생한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자 중국 당국이 이를 자국 역사에 편입하기 위해 2003년부터 해온 사업이다. 랴오허 일대를 편입하면 중국문명이 기원전 1만 년까지 올라간다. 현재의 정치 사정에 맞춰 역사 왜곡을 시도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2006.12.18 04:26 입력 / 2006.12.18 07:00 수정

 

 

 

중국 내몽골자치구 적봉시 동북쪽에 紅山(홍산)이라는 산이 있다. 몽골사람들이 ‘우란하따(烏蘭哈達)’라고 부르는 이 붉은 바위산 인근에서 학계를 놀라게 한 거대한 제단(壇)과 신전(廟)`적석총(塚) 등 거대한 후기 신석기 문화가 발견됐다. 100여년 전의 일이다. 중국 요녕성과 내몽골, 하북성 경계의 燕山(연산) 남북, 만리장성 일대에 널리 분포된, 국가 체제를 완벽하게 갖춘 이 유적을 ‘홍산문화’라고 부른다.

◇홍산문화를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였다. 1906년 적봉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중 많은 신석기 유적과 적석묘 등을 발견했는데 동북지방과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다. 1955년 이를 ‘홍산문화’로 이름 붙였는데 이후 1982년 요녕성 뉴허량(牛河梁)에서도 같은 유적이 대거 발굴되자 세계 각국 언론들은 ‘5천 년 전 신비의 왕국’이라며 대서특필했다. 이 일대는 현재 발굴작업이 계속되고 있으나 중국의 방해로 연구가 제대로 진행되지 못 하고 있다.

◇황하문명보다 앞선 서기전 4천500년~2500년경으로 추정되는 홍산문화는 통상 청동기 시대에나 출현 가능한 분업화가 이뤄진 국가형태를 띠고 있다. 특히 가면과 玉(옥) 장식 등에 곰 형상이 투영된 유물이 대거 발견돼 국내 학자들은 곰 토템을 지닌 웅족과 청동기 시대의 고조선 초기(고조선 중기 이후는 철기시대) 이전 한민족 원류 중 하나인 신석기 시대의 배달국 초기(한웅배달국 후기는 청동기시대)가 자리했던 곳이라고 주장한다. 즉 홍산문화는 단군조선 건국의 토대일 가능성이 높은 유적이라는 말이다.

◇2006년에 중국이 뉴허량 유적 등 35개를 중국의 세계문화유산 예비목록에 포함시켰다고 한다. 遼河(요하) 일대의 북방 신석기 문화를 중국 문명권에 편입하려는 중국의 探源工程(탐원공정)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에 국내 학자들은 “고조선과 부여`고구려`발해 등을 중국사에 편입하기 위해 요하 일대의 홍산문화를 중국문명권에 편입할 의도”라고 비난하고 있다.

◇30년 전 중화문명의 시발점을 앙소문화에서 하모도문화로 바꿔 재설정한 중국은 뉴허량 유적 발견 이후 홍산문화를 ‘요하문명’이라 부르며 중화 3대 문명의 시발점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漢族(한족)의 것과 엄연히 다른 동이족 문화인데도 과거 일제가 한 것처럼 한민족의 뿌리마저 잘라버리려는 역사왜곡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허구의 종족 짱골라  

 

中교수 “순수한 漢族은 없다”… 多민족 섞여 혈통 불분명
2007년 02월 16일 | 글 | 베 이징=하종대 동아일보 특파원ㆍorionha@donga.com |
 
일개 민족이 전 세계 인구의 19%인 13억 명이나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학자가 있었다. 중국 란저우(蘭州)대 생명과학학원의 셰샤오둥(謝小東) 교수. 회족(回族)인 그는 한족(漢族)과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유전자(DNA)를 몇 년에 걸쳐 조사했다. 중국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기원과 이동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였다.

조사 결과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는 한족은 실제로 1개의 민족이 아니었다. 한족이라고 부를 만한 순수한 혈통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중국 언론은 13일 셰 교수의 연구 결과를 자세히 보도했다.

셰 교수는 “오래 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는 어느 한 시기에 한족을 주변 국가 또는 민족과 구별하기 위해 지역적으로 획정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적으로 ‘염제와 황제의 자손(炎黃子孫)’으로 생각돼 온 한족이지만 연구 결과 염제와 황제의 발원지는 중원이 아닌 ‘북적(北狄·북쪽 오랑캐)’지역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황제(黃帝)의 발원지는 현재의 간쑤(甘肅) 성 친양(沁陽)에서 톈수이(天水)에 이르는 지역이고 염제(炎帝)의 발원지는 간쑤 성 동부에서 산시(陝西) 성 서부에 걸쳐 있는 황토고원으로 이들 지역은 원래 ‘북적’ 지역이었다.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산시(山西) 성 남부와 장쑤(江蘇) 성 서부 및 안후이(安徽) 성 서북부를 포함한 허난(河南) 성 일대. 따라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이 바로 중원 사람이라고 생각돼 왔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현재 소수민족이 된 객가족(客家族)이 오히려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순수한 한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주변의 소수민족이나 주변 국가가 한족과 융합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셰 교수의 연구결과에 중국의 일부 누리꾼은 셰 교수가 한족의 ‘동포감정’을 훼손했다며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한족의 비율은 중국 대륙이 92%, 대만이 98%, 홍콩과 마카오가 각각 95%와 97%이다.

 

 

 

“漢族, 단일민족 아니다 해!”
중국 유전연구소 충격 발표 … “지배민족 편입된 ‘가짜 한족’ 수천 년간 묵인”

중국을 여행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중국의 남쪽과 북쪽 사람의 생김새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광둥(廣東) 지방 사람과 베이징 사람과는 겉모양이 뚜렷이 구분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을 같은 한족(漢族)이라며, 한족과 닮지 않았다는 말에 상당한 불쾌감을 표하곤 한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는 이들을 몹시 불쾌하게 할 만한 발표가 있었다. 54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임에도 13억 인구의 92%가 한족이라는 중국 정부의 공식 인구 통계를 부정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기 때문. 거대 순수 혈통으로 인정받던 중국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는 이번 연구 결과는 중국 사회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번 발표가 중국 한족에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 한족의 ‘순수혈통론’에 반기를 들고 나선 주체가 바로 중국 국영 연구소라는 점이었다. 중국 과학원 소속 유전연구소 인류유전자연구센터가 지난 5월 26일 15년 동안 진행한 중국인의 성씨와 유전자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고 전격 선언하고 나선 것. 분석자료를 통해 연구팀이 내린 결론은 중국 남부 지역인 푸젠성(福建省)과 장시성(江西省)에 걸쳐 있는 우이산(武夷山)과 난링산맥(南嶺山脈)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에 거주하는 ‘한족’이 혈연상으로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연구팀은 두 개의 ‘한족’이 한족과 소수 민족 간 유전적 차이보다 더욱 큰 차이점을 보였다고 발표해 파장을 더했다.

 

 

난링 산맥 경계 두 개의 ‘별개 집단’

 

이 연구팀의 한 관계자는 “한족이 통치하던 송나라와 명나라 시기,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등 모두 세 차례의 인구조사 내용을 분석하고 500여 편에 이르는 고문헌과 족보를 참조했다”며 “동시에 수백만 명의 중국인 혈액을 검사해 분석한 결과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유전학자들의 이런 연구 결과는 일부 소장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중국의 역사는 황허(黃河) 유역 한족세력의 남방 침략과 정복의 역사였고, 이 과정에서 남방의 토착민이 자신의 출신을 속이고 한족 행세를 하면서 이같은 결과가 빚어졌다는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북경의 한 역사학자는 “한족만이 중국 사회에서 정치적 파워를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 토착민들이 우월한 중화문화권에 편입하기 위해 한족임을 자처했다”며 “중앙 정부도 소수민족 복속정책의 일환으로 그것을 묵인하고 장려해 왔다”고 말했다. 한편 이들 ‘가짜 한족’ 외에도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후손 중 절대 다수가 소수민족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유리한 한족을 택한 것도 한족 양산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중국에서 부모의 출신 민족이 서로 다르면 자녀에게 선택 권한이 주어지지만, 소수민족을 택하는 자녀는 거의 없는 실정.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결국 한족은 ‘가짜 한족’에 대한 묵인과 ‘민족 선택제’라는 소수민족 통치 기술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는 거꾸로 지배민족으로서 한족의 위치를 수천 년 동안 보전하는 힘이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을 한족의 수로 압도하려는 중국 정부의 ‘인해전술식’ 인구정책의 결과물이 바로 92%라는 통계수치라고 비웃는다.

 

어쨌든 ‘중화주의’라는 민족적 개념을 통치 이념의 전면에 내세우는 중국 당국에게 ‘한족이 사실상 두 개의 별개 집단’이라는 사실은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인류유전자연구센터의 이번 발표는 국영 연구소의 발표임에도 중국 언론매체에 거의 소개하지 않고 있다. 한족의 이익이 중국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였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다.

 

< 소준섭/ 상하이 통신원 > youngji@81890.net
발행일 : 2001 년 06 월 14 일 (288 호)
쪽수 : 62 ~ 62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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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8.19 13:15

    첫댓글 방대하고 일목요연하게 올려주신 정성에 감사드립니다.

  • 13.08.21 19:19

    다들 여러 분야에서 노고가 참으로 많으신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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