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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7장
다섯 번째 설교: 초막절에 율법의 참 뜻을 가르치심,
믿는 자에게 성령 주셔서 그리스도의 풍성한 생명 주심
(찬송 167장)
2024-3-7, 목
맥락과 의미
요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먹이신 기적은 유월절에 있었던 일입니다.
7장은 초막절 때의 일입니다. 7장은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말씀과, 그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여줍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알아가는 사람들과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보겠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는 태도를 돌아보기를 바랍니다.
1. 초막절 명절 준비: 예수님께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음(1-9절)
2. 명절 중간에 가르치심: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을 이루신 분(10-36절)
3. 명절 끝날(제8일째)의 가르침: 믿는 자에게 생명 주심(37-53절)
1. 초막절 명절 준비: 예수님께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음 (1-9절)
초막절(7월 15-21일, 현재달력 9-10월 중)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천막에 살던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레위기 23:40). 나뭇가지를 꺾어서 움막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서 힘들었던 광야 생활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추수의 풍요를 주신 것을 기념합니다.
예배자들은 나뭇가지를 손에 들고 노래하며 성전에 들어갑니다. 그 나뭇가지로 제단을 천막처럼 덮습니다. 7일 동안 명절을 지킨 다음에 8일째 되는 마지막 날에는 큰 집회를 합니다.
예수님의 가족은 예수님께 “자기를 세상에 나타내라.”(3,4절)고 합니다. 5절에 그때 예수님의 가족들은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예루살렘에 예수님을 선지자로 알고 따르는 추종자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을 나타내라고 권유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6,8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올라가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때는 29,30절에서, 예루살렘에서 잡히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나타내며 영광받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자신을 어린 양 희생제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아직은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나타낼 그 때가 온 것은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에도 어떤 사람은 자기의 이름을 나타내기 위해 예수님을 이용하려 합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면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자신이 이익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참 슬픈 일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믿음의 길은 환난 가운데서 순종하는 길입니다.
2. 명절 중간에 가르치심: 예수님은 율법의 정신을 이루신 분 (10-36절)
1) 명절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음 (10-13절)
10절에 예수님은 초막절 명절에 올라갔습니다. 유대인 민중들은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무리들의 반응이 11-12절에 나옵니다. 예수님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무리를 미혹하는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여러 가지로 의견이 엇갈렸습니다.
13절에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을 싫어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내려 주신 것을 가르침 (14-24절)
14-18절: 14절에 명절의 중간이 되어서 예수님께서 성전에 올라가셔서 가르치기를 시작했습니다. 15절에 예수님께서 워낙 말씀을 잘 가르치셨습니다. 사람들이 “이 사람은 배운 바가 없는데 어떻게 이렇게 잘 가르치는가” 하고 놀랐습니다. 그러나 초라한 시골 출신의 청년이라는 그 배경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17절에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말씀을 잘 듣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르치는 하나님 말씀을 행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께 순종하는 거룩한 삶을 산다는 의미도 있고 하나님과 친교를 나눈다는 뜻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싶어하는 열망이 있으면 누가 어떻게 가르치는가 하는 외적인 것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누가 가르치는가 하는 외면적인 것만 보면 말씀을 깨닫지 못합니다. 유명한 책이다, 유명한 목사다 하는 것을 따라가기 보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뜻대로 행하기를 간절히 사모합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교회를 통해서 말씀을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이 말씀은 예수님 스스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18절에 스스로 말하는 자들은 자기 영광만 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보내신 이, 곧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십니다. 하나님이 가르치신 것만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신 큰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도 우리 영광을 구하지 맙시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잘하는가를 나타내지 맙시다. 하나님의 영광만 구합시다. 가장된 아버지들도 가정에서 말씀을 인도할 때 자기를 나타내려 하지 맙시다.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합시다. 우리 모든 삶에서도 내 이름을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만 구합시다.
19-24절: 안식일에 병 고치는 문제, 율법을 지키는 문제로 그리스도와 유대인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려는 열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죽이려 하면서 6계명을 어기고 있습니다(19절).
그들은 예수님께서 가르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15절). 이제는 예수님께서 병을 고치시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21절). 특히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을 보고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답변하십니다(23절). “할례를 생각해 봐라. 할례란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백성이라는 상징인데, 그 할례는 태어난 지 8일째 행하게 되어 있다. 그 8일째가 안식일이라면 안식일에 할례를 하지 않느냐? 내가 안식일에 병을 고친 것은 할례가 나타내는 그 실제의 의미를 이룬 것이다.”
예수님은 육체를 치료하시면서 그 사람의 영혼도 함께 치료하셨습니다. 할례가 나타내는 바를 실제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몸과 영혼을 치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24절에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친 것으로 예수님을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분은 안식일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안식일은 쉼과 해방의 복된 날입니다. 그 정신을 이루신 예수님을 공의롭게 판단해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가르치신 말씀의 뜻을 잘 이해하고 그대로 살아갑시다. 말씀은 우리를 얽어 매는 규칙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참 자유와 평화를 줍니다. 주일성수라는 규칙을 지키려는 마음보다 참된 안식과 자유를 누리기 바랍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안식을 누리는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주일에 쉬고 경제 활동을 절제합니다.
3)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가 하나님께로 가시는 분 (25-36절)
a) 민중들의 의문(24-27절): 민중들은 예수님이 바로 유대인 지도자들이 죽이려는 분임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사람들은 “과연 예수님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인가?” 서로 논란했습니다. 유대인 중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는 어디에서 오는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27절).
b)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 (28-29절): 예수님은 자신이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라고 증거하십니다.
c)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반응 (30-32절): 민중들은 말합니다. 예수님이 표적을 많이 행한 것을 보면 그리스도가 맞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31절).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아랫사람을 보냅니다.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분이라고 하는데도 겁 없이 잡으려고 합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조롱합니다. 믿음 때문에 우리도 핍박을 받을 수 있습니다.
d) 하나님께로 가시는 분 (33-36절): “나는 나를 보내신 분으로부터 와서 그분께 돌아간다.”(34,35절) 사람들은 “어디 외국에 가는가?” 하고 의문을 품습니다. 그리스도는 보통 사람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지셨습니다. 부활하여 하늘로 가셔서 우리도 하늘로 높여 주십니다.
3. 명절 끝날의 가르침: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성령 주심 (37-53절)
1) 믿는 자에게 성령 주심과 생명 (37-39절)
37절에 초막절 마지막 날, 제 8일 큰 집회를 하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외치십니다(38절).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말하듯이) 그의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이 생수는 성령을 의미합니다. 성령께서 우리와 같이 계시면서 계속해서 생명이 흘러나오게 하십니다 우리 영혼에 필요한 모든 좋은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흘러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여 영광을 얻으신 후에, 하늘에서 교회에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믿는 자들에게는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 성령이 있으니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고백합니다.
성령님 의지하여서 마음속에 생수가 흘러 넘치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복음 말씀을 듣고 믿으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좋은 것들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믿고서 간절히 갈망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두 번 외치셨습니다. 그분이 세상에 오셨다가 하늘로 가시는 것을 말할 때도 외치셨습니다(28절). 우리에게 성령님을 주시는 것을 말할 때도 외치셨습니다(38절). 그분이 이 땅에 오셨다가 하늘로 다시 가신 이유는 성령님을 우리에게 보내시기 위해서입니다.
구약 교회에서는 성전을 중심으로, 제사장, 왕, 선지자에게 성령님이 충만했습니다. 보통 백성들에게도 성령님은 계셨지만 그렇게 풍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셔서 제사장, 왕, 선지자로 오셨습니다. 그분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는 성령님의 생명이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바깥에서 오신 성령님께서 성도의 영혼으로부터 온 육체로 생명이 흐르게 하십니다. 교회 안에 생명이 흐르게 하십니다. 세상을 향해 흘러가게 하십니다.
오늘도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성령님을 갈망합시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하늘의 의와 평강과 기쁨을 충분히 주시는 하루 되기를 축복합니다.
2) 그리스도에 대한 반응: 긍정적 반응, 갈릴리에서 선한 것들이? (40-53절)
a) 무리들(40-44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무리들은 더 긍정적 반응을 보입니다. “그리스도, 선지자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갈릴리가 아니라 베들레헴에 태어나신다”고 반응합니다.
b) 성전 직원과 대제사장, 바리새인들(45-49절): 대제사장들이 보낸 성전 직원은 예수님을 잡지 않고 그냥 돌아왔습니다. “그 사람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습니다.” 대제사장은 “너희도 유혹에 빠졌느냐? 지도자와 바리새인들 중에 믿는 자가 있느냐?” 사람들의 평가를 따라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결정하려 합니다.
c) 니고데모와 대제사장, 바리새인(50-51절): “전에 예수님께 왔던” 니고데모는 말합니다. “우리 율법에는 피고인의 말을 들은 다음에 판결한다.” 그러나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들은 대답합니다. “갈릴리에서 선지자가 나지 못한다.”
이 엇갈리는 평가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누구라고 고백합니까?
믿고 복종할 일
예수님께서는 초막절 명절에 성전으로 올라가셨지만 자신을 나타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실 그 사명의 시간을 위해 준비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자기들의 경쟁자로 생각하고 미워하여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경쟁자로 생각하지 맙시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을 풍요롭게 잘 가르치셨습니다. 말씀의 형식이 아니라 말씀의 내용, 은혜의 내용을 우리가 잘 가르치고 배워야 하겠습니다. 전하는 사람의 외모로 보지 않고 말씀을 잘 배웁시다.
하늘의 영광을 버리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합시다.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부활하셨습니다. 교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므로 성경의 말씀에 더욱 순종합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는 이미 성령님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더 충만하게 주시도록 사모합시다. 우리 모두와 우리 모든 가정에 생명이 흘러 넘쳐서 의와 평화와 기쁨이 가득 하기를 기도합시다.
1. 오늘 말씀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2. 오늘 말씀에서 주신 교훈은 무엇입니까? 3. 오늘 말씀에서 순종할 내용은 무엇입니까? |
조금 더 생각하기
<참고> 놀랍게 여긴다(15절), 이상히 여긴다(21절)
두 단어는 같은 단어(타우마조)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가르치는 말씀에도 놀랐고, 행하시는 표적에도 놀랐습니다.
<참고> 구약 성도의 3대 명절: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유월절은 유대인의 달력으로 1월(오늘날 3,4월), 초막절은 7월(오늘날 9,10월)입니다. 그 사이에는 오순절이 있습니다. 오순절은 유대인 달력으로 3월 초(오늘날 5,6월)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에 오순절에 성령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님의 오심(오순절)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으고 생명을 주시는 것(초막절)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참고> 초막절과 그리스도, 성령님 (37-39절)
2절에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나옵니다. 초막절은 유대인의 달력으로 7월에 있는 명절입니다. 우리 달력으로 치면 한 9월쯤입니다. 7일 동안 명절을 지킨 다음에 8일째 되는 마지막 날에는 큰 집회를 합니다. 그 집회의 날에 유대인들은 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갑니다.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는 때는 유월절과 오순절, 그리고 초막절 이렇게 세 번입니다. 오순절은 칠칠절이라 하기도 합니다.
초막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천막에 살던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레위기 23:40). 나뭇가지를 꺾어서 움막을 만들고 그 안에 들어가 있으면서 광야 생활의 힘들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때에는 예배자들이 한 손에 나무 가지, 한 손에는 키트론 열매(레몬처럼 생긴 과일)를 들고 성전으로 들어갑니다. 플루트를 불고 춤을 추며 들어 갑니다. 열매와 나무 가지로 성전 위를 천막처럼 덮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에서 비와 풍요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7일 동안 매일 실로암 물을 금 그릇에 담아서, 성전으로 가지고 옵니다. 트럼펫을 즐겁게 연주합니다. 이 물은 제단 옆에 있는 그릇에 담아 둡니다. 그 그릇에 튜브를 연결하여 제단 밑으로 흘러가게 합니다.
이 물은 광야 생활, 바위에서 샘이 솟아 난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또한 지난 해 비를 주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동시에 다음 해의 비를 간구하는 기도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예루살렘 탈무드는 이 풍습을 이사야의 예언과 관련시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이사야 12:3) 물이 떨어지는 것은 성령님을 부어주는 것을 상징한다고 보았습니다.
또 상징적으로 에스겔 선지자가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와 동쪽 문으로 흐르던 것을 본 것과 비슷합니다(겔 47:1,12). 이 물이 흘러가며 강과 바다의 생명체를 살리고, 강가에 각종 나무를 살립니다. 잎은 모든 민족들을 살리는 약 재료가 되었습니다(겔 47:6-12). 에덴 동산의 동쪽으로 물이 흘러나와 모든 동산을 적시고 땅으로 흘러나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집회의 제 8일에 가르치셨습니다. 제 8일의 집회에서는 물을 흘려보내는 의식이 없습니다. 물은 그쳤지만 그 물이 의미하는 실제적인 의미를 가르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1차로 염두에 둔 것은 성전에서의 물 붓는 의식이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제단의 물은 성도들이 마시는 것이 아니라 흘러내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광야에서 물을 마시던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 명절 준수에서 물을 간구하는 기도에 대해, 예수님은 예배자들이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배로부터 생수의 강이 흘러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성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인 성도들 안에서 흘러 나옵니다. 성도들이 성전이 됩니다. 교회가 성전이 됩니다. 성령께서 교회와 성도와 함께 계시면서 움직이는 생명을 풍성히 공급하십니다. 교회와 성도의 삶에 생명이 가득하게 됩니다.
나아가 교회와 성도는 이 세상으로 생명을 풍성히 흘러 보내는 생명 저수지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만물 안에서 만물을 생명으로 충만케 하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세상에 전달하는 직분을 합니다(엡 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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