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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의 이해: 몸 주체와 몸의 언어
I.
시의 언어는 몸의 언어이다. 시를 쓰는 일은 하늘의 목소리 혹은 천상을 향하는 정신에 몸을 입히는 행위이다. 몸에 갇혀 있는 인간은 몸 바깥을 사유한다. 사유는 몸을 넘어 닿을 수 없는 곳을 향해 뻗어나가지만, 그것은 살과 피, 물질과 몸에 의해서만 응결된다. 시의 언어는 몸의 울타리 너머로 뻗어나간 ‘보이지 않는’ 정신의 가지들을 ‘보이는’ 것으로 만든다. 시의 언어는 보이는 몸으로 보이지 않는 영혼을 꿈꾸는 언어이다. 몸은 유한성의 형식이고 몸이 몸 바깥을 향하는 것은 몸의 ‘한계’에 대한 자의식 때문이다. 그러나 몸 너머의 사유는 오로지 몸을 통해서만 ‘안’으로 들어온다. 말라르메(S. Mallarme)는 “육체는 슬프다, 아! 나는 모든 책을 읽어버렸다./도망치자! 저 멀리로 도망치자!”(「바다의 미풍」)라는 문장을 통해 이미 많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모든 책”은 정신의 힘, 의식 혹은 이성의 먼 궤도를 의미한다. 시인은 정신의 끝장까지 가서 다시 몸으로 돌아온다. 모든 위대한 정신은 육화 혹은 물화(物化)의 순간 ‘존재’가 된다. 몸을 입지 않은 정신은 정신으로조차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몸은 정신의 표면이고, 정신은 몸의 표면이다. 가장 높은 신성(神性)도 살과 피의 모습으로 지상으로 내려왔다. 빵과 포도주를 들고 “이것은 나의 몸”이고 “이것은 나의 피”라고 말하는 순간 신성은 존재 안으로 들어왔다. 하늘이 스스로 몸을 입고 자기 몸을 찢어 살과 피의 현존을 보여줄 때, 정신은 가장 낮은 곳에서, 몸은 가장 높은 곳에서, 서로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몸은 스스로 유한자의 표식(標式)이므로 몸을 이기지 못하는 자, 하늘에 이를 수 없다. 그리하여 모든 “육체는 슬프다.” 시는 몸을 벗어나 “도망치자! 저 멀리로 도망치자!”고 속삭이지만, 몸은 도망친 모든 것들이 마지막으로 귀환하는 이타카이다. 수도 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도 끝끝내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처럼 사유와 의식과 정신은 결국 몸으로 돌아온다. 그러므로 시는 몸으로 표현된 정신이며, 스스로 바닥으로 내려온 하늘의 목소리이다.
살 속에 말이 있다
살은 스스로 말을 한다
어설픈 이성은 그 말을 막는다
노동의 근육 속에는 말이 있다
그것은 살과 살의 대화다
뼈와 살의 대화다
남의 살과 나의 살의 대화다
살은 창조를 한다
스스로 세포를 증식하듯이
스스로 유전인자를 만들듯이
살은 스스로 음악을 만든다
살은 속삭이듯 말을 하지만 우리를 지배한다
어설픈 이성은 독재처럼 살을 지배하려 하지만
오래 억눌린 살의 말은
또 다른 피흘림으로 대답한다
-백무산 「노동의 근육」 전문
메를로 퐁티(M. Ponty)에 의하면 주체는 정신이나 의식이 아니라 ‘몸(body)’이다. 그리하여 퐁티는 주체를 “몸-주체(body-subject)”라 부른다. “나는 나의 몸 앞에 있지 않다. 나는 몸 안에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몸이다. …… 만일 우리가 여전히 몸의 지각(perception)과 관련하여 해석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몸은 자신을 해석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퐁티 『지각의 현상학』) 퐁티가 몸을 중시하는 것은 지각이 궁극적으로 (퐁티의 용어대로) “감각 덩어리(mass of the sensible)”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몸은 그 자체 주체이므로 “스스로 말을 한다.” 그것을 가로 막는 것은 “어설픈 이성”이다. 이런 점에서 백무산의 위 시는 “살 속의 말”을 옮겨놓은 것이다. 백무산이 “살”에 집중하는 것은 노동자의 삶이 무엇보다 ‘몸의 삶’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노동력이 “특수한 상품”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살과 피” 외에 다른 저장고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백무산은 노동자의 삶을 통해 몸이 언어이며, 의미이며, 주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스스로 음악을 만”드는 몸, “창조”하는 “살”이라는 인식은 (다른 경로를 통해) 몸이 곧 주체, 즉 몸이 스스로를 해석한다는 퐁티의 주장과 동일한 지점에 도달한다. 퐁티에 의하면 몸은 가시적인(visible) 것이고 살은 비(非)가시적인(invisible) 것이다. 살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모든 사물과 존재의 원료이자 동력이다. 몸은 비가시적인 살이 가시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II.
퐁티의 ‘몸’ 개념이 보편론이라면, 백무산의 ‘살’ 개념은 (계급적) 특수성에서 성취된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논의에도 불구하고, 시는, (더 정확히 말해) 예술의 언어는, 몸의 언어 혹은 감각 덩어리의 언어이다. 음악의 소리, 회화의 빛과 색채, 시의 이미지들은 모두 감각의 그물들이다. 가령 “회화는 몸들의 예술이다. 회화는 오직 살갗만을 알 뿐이며, 한편에서 다른 편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살갗이기 때문이다”는 장-뤽 낭시(J. Nancy)의 정의를 부정하긴 어렵다. 낭시에 의하면 “몸은 ‘포만’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몸은 꽉 찬 공간이라 할 수 없다. 몸은 열린 공간이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의미에서 공간을 차지한다기보다는 본연적으로 공간의 여지를 내는 공간, 다른 표현으로는 우리가 자리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이다. 몸은 실존의 자리다.”(낭시, 『코르푸스: 몸,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
카뮈(A. Camus)의 「티파사에서의 결혼」은 다음과 같은 문장들로 시작한다.
봄철에 티파사에는 신(神)들이 내려와 산다. 태양 속에서, 압생트의 향기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며, 야생의 푸른 하늘, 꽃으로 뒤덮인 폐허, 돌더미 속에 굵은 거품을 일으키며 끓는 빛 속에서 신들은 말한다. 어떤 시간에는 들판이 햇빛 때문에 캄캄해진다. 두 눈으로 그 무엇인가를 보려고 애를 쓰지만 눈에 잡히는 것은 속눈썹 가에 매달려 떨리는 빛과 색채의 작은 덩어리들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무한성을 수용하는 몸-주체와 만난다. 몸은 열린 공간이며, 여지를 만들어내고 무엇이든 받아들인다. 그것은 저 멀리, 닿지 않는 곳에 있는 신들을 불러낸다. 보이지 않는 신들은 태양과 압생트의 향기, 바다와 하늘, 꽃, 돌더미로 현전(現前)한다. 신들을 감각의 “작은 덩어리들”로 바꾸는 것은 몸이다. 몸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고, 오지 않는 것들을 불러내며, 잠재성을 실현하는 “실존의 자리”이다.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
꽃의 생애는 순간이다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를 아는 종족의 자존심으로
꽃은 어떤 식으로 피든
필 때 다 써 버린다
황홀한 이 규칙을 어긴 꽃은 아직 한 송이도 없다
피 속에 주름과 장수의 유전자가 없는
꽃이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욱 오묘하다
분별 대신
향기라니
-문정희 「늙은 꽃」 전문
감각은 지속성이 없다. 이것이 몸의 유한성이다. 그러나 몸은 순간에 완벽을 이룬다. 순식간에 만개하고 멈춰버리는 삶은 늙을 틈이 없다. 그러니 “어느 땅에 늙은 꽃이 있으랴”. “황홀한 이 규칙”은 시간을 초월해 있다. 그것은 순간 속에 자신을 던짐으로써 시간을 넘어선다. 시간의 계산이 개입할 수 없는 이 생애에서 중요한 것은 “분별”(이성)이 아니라 “향기”(몸, 감각)이다. 시는 향기로 분별을 넘어선다. 시는 감각으로 이성을 녹이며, 보이지 않는 이성을 몸으로 응결시킨다. 몸에 갇힌 이성, 감각의 성에 갇힌 이념, 살갗에 그려진 개념이 시이고 문학이다.
III.
그러므로 예술가들은 예술의 물질성에 주목한다. 철학이 가장 비(非)물질적인 언어라면, 산문은 덜 물질적인 언어이며, 시는 가장 물질적인 언어이다. 시는 몸의 그물로 개념과 관념, 이념과 이성을 낚아챈다. 시는 그 자체 몸이고 감각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엘리엇(T. S. Eliot)은 「햄릿과 그의 문제들 Hamlet and His Problems」에서 “예술의 형식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객관상관물(objective correlative)’을 발견함에 의해서이다”라고 주장한다. 그에 의하면 객관상관물이란 “특정한 정서(감정)의 공식이 될 일련의 사물들, 상황, 사건들의 연쇄”이다. 정서 혹은 감정은 그 자체 예술이 아니며, 그런 의미에서 비물질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것에 상응하는 객관상관물을 발견할 때 비로소 물질로, 예술로 전화된다. 가령 쉘리(P. Shelley)의 「인디언 세레나데」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대목 “나는 죽네, 나는 혼절하네, 나는 쓰러지네”와 같은 문장에는 아무런 객관상관물이 없다. 이런 문장은 아직 예술이 되지 못한, 몸을 얻지 못한 감정의 (긴장 없는) 표현일 뿐이다. 엘리엇에 의하면 셰익스피어의 『햄릿』은 “가장 확실한 예술적 실패”인데, 그것은 셰익스피어가 (햄릿의) 감정에 상응하는 객관상관물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 즉 “표현 불가능한 감정에 지배당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표현 불가능한 감정에 지배당했다는 것은 그것이 몸의 옷을 입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자 가자, 너와 나,
마취된 채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환자처럼
저녁이 하늘을 배경으로 퍼져있을 때;
자 가자, 반은 버려진 어떤 거리들을 지나,
하룻밤 싸구려 호텔들의 불안한 밤들과
굴 껍질들과 톱밥이 깔려 있는 레스토랑들의
그 중얼거리는 도피(逃避)들을 지나,
-엘리엇 「프루프록의 사랑 노래」 부분(오민석 역)
엘리엇에 의해 도시의 저녁하늘은 “마취된 채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환자”의 몸을 입는다. 이런 점에서 시는 ‘설명하기(telling)’가 아니라 ‘보여주기(showing)’이다. 위 시의 어느 곳에도 섹스와 소비(낭비)의 도시 공간에 대한 ‘개념적’ 설명이 없다. 시인은 개념을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대신 “싸구려 호텔”, “굴 껍질”, “톱밥”, “레스토랑”, “거리” 등의 객관상관물을 배열함으로써 개념을 ‘보여 준다’. 사물들을 끌어들임으로써 개념은 비로소 예술로 전화된다. 보여주기는 사물들로 가득 차 있다. 소리가 없는 음악, 색채가 없는 회화를 말할 수 없는 것처럼, 객관상관물이 없는 시는 (적어도 엘리엇에 의하면) 시가 아니다.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만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남
-고원 「한 번의 우연적 만남과 두 번의 필연적 만남」 전문
1960~1970년대에 주로 독일어 문화권을 중심으로 주목받은, 소위 ‘구체시(concrete poetry)’는 문자의 회화적 물질성을 극대화하려는 시도 중의 하나였다. 위 시는 구체시의 일종이다. 위 시는 시각성(the visual)을 전경화함으로써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보여 준다’. 중앙의 “만”자를 중심으로 다양한 관계들이 교차된다. 우리는 수많은 “남”들을 경유하며 때로는 고립된 ‘남’의 상태로 또는 ‘남남’ 또는 ‘남남남’(∞)의 수많은 순열조합들 속에 존재한다.
IV.
시는 몸의 언어, 물질(사물)의 언어이면서 동시에 몸의 유한성과 싸우는 언어이다. 시는 유한한 몸으로 무한성에 도전한다.
여기서부터, 멀─다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를 타고
대꽃이 피는 마을까지
백 년이 걸린다
-서정춘 「죽편(竹篇) 1-여행」
몸은 “칸칸마다 밤이 깊은 푸른 기차”같다. 그것은 지상에 낮게 엎드려 땅바닥에 몸을 갈며 달리는 언어이다. 그것은 “밤”처럼 어둡다. “대꽃이 피는 마을”은 여기, 몸으로부터 멀고 “멀─다”. 거기에 도착할 때까지 “백 년이 걸린다”. 그래도 몸은 “푸른 기차”의 모습을 버리지 않는다. 낭시의 정의대로 몸은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여기”이다. “지금 여기”가 몸이고, 몸은 가장 먼 곳까지 자신을 열어놓는다. 신들을 호출한 카뮈의 사물들처럼, 몸은 몸이 아닌 것, 영혼과 이성과 의식의 바깥이다. 그것은 그 바깥들을 향해 계속해서 채워지지 않는 ‘자리’를 열어놓는다. 몸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불러 옷을 입혀주며, 비(非)존재를 존재로 만든다. 유한성에 갇힌 무한성이 존재의 ‘현현’이다. 신성(神性)이 피를 흘리는 것은 오로지 빵과 포도주를 통해서이다. 엘리엇의 말대로 맥베스 부인(셰익스피어 『맥베스』)의 정신상태가 독자에게 전달되는 것은 “상상된, 감각적 인상들의 숙련된 축적” 때문이다. “감각적 인상들”이 없이 신들은 하늘의 정원에서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는다. 문학은 유한한 언어로 무한한 것들을 포획하는 언어이다. 그 중에서도 시는 가장 물질적인 언어로 붙잡을 수 없는 것들을 지상으로 끌어내리는 언어이다.
누가 내 이름을 부를 때
나는 배경으로부터 도려내어진다
누가 나를 깨울 때
나는 어둠으로부터 발라내어진다
찢어내지 않고 부르는 소리
발라내지 않고 깨우는 소리
허공 다치지 않게 나는 새들 소리
-백무산 「새벽 종소리」 전문
낭시에 의하면 몸은 무한을 향해 열려있는 “자리”, “자리로서의 실재”이다. 그것은 대상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끌어당기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몸과 살의 다른 이름은 에로스이다. 몸은 “실존의 최대치라는 무한함을 자리의 지평의 유한한 절대에 합치시킨다.”(낭시) 백무산이 말하는 바 “찢어내지 않고 부르는 소리// 발라내지 않고 깨우는 소리// 허공 다치지 않게 나는 새들 소리”야말로 이런 의미에서 ‘몸’의 소리이다. 신들을 불러내는 감각의 덩어리는 신들을 해치지 않는다. 그것은 신들과 ‘합치’하는 몸이다. 누가 내용과 형식을 분리하는가. 헤겔의 말대로 “모든 내용은 형식의 내용이고, 모든 형식은 내용의 형식이다.” 몸의 바깥은 영혼이며, 영혼의 바깥은 몸이다. 몸의 언어인 시는 영혼을 향해 바깥을 내밀고, 바깥의 영혼은 몸 안으로 들어온다. 이것이 시의 방정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