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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제신공 여주(驪州)의 학당(學堂)과 거주지
집안에 내려온 전언(傳言)에 의하면 정제신공이 사셨던 곳이 여주 고달사지 근처라고 한다.
구체적인 곳을 알 수 없으므로 이 한시집에 언급되는 부분을 찾아 유추해 보면 정자를 지었던 곳과 집터를 알 수 있다. 38편의 시 중에서 유년간친회(幼年懇親會)시와 신정(新亭)의 두 시에 언급된 부분이 있다.
▪ 간친회는 친목의 모임인데, 학당(서당)을 운영하셨고 유년 간친회이므로 학당 학부모와 지인과 지역유지 중심으로 한 모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간친회 행사를 위해 새로이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이곳의 옆에 가는 시내가 흐르는데, 손님이 오실 때 짚 앞의 입구에 있는 시냇가에서 인사하며 맞이했다. 또한 이집은 옆에 큰 버드나무가 있다. 다른 구절에서도 버드나무를 언급하며 우구(雨鷗)를 부른다 했다.
< 4월 26일 상교리 유년 학당 간친회(四月二十六日上橋里幼年塾懇親會韻) 중 >
「결구소정신제도(結構小亭新制度) 환영고회진명류(歡迎高會盡名流)
조그만 정자 짓고 학당 제도를 새롭게 하고/ 성대한 모임을 열어 환영하니 이름난 인사가 다 모였다」
「차일선유설차루(此日選遊設此樓) 가빈연접벽계두(佳賓延接碧溪頭)
오늘 날 잡아 놀기로 하고 이 정자를 지었지/ 맑은 시냇가 머리에서 훌륭한 손님들을 연달아 만나고」
「방초노중삼리로(芳草露中三里路) 녹양연외일계류(綠楊煙外一溪流)
이슬 맞은 방초는 삼리길인데/ 푸른 버드나무 집 굴뚝 너머 한 줄기 시내 흐르네」
▪ 그러면 서루는 어디에 있는가? 다음과 같이 여주 황려강(남한강)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금당천의 북쪽이자 봉암 근처이다.
「복차명구기차루(卜此名區起此樓) 황려강북봉암두(黃驪江北鳳岩頭)
인간아역수양조(人間我亦隨陽鳥) 물외군개폄수구(物外君皆泛水鷗)
이 아름다운 곳 자리 잡은 누대에서 일어나 바라보니/ 황려강 북쪽의 봉암 머리일세/
사람들 나 역시 버드나무 앉은 새 좇아 바라보거니/ 세상 물정 알 수 없는 임금은 물위에 떠 있는 물새로다」
「수재경영차일루(數載經營此一樓) 금당천북벽산두(金塘川北碧山頭)
몇 년 관리하는 것은 이 하나의 정자인데/ 금당천 북쪽의 벽산 머리라네」
▪ 다음 구절에 집의 문 앞에 영탑(靈塔)이 서있는지 10년이 되었다고 한다. 집을 짓고 산지가 10년은 되었다는 뜻으로 집 옆에 시내가 흐른다. 여주에 오신 것이 1916년쯤 된다는 것인가? 삼일만세운동이 1919년이다. 만세운동 하신 곳은 광주군 오포면 고산리 일대이다.
여주 고달사지(高達寺址)에는 승탑과 원각대사탑 등 두 개의 탑이 있다. 영탑이란 일종의 위령탑이다. 이곳이 절터이므로 스님의 부도탑이다. 고달사지승탑은 산의 능성에 있고, 원종대사탑은 평탄면의 약간 상부에 있다. 승탑은 지형 상 산위의 능선이므로 주위에 거주지를 마련할 곳이 못되므로, 문 앞의 영탑이란 원종대사탑으로 보아야 한다. 원종대사탑을 바라보는 시냇가에 집터가 있고 정자가 있고 큰 버드나무가 있었다.
「문전영탑십년재(門前靈塔十年在) 함외청계수곡류(檻外淸溪數曲流)
문 앞에는 영탑)이 10년째 서있는데/ 난간 밖의 맑은 시내는 몇 군데나 감아 도네」
▪ 신정(新亭)이란 시에도 서루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 정자를 지을 때 땅을 일구고 깍고 터를 잡았는데, 서쪽으로 불탑이 인접해 있다고 하고, 또한 봉암(鳳岩)도 인접해 있다고 한다. 여기서 원종대사탑은 동쪽이 산이므로 정자를 짓기에 부적합하다. 승탑의 동쪽 평지에 지었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후에 정자가 물 위에 무너져 내렸다고 하는데(고설소주수상두(高設騷坍水上頭), 앞에 언급한 작은 시냇가이다.
피대벽지축신정(披㓫闢地築新亭) 등차심신광차성(登此心神曠且醒)
서린불탑천년백(西隣佛塔千年白) 병접봉암일말청(幷接鳳岩一抹靑)
땅을 일구고 깍아 정자를 새로 짓고/ 여기에 오르면 심신은 잠깐 깨어 맑아진다네/
바로 서쪽 불탑은 천년동안 밝고/ 봉암은 이웃에 있어 오로지 푸름을 무색케 하네
양수재방잉작동(兩樹在傍仍作棟) 소계임하자환정(小溪臨河自環庭)
최애한천류석극(最愛寒泉流石隙) 시의양주수영붕(時宜釀酒數迎朋)
두 그루 나무가 곁에 있어 용마루를 만들어주고/ 작은 시내가 하천에 닿아 스스로 뜨락을 돌아 흐르네/ 가장 좋아하는 것은 돌 틈에서 흘러나오는 차가운 샘이고/ 가끔은 적당히 술을 빚어 친구를 오라하네
이상을 종합하여 볼 때, 사진 4의 붉은색 표시 원 부근이 집터 및 정자 터로 비정된다.
당시에는 땔감 형편으로 볼 때, 일 일대의 산들도 나무가 없거나 적어 승탑이나 봉암이 훤히 보였을 것이고, 절터도 평탄지는 상당부분 전답으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고달사지 발굴사를 읽어 보면, 마을의 주거지도 많이 혼재되어 있었다. 공이 거주하셨던 곳은 고달사지의 농경지와 마을에 연접하였기는 하나, 산지에 접한 궁벽한 곳이므로 생활이 어려웠으리라 짐작된다. 특히 가전된 농지가 없는 상태에서 학당을 운영해 그 삯으로 살았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다.
< 사진 1 고달사지 전경 >
< 사진2 고달사지 승탑 >
< 사진3 네이버 지도 원경 >
< 사진4 네이버 지도 근경 >
ㅇ 참 고 1. 여주 북내면(北內面) : 출처 여주시사(驪州市史)
여주읍내의 북쪽이 되므로 이전에는 북면(北面)이라 하였는데, 이후에 북면(北面)과 지내(池內)의 이름을 따서 북내면이 되었다. 북내면은 동쪽은 강천면과 양평군 양동면, 남쪽은 강천면과 여흥동·중앙동·오학동, 서쪽은 대신면, 북쪽은 양평군 지제면과 접하고 있다.
북내면은 남쪽으로 남한강과 접해 있고, 동북쪽으로 소달산(蘇達山)이 남북으로 걸려 있다. 중앙으로는 금당천(金塘川)이 흘러내려 장암, 신남의 들녘을 풍요롭게 해주고 있다. 상교리에는 국보4호인 고달사지부도가 있고, 남한강변에는 신륵사가 있어 보물 등 귀중한 문화유적이 보존되어 있다.
< 네이버지도 : 여주 북내면 상교리 >
ㅇ 참 고 2. 여주 고달사지 : 출처 여주시사(驪州市史)
□ 소재지 :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1-1 □ 시대 : 통일신라 □ 지정사항 : 사적 제382호
고달사지는 해발 400~500m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盆地)의 서북쪽 고달산(혜목산, 현지명은 우두산) 동쪽 경사면에 위치한 절터이다.
고달사의 정확한 창건에 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아 764년(신라 경덕왕 23)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고달사는 곧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이래의 유명한 삼원(三院) 즉 도봉원(道峰院), 희양원(曦陽院), 고달원(高達院) 중의 하나로 고려시대에는 국가가 관장하는 대찰이었으므로 왕실의 비호를 받았던 곳이다.
고달사지에 관한 각종 기록을 살펴보면 고달사는 구산선문 중 하나인 봉림산문의 개조로 알려진 원감화상 현욱(園監和尙 玄昱, 787~868년)이 도당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혜목산 고달사에 주석하였던 9세기 무렵 이미 사찰로서 운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원감대사는 중국 선종의 제6조인 혜능에서 마조도일(馬祖道一)-장경회휘(章敬懷暉)로 이어지는 법맥으로 868년(경문왕 8) 혜목산에서 입적하였다. 훗날 봉림산문을 개창한 진경대사 심희(眞鏡大師 審希, 854~923년)는 9세의 나이로 혜목산에서 출가(863년)하여 원감화상의 가르침을 받고, 열아홉 살에 구족계(873년)를 받았다. 이후 산천을 두루 순례하며 구도하다가 신라 말의 전란을 피해 창원으로 내려온 뒤 그곳에 봉림사를 세우고 봉림산문을 열었다. 진경대사가 고달사를 떠난 뒤 창원에서 봉림산문을 개창하기까지의 약 50년간 고달사에 대한 기록은 자취를 감추다가 원종대사 찬유(元宗大師 璨幽, 869~958년)가 중국에서 돌아온 10세기 초에 다시 나타난다. 원종대사 찬유는 고려초에 국사의 예우를 받으며 활약한 승려로서, 고려 광종대의 불교 교단의 정비와 사상의 통일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법안종의 성립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고달사와 고려 왕실의 관계는 원종대사 사후에도 광종이 특별히 명을 내리어 도봉원·희양원과 함께 고달사를 삼부동선원(三不動禪院)으로 삼고, 977년(고려 경종 2)에 원종대사혜진탑을 건립하는 등 고달사는 고려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고, 이 시기에 크게 사세를 떨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종대사 입적 후 법통은 삼중대사 흔홍이 이어받고 이 밖에 중대사 동광, 행근 등 500여 명의 문도가 있을 정도로 융성하였으며, 훗날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하고, 1101년(고려 목종 4) 고달, 영암, 거돈, 지곡 등 5대 사원의 문도 및 제자 1,300여 명이 천태종에 흡수될 때까지 지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고려 말까지 고달사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1530년(중종 9)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비로소 등장한다. 고달사가 언제 폐사되었는가에 대한 기록은 확실하게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799년(정조 23)에 씌어진 『범우고』에 비로소 고달사가 폐사지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적어도 18세기 말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재 이곳에는 국보 제4호 고달사지 승탑과 보물 제6·7·8호로 각각 지정되어 있는 원종대사탑비, 원종대사탑, 고달사지 석조대좌 등이 남아 있는데, 이들 석조유물들은 하나같이 넘치는 힘과 호방한 기상이 분출하는 가운데 화려하고 장엄한 기운을 간직하고 있다. 한편 고달사지 내에 있던 원종대사의 비와 쌍사자석등(보물 제282호)은 원래의 위치에 있지 않고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되어 있다.
ㅇ 여주 고달사지 승탑(국보 4호)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승탑으로 높이는 3.4m이다.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의 고달사지에 위치한다. 승탑에 딸린 탑비(塔碑)가 없어 주인공을 알 수 없지만, 각 부의 조각 수법과 양식 등으로 보아 같은 사역에 있는 원종대사(元宗大師, 968년 입적, 광종 9)의 묘탑(墓塔)인 혜진탑(慧眞塔) 보다 앞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설에 따르면, 868년(경문왕 8)에 입적한 신라 말의 고승 원감(圓鑑)의 묘탑(墓塔)이라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ㅇ 원종대사탑(보물 6호)
원종대사 찬유(869~958)가 958년 입적하자 광종은 곧바로 김정언(金廷彦)에게 비문을 찬하도록 하고, 966년경에는 탑비 건립 공사가 시작되었다. 비문이 975년경에 완성되자 이정순(李貞順)이 각자하였으며, 977년에 완공되었다. 1915년 귀부위에 얹혀 졌던 비신은 떨어져 8조각으로 깨어진 것을 현재 여주박물관으로 옮겨져 보관하고 있다.
ㅇ 원종대사탑비(보물 6호)
이 탑비는 고달사지 사역 내에 위치하고 있다. 이수의 제액부에 주인공이 음각되어 있으며, 비문이 전하고 있어 건립 시기를 분명하게 알 수 있는 귀부와 이수이다. 그리고 귀부 외곽으로 초석과 긴 사각형 돌이 구획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비각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비문의 기록에도 비각이 건립되었던 사실을 전하고 있다. 주인공인 원종대사 찬유는 탑 비문에 의하면 958년(고려 광종 9) 8월 20일 고달사에서 입적한다. 그러자 광종은 사신을 보내 조문하고 이어서 시호와 탑호를 내리고 진영(眞影)을 조성하게 한다. 그리고 국공(國工)을 파견하여 석조부도와 탑비를 건립하게 한다. 그런데 비문 음기에 의하면 탑비는 975년(고려 광종 26) 10월에 세웠는데, 건립 공사는 966년(고려 광종 17) 시작하여 977년(고려 경종 2)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비각 건립까지 모든 공사가 완료된 시기가 977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비문이 각자되어 탑비가 세워진 시기는 975년으로 보인다.
따라서 원종대사 찬유가 958년 입적하자 광종은 곧바로 김정언(金廷彦)에게 비문을 찬하도록 하였으며, 966년경에는 탑비 건립 공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비문이 975년경에 완성되자 이정순(李貞順)이 비문을 각자하였으며, 각자가 완료되자 비각을 건립하기 시작하여 977년에 완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
< 원종대사탑비, 보물6호 >
ㅇ 참 고 3. 여주 고달사지 발굴조사 : 출처 여주시사(驪州市史)
약 12,000여 평에 달하는 웅장한 사역규모와 사역 내에 남아있는 다수의 국보급 문화재는 고달사지의 높은 위상을 말해주고 있다. 관련 학계에서도 일찍부터 고달사지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높은 관심을 보여, 1993년 7월 23일 사적 제382호로 지정(지정면적 41,035㎡)하였다.
그러나 사역 내에 민가와 여타 건물이 들어서 마을을 형성하고, 일부는 경작지로 변도됨에 따라 절터의 파괴가 진행되어 갔다. 이에 경기도와 여주군은 사역의 정비와 보존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1998년에 고달사지의 정비 및 보존에 필요한 기초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사역 전체에 대한 시굴 및 발굴조사를 경기도박물관에 의뢰하였다.
이후 1차 시굴 및 발굴조사 결과 유적 범위가 당시 주변의 민가지역까지 확장될 가능성이 제기됨에 따라 여주군에서는 주변 민가를 매입, 철거한 후 정밀발굴조사를 의뢰하였다. 이에 경기도박물관과 기전문화재연구원은 1999년 9월부터 2000년 6월까지 공동으로 2차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10세기말 이후의 건물지로 추정되는 15여동 건물지를 확인함에 따라 가람 배치에 대한 기초자료를 수집해 나갔다.
이러한 1·2차 발굴조사의 성과를 당시 정치상황의 변화와 연결하여 고달사지의 가람 변화 및 고고미술사적 자료를 연대기적으로 고찰하여 조사성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신라하대는 현욱·심희·찬유 등의 유학 전 활동기로 이때의 고달사는 신라하대의 사회적 혼란기에서 대대적인 경영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 사역은 석불대좌가 있는 1건물지와 그에 연결되는 1-1건물지가 중심인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리고 1건물지 전면에는 추정 석등지와 추정 탑지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결국 남향하는 법당(1건물지)을 중심으로 전면의 축선상에 탑과 석등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법당과 연결되는 승방(1-1건물지)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시기 유물은 보상화문·6엽단판연화문·8엽단판연화문 등의 수막새기와가 특징이다.
고려전기는 찬유가 활동하던 때로, 광종의 적극적인 후원과 지원을 받으면서 사세가 급성장하여 부동선원으로 자리 잡은 시기이다. 이 시기는 전엽, 중엽, 후엽으로 세분할 수 있다.
우선 전엽은 찬유의 생존시기로 국가적인 지원으로 사세가 날로 번창하던 시기이다. 이시기에 1건물지를 중심으로 하는 2건물지의 중단구역과 가-2·가-3 건물지를 중심으로 하는 하단건물지가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엽은 찬유 사후의 시기부터 천태종에 흡수되기 이전까지의 시기이다. 이때에 원종대사혜진탑의 비각이 세워지고 이 비각을 중심으로 하는 상단구역이 조성되었다. 즉 8건물지, 11건물지, 3건물지 등이 이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후엽은 고달사가 법안종에서 천태종으로 흡수되는 시점이다. 이 시기에도 고달사는 기존의 사역을 유지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이 고려전기의 유물은 12엽세판연화문·16엽세판연화문으로 대표되는 수막새기와와 강진에서 번조된 상품자기들이 대표적이다. 고달사 출토유물은 이 시기의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 시기의 유물은 제5건물지를 제외한 전체지역에서 고르게 출토된다.
고려중기는 무신집권기로 고려사회가 동요하기 시작하고, 불교계에서는 행동불교인 선종이 무신정권의 비호를 받으면서 두각을 나타내는 시기이다. 이즈음 고달사는 국가적인 지원이 끊기면서 급속하게 쇠락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여주를 본향으로 하는 이규보의 글에 고달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사실에서 단적으로 입증된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해당되는 상품청자가 보이지 않는 사실과 함께 해당시기 유물의 출토량이 급격히 줄어드는 점도 위의 추측을 뒷받침한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 시기에 귀목문이라는 특징적인 형태를 지닌 막새기와가 본격적으로 사용된다.
마지막으로 고려후기·조선전기는 원간섭기를 거치면서 고달사의 사역은 매우 축소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5건물지를 중심으로 해당시기의 유물들이 집중적으로 출토되는 사실로 미루어 중단구역의 북편을 중심으로 사역의 명맥은 유지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성립과 함께 불교에 대한 억불정책이 자행되면서, 고달사의 사세도 극도로 피폐되었을 것이며, 결국 16세기 성리학이 국가이념으로 굳건히 자리잡는 시점을 기하여 고달사는 폐사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시기의 유물로는 분청자를 중심으로 하는 도자기와 범어문·운룡문으로 대표되는 조선기와가 특징적이다.
3차 발굴조사는 2000년 11월부터 2001년 9월까지 진행되었다. 이 조사는 2차 조사에서 조사하지 않았던 가-2건물지의 동쪽 부분을 확인함으로써 가-2건물지와 고달사지쌍사자석등 자리를 중심으로 하는 영역의 건물배치를 확인하는 것에 비중을 두어 진행하였다. 또한 조사지역 내에 유구의 유무를 확인하고, 이를 토대로 추후 해당 지역에서의 전면적인 발굴조사를 위한 기초자료를 수집하는 조사였다. 3차 발굴조사의 성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3차 조사를 통하여 가-2건물지와 가-3건물지 동쪽 기단이 노출되어 각 건물지의 규모가 확인되었으며, 출토유물을 통하여 가-2건물지와 가-3건물지의 사용시기 및 상호관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둘째, 가-2건물지는 정면 5칸 측면 2칸으로 구성되었으며, 건물지 정면의 중심 축선상에 고달사지쌍사자석등지가 위치하는 것이 확인됨으로써 가-2건물지와 석등지의 배치관계(1금당-1석등)가 명확해졌다.
셋째, 가-2건물지 동쪽 지역에서 건물지가 추가로 확인되어 가-2건물지를 중심으로 하는 영역의 건물배치에 대한 연구의 발판이 마련되었다. 이 건물지는 장축 33m 이상의 남북으로 긴 형태로 노출되었으며, 주변에 크고 작은 초석이 어느 정도 정형성을 가지고 배치되어 있다.
출토유물중 우선 기와류로는 수키와와 암기와 외에 수막새, 암막새 등의 막새기와와 “高達寺”명 기와, 귀면와, 치미 전돌 등이 출토되었다.
토기는 회청색 혹은 회흑색의 경질이 대부분이지만 좀더 이른 시기로 추정되는 연질의 회색토기편도 몇 점 발견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의 이화문토기편도 1점 수습되었다.
자기류는 청자, 분청, 백자가 고루 출토되었는데, 백자류는 표토층 및 상부퇴적층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었고, 청자와 분청은 상대적으로 유구가 노출되는 면에서 많이 출토되어 시기적 차이를 나타낸다.
금속유물은 철제 꺾쇠, 철부, 철도자편, 철촉, 철제, 고리 등이 있으며, 청동제 방울도 1점 수습되었다. 이외에도 석제 벼루편 2점이 출토되었다.
4차 발굴조사는 2002년 8월부터 2003년 7월까지 진행되었는데, 조사 결과 건물지, 축대, 담장지, 석조 등이 발굴되었으며, 이와 관련하여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들을 토대로 조사성과와 의의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문헌에 부합되는 유구의 존재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즉 1·2차 발굴조사 결과 15여동의 건물들이 모두 10세기말 이후의 건물지들로 조사됨에 따라 문헌에서 보이는 고달사지의 초창기(8세기)와 사세확장기(9~10세기)대의 유구가 발견되지 않았는데, 4차 조사지역에서 8세기 이후부터 12세기에 걸쳐 유구 및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초창가람의 권역이 현 조사구역 내에 존재할 가능성을 제시했고, 이에 따라 가람 배치 변화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둘째, 건물지간 위치 관계 및 동선 처리, 석조물은 각 영역의 성격을 추정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우선 축대와 가-1담장석렬, 계단지로 구성된 영역은 사찰 내외와 사찰 내 각 영역간의 동선의 흐름을 조절해 주는 전이공간으로 작용한다. 다음 가-1·2·3건물지 및 이로 둘러싸인 마당은 조용한 예배 공간 및 수행 공간이 되도록 계획한 것으로 판단되며, 가-4건물지는 수조와 함께 그 동쪽 영역으로 생활공간인 요사채 영역과 배수시설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셋째, 조사구역의 동쪽 전면에 대형건물지가 노출됨에 따라 이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영역이 구성될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라 추후 확장된 사역과 가람 배치에 대한 조사 및 해석이 요구된다.
출토유물은 우선 기와류로는 연화문·귀목문 수막새와 당초문·인동당초문·초엽문 암막새가 출토되었다. 명문와로는 “高達寺[艽]”, “丁巳生”, “祖十口七 太戶子十口”, “寺天”, “卍”자가 적힌 평기와가 출토되었다. 전류로는 건물지에 따라 방형전, 장방형전, 제형전 등이 출토되었다.
토기류는 가-1건물지안에서 일부 회백색 연질토기편이 출토되었을 뿐, 조사지역 대부분 회청색 또는 회흑색의 고려시대 경질토기편이 차지하고 있다. 그 기종은 호, 병류가 주종을 이룬다.
자기류는 청자가 가장 많이 출토되었으며, 후대 민가 유구가 포함된 층에서 백자편이 주류를 이루었다. 청자는 순청자가 주류를 이루었고, 기종은 완, 잔, 접시, 대접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철제유물은 대부분 철정이 차지하고 있으며, 이 밖에도 문고리, 철겸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가-2건물지 정면 기단열 밖에서 철마 2점이 나왔다. 청동제 유물로는 청동수저와 청동편들이 가-1건물지의 안팎에서 출토되었다. 동전은 2점이 출토되었는데 하나는 가-1건물지 남쪽 기단석렬 밖에서 출토된 ‘원풍통보(元豊通寶)’로 원풍은 송나라 신종대(神宗代) 연호로 1078년~1085년까지 8년간이다. 다른 하나는 ‘상평통보(常平通寶)’로 가-1축대의 남쪽에서 출토되었다.
기타유물로는 석제 벼루편 2점이 가-3건물지 안팎에서 출토되었다. 또한 화엽문의 귀꽃이 쌍사자석등 지대석에서 동쪽으로 약3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출토되었는데, 이는 쌍사자석등 옥개석의 귀꽃으로 추정된다.
5차 발굴조사는 2004년 3월부터 11월까지 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동쪽 시내에 인접하여 사역의 경계를 보여주는 석렬이 노출되었으며, 그 앞(북)쪽에는 요사채로 추정되는 건물지 6동이 노출되었는데, 이 가운데 구들과 마루의 흔적이 남아있는 건물지도 포함되어 있다. 이 밖에도 보완 조사지역에서 탑지 1기가 추가로 발굴되어, 가람배치의 변화를 읽는 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출토유물은 각종 막새류, “高達寺”명 명문기와, 장방형전과 제형전 등의 전류가 출토되었다. 도기류는 대부분 회청색 또는 회흑색의 고려시대 경질토기편이 차지하고 있으며, 기종은 호, 병류가 주종을 이룬다. 자기류 중에는 고려청자가 주류를 이루었고, 기종은 완, 접시, 대접이 상당수를 차지한다. 금속유물에는 특히 청동향로와 청동합 등 청동제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이 중 사자머리가 조각되어 있는 향로다리는 몸체편에서 분리되어 결실된 상태로 3점이 출토되었다. 또한 가-6 건물지 밖에서는 ‘희령원보(熙寧元寶)’ 1점이 출토되었는데, 이 유물은 고려 문종대(1046~1083년 재위)에 건물이 사용되었음을 추정케 해준다.
이상 고달사지에 대해 1998년부터 2004년까지 총 5차에 걸쳐 발굴조사된 조사성과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고달사지에 대한 발굴조사는 2005년 현재 6차발굴이 진행중에 있다. 1980년대부터 2004년까지 고달사지에 대한 연도별 사업 및 발굴조사 성과를 정리하면 (표 1)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