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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조 문양공(휘:荃전)님의 연구 劉氏자료실
2009.11.26. 11:30
http://blog.naver.com/ykcjowon/140094334563
동도(東渡)시조 문양공(文襄公) 유전(劉荃)의 고증
우리 강릉보에 보면 학사(學士)들이 동쪽으로 건너 오셨다는 것만 기록되었고 그 밖에 행적은 심히 모호하기로 의아스러웠는데 음죽(陰竹-이천의 남쪽 경계지역의 옛이름))에 사시는 재기(在起) 할아버지께서 임한호(林漢浩) 정승(政丞)댁의 임씨보첩(林氏譜牒)을 참고 하여 보니...
임씨시조 임팔급은 송조때 한림학사(임씨 보첩에는 당나라때 한림학사라고 기록이 되어 있음)라 여러 간신배들의 모함을 받아 팔학사(八學士)인 병부상서 유 전(劉 荃) 이부시랑 최 호(崔 互) 어사대부 송 규(宋 圭) 태중 대부 중랑장 공덕수(孔德狩) 한림 권지기 (權之奇)등과 더불어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에 오셨으니
그때가 고려 문종때(임씨보첩에는 신라말이라고 기록)라 하였고 강원도 통천군에 명승고적인 총석정 절벽위에 팔학사(임팔급,설인경,허동,송규,최호,권지기,공덕수) 성명과 그 관직함이 차례로 각석 되었으며 또 그곳 해상에서 각자 절구 한수씩을 지어 읊었다는 그 시가 임씨보첩에 소상히 기재 되었으니 (임씨보첩에 기록되었다는 내용이 없음) - 산동반도에서 배를 타고 아산만, 지금의 팽택군 팽성읍 농성현에 도착하였다는 문헌과 구전이 임씨보첩에 실려있음)
송조 팔학사는 가히 확증 된다고 하겠으나 후예들이 광범하게 수문(蒐聞)하지 못한 점은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임씨시조 임팔급의 동도 시기와 시조 동도설 (始祖 東渡說) 연구
임씨 시조 [林八及]께서 중국 唐나라 조정에 出仕하셔서 나이 18세에 한림학사( 翰林學士)가 되셨는데 간신들의 참소(讒訴)를 입어 축출(逐出)되시니 동료 7분(설인경,허동,유荃,송규,최호,권지기,공덕수)과 함께 바다를 건너 동쪽으로 건너 지금 평택인 팽성 용주방에 다달아 머무시어 사시니 우리 東方의 林氏는 여기서 비롯되어 면면이 이어저 내려오고 있다.
시조 學士公 林八及의 동도(東渡)시기는 당나라 문종조와 그후 후당의 명종조로 밝히고 있으나 년대로 보아 서기 827년에서 933년에 이르는 기간으로 약100년의 기간이 되고 지금으로부터 약 1,100년 전후가 된다. 혹은 거금 3,000년 전으로 소급되는 주무왕 원년의 동도설도 있다.
그러나 薛氏(설씨)의 시조 인경공(仁敬公)의 동도시기와 8학사의 동도시에 [李씨(唐王의 姓]의 운수가 다하였으니 현인(賢人)들이 참소(讒訴)를 당하는구나]라는 구절이 있어 미루어 본다면 8학사 동도 시기는 최소한 당나라가 망하기 전이거나 이미 망할 징조가 농후(濃厚)하였던 시기가 아닌가 생각된다.
당나라가 망한 시기가 907년이고 보면 시조 동도 시기는 830년대(당 문종827~840년)에서 900년의 70년 사이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시기는 고려 건국된 918년과 신라가 망한 935년의 이전으로서 族譜의 기록으로나 여러 가지 史料의 면에서 무리없는 추정(推定)으로 생각된다.
學士公께서 東渡 하실 때 함께 오신 7賢과 더불어 각자 욾으신 東渡詩는 다음과 같다.
林八及 ; 八人浮海兮여 桂棹蘭檣이로다.
(여덟사람이 바다 건너옴이여 계수나무 돛대에 난초의 삿대로다)
薛仁敬 ; 仙李運盡兮여 賢士被讒이로다.
(당나라의 운수가 다 함이여 어진 선비가 참소를 입었도다.)
劉 荃 ; 波濤闊矣兮 여 舟楫利逝로다.
(파도가 넓음이여 뱃길이 편히 가도다.)
許 董 ; 吾徒東矣兮여 可以免禍로다.
(우리들은 동쪽으로 가니 가히 화를 면함이로다.)
宋 奎 ; 接淅而去兮여 謝暗投明이로다.
(파도를 조리질하며 떠남이여 어두운곳 버리고밝은곳 찾아가네.
崔 冱 ; 李老入海兮여 殷道衰亡이로다.
(기자와 미자 두어진이가 해외로 떠나니 은나라는 곧 망할것이로다.)
權之奇 ; 賢士出東兮여 竭誠盡忠이로다.
(어진선비가 동쪽으로 감이여 충성을 다 하리다.)
孔德狩 ; 見機而作兮여 疏廣之徒로다.
(기미를 보아 행함이여 소광과 같은 사람들이로다.)
출처: 임씨시조 임팔급의 동도 시기(부안임씨보첩)
중국상계(中國上系)의 전해온 내력
대동보 보유(補遺)에 의하면 홍세주(洪世周)씨가 중국사절로 출국할 때 종친 재기(在起)씨가 사절에게 화폐(貨幣)를 많이 주면서 간절히 부탁하기를
우리 유(劉)성이 본래 중원 황조(皇朝)로부터 동래(東來) 하였으나 상서공 휘 전(諱 筌) 선대 세계는 막연하여 기록된바 없으니 바라건데 유씨 세계를 널리 탐문하여 상계(上系) 세계(世系)를 가지고 오도록 당부하였다.
그런데 마침 상서공 후손 휘, 용(庸)이 이부상서(吏部尙書)의 자리에 있어 어렵지 않게 한태상황(漢太上皇)으로부터 상서공에 이르기까지 41세가 되는 세계(世系)를 가지고 왔으나
그 세계(世系)기록이 판각(板刻)이 아니고 두루마리에 등서하여 왔었음으로 그 세계를 (금석지문을 등본:손으로 쓴 것으로는)인정할 수 없다하여 믿어 주지 않으므로 동지서장관(冬至書狀官)의 사명을 받고 중국으로 출국하는 윤찬(尹璨)에게 또 부탁하여 유 용(劉 庸)과 교섭끝에 중국상계(中國上系) 판각본을 얻어 오는데 성공하여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우리나라 유씨시조(劉氏始祖) 유 전(劉 荃)
우리 유씨의 시조는 중원(중국)한나라 한태상황(漢太上皇) 유 단(劉 湍)의 41세손으로 휘(살아서는 이름이고 죽어서는 휘(諱)라고 한다)는 전(筌)이요 자는 원보(原甫)며 호는 죽간(竹諫)이며 시호(諡號)는 문양공(文襄公)이시다.호(號)뒤에 공(公)을 부치는 것은 존칭이다
할아버지는 중국 팽성(중국 강소성에 있는 현)에서 송나라 인종황후 3년 신묘 서기 1051년 4월 8일에 출생하여 천성이 어질고 강직하며 학문이 순수하여 구경(역경,시경,서경,예기,효경,춘추,논어,맹자,주례)과 천문,지리학에도 능통하였으며 직언을 삼가하지 아니하고 불의와는 타협을 하지 않는 곧은 성품이었다.
할머니는 마한국부인(馬韓國夫人) 롱서이씨(隴西李氏) 이시다.
벼슬은 송나라 정헌대부 한림학사 병부상서(조선시대 병조판서, 지금의 국방장관)를 역임 하시던 중 송나라 신종원풍년간(서기 1078~1085)에 집현전에서 대악[송나라 악명(樂名)]을 의논하여 정하는 자리에 왕이 환관(내시)을 참관케 하자 이의 부당함을 간청하여 참관을 못하도록 하였고
또한 궁중에서 상명(上命)을 맡은 관서의 환관이 신하의 바른직언을 배제하는 것은 폐하의 선명함을 보이지 않도록 가리어 숨기고 백성들의 입을 다물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자 간신들이 사소한 것을 침소봉대(적은것을 크게 부풀어 말함)한 것이라고 할아버지를 모함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하였다.
당시 백성들 간에 고리(高利)가 성행되어 이를 막기위해 나라에서 저리로 봄에 푸른싹이 돋을때 빌려주고 추수기에 원리금을 상환케 하였으며 또 빈국고를 채우기 위하여 송나라 재상 왕안석이 제정한 청묘취식법(靑苗取息法)은 전답의 푸른싹을 보고 미리 세금을 부과하는 법으로 수확도 하기전에 세금을 부과하는 악법이라고 폐지할 것을 극간하다가 받아 들여지지 않자
정의가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는 살 수 없다하고 뜻을 같이한 팔학사(임팔급,설인검,허동,송규,최호,권지기,공덕수)와 같이 동쪽나라 고려국으로 건너와 경상북도 영일군 기계현에 터를 잡아 거주하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때는 고려 문종36년(송나라 신종원풍 5년 서기 1082년 임술)이니 할아버지 춘추(나이)32세 였다. [출전:江陵劉氏 大宗會 宗報(第 3 虎)-2000.12.15]
한국(고려)에서의 생활
배편으로 중국을 떠나올 때와 망망대해에서의 서글픈 심정을 시로 남겼고 한국에 와서도 고향과 송황제를 그리워하는 많은 글을 남겼다. 처음은 8학산 밑에 거주하였으나 나중에 영천군(거타군, 동거군, 영양군)으로 이주하였고 문종시에는 고려정부에서의 관직을 사양하였으나 고려 숙종시(1096-1105)에 입조하여 이후 후손은 고려정부에서 높은 벼슬을 살았다.
시조의 처음관직은 고려 선대 왕들의 제사를 지내는 국자감 이었고 후손들은 현감에서부터 대제학, 대사헌, 추밀부사 이었고 시조께서는 고려예종 17년 1122년 2월 7일 향년 72세로 별세했다.
고려정부에서는 시조의 높은 학문과 공을 인정하여 장남을 거타군으로 봉하고 차남은 아림군 삼남은 백천군 으로 봉했다.
고려 예종 왕은 거타군 북명천면 덕곡 산하 계량동에(지금의 영천시 녹전동 비석촌) 전답을 하사 했다. 시조에서부터 8대까지 주 거주지가 당시 서울이었던 개성과 영천이었고 8대에서 장남은 거타군으로 차남은 옥천으로 분파된다.<옥천은 강릉의 옛 이름이고 강릉 유씨(劉氏)의 중시조가 된다> 고려실록(고려실기)에 의하면 고려 충순왕때 거타군 북명천면 덕곡산하 계양동<지금의 영천군이며 일명 명산면 화지동(鳴山面 花枝洞)>에 죽간선생의 묘가 있고 사패지(賜牌地:왕으로부터 받는 패와 토지)는 사방으로 5리(2km)이고 그중에 위토전(位土田) 즉 밭이 10만평, 밤나무 300주, 대추나무 200주가 있으며 개펄밭이 좌우로 둘러있다. 제실이름은 수송대(水松臺) 정침 5간이라 기록되어 있다.
구족보에는 愁送臺(수송대:그리워 하는 심정을 보내고 싶은 마음)라고 적혀있다. (세보1권111쪽) 할머니는 감숙성 농서현 출생 농서이씨 정경부인이시다.
우리나라 유씨 도시조(劉氏 都始祖): 유전(劉荃)
우리나라 유씨의 도시조(都始祖)는 고대 중국 한(漢)나라 태상황(太上皇)의 사십 일세 손이신 휘는 전(荃)이시고 자는 原甫(원보)이시며 호는 竹諫(죽간) 시호는 文襄(문양)이시다. 공은 중국 강소성 팽성현(中國 江蘇省 彭城縣)에서 서기 1051년 4월 8일에 출생하시어 송(宋)나라의 정헌대부 한림학사 병부상서(正憲大夫 翰林學士 兵部尙書:우리나라 현 국방부장관)로 재임하셨으며 배(配:아내배)는 마한국부인롱서이씨(馬辰韓國夫人롱西李氏)이시다.
공(公)의 증조부(曾祖父)에 휘는 宗(종)이시고 벼슬은 송조한림(宋朝翰林)이셨으며 조부(祖父)의 휘는 迪(적)이시며 벼슬이 송조이부상서(宋朝吏部尙書)이셨다. 또한 부친의 휘는 采(채)이시고 벼슬은 송조 금자광록대부(宋朝金紫光錄大夫)이셨다. 공께서는 천성(天性)이 어지시면서도 강직하시어 바른 직언(直言)을 삼가 하지 아니하셨고 불의(不義)와는 타협을 하지 않는 곧은 성품이셨다.
또 학문이 깊고 넓으셔서 통달(通達)하지 아니한 서적(書籍)이 없으셨으니 역경(易經), 서경(書經), 시경(詩經), 예기(禮記), 효경(孝經), 춘추(春秋), 논어(論語), 맹자(孟子), 주역(周易),등 구경(九經)과 많은 학자들의 글을 빼놓지 아니하시고 암기하셨으며 천문지리학(天文地理學)과 의약복서(醫藥卜筮)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시어 세상 사람들이 공에 대하여 말하기를 "나라를 경륜하고 세상을 구제할 만한 큰 인재다" 라고 칭찬이 자자 하였다. 위와 같은 세평(世評)은 적중되었다.
공께서 송조(宋朝)의 신종대(神宗代)에 병부상서직(兵部尙書職)에 재임하실 당시 집현전(集賢殿)에서 대악(大樂)을 의논하여 정할 때 왕이 환관(宦官)까지 의논에 참관(參觀)하게 하자 공은 이에 부당함을 간청하여 참관을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공어사(孔御史)는 공(公)과 함께 간(諫)하다가 어사직을 파직당하기까지 하였다. 이에 공은 왕에게 극간(極諫)하기를 "궁중(宮中)에서 상명(上命)을 맡은 관서(官署)에 환관이 바른 직언을 배제하는 까닭은 폐하(陛下)의 선명하심을 보이지 않도록 가리어 숨기고 천하(天下)사람들의 입을 다물게 하려는 것입니다." 라고 하자 간신(奸臣)들은 서로 작당(作黨)하여 공에 바른 직언을 묵살시키고자 "왕의 커다란 선정(善政)에 비하면 마치 옥에 티와 같은 것을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간(諫)하는 것이다" 라고 공을 모함하여 왕의 총명을 흐리게 하였던 것이다.
또한 당시 송조(宋朝)의 영상 왕안석(領相 王安石)이 청묘취식법(靑苗取息法)이라는 기괴한 악법을 제정하여 이법이 백성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악법(惡法)임을 지적하고 이법 시행의 부당성과 법의 폐지를 극간(極諫)하시다가 간신들의 모함으로 인하여 또다시 실패하셨던 것이다. 왕안석이 제정한 청묘취식법이란 당시 백성들간에 고리(高利)가 성행되어 이를 막기위해 나라에서 년이분(年二分)의 이자로 빌려주고 추수기(秋收期)에는 그 원리(元利)를 반환케 하던 법이며 또한 국고가 비어 국고를 채우기 위하여 논과 밭에 푸른싹을 보고 추수도 하기전에 미리 세금을 부과하던 법으로써 이법은 백성을 위한 법이라는 명분뿐이고 실제로는 송조(宋朝)가 부패(腐敗)한 나머지 백성들을 가혹하게 착취하는 악법이었기에 공은 이법의 폐지를 극간하시다가 간신들의 모함을 입으시고 "진실한 직언을 용납지 않는 이땅에서는 더 머물수 없다." 하고 평소 뜻을 같이하던 동지칠학사(同志七學士) 임팔급(林八及), 설인검(薛仁儉), 허동(許董), 송규(宋奎), 최호(崔호), 권지기(權之奇), 공덕수(孔德狩)와 더불어 표연(飄然)히 배를 타고 절역(絶域)의 바다를 건너 동쪽나라인 우리나라에 서기 1082년인 고려 문종(高麗 文宗) 36년 8월에 경북(慶北) 영일군(迎日郡) 기계면(杞溪面)에 오셨다. 당시 공의 춘추(春秋) 32세이셨으며 이분이 바로 우리나라 劉氏의 도시조(都始祖)이시다. (소위 팔학사(八學士)라고 한다.)
도시조께서는 우리나라에 오시어 40여 년 동안 지으신 시(詩)가 수백 수 이었으나 아깝게도 많이 유실(遺失)되고 지금 134수가 보존되어 있는바 그중에 몇 수를 소개하면
"이내몸 한번 고려에 온뒤로 어찌하여 고국수심 잊어버리랴, 그리운 우리 임금 언제 보았던고 보고파 쏟는 눈물 금할수 없어라."
自東來後 那忘故國愁(자동래후 나망고국수)
美人長不見 難禁涕橫流(미인장불견 난금체횡류) 라고 읊으셨고
또한 수송대(愁送臺)에 직접 올라 지으신 수송대기(愁送臺記)...
"쓸쓸한 가을날 수송대에 올라서 내시름 멀리 고국으로 보내노라, 그러나 어느곳이 중국땅인지 사람들은 아쉬움을 몰라주노라." 라고 하셨으며..
또 자경시(自警詩)가 있으니 "도덕을 지키면 가난도 좋고 글월을 대하니 세속과는 멀어지네 이 마음 굳게 잡아 놓이지 않으면 그제야 본성이 돌아오리라." 하셨다.
이 시 삼수(三首)만 보아도 공의 학문이 어느 경지에 이르렀으며 왕에 대한 충성하는 마음이 어느 정도 이었던가를 가히 알 수 있는 것이다.
공께서는 정학(正學)을 창도(倡導)하는 것을 자신의 책무(責務)로 여기시고 글방을 만들어 예악(禮樂)을 진흥시키는데 최선을 다 하시므로서 조정(朝庭)은 물론 많은 백성들이 공을 존경하여 공으로부터 학업을 익히는 자가 수천명에 달하였다.
고려 문종께서 수차 측근(側近)을 보내어 벼슬길에 나오시도록 권유하였으나 가난함에 만족하시고 오직 유도(儒道)를 정도(正道)로 삼아 사람들을 교화(敎化)시키는데 전심전력(全心全力)을 다하시어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정학(正學)인 유도(儒道)를 밝힘으로써 삼한시대(三韓時代)의 사도(邪道)와 구악습(舊惡習)이 일소되어 온 나라가 태평성대(太平聖代)로 순화(醇化)됨으로써 조정(朝庭)에서는 "하늘이 공과 같은 철인(哲人)을 중국에 태어나시게 하여 공으로 하여금 선도(善導)를 우리나라에 펴서 구습(舊習)을 씻어내고 태평성대를 이루게 한 것이다." 라고 하시며 그 공을 높이 찬양하였다.
공은 서기 1122년 2월 7일에 수(壽) 72세로 서거하시었으며 할머니 역시 서기 1123년 6월 7일에 향년(享年) 45세로 서거하셨다. 고려 예종왕께서는 예관(禮官)을 보내어 후장(厚葬)케 하셨으니 공의 묘는 거타군 북명천면 덕곡산하 계량동, 즉 지금의 경북 영천시(永川市) 녹전동(祿田洞) 비석촌(碑石村)에 양위(兩位)분을 상하봉(上下封)으로 모셨다.
공께서는 세분의 아드님을 두셨으니, 장자(長子)에 堅規(견규: 거창,강릉분관)이시고 고려에서 봉익대부도첨의찬성사(奉翊大夫 都僉議贊成事) 정승으로 거타군(居陀君)에 봉작(封爵)되시고 차자(次子)에 휘 堅矩(견구: 아림파)는 고려조에서 광정대부밀직사사 대사헌을 역임하셨으며 삼자(三子) 휘 堅益(견익: 백천파)은 봉익대부 이조판서 대사헌이셨다.
충렬왕(忠烈王)때에 한림학사(翰林學士) (설장수), 대제학(大提學) 朴宣中(박선중), 朴尙衷(박상충), 대사성(大司成) 李文靖(이문정)등 재신(宰臣)들이 상소(上疏)하기를 文襄公 (문양유전)은 동방에 도학(道學)을 창도(倡導)한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조종(祖宗)으로써 그 훈덕(勳德)이 옛날 주공(周公), 소공(召公)과 태공(太公)에 비할만한 분이니 사당(祠堂)을 지어 봉향(奉享)함이 마땅하다고 하여, 이에 왕은 즉각 특명으로 공의 시호(諡號)를 文襄(문양)이라 하시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위령제를 지내고 개성부(開城府)에 사당을 건립하여 영령(英靈)을 안주케 하셨으며, 숭의전(崇義殿)에 배향(配享)하여 나라와 더불어 영원히 함께 빛나게 하였고 전답(田畓)과 노복(奴僕)을 하사(下賜)하시어 생전에 공덕(功德)을 크게 보답하는 은전(恩典)을 베풀었다.
석물(石物)로는 신도비(神道碑), 토지수조세(土地收租稅) 4萬 5里, 위토전(位土田)이 오백두락(五百斗落: 약 10만평), 율목(栗木:밤나무) 300주, 대추목(대추나무) 200주가 하사되었고 제실(齊室) 이름은 수송대(水松坮), 정침오간(正寢五間), 동행랑(東行廊), 서행랑(西行廊)이 각각 삼면(三面)과 하마비, 제실(下馬碑 祭室)이 있었다. 이를 관리하는 사람은 정대옥(鄭大玉)이었다.
대현묘(大賢墓:문양공 묘소)를 잘 관리하여야 할 정대옥은 오히려 우리 유씨(劉氏)의 자손이 점점 약해지는 기회를 틈타 유씨제실(劉氏祭室)에 침주하여 산림을 울창하게 하여 사패전토(왕이하사한 밭과 토지)를 자기소유로 만들고 묘표석(墓表石)과 신도비(神道碑), 기타 묘전석물(墓前石物)등을 암암리에 모두 빼다가 암매(暗埋)해 버렸다. 그리하여 정대옥은 대대부호로 살아왔다. 지금 상서공(尙書公) 묘단하(墓段下)에 있는 고총(古塚:봉분)은 정대옥의 외손자인 이주관(李周寬)이 파장(把葬)한 묘(墓)이며, 근래에는 더욱 불량하고 나쁜 정모(鄭某)라는 자가 석물을 빼서 주춧돌, 다듬이돌, 제방수문돌 등으로 악용하고 전해오던 제실은 뜯어다 몇 해 동안 자신들의 가옥을 개축하는데 이용하는 등 악행을 일삼다가 정가수십가권(鄭家數十家眷)들이 몰사하였다. 정총이위(鄭塚二位:정씨묘 2기)는 굴거(掘去:옮김)하였으나 일위(一位:묘 1기)는 기소중(起訴中)인데 이 묘는 임진왜란때 전몰장병의 초혼장(招魂葬)이라고 한다.
도시조 竹諫先生(죽간선생)의 시
自警(자경)
求道貧猶樂(구도빈유락)
看書俗與疎(간서속여소)
此心操不舍(차심조불사)
然後復其初(연후복기초)
詠雪中松(영설중송)
蒼蒼冬獨秀(창창동독수)
霜雪莫能侵(상설막능침)
非但材成棟(비단재성동)
最憐不變心(최연불변심)
스스로 깨우침
도덕을 지키면 가난해도 좋고
글월을 대하면 세상과는 멀어지네
이마음 굳게 잡아 놓이지 않으면
그제야 본성이 돌아오리라.
눈가운데 소나무를 읊음
겨울에도 푸릇 푸릇 우거진 너에게
눈보라도 지조만은 꺽지 못하네
자라서 큰재목 되기도 하려니와
보다도 사랑스러은 것은 변치 않는 맘
[출처] 도시조 문양공(휘:荃전)님의 연구|작성자 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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