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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문학관.한국시낭송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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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문학관 스크랩 쌍용계곡 그리고 용유동 계곡
지리산문학관.한국문학문화재협회 추천 0 조회 135 16.05.30 12: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남장사를 둘러보고 상주시내로 나왔습니다.


식사를 하고 나와 잠시 주변을 둘러봅니다.

 

 

 

 

 

발걸음이 향한 곳은 중앙시장인데 막상 시장안으로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오후 일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아쉽지만 잠시 둘러 본 것으로 도시의 분위기를 미루어 짐작할 뿐입니다.

 

버스를 타서 자리를 찾아 앉습니다.

 

상주라는 도시가 하루이틀에 둘러볼 수 있는 도시는 절대 아니지요.

이곳 저곳 문화와 역사의 향기가 베어있고 절경이 펼쳐져 있는 곳이 바로 상주입니다.


경상도(慶尙道)의 尙이 상주를 의미하듯

이런저런 영고성쇠를 거쳐 오늘에 이른 오랜 전통의 도시입니다.


삼한시대에 진한(辰韓)의 영토였으나

그후 사벌국(沙伐國 혹은 沙佛國)이라는 소국으로 유지해 오다가

신라 첨해왕 때 정벌되어 신라 법흥왕때 상주(上州)로 이름이 고쳐졌습니다.
진흥왕이 상락군(上洛郡)으로 고치고 신문왕 때 사벌주(沙伐州)로 개칭되었다가

경덕왕 때 상주(尙州)로 개칭하였으며 혜공왕 때 다시 사벌주로 환원되었습니다.


고려 태조시절 상주라는 이름이 정해졌지요.

성종 때 귀덕군(歸德郡)이라 하여 영남도(嶺南道)에 속하게 하였습니다.
현종 때 전국에 8곳의 목(牧)을 설치할 때 다시 상주라는 이름을 가져와 상주목이 되었지요.


조선 태종 때 경상감영이 상주로 옮겨왔다가

선조 때 경상도의 중앙에 위치한 대구로 옮겨갔습니다.
고종 때 상주목이 상주군으로 개편되었고 1914년 상주군에 함창군이 편입되었으며,

1931년에 상주군 상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습니다.

1986년에는 상주군 상주읍이 시로 승격되어 분리되어 나갔고,

1995년 상주군이 상주시에 통합되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름이 나오는데 

주목해야할 이름은 상락입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태백산 황지와 경북 문경의 소백산에서 나온 물이 합하여 상주에 이르러 낙동강이 된다’고 적고 있습니다.
1300리의 낙동강은 상주의 옛 이름인 ‘상락(上洛)’의 동쪽으로 흘러간다고 해서 붙은 이름입니다.


상락의 동쪽 ‘낙동(洛東)’이라는 지명도 상주에 남아있습니다.
낙동면 낙동리,

이곳에는 조선시대 원산·강경·포항과 함께

4대 수산물 집산지로 꼽히는 낙동나루가 있었습니다.

 

낙동리에 있는 나각산은 최고의 낙동강 조망코스로 트레킹코스로 참 좋은 산입니다.
나각산에 마귀할멈굿터라는 굴도 있는데..

굴 속을 들여다보면 둥근 돌이 박혀 있던 흔적이 있지요.

 

버스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오던중 차가 섰습니다.


내립니다.


쌍룡계곡이라는 표지판이 보입니다.

 

지금 우리는 문경땅을 밟고 있네요
상주 화북면 용유리와 문경 농암면 내서리의 경계가 조금전 넘어온 병천교에서 갈라질겁니다.

 

이곳 심원사와 도장산으로 넘어가는 다리 있는 곳은 문경에 해당되지요.

 

 

용추교를 건너갑니다.

용추란 말이 많이 쓰이다보니 용추란 말은 이제

폭포수가 떨어지는 지점에 깊게 패어 있는 웅덩이를 나타내는 일반명사가 되었지요.

 

도장산 가는 길 표지

 

등산안내도

 

우리는 산으로 가지 않고
천변으로 다가갑니다.

 

 

 

 

물길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거대한 쇄석들이 물에 의하여 커다란 몽돌처럼 만들어져 매끄럽게 다듬어지고

그 사이로 소와 담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물가엔 높은 벼랑이 치솟아 뛰어난 경관을 형성합니다.

 

천변에서 나와

 

길을 따라 걷다가

 

길을 막듯 서있는 바위를 만납니다.

 

이 바위가 안도석인데 쌍용구곡 제 6곡에 해당하는 곳이지요.

 

문경의 쌍용구곡은 평생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자연에 은거하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면서 학문에 전력하던

민우식이 경영했던 내서천과 쌍룡천에 걸쳐있는 구곡원림입니다

 

벽면에 安道라고 초서로 쓴 글을 예전에 보았는데 오늘은 어디였던가 가늠이 않가네요.
그냥 지나칩니다.

도의 세계에 다다르면 편안해 진다라는 뜻일텐데 도를 얻은바 없으니 해당이 없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산이름이 道藏山, 도를 감춘산입니다.

어딘가를 캐면 도가 나올까요?

도는 차치하고 단지 풍광에 감탄하며 다시 계곡물 옆으로 가서 물길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산길도 타보고...

 

참 남들은 기중 쉬운길로 가는데

일부러 어려운 길로만 가는 내심보를 내가 모르겠습니다만...

 

이것도 잠시,

조금만 더 기력이 떨어지면 가라고 해도 못갈겁니다.

 

 

 

 

 

 

 

 

 

 

 

 

 


용소에 다다랐습니다.

 

심원사 쪽으로 올라가면 쌍룡폭포와 심원폭포라고 하는 멋진 폭포를 감상할 수 있습니다만

오늘은 이 용소로 흘러드는 물줄기에 만족합니다.

 

바로 옆으로 도로가 지나간다고 알면서도 층암절벽 계곡속에 있는 느낌입니다.

 

 

 명주실 한타래가 들어갈 만큼 깊다는 용소입니다.

 

 

 

 

둘러보고 또 둘러보고...

 

사진찍고 또 찍고...

 

 

 

 

 

 

 

 

 

 

 

그렇게 한참을 보내다 자 돌아갑시다 소리에 몸을 돌립니다.

 

 

일행을 앞으로 다 보내고

심원사 가는 길 입구쪽으로 갑니다.

 

 

 

심원사를 올라가겠다는것은 아니고 그냥  아쉬움의 표시를 하고 싶어서지요.

 

안도석을 편하지 않은 자세로 찍어보고

 

다시 편안한 자세로 찍어봅니다.

 

용추교

 

그 아래쪽

문경의 영강으로 농암천물길이 흘러갑니다.

더 아래로 흘러 사우정이라는 정자가 있는 곳에서부터 본격적인 쌍룡계곡이 시작되지요.


 

버스에 올라탑니다.
다음 일정이 어디라고 했더라하고 생각하려는 순간 차가 섭니다.


차에서 내립니다.


예향농암

아까 차를 탄 용추교에서 약 3km서쪽으로 왔습니다.

 

용소에서 계곡을 거슬러 오거나 산길을 넘을 수 있는데 너무 힘든듯 하고

도로로 걷자니 쌍용터널이 있어  걸을 수가 없으니 차량으로 이동을 했나 봅니다.

 

회원들은 계곡으로 내려가고

 

나는 언덕받이로 올라갑니다.

 

병천정사입니다.

 

전면에는‘병천정사(甁泉精舍)’ 현판이 해서로 걸려있고

 

우측면 방 문 위에 ‘빙청실(氷淸室)’ 현판이 예서로 걸려 예스런 정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정사는 1703년(숙종 29)에 송요좌(宋堯佐)가 건립하였다고 하며

그의 아들인 송명흠(宋明欽)이 영조에게 사도세자에 대한 처벌을 거두어 달라고 요구하다

결국 그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사도세자가 사망을 한 것을 본후

이곳으로 내려와 은거하면서 후진을 양성하였다고 합니다.

 

검간 조정 선생의 '임란일기'에 의하면, 이 곳은 임진왜란 당시 상주지역 의병들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는데

그런 점에 비추어 본다면 이 정자관리는 많이 아쉽습니다.

 

녹차(綠此) 황오가 이 정자에서 ‘병천정화홍해사(甁泉亭和洪海史)’라는 시를 남겼습니다.


“구월에 나귀 타고 개울 샘을 찾으니(九月騎驪尋澗泉)
병천 정자가 홀연히 앞에 섰네(甁泉亭子忽當前).
뭇 산은 푸른 바위에 묶여 동쪽 땅도 없는데(群山碧束東無地)
거대하게 둥글둥글한 반석 그 위론 하늘일세(巨石圓盤上有天).
새는 뭇 봉우리 모습을 즐겨 지저귀는데(鳥悅峯巒含氣色)
용은 폭포가 나무뿌리 뽑음을 미워하네(龍憎瀑布拔根綠).
거처하는 사람은 고을에 출입도 않고(居人不出郡中市)
황국과 단풍으로 평생을 벗한다네(黃菊丹楓一百年)."

 

녹차 황오에 대해서 잠깐 더 생각해봅니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로 귀향갔을때 위로하는 편지를 주고받기도 한 분으로

압록강 이남에서 날 따를 사람이 없다고 하여

압록강의 녹(綠)자와  이를 차(此) 녹차라는 자호를 쓸만큼 대단한 문학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던 분입니다.

 
녹차 황오는 평생을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천지를 주유하였다 하며

20세에 한양에 올라가 십여 년을 지내고 강산을 두루 유람하다 

40후반에 상주 중모로 내려 왔다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상주에 내려와서 지은 시 한편 올려봅니다.

 

"상주의 관리는 사납기가 호랑이 같아
관청의 일로 벽제 할 땐 사립문을 닫아거네.
한바탕 호통소리에 촌백성 전율하고
세상일 어리석은 생원은 눈만 크게 뜨네.
환곡과 세금 면하긴 천하에 어려운 일
지난해 이미 발 부러진 솥까지 팔았다오.
부잣집 쌓인 곡식 참으로 그림의 떡이로세
온갖 계책 막힌 살림 밑 없는 독이요
한 푼 돈 보기를 야광주 보듯하여
돈 있는 곳 모인 사람 초 한이 전쟁하듯하네
..."

 

그때나 지금이나 관리들은 자기들 녹을 주는 백성들을

아랫사람 대하듯 하는 건 변함이 없습니다.

 

황오의 시를 올리는 김에 하나더...


'생각이 있어 (有所思)'

"허둥지둥 달려온 마흔여섯 세월(悤悤四十六)
거친 꿈은 아직 식지 않았는데(磊落未全消)
가을빛은 천리 멀리 밀려오고(秋色生千里)
석양은 하늘에서 내리 비치네.(夕陽照九?)

강호의 곳곳에는 나보다 젊은 이들이 있고(江湖弟子在)
비바람 속 벗들은 곁을 떠나네.(風雨友生遙)
남산의 달빛 아래 홀로 섰나니(獨夜終南月)
고목 가지엔 거미가 줄을 치누나.(蛛絲古木條)"

 

황오가 40대 중반을 넘긴 후 상주로 내려와서 읊은 시입니다.


당시의 40대를 지금의 50대쯤으로 계산해서 제가 종종 읊조리는 시인데요...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온 세월도 막바지에 다다른 듯 하지만 그래도 아직 꿈을 접을 나이는 아니지요.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다 후배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동년배는 다 자리를 떴습니다.

아직 무언가를 이룰수 있을 것

같은데....

황망할 뿐입니다.

 

그 기고만장하던 황오가 만년에 이런 처연한 글을 씁니다.
그 후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르게 기록속에서 사라집니다.

 

생각의 곁가지가 너무 멀리 갔습니다.

 

계곡으로 내려갑니다

 

송명흠이 이 곳으로 내려와 경영했다는 구곡원림중 한꼭지였을 용조암입니다.

 

이곳은 용의 발톱이 바위를 눌러 이런 저런 골을 바위위에 파 놓았는데

 

그 골사이 사이로 물줄기가 휘돌아 흘러 아래쪽으로 깊은 소를 만들어 놓아

 

이곳의 바위를 용발톱 바위, 즉 용조암(龍爪巖)이라고 합니다.

 

그 중 바위 하나 넙적한 면에 물결이 도는 바위라는 뜻으로 회란석(廻瀾石)이라고 음각되어 있습니다.

 

 

 

 

감히 겁도 없이 용의 발톱을 밟고 뛰어 다녀봅니다.

 

 

 

 

 

 

 

바위위에서...

 자라는 게 아니고 바위위에 가부좌하고 앉은 나무입니다.

 

계곡을 잠시 거슬러 갑니다.

 

 

병천교를 만나 도로로 올라왔습니다.

 

이 다리 초입부터 상주땅입니다.

다리 우측으로 갑니다.


행정구역으로는 상주시 화북면 용유동
마을사람들이 부르기는 계곡은 용유계곡, 동리는 우복동입니다.


마을의 지맥이 청화산에서 속리산을 거쳐 도장산으로,

다시 청화산을 뒤돌아 보며 원을 그리는 회룔고조형  지세에

그 안에 동리가 있어 우복동이라고 한다고 합니다.

정감록에서 말하는 當亂藏身 萬無一傷의 길지로
난을 만나 몸을 숨기면 조금도 다치지 않는다고 합니다.

 

동리의 중심 영지산 자락에 위치한 질병과 재앙을 축출하고 안전을 기원하는 산제당입니다.

 

150년 정도의 나이를 먹은 소나무가 사방으로 가지를 뻗고 있습니다.

 

영지산 자락

또 다른 바위들

 

 

먼저 대은병

 

아마도 송명흠이 경영했다는 구곡원림 중 또 다른 꼭지일 듯 싶습니다.
대은병은 주자의 무이산(武夷山) 대은병(大隱屛)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당시 조선의 선비들에게 주자의 무이구곡은 학문과 사상의 이상향이었습니다.

윤선도는 보길도에 거주시 집뒤에 커다란 바위를 소음병이라 이름하고

그 바위위에서 명상과 사색을 하던 때가 많았다고 합니다.

 

이곳 병천甁川은 계곡 좌우 양쪽의 산이 병풍같이 서있기 때문에 옛이름이 屛川이었다 합니다.

 

그리고 연좌암

상주 속리 36경 중 한 곳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바위...
줌으로 최대한 당기니 靈자가 보이는데 다가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영구암(靈龜岩)일 듯 싶은데 일행과 너무 떨어져서 몸을 돌립니다.

 

건너편 산기슭을 봅니다.

도장산 기슭입니다.

 

징검다리가 있어 무심코 다리를 건넙니다.

 

아이고 아니구나

 

용유교를 건너

 

야영장 길을 따라 계곡옆을 걸어갑니다.

 

돌아본 승무산

스님이 춤추는 모습을 찾아봅니다.

 

 

 

 

길이 끝나고 배추밭

배추밭 고랑을 이용 앞으로 앞으로

 

저기는 속리산 줄기인데....

 

속리산이 어느 행정구역에 위치하고 있을까요?

 

보은입니다.라고 하시면...
맞았다고 하기 참 힘들어요..

 

속리산 법주사는 보은에 있습니다만

경북과 충북의 경계에 위치한 속리산은 주봉인 1,057.7m의 천황봉이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에 위치하고,

가장 절경이라고 하는 1,054m의 문장대도 상주시 화북면 장암리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속리산 총면적 283.4㎢ 중에서 80%정도가 충북 보은군과 괴산군에 걸쳐 있으니

편한대로 생각하세요.

 

도와주려면 발벋고 도와줘야 한다는 말을 실감하게 한 개천...

배추밭을 지나니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을 필두로 하여 신발을 벋고 하천을 건넙니다.


나는 신발을 벋기 싫어서 조금 더 윗쪽으로 올라와서 몇개의 돌을 징검다리 삼아 넘어왔는데

그 뒤로 많은 분들이 따라옵니다.
간격이 여자분들 뛰기 조금 넓은 듯하여

바위위에서 잡아준다고 서 있는데 큰 보탬이 않되더라고요.


그런데 어느 남자분이 아래쪽에서 넘어오던 벋은 발 그대로 다가오더니

물속에서 자리잡고 서서 여자분들을 건널 때 손을 잡아 줍니다.


그래요 도와주려면 어설프게 하지 말고 발벋고 도와주세요.


수고하셨습니다.


그래도 공연히 심통나서 사진은 않찍었습니다.

 

뒤에 계신 분들 넘어오는 것 기다리며 주변을 둘러 봅니다.

 

 

 

 

 

 

시비공원

 

속리산 시비공원이라하여 속리산과 병천인근의 산천풍경을 에찬하는 시들이 모여있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옥중시가 제일 앞에 있습니다.

문경출신 운강 이강년의 시입니다.
가까운 문경시 가은읍에 기념관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만나것이 이중환의 택리지초 중 용유동

 

뒷면에 해설이 있습니다만...

읽기 어려울테니 옮겨봅니다.


"속리산 남쪽에 있는 환적대는 천 봉우리, 만 구렁이 깎아지른 듯 깊숙하여

사람이 들어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
이 골자기의 물이 합쳐져 작은 냇물이 되어 들을 지나고,
청화산 남쪽을 따라 동쪽으로 용추에 흘러드는데 이것이 병천 (甁川쌍용계곡)이다.

병천 남쪽이 도장산이다.
또한 속리산 한 가닥이 뻗어내린 것으로 청화산과 맞닿았으며,
두산 사이의 용추 이상을 모두 용유동이라 한다.
평지는 모두 반석이고 큰 냇물이 서쪽에서 북쪽으로 흐른다.
물이 돌 위에 펑퍼짐하게 펼쳤는데,
돌이 언튼먼틀한 곳을 만나면 작은 폭포로 되고,
돌이 비좁게 움폭한 곳을 만나면 작은 간수로 되고,
돌이 모나게 넓은 곳을 만나면 작은 못이 되고,
돌이 둥글게 구덩이진 곳을 만나면 작은 우물이 되며,
평평한 곳을 만나면 물이 진주밭 같고, 거슬러 도는 곳을 만나면 물이 향(香)연기 같다.
돌은 구유, 솥, 가마, 확, 석가산, 작은 섬, 염소와 범, 닭과 개 형상같은 것이 기기괴괴한데
물이 빙돌아 구르면서 혹 치솟기도 하고, 혹 괴어 있기도 하며,

혹 부딪쳐 쏘기도 하고, 혹 거꾸로 쏟아지기도 한다."


대략 이런 내용입니다.

 

몇장 더 찍어 봅니다.

 

 

 

 

 

 

 

먼산을 보니 문장대가 모습을 나타냈습니다

 

맞은 편 신화산, 구화산도 나를 보아 달라고 하네요

 

 

오미자라고 합니다.

 

도장산을 배경으로 오미자를 찍습니다.

빨간 열매는 없어도 오미자라고 하니 황동규의 시가 떠오릅니다.


"오미자 한 줌에 보해소주 30도를 빈 델몬트 병에 붓고
익기를 기다린다.
아, 차츰차츰 더 바알간 색,
예쁘다.
막소주 분자(分子)가
설악산 오미자 기개에 눌려
하나씩 분자 구조 바꾸는 광경.
매일 살짝 보며 더 익기를 기다린다.
내가 술 분자 하나가 되어
그냥 남을까 말까 주저하다가
부서지기로 마음먹는다.
가볍게 떫고 맑은 맛!

 

욕을 해야 할 친구 만나려다
전화 걸기 전에
내가 갑자기 환해진다. "


오미자술이라는 시입니다

 

그리고 누가 라마라고 하던데..

이름이 무엇이든 간에

눈과 입 그 표정이 너무 구슬픕니다.

하지만 우리로 보호되고

그 속으로 던져주는 먹이없이는 생존이 어렵다는 것을

이 동물은 알까요?

어쩌면 거친 야생에서 보호없이 살더라도

자유롭게 뛰다 죽기를 바랄수도 있겠지요.

 

뒤를 돌아봅니다.

저 바위봉이 청화산 시루봉입니다..

 

최대한 당겨볼까요.

 

용유천위에 걸쳐 있는 용유3교라는 다리를 넘었습니다.
삼거리 오른쪽 농협앞에 우리를 태울 버스가 서있습니다만 빠른 걸음으로 왼쪽으로 갑니다.

 

망루와 돌탑이 있습니다.

 

화북파출소입니다.

 

이곳 화북파출소는 1949년 무장공비의 습격으로 파출소와 사택등이 전소 되었었습니다.
그 후 마을 주민들의 성금으로 재건축되었다고 하네요.
재건축시 돌담을 이용 방호벽을 구축했다고 하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방호벽은 점점 허물어져 가고...
그래서 2009년 그 돌들을 모아 2기의 돌탑을 쌓았고 치안탑이라고 이름 붙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2012년 6월 25일에 그 예전 시기 무장공비 출몰을 감시하고

주민들에게 대피싸이렌을 울리던 망루를 재건하였습니다.


역사적 현장에 대한 산교육장을 만든 것이지요.

 

버스가 서있는 농혐앞으로 가면서 삼거리에서 이정표를 찍습니다.

문장대 방향, 견훤산성으로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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