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누어 가질 때 인간이 된다
이따금 고속도로에서 관광버스와 장의차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달리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이런 때 우리는 생과 사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뻣뻣하게 굳어버린 주검으로 차에 실려
어디론지 묻히러 가고 있는 그도, 살았을 때는 관광버스를
타고 생의 기쁨을 노래하면서 즐거운 여행을 떠나기도 했을 것이다.
그는 장의차와 관광차가 휴게소에 함께 가지런히 쉬고 있을 때에도
자기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남의 일로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언젠가 우리 모두가
반드시 맞이해야 하기 때문에 결코 남의 일일 수 없다.
우리 내면에서도 생과 사가 그처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순간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마르틴 부버는 그의 <인간의 길>에서 하느님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렇게 묻는다고 했다.
너는 네 세상 어디에 있느냐?
너에게 주어진 몇몇 해가 지나고 몇몇 날이 지났는데,
그래 너는 네 세상 어디쯤에 와 있느냐?”
언젠가 이 세상을 하직해야 할 우리들은
저마다 자신의 목소리로 그와 같이 물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한스러운 일도 적고 생에 대한 미련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죽음이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만약 죽음이 없다면 사람은 또 얼마나
오만하고 방자하고 무도(無道)할 것인가.
죽음이 없다면 생 또한 없을 것이다.
죽음이 우리들의 생을 조명해주기 때문에
보다 빛나고 값진 생을 가지려고 우리는 의지적인 노력을 기울인다.
살인, 강도, 대량 학살, 고문, 폭행 등
비인간적인 범죄가 날이 갈수록 여기저기서 늘어만 가고 있는
현대사회, 때로는 우리들의 의식이 마비될 정도로 그 도가 심각하다.
1999년까지 갈 것도 없이,
인간의 끝이 아닌가 싶도록 막막할 때가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웃의 불행에 대해서 모른 체하지 않고
알게 모르게 따뜻한 손길을 펴는 사례를 보면서
아직도 우리는 인간이구나, 그래도 인간은 건재하구나 하고
잃었던 인간의 궁지를 되찾게 된다.
이제는 고전적인 표현이 되어버렸지만,
우리들은 서양의 물질편중의 과학 문명과 그 기반 위에 선
그릇된 자본주의, 그리고 서구적인 이데올로기에 의한
계급의식과 대립 사상 등으로 인해
인간 존재가 말할 수 없이 위협을 받고 있다.
일찍이 동양에서는 서양에서와 같은 계급의식이나
대립 항쟁의 양상은 별로 없었다.
관용과 화해로써 인간관계가 이루어졌다.
오늘 우리들은 새삼스럽게,
그렇다. 정말 새삼스럽게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원초적인 물음 앞에서 마주 서게 되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인간’은 끊임없이 회복되어야 한다.
인간이 곧 우리 문화의 본질이고,
인간만이 우리 공동체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인간이 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그가 하는 행위에 의해
인간이 될 수 있고, 혹은 비인간으로 타락할 수도 있다.
오로지 인간다운 행위에 의해서 거듭거듭 인간으로 형성되어간다.
그러면 인간다운 행위란 무엇일까?
우선 나누어 가질 수 있어야 한다.
타인과 함께 나누어 가져야 ‘이웃’이 될 수 있고,
인간적인 관계가 이루어진다.
사람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관계를 통해서 비로소 사람이 될 수 있다.
우리들의 삶이 곧 관계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관계에 의해 존재하고
우리들의 관계는 인간을 심화시킨다.
흔히 베푼다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말인 것 같다.
원천적으로 자기 것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이 우주의 선물을, 우리에게 잠시 맡겨진
그 선물을 함께 나누어 가지는 것이지,
결코 베푸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나올 때 누가 가지고 나온 사람 있던가?
또한, 살 만큼 살다가 인연이 다해 이 세상을 하직할 때,
자기 것이라고 해서 무엇하나 가지고 가는 사람을 보았는가?
물질적으로 여유가 있는 부자만 나누어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가난한 사람도 얼마든지 나눌 수 있다.
나누어 가지는 것이 어찌 물건만이겠는가.
부드러운 말 한마디, 따뜻한 눈길,
함께 걱정하고 기뻐하는 것도 나누어 가짐이다.
그러니 많이 차지하고 있다고 해서 부자가 아니라
많이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부자다.
즐거운 마음으로 나누어 가질 때,
그 즐거움 자체가 보상이다.
마지못해 싫은 생각으로 준다면
그에게는 그 싫은 마음이 곧 그 갚음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기왕에 나눌 바에야
즐거운 마음으로 선뜻 나누어야 한다.
기쁨이 없는 봉사는 봉사하는 사람에게도,
봉사 받는 사람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
한 걸음 나아가 신문이나 방송에 이름 석 자 내려는 생각도 없고,
어떤 의무감에서도 아니고, 덕행으로 여기는 생각조차 없이
무심히 나눌 수 있다면,
그런 사람들의 손을 통해 하느님은 말씀하시고
그들의 뒤에서 서서 부처님은 빙긋이 웃으실 것이다.
마치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가듯 무심히 하는 일이 우리를 눈뜨게 한다.
봄바람이 메마른 가지에 잠든 움을 틔우듯이.
<금강경>에서, “어디에도 집착함이 없이
그 마음을 내야 한다(應無所主而生其心).”고 한 말이나,
“모든 생각의 자취에서 벗어난 사람을
부처라고 할 수 있다(離一切相 卽名諸佛).”는 말은 바로
무심히 행하는 일을 기리는 가르침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곧 주는 일이요, 나누는 일이다.
주면 줄수록, 나누면 나눌수록
넉넉하고 풍성해지는 마음이다.
받으려고만 하는 사랑은
곧 포만하여 시들해지게 마련이다.
우리들 마음속 깊이 깃든 사랑의 신비는 줄 때에만 빛을 발한다.
그러니 우리가 누구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에 깃든 가장 아름답고
어진 인간의 뜰을 가꾸는 일이 된다.
사람의 심성은 마치 샘물과 같아서 퍼낼수록 맑게 고인다.
퍼내지 않으면 흐리고 상한다.
많이 줄수록 많이 받는다.
주는 일 그 자체가 받는 일이므로,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주고 싶어줄 뿐이다.
사람은 이와 같은 행위를 통해
우리들 안에 잠들어있는 인간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삼국유사> 권5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신라 제40대 애장왕 시절, 정수(正受)라는 스님이
황룡사에서 머물고 있었다.
추운 겨울날 볼일이 있어 삼랑사에 갔다가
해가 저물어 돌아오는데 눈까지 내렸다.
천엄사 앞을 지나오려는데 거기 한 여자 거지가
맨땅 위에 해산하여 얼어 죽을 판이었다.
스님은 이 광경을 보고 가엾이 여겨
그 여인을 온몸으로 안아주었다.
한참을 지나니 여인이 소생하였다.
그러자 그는 자기 옷을 벗어
그 어미와 아기를 덮어주고 벌거벗은 채
황룡사에 달려와 거적으로 몸을 덮고 밤을 새웠다…….”
추위를 나누어 가지는 일을 통해서 남도 살리고
자기 안에 잠들어 있는 ‘인간’도 함께 불러일으킨 것이다.
자기 자신과 타인을 하나로 보지 않고서는 이런 일은 하기 어렵다.
인간관계를 수직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수평적인 유대로 보아야만 자타의 차별을 극복할 수 있다.
이런 나누어 가짐을 무연대비(無緣大悲)라고 한다.
이런 사랑을 통해서 사람은 거듭거듭 인간이 되어간다.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그의 정신적인 자서전인
<희랍인에게 이 말을>에서 나누어 가지는 의미를
자신의 기도문으로써 이렇게 말한다.
“주여, 지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면서
제가 어찌 천국의 기쁨을 즐기겠습니까.
저주받은 자들을 불쌍히 여겨 천국으로 들여보내든가,
아니면 저를 지옥으로 보내어 고통받는 그들을 위로하게 하소서.
저는 지옥으로 내려가 저주받은 그들을 위로할 질서를 세우겠나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없다면
저는 지옥에 남아 그들과 함께 고통을 나누겠나이다.”
옛날 어떤 선사는 항상
‘ 나무 지옥대보살(南無 地獄大菩薩)’을 불렀다고 한다.
몸소 지옥으로 들어가겠다는 발원이다.
이웃이 겪는 고통을 함께 나누어 가지면서
그들을 건져내겠다는 비원(悲願)에서였으리라.
현대인들은 대부분 덕을 쌓으려고 하지 않는다.
눈앞의 이해관계에만 급급한 나머지
인간의 뜰을 가꾸려고 하지 않는다.
인간의 뜰은 곧 덕이다.
덕은 자기희생으로 쌓인다.
덕행은 영혼의 아름다움, 인간을 한없이 높여줄 수 있는 디딤돌이다.
자기 자신과 가족을 아끼고 사랑하는 일쯤은 짐승도 할 수 있다.
사람이기 때문에 낯선 타인까지도 사랑으로
그들의 일에 관계를 가지려는 것이다.
남을 사랑함으로써 자기중심적인 아집에서 벗어날 수 있고,
‘ 닫힌 내’가 ‘활짝 열린 나’로 눈을 뜰 수 있다.
내 마음이 열려야 사람 속에서 인간을 캐낼 수 있고,
중생 속에 잠든 불성을 일깨울 수 있으며,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느님을 볼 수 있다.
한 개인 속에 깃들여 있으면서도 개인보다 더 큰 존재,
자기중심이 아니라 나와 남을 하나로 보는
인간 정신이 우리를 인간의 길로 이끈다.
개인은 한정된 존재다.
특정한 나라에 살면서 특수한 문화, 독특한 사회, 각기 다른 종교에 소속된다.
그러나 ‘인간’은 그런 국지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는 어디에나 있다.
그러니 우리는 부분이 아니라 전체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아무리 미미하고 덧없는 개인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부름에 따라
공동체의 사업인 나누어 가지는 일에 참가하면
인간으로서 불멸의 본질이 구현되고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된다.
따로따로 보면 개인은 한 사람씩 죽어가지만,
뜻을 함께 나누어 가질 때에는 인간이 되어 영원히 멸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들의 본질인
그 인간을 찾아내고 드러내야 한다.
진정한 인간의 집합만이
이 지구상에 이상적인 세계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1983 ]
無事太平
이보게 차(茶)나 한잔하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