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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불교 의사회 삼사 순례 은해사- 백흥암- 거조암 2019.12.25 산해숭심 명필의 야외 전시장이라는 백흥암, 백흥암 보화루 맑은 오후의 빛 사이로 추사의 글씨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다는 뜻의 산해숭심은 추사의 스승격인 청나라 금석학의 대가 옹방강이 추사를 격려하며 보낸 편지 속에서 나온 글입니다 攷古證今 山海崇深 "옛 것을 고찰하여 오늘을 증명하니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다" 옛 비석 속 문자를 고증하는 추사의 작업 추사가 추구한 세계가 "字"에 머물렀다면 그는 다만 금석 학자에 지나지 않았을것입니다 추사의 글씨체는 여러번 바뀌었지만 제주 귀양을 다녀 온 후로는 결코 타인의 글씨체를 모방하거나 구속받는 일이 없었습니다 글씨의 妙를 깨닫아 무애의 필치가 자유 자재하니 일필로 깨닫음을 증득한 진정한 도인이었습니다 일행영상막심산(日行嶺上莫尋山) "매일 넘는 고갯마루에서 산을 찾지마라" 山是山 水是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금강경이 늘리 독송되고 있지만 내용이 대단히 간결하고 함축적이어서 그 신묘함을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그래서 요즈음 이전에 교양서처럼 읽었던 금강경을 다시 읽어보고 있습니다 지난날의 금강경이 자귀만 좇아다닌 근경의 금강경이었다면 지금의 금강경은 한발 멀리 물러나 새가 세상을 조감하듯 멀리서 들여다보는 원경의 금강경입니다 근경의 금강경이 잣구의 희열을 준다고 하면 원경의 금강경은 금강경 본래의 담연한 맛을 줍니다 이 글은 금강경의 여리실견분에 나오는 "凡所有相 皆是虛妄 若見諸相非相 卽見如來 " 에 붙인 야부스님의 글로써 성철 스님 덕에 불교를 모르는 사람들의 입에도 자주 회자되는 글입니다 '일행영상막심산'도 산은 산 물은 물 바로 앞에 나오는 禪詩의 한 구절입니다 身在海中休覓水
날마다 넘는 고갯마루 위에서 산을 찾지를 말아라. 꾀꼬리 울음이나 제비울음소리 비슷하니 앞이 어떻고 뒤가 어떤지 굳이 묻지 마라 日行嶺上莫尋山
어떤 문장이 마음에 스며들기까지는 그 세계에 빠져보기 전에는 알수 없는 노릇입니다 가섭이 부처의 마음을 다 알 수 없고 아난이 가섭의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산에 빠져 봐야 산의 맛을 알고 사랑에 미쳐봐야 사랑을 압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디에 미쳐야 할까요? 어디에 빠져야할까요? 大死一飜도 어려운데 絶後再蘇라! 화두를 처음든것처럼 참 막연하기만 합니다 佛在何處 부처님은 어디에 있을까요? '일행영상막심산'을 대신해 '日行寺中莫尋佛' 매일가는 절에서 부처를 찾지마라 라고 하면 어떨까요? 의미에 하나의 흐트러짐도 없을것 같습니다. 부처가 어디에 존재하는가를 묻는것은 집에서 집을 찾는격입니다. 삼라만상이 다 비로자나불, 법신의 그림자라는 믿음이 확고하면 산천경계도,사람이며 온갖 모습들이 다 진공 묘유요,본지의 풍광입니다. 그러니 산은 산 그대로 부처의 모습이고 물은 물 그대로 부처의 모습이니 부처의 모습에서 부처를 찾은 격입니다. 산도 물도 부처도 사람도 다 한모습이며 절대 평등하다는것이 금강경의 대의입니다. 삼라만상은 다 그림자입니다 하지만 그림자니 광명이니 하는것도 다 名相일 뿐 그림자가 빛이요,빛이 다 그림자입니다. 빛과 그림자가 따로 존재하는것이 아닙니다 "어떤 모습이 있다하여 찾는다면 모두 거짓. 형상이 없어 볼 수 없다면 이 또한 삿된 소견. 당당하고 깊은 고요에 어찌 틈이 있겠는가 한줄기 뻗는 섬광 온 허공이 환해지네" -야 부- 늦은 봄 곡강의 풍경이나 초겨울의 은해사 개울 풍경이나 털어내며 변화하는 무상의 모습이라는 점에서는 한결같습니다. 시간을 통찰하여 한모습을 볼 수 있다면 삼라만상이 다 일종평회로 돌아가는 泯然自盡(민연자진)의 한 모습일것입니다 “一片花飛減却春 風飄萬点正愁人 且看欲盡花經眼 莫厭傷多酒入唇”
마지막 꽃송이 떨어질 때는 찌꺼기 술이라도 마시며 사라지는 봄에 취하고 싶다 꽃이며,술이며,봄이니 하는것들이 다 명상입니다 名相, 이름의 빛들이 사라지고, 능소가 가라앉고 마지막 분별마저 사라지면 體露에 부는 金風처럼 스산하리니 경계에 익은 몸은 이처럼 사라지는 모습에 애닯아 하며 상을 사모하는 마음이 지극하기 이를바 없습니다 마른잎 뉘엇 뉘엇 떨어지는 늦가을의 모습이 曲江의 봄 풍경처럼 애잔한데 진작 산중에 부는 바람은 속세의 정리를 외면한채 소쇄하기만 합니다
마당의 낙엽은 쓸어야할까,그냥 둬야할까? 물각부물(物各付物) 사물에는 각각 특성이 있으니 사물에 대해 나의 私見으로 응대할것이 아니라 그 사물이 갖고 있는 특성대로 응대해야한다는 뜻입니다 금강경이 그렇습니다 그렇게 보아야합니다 塵埃楓葉滿室 隨掃隨有(진애풍엽만실 수소수유) 然而不可敗掃 以爲賢於不掃也(연이부가패소 이위현어부소야) 若本無一物又何加焉 有詩錄呈(약본무일물우하가언 유시록정) 簾捲穿窓戶不扃 隙塵風葉任縱橫(염권천창호불경 극진풍엽임종횡) 老僧睡足誰呼覺 倚枕床前有月明(노승수족수호각 의침상전유월명) 티끌을 머금은 낙엽이 떨어져서 집에 가득하니 낙엽은 쓸면 쓸수록 자꾸 떨어진다. 비질을 하면 자꾸 떨어지는 낙엽을 그래도 자꾸 쓸어서 모으는 것은 안 쓸고 그냥 놔두는 것보다 나아서 그런 것인가. 만일 본래 한물건도 없다고 한다면 낙엽을 쓸던지 쓸지 않던지 거기에는 쓸고 안 쓸고 시비를 가릴 필요가 없다. 여름에 친 발은 말아서 올린 채로, 구멍 뚫린 창문은 바르지 않은 채로, 싸리문은 빗장을 채우지 않는 채로, 노스님 토굴 문틈 사이에 낙엽은 이리 저리 바람에 휩쓸려서 왔다 갔다 하는구나. 낙엽을 쓸다 지쳐서 낙엽 속에 묻혀서 선정 삼매 잠에 들어 버린 노스님을 누가 깨울 것인가. 동산에 달이 떠서 이마에 달빛 비치니 그때서야 노스님은 선정에서 깨어난다. - 蘇軾 -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소동파가 녹균헌의 스님으로부터 금강경을 배우고, 그 느낌이 있어 詩를 적어 친구에게 띄운 편지의 내용입니다 이 편지는 세종대왕도 만번을 읽었다는 구소서간(歐蘇書簡·구양수와 소동파가 자주 주고받은 편지글들의 모음)에서 발췌했습니다 곡식을 여물게 하는 가을바람처럼 금강경의 진공묘유의 분위기를 잘 살려즙니다 -덕민스님- 약본무일물 우하가언(若本無一物又何加焉) 삼라만상의 본래성품이 공한 것이어서 시비를 가릴 필요가 없습니다 맑은 물을 얻으려 자꾸 샘물을 팔것이 아니라 흙탕물이 가라앉기를 기다려야하는것입니다 봄은 삼개월이요 기다림은 사개월입니다 금강경은 읽어서 깨닫는 경이 아니라 깨닫기를 기다리며 읽어야하는 경입니다 나무를 읽을게 아니라 나무에 스치는 바람을 느끼는게 금강경입니다 부처가 설한바 없다는 법문을 내가 읽어서 안다는것은 부처를 비방하는것이다. 경을 읽고도 읽고 깨닫은 바를 말하지 못한다면 그 또한 아둔한 일이다 범부의 설법은 心有所得,여래의 설법은 心無所得이니 범부의 설법은 곧 마음의 지음이요 여래의 설법에는 말과 침묵에 구분이 없다. 그래서 유마경에 이르기를 설법이란 설함도 없고 보임도 없으며 청법이란 들음도 없고,얻음도 없다고 하니 만법이 다 공적하기 때문이라 대나무 그림자 뜰을 쓸어도 티끌 하나 움직이지 않고 달빛이 연못을 투과해도 물에는 흔적이 없다 부모는 자식의 얼굴 만 보아도 자식의 근심을 다 읽어 내고 석굴암 부처님은 침묵 하나로 팔만사천 법문을 다 설하십니다 오직 수행자가 상념의 정지 (止)만을 수행한다면 마음이 침체되고 태만해져 중생을 늘리 구제하려는 비원이 상실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질에대한 통찰 즉 觀이 필요합니다 觀의 대상은 생멸입니다 관을 본질의 통찰이라고 할 때 그 본질은 현상의 본질, 변화를 본질로하는 생멸계에 속해 있으며 그것이 곧 苦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고를 통해 아름다움을 채굴합니다 예술이라 불리는 아름다움은 다 이 고의 아름다움이요 무상의 아름다움입니다 희노애락 춘하추동이 다 무상의 아름다움입니다
꽃은 떨어지는 향기가 아름답습니다. 해는 지는 빛이 곱습니다. 노래는 목마친 가락이 묘합니다. 님은 떠날 때의 얼굴이 더욱 어여쁩니다.
- 한용운의 '떠날 때의 님의 얼굴' 중에서 - 無我는 我의 否定이 아니라 我의 정의다 즉 무아가 我인것이다 열반은 오음의 이면이다 須菩提야 於意云何오 可以三十二相으로 見如來不아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 견여래부 不也니이다 世尊이시여 不可以三十二相으로 得見如來니 불야 세존 불가이삼십이상 득견여래 -여법수지분- 須菩提 於意云何 可以三十二相 觀如來不 須菩提言 如是如是 以三十二相 수보리 어의운하 가이삼십이상 관여래부 수보리언 여시여시 이삼십이상
觀如來 佛言 須菩提 若以三十二相 觀如來者 轉輪聖王 卽是如來 관여래 불언 수보리 약이삼십이상 관여래자 전륜성왕 즉시여래 -법상비상분- 見으로도 볼 수 없고 觀으로도 볼 수 없는 부처의 세계를 어찌 볼것인가 부처의 세계는 안이비설신의의 세계가 아니다 그렇다고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세계도 아니다 부처의 세계는 허구의 세계도 현실의 세계도 아니다 그런 세계가 있다 차의 맛을 알려면 차의 세계에 온전히 빠져봐야 하고 사랑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제대로 사랑에 빠져봐야한다 그래야 그 세계를 안다고 할 수있다 喫茶去(끽다거) 조주 스님이 물었다. “스님들은 여기에 와 본 적이 있는가?” 한 스님이 대답했다. “와 본 적이 없습니다.” 喫茶去 차나 한잔하고 가게 "여기" 가 어디인가 불성의 자리가 아닌가 와 본적이 없습니다 스님은 불성을 체득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차나 한잔하고 가게 차의 세계를 온전히 깨닫는것은 불성의 세계를 깨닫는것과 차이가 없다 추사의 불후의 최고작은 단연 "명선"이다
차와 선이라는 두개의 명사를 병치시켜 차를 마시며 동시에 선의 경지에든다는 높은 차원의 동명사이다 그의 글이 그렇고, 그가 불교를 통해 체험한 증득의 세계가 그렇다 字의 차원을 넘어 글씨에서 뿜어나오는 힘과 기의 세계가 그렇다 박제화된 글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생명의 글이 된것이다 추사체의 본질은 형태의 독특함에서 나오는것이 아니라 필획과 글씨의 구성에서 발휘되는 힘에서 나온다 불법의 대의를 깨닫기 위해서는 단순히 차를 마시고 가는 수준이 아니라 茶半香初를 제대로 체득할 정도의 깊은 수행이 있지않고서는 불가능 할것이다 마음이 무언가를 찾으려 온 세상을 다 헤매어도 끝내 찾을것은 없습니다 형체,색 즉 육진의 경계는 마음에 의해 파악되는것이 아니요 마음 또한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긿을 잃는다하여도 동서남북은 엄연히 존재하듯 무명이 길을 잃고 그 마음을 상념이라고는 하지만 마음의 세계는 그대로입니다 마음이 상념을 가지지 않고(無念),상념이 마음의 헛된 움직임이라는것을 알고 나면 누구나 실재의 세계 (眞如門)에 들어 설 수 있을것입니다 染法(상념에 물든 현상)도 淨法(진여본체)도 다 상대적인 것으로 그 자체로는 기술의 대상이 아닙니다 일체 사물과 현상은 非色非心으로 언어로 형용될 수 없습니다 언설로 표현되는것은 단지 여래가 언설을 빌어 중생을 깨닫으로 이르게 하는 방편으로 상념을 떠나 진여의 길이 있음을 가리키기 위한 수단이라는데 참 뜻이 있습니다 一圓心 당신이 가운데 놓이도록 원을 하나 그려보세요 그러면 당신은 원의 세계에 갇힌겁니다 우리는 태어나며 삶의 일원상에 갇힙니다 때로는 그 원이 한없이 넓어져 우주 법계를 다 에워싸지만 때로는 당신의 목을 조이는 올가미가 됩니다 삶의 방향은 우리에게 둘러쳐진 원의 반경을 넓히는것입니다 원이 세상을 향해 넓게 퍼질수록 우리는 자유롭습니다 우리 삶의 마지막 원은 어떤 크기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조그마한 원 하나를 손바닥에 쥐게될지도 모릅니다 그토록 크다고 믿었던 원이 사실은 내 손바닥 위 손금이 만들었음직한 작은 동그라미에 불과했다는 사실을요. 충분하다 이 말 한마디로 충분하다 당신의 마음이 갈애로 소용돌이 칠때에 조차 충분하다 이 말 한마디로 모든것이 충분하다 삶을 하나의 프레임으로 보는것이 명상입니다 관여하지도,판단해서도,이끌려서도 안됩니다 그저 바라보아야합니다 머리 속에 흐르는 수많은 상념의 흐름들을 그저 바라 보아야합니다 이것이 가장 힘듭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이기도 합니다 삶에 무상성을 빼고 나면 무엇이 남겠습니까 우리는 생각을 통해 깨어나는것이 아니라 생각을 바라 볼 때 깨어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삶의 프레임은 그 자체로 온갖 의미의 천국입니다 앎에는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지식이고 하나는 지혜이다 지식과 지혜는 그 성격이 상반된다 지식은 쌓아서 이룩되는것이고 지혜는 부숴져 이룩된다 無와 不 不이란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이 청정한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라 染汚(염오)의 세상이란 것입니다 보이는 그대로의 세상 相에 뒤법벅이된 가상이란 것입니다 無는 능소가 소멸된 자리 빛도 소리도 냄새도 없는 분별이 생기기 이전의 청정한 세계를 이르는것으로 부처의 세계입니다 중생이 다다를 수 있는 세계가 아닙니다 개에게 불성이 있습니까? 無 여기서 개는 애꿎은 들러리입니다 이 화두만을 생각하면 개는 참 억울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無를 생각할 때 문자의 무게가 이 만큼 무겁게 느껴진 때가 있을까요. 여기서 無는 그 자체로서 완전한 법계입니다 불성이야말로 그대로 無이며 있음과 없음 분별이 끊어진 당처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관념이 이 無라고 하는 절대 평등의 세계로 확대될 때 비로소 無門의 門이 열립니다 一卽一切 一切卽一 이요 信心不二 不二信心 입니다 어떤분이 말씀하시길 죽음이란 잘 익은 과일이 툭 떨어지는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한 모습으로 완성된것입니다 生도 제모습이요 死도 제 모습입니다 살아있을 때는 온 천지가 삶이요 죽을 때는 온 천지가 죽음입니다 生死不染 去住自由 생사에 물들지 않으면 가고 머뭄이 자유 자재합니다 산과 물을 돌아봄에 무정 설법이 있다는것은 삼라만상에 佛祖가 아니 나툰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불조가 곧 물이요,물이 곧 불조입니다 물과 불조가 둘이 아니듯 삼라만상과 불조가 둘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我 또한 삼라만상의 일부이니 내 속에 또한 불조가 존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산천 경계의 무정설법을 내가 듣는것은 불조가 불조의 설법을 듣는다는 이치입니다 산수를 통해 불조께서 설하신 설법에 골몰하는것이 곧 공안입니다 그러니 공안을 통해 불조와 불조가 대치하는 샘입니다 깨닫음을 얻는다는것은 세상만사의 본래 모습을 체득하는 일 불조가 불조의 모습을 보는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깨닫음을 통해 세상을 보는 안목을 가다듬어 세상을 바라볼 때 空怯已前의 세계가 바로 열립니다 그것이 곧 공덕입니다 - 도겐선사의 산수경에서- 스님께서 설법을 하시다 말고 "이"라고 해보라고 하셨다 "이 뭣고?"
영문을 아는 사람도, 모르는 사람도 답할수 없는 "이" 그래서 이 "이"를 똥개에게도 있다는 불성이라고 치자 불성이란 명상이 깨름직하면 그냥 부처라고 하자 그렇다면 법당에서 기도를 드린다는 것은 결국 부처가 부처에게 기도를 하는것과 다를 바 없게된다 어느 부처님이 더 높고 수승한가 이런 의문이 든다면 불전을 놓는 쪽이 더 하열하다고 할것이나 실상 부처에 고하가 있을 리 없다. 그런 까닭에 나는 요즘 절에 가면 기도를 하지 않는다. 다만 부처님께 문안드린다. 저 부산 사는 이아무게 부처가 은해사 아미타 부처님께 인사 올리는거다 남의 집을 방문했으니 그 집 주인께 인사드리고 안부 여쭙는것은 당연한것 아닐까. 설악산 영시암에서 봉정암에 오르지 못한 할머니들이 봉정암을 향해 합장하며 "부처님 저 아시지라, 저 전라도 땅 해남서 온 아무개요"하고 절을 하고 가듯. 무엇이 부족한가 무엇이 부족한가 깨닫음이 지혜로 도달하는 경지라면 아마 입시 학원처럼 '悟道학원'이 난립할것입니다 하지만 깨닫음은 머리에서 나오는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몸이나 經에서 나오는것도 아닙니다 쇠를 씹는 체험, 대사일번의 수행의 결과입니다 화두를 걸망처럼 짊어지고 삶의 길을 떠나봅시다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밟아가다보면 소소영영한 본래지의 풍광을 보게될 날이 오겠지요 아니 보지 못한다해도 상관 없습니다 우리는 그기로 한 발짝 다가선 까닭이니까요 나머지는 다음 생애에서 구하면 됩니다 중생의 末後句 혜가의 잘린 팔로는 운문의 똥막대기를 줍지 못하고 파초의 주장자는 하루 밤 땔감도 되지 못한다 여기 오직 한 길이 있어 無門이라 이름하니 그 길로 나아가 문수도 깨우지 못한 그 여인을 깨워보라 깨갱깽 금강경 금강경을 읽는다는것은 봄날 梅園을 거니는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꽃비를 맞아도 옷이 젖지 않는것처럼 온종일 글을 뒤져도 以無所得입니다 금강경의 대의는 說이라부르는 名相의 뒤에 존재합니다 說의 體를 깨닫으면 금강경을 체득한것이요 說의 用을 얻었다면 금강경을 읽은것입니다 說의 體가 법계통화요 이색이상이며 마침내 非說所設입니다 無住 부처님은 금강경을 통해 어떤 모습에도 얽매임없는 삶을 살아갈것을 당부하셨습니다 이는 실용적으로 禮의 가르침과 유사합니다. 예란 인간 세상에서 영위하는 "완전한 삶의 쓰임새"를 말합니다 사람이 예를 알면 나아갈 자리와 물러날 자리를 스스로 알 수 있고 처신이 올곧아 베품에 어질지 아니한 바가 없습니다 無住는 허공 속에 바람과 달이 서로를 방해하지않는것처럼 모습과 모습에 얽매임이 없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이런 무주의 바탕 위에 완전한 삶의 쓰임새 즉 禮의 大用이 일어납니다 인간의 견문각지는 집집마다의 가풍과 같습니다 각 가정의 온갖 기운과 장맛이 수행자의 수행터이자 놀이터입니다 이 대용의 활발하고 자유 자재한 작용으로 인해 온갖 공득이 두루 드러나게 됩니다 不可得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心이 불가득인것은 마음이 공적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공적하다는것은 다만 공적하다 이름하였을 따름입니다 공적의 名相을 마음에 비유한 까닭은 집착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불가득한 마음을 구할것이 아니라 마음의 뒤란에 흐르는 불가득의 體를 깨닫아야 합니다 현재 과거 미래도 마찬가집니다 시간으로 분별된 명상에 의미가 있는것이 아니라 시공을 관통하는 오직 하나의 모습 일물의 존재에대한 확고한 믿음에 의미가 있습니다 노출 사진에 있어서 노출의 의미는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삼라만상을 아우르는 체를 드러내는 방편입니다 다이안 아버스의 스승으로 유명한 리제트 모델은 노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사진의 노출은 감춰진 어둠,그 비밀에 빛을 주라는 노출이다 보이지 않는 삶,미미한 세부,눈길로 부터 소외된것, 타인이 고통 받는것,스스로 말하지 못하는것, 드러나지 않는 아름다운것,세상으로부터 아파하는것, 슬퍼하는것들,심지어 버림받고 상처받는 영혼들까지 바라보고 비추고 드러내는 노출이 참된 노출이다 擧頭殘照在 元時住居西 문득 머리드니 불타는 저녁놀 원래부터 집은 서향이었지 깨닫음을 얻었다하여 세상이 변하는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본모습을 겨우 찾았을 뿐입니다 자신의 본 모습이 곧 세계의 모습임을 통철히 깨닫아야 비로소 세상과 하나가 됩니다 圓相 금강경 제목 아래에 야부스님은 원상을 그리셨습니다 금강경이 문자의 속성을 벗어나 있음을 상징하는 의미입니다 우주의 근본이 되는 최초의 한마디, 천하를 만들어내는 어머니의 말씀을 원으로 상징화하신것입니다 이 원상을 한 글자의 名相으로 표현한것이 法입니다 법은 스스로 이름을 붙이지 않지만 인연이 되면 붙여진 이름의 모습으로 드러나기때문에 이름이 붙여졌다고합니다 "온갖 법을 지니고 있는 원상에는 문자가 없지만 문자는 온갖 법을 지니는 원상을 나타낸다" 그래서 금강경에 씌여진 모든 문자들은 봄날 피어나는 꽃과 같습니다 꽃을 보는 즐거움으로 꽃을 피게한 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법은 홀로 일어서는 법이 없습니다 種瓜得瓜 種果得果 昔年所學 卽今日所信 因地所習 卽果上所證 오이씨를 심으면 오이를 따고 참외씨를 심으면 참외를 딴다 예전에 배운것이 곧 오늘의 믿는 바요 인의 땅에서 익힌바가 결실로 증득한 바이다 법신 보신 화신 그 사람의 그림자일 뿐 깨닫고 보면 그림자와 그림자가 다른것이 아니다 1. 국보 제14호 영천 은해사 거조암 영산전 (永川 銀海寺 居祖庵 靈山殿) - 고려시대 은해사는 통일신라 헌덕왕 1년(809) 혜철국사가 지은 절로 처음에는 해안사라 하였다고 하며, 여러 차례 있었던 화재로 많은 건물을 다시 지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들의 대부분은 근래에 세운 것들이다. 거조사는 은해사 보다 먼저 지었지만, 근래에 와서 은해사에 속하는 암자가 되어 거조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돌계단을 오르는 비교적 높은 기단 위에 소박하고 간결하게 지은 영산전은 거조암의 중심 건물이다. 고려 우왕 원년(1375)에 처음 지었으며, 석가모니불상과 526분의 석조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앞면 7칸, 옆면 3칸 크기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보았을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공포를 기둥 위부분에만 설치한 주심포 양식이다. 특히 영산전은 고려말, 조선초 주심포 양식의 형태를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어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2.국보 제15호 안동 봉정사 극락전 (安東 鳳停寺 極樂殿) - 고려시대 3. 국보 제18호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榮州 浮石寺 無量壽殿) - 고려시대 4. 국보 제19호 영주 부석사 조사당 (榮州 浮石寺 祖師堂) - 고려시대 5. 국보 제49호 예산 수덕사 대웅전 (禮山 修德寺 大雄殿) - 고려시대 6. 국보 제51호 강릉 임영관 삼문 (江陵 臨瀛館 三門) - 고려시대 -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고려시대 건축물- 오백나한상 오백 나한상의 각자 다른 모습에 사람들은 신기해하며 그 다른 모습들 속에서 우리의 모습들을 찾기 바쁩니다 삼라만상의 모습처럼 인물들도 참 다양합니다 하지만 다양함을 찬탄하는 한편으로 저들도 다 사람인지라 한결같이 머리는 위로 하늘을 받치고 있으며 앉은 자리는 땅을 향해 있습니다 여느 사람들과 같이 눈섶은 횡이요,코는 종으로 오똑합니다 봄이 오면 매화가지에 흰꽃이 필것이요 가을이되면 오동잎이 떨어집니다 아무도 세상의 이런 현상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세상이 모두 한모습이라는 이 이치, 분별하려들거나 헤아리지 않는 이것이야말로 평상의 도 입니다 일상에서 이 이치를 깨닫으면 가뭄 속의 단비를 만난것이며 먼 타향에서 벗을 만나는 즐거움과 같은것입니다 스승 남전에게 조주가 물었습니다 안다고 하는 것은 망심으로 깨닫는 것(妄覺)이요, 모른다는 것은 생각 없이 깜깜한 것(無記)이다. 만약 참으로 '헤아리지 않는 도'(不擬之道)를 통달하면, 마치 허공과 같아서 탁 트이고 텅 비어진다. 어찌 옳으니 그르니 굳이 따질 수 있겠는가?” 백흥암 수미단(보물 486호) 높이 125cm 너비 413cm 조선 후기에 만든 불단 "남 밟고 올라서려 않으면 더 나은 삶 살 수 있어" "I'd like to say as little as possible here because the film is the best when you go into it cold." 봉준호 감독이 미국 NBC 토크쇼에 출연하여 사회자가 기생충은 어떤 영화인가라는 질문에 "나도 되도록 여기서 말을 안 하고 싶어요. 스토리를 모르고 가서 (영화를) 봐야 재밌거든요." 를 통역한 문장입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것은 "cold"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영화를 보라는 뜻입니다 빈 마음 편견이 없는 마음 상을 떠난 마음 이 cold란 작은 단어 속에 금강경의 키워드가 고스란히 담긴듯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금강경의 百讀보다 이 cold란 한마디가 금강경의 대의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더 수승하지 않을까요? 相이 없는 진리의 본처는 차고 담연합니다 하지만 거침이 없고 자유로우며 서로 방해되지 않는 세계입니다 상을 떠난 마음의 상태 세상 만물의 어머니와 같은 마음의 근본 모습입니다 마음을 비운다는것은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삶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 후 기 - 말은 이미지를 온전히 표현할 수 없고 이미지는 오직 한 모습이 아니다. 말이 이미지를 대신하면 모습이 상처를 입게되고 이미지에 집착하면 본질을 잃게된다 부처님의 30종호 82상도 다를 바 없다 |
첫댓글 다대포 해안에 전시된 작품도 나한상과 잘 어울립니다.
열반은 오음의 이면.
오음이란?
감사합니다. 좋은 작품 우리 불교의사회 유산으로 또 저축됩니다.^^*
템플스테이 삼사순례가 학수고대해지는 이유는 선지식도반과 함께하기때문이리라. 천태지의선사의 교상판석과 같은 폴선사의 선법문은 디지털시대의 4차원적 선문화해설의 결정판 ...볼때마다 아뢰야식에까지 깊숙히 쌓인 나의 업식망견들이 요동을 치게하며, 마치 휘몰아치는 禪風이 태풍에 흔들리는 대나무숲그림자가 땅밑 쌓인 낙엽까지 휩쓸어대듯...일체만법은 불리 불성(자성)이라, 불성은 본청정 본구족 본불동요 만능생이라하니 .. 활구화두참구로 이 모든 업식망상덩어리를 몽땅 한덩어리 의단으로 꽁꽁묶어 용광로에 처넣어 타파하리라고 순간적이나마 분,신심을 일으켜봅니다...그러면 산마루에서 산을 찾아 헤메지않겠지요.
지난 한철 배우고 익힌 바를 두서없이 생각나는대로 나열해 보았습니다
원래 바탕이 없고 어깨 너머로 배운 지식들이라 글이 거칠고 익지못여 어디에 내 놓기도 송구스럽습니다만 딱히 여기 말고 어디 내 보일곳도 없어 이리 미천한 글이나마 올려봅니다 부디 혜량하여 주시옵소서
미진한 부분은 또 한해 공부해서 보다 정제된 글로 점검받도록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