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성령 강림 대축일>
새 계명, 그 사랑의 보호자
‘성령 강림 대축일’, 교회의 공식적인 부활 축제는 성령 강림으로 끝난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 강림’의 의미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선명하게 드러나듯이, 죽음과 부활의 의미는 성령 강림을 통하여 완결된다. 표현을 달리하자면, 말씀이신 하느님께서 세상에 오신 까닭은 궁극적으로 성령 강림을 통하여 온전한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모양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아버지에 대하여 알려주셨다.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계시’가 의미하는 바를 찾아내고 이해하는 것이 교회인 우리에게 중요한 몫이라면, 성령 강림을 통해 드러나는 계시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완결의 의미가 있다 하겠다.
하느님은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오신 걸까?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은 무엇을 ‘계시’하셨고, 무엇을 위하여 ‘계시’하셨는가? 아무런 죄 없는 자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에게 ‘계시’하는 바는 무엇이고,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예수님은 왜? 이 모든 일을 하셔야 했는가? 무엇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진정 바라시는 교회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과 일치하는가? 일치하는 것은 어떤 것이고,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 어떤 것일까?
성령 강림으로 부활 시기는 끝이다. 부활의 의미는 성령 강림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당신의 제자들은 물론 그들에게 세례를 받게 될 미래의 제자들에게 성령의 활동이 들불처럼 일어나기를 바라신 것이다. 당신의 부활을 시작으로 이제 온 세상에 성령의 불이 그리스도인들을 통하여 들불처럼 번져나가길 바라신 것이다. 무엇을 위한 들불일까? 그것은 분열과 갈등으로 갈라선 이들과 우리 자신의 내적분열이 통합되고 하나가 되어 서로 일치하기를 위한 것이었다.
세상은 아담의 원죄를 시작으로 하느님께 대적해왔다. 죄악은 하늘 높이 치솟고, 인간은 서로 갈라지고 다투는 분열에 분열을 반복한다. 하느님께서는 물로 세상을 심판하셨고, 예언자들을 보내어 사람들을 달래기도 하셨다. 모든 노력은 하느님의 자기 계시와 함께 이루어졌는데, 이를 우리는 구원사라 부른다. 마침내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계시에 대한 정점이요, 구원의 완성이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이 당신의 아들을 알아보기를 기대하셨다. 세상은 그를 처참하게 죽였지만, 아들은 아버지께 끝까지 순종하심으로서 사랑을 완성하셨다. 아버지는 아들을 죽음에서 건져내시고 다시 살리셨다. 그리고 아들을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아들을 믿는다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께 순종할 수 있었던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세상 사람들을 사랑한 아들의 마음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것이 새 계명으로 드러났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
이 모든 것이 성령 강림을 통하여 실현된다.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지만, 성령은 불꽃 모양으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사도 2,1 이하) 성령이 ‘무리’가 아닌 ‘각 사람’ 위에 내렸다. 교회는 각자의 달란트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몸의 지체들이 통합되는 공동체지, 일사불란하게 떼 지어 움직이는 무리가 아니다. 성령은 협조자요, 보조자다. 주체자가 아니다. 주체자는 누구인가? 바로 ‘나’다. 바로 ‘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끝까지 순종하신 ‘주체’ 여셨던 것처럼 우리 ‘각자’가 주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에 ‘개입’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돌보시지만 간섭하지 않으신다. 우리의 선택을 존중하시고, 우리의 의지를 가벼이 여기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강요나 위협으로 사랑할 수 없는 법이다.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사랑하셨듯이, 우리 또한 당신의 사랑을 선택하고 믿으며, 그 사랑 안에 머물기를 기다리신다.
성령의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시다. 성령의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사람들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시다. 성령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머물고 그 사람 안에서 활동하신다.(1코린 12,3 이하) 성령은 통합의 정신이다. 각자지만 하나로 통합되는 것이다. 이 통합에는 ‘섬김의 원리’가 작동한다. 무엇을 섬기는 것인가? ‘진리’를 섬기는 정신이다. 세상의 진리가 아니라 하느님의 진리다. 하느님의 진리는 정의와 사랑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정의와 사랑을 떠나서 자신의 존재성을 구현할 수 없는 이유다. 세상도 정의와 사랑을 외친다. 예수님께서 계시해주신 하느님을 우리가 제대로 알지 못하면 세상의 혼돈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성령의 선물이 있다. 인간의 지성과 관련된 슬기(sapientia), 지각(intellectus), 의견(consilium), 지식(scientia)과 인간의 의지와 관계가 깊은 용기(fortitudo), 효경(pietas), 두려움(timor)으로 성령 칠은(七恩)이라고도 한다. 물론 이것은 상징적인 숫자에 불과한 것으로 성령의 선물은 무궁무진하다.(가톨릭사전, 성령칠은) 우리에겐 이러한 성령의 도움이 마련되어 있다.
왜일까? 무엇을 위하여 성령이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이토록 살피시는가? 요한복음 21장 15절 이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시면서 “내 어린양들을 잘 돌보아라!”라고 당부하신다. 어린양, 양은 우리 가운데 보잘것없는 이들, 가난하고 비천한 이들, 고아나 과부 등 쉽게 착취의 대상이 되는 약자들이다. 어쩌면 이들은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이겨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직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이겨내는 길을 찾지 못한 경우다. 예수님께서는 이들도 모두 하늘나라의 자녀로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기를 바라신다. 모든 민족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께서 걸으신 길에서 각자의 길을 찾고, 그 십자가의 사랑으로 하나 되기를 바라신다. 바로 이 일, ‘만민의 복음화’라는 과업을 위하여 우리를 그토록 살피신 것이다.
성령은 진리이시다. 사기꾼도 의기투합할 줄 알고, 도둑놈들도 일치단결한다. 세상의 악도 단결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 그러나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치는 그러한 일치와 다르다. 성령께서 이루시는 일치는 ‘진리 안에서’의 일치다. 우리가 각자 자기 주체성 안에서 살아간다 해도, 우리 각자 진리 안에 머물면, 우리는 진리를 통하여 ‘일치’할 수 있다. 이것이 가톨릭교회의 보편성이요, 다양성의 원리다. 우리는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무례하게 굴지 않는다. ‘일치’라는 명분으로 ‘동조’하기를 요구하지 않으며, 다르다는 이유로 그를 내치지도 않는다. 성령의 지혜는 우리의 지성 저 너머에까지 높기에,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간의 나약함을 극복할 수 있다. 교회는 성령의 교회이기에 인간의 나약함이나 죄악으로 무너지지 않는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 다시 오시어 구원을 완성하실 때, 그때 교회는 하늘나라로 완성될 것이다.
성령이신 하느님께서 ‘너희는 서로 사랑하여라!’라는 새 계명을 위하여 오셨다. 온 인류가 참된 생명으로 나아가는 길, 그 구원의 길, 그 유일한 길인 ‘새 계명’을 위하여 성령께서 오신 것이다. 여전히 차별과 전쟁, 착취와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에 ‘사랑’이 사랑으로서 온 인류를 구하는 유일한 길이기에 그 사랑을 위하여 보호자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셨다. 우리의 사랑을 돌보시는 하느님, 성령이시여! 어서 오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