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의 아름다움, 우주의 틈새’를 탐문하는 생태시인
- 배한봉 시인론
1. 우주의 틈새 찾기
2020년 전세계를 불안과 공포에 떨게 하고 있는 ‘코로나19’가 한창이다. 8월 20일 현재 지난 4월 이후 잠잠하던 수도권의 확산세가 커지면서 가을 대유행의 전조라는 인식 속에 심각성이 증대되고 있다. ‘새로운 역병의 시대’에 대한 다양한 진단과 대처 방안의 모색 속에서 자연 생태계의 회복을 알리는 ‘코로나의 역설’을 보며 ‘지구촌의 문제아’였던 인간의 오만함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코로나 시대에 처한 이래로 생활 방역과 함께 ‘사회적 거리두기’가 7개월 가량 이어지면서 많은 국민들이 피로감에 젖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올해는 54일에 걸친 긴 장마로 인해 한반도에서 파란 하늘을 대면하기 어려웠을 정도로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체감하는 날들이다.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8월 20일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주 ‘데스밸리’의 55도 폭염보다는 못하지만 한반도 남단은 35~40도에 육박하는 폭염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
사람들 사이의 즐거운 만남을 앗아간 ‘비대면 접촉’의 시대, 배한봉 시인과의 만남을 떠올려본다. 이미 고인이 된 김충규 시인이 운영하던 시 전문계간지 『시인시각』의 편집주간을 맡았던 시인이 어느날 함께 편집위원을 맡자고 제안을 했었다. 그때 이형권, 김유중 선생과 함께 편집위원 직무를 수행하면서 자연스레 서정시의 세계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후 시인과 나는 편집회의를 진행하면서, 학교 행사나 문학 관련 일을 통해 적어도 1년에 3~4회 이상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시인을 알고 지낸 지 15년 가량 된 셈이다. 그럼에도 내 못난 성정 탓에 우리는 여전히 데면데면한 사이다. 물론 예나 지금이나 처음 만나면 시인은 특유의 경상도 사투리로 ‘오 선생~ 반갑소~’ 하면서 구수한 살가움을 전해온다.
“아이고, 오 선생~ 오랜 만이오, 잘 지내시는가 모르겠네~”
“네, 안녕하세요~ 저는 뭐 그럭저럭 잘 견디면서 지냅니다. 형님은 어떠세요?”
“나요~ 나도 뭐, 항상, 잘 지내지요~ 우리 언제 쏘주 한 잔 해야 될낀데~ 그죠?”
이런 식의 안부 인사를 시작으로 둘이든 더 여럿이든 본격적으로 이런저런 일상과 학교와 주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작년에는 경희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 금요일 오후에 우연히 만나 차를 한 잔 마시며 담소를 나눈 것이 가장 최근의 만남이다. 정문 근처의 환한 카페에서 어느새 환갑이 가까워진 배한봉 시인의 주름이 깊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50이 넘은 나도 주름이 늘었으니 불행인지 다행인지 세월이 우리를 비껴가지 않았음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시인은 가장 최근의 시집인 다섯 번째 시집 『주남지의 새들』 (2017)에서 「시인의 말」을 통해 “아름다움이 태어나는 곳은 다가가는 만큼 멀어진다.”면서 시의 운명이 생명의 본질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학에 닿아 있음을 토로한다. 그리고 “인간 삶과 자연의 아름다운 조화, 생명력의 본질적 순수를 향한 도정”에 그의 시가 자리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지금 그 소망의 언저리에 그의 시가 있다.
2. 대자연을 섬기는 우포늪 흑조(黑鳥)
첫시집인 [흑조](1998)에서 시인은 “기억의 주렴을 펼쳐”(「웃개나루」) 생의 추억을 갈무리하고 도도한 정신으로 ‘검은 새의 비상’을 노래한다. 뒤이어 ‘우포늪 생태보고서’라고 해도 좋을 『우포늪 왁새』(2002)에서는 한국 생태시의 한 진경을 펼쳐보인다. 우포늪을 배경으로 소리꾼 왁새의 영혼을 추적한 ‘우포늪 왁새’(「우포늪 왁새」)나 “우주의 검은 씨”를 품은 ‘까치밥’(「까치밥」) 등의 다양한 자연물을 통해 우주적 경이로움을 조망하고 성찰함으로써 ‘생태시인 배한봉’을 대내외에 천명한다. 세 번째 시집인 『악기점』(2004)은 ‘대자연의 조율사’(「악기점」)로서 과수농사를 지으며 일상과 노동과 자연이 한몸으로 어우러져 생명 서정의 소리를 집약해낸다. 네 번째 시집인 『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2006)에서는 자연의 지혜를 비밀스런 시의 언어로 감지하여 신성한 타자로서의 자연이 내포한 다면적 은유를 풀어놓는다.
1) 산으로부터 배우다
시인은 산과 나무와 숲과 꽃과 달과 계절 등 자연으로부터 생의 자리를 반성하는 법을 배운다. 생장소멸을 순환하는 대자연 앞에서 시인의 굴곡진 생은 겸허를 체득함과 동시에 생기를 제공받는 것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타락한 세속 도시의 세계에서 성(聖)스러운 원융(圓融)의 자연을 지속적으로 응시하고자 한다. 그러한 태도는 인생의 성찰로 이어져 자연이 제공하는 고요한 희망의 전언을 되새기게 한다.
시인에게 자연은 ‘산’의 형상으로 다가온다. 산이 생의 다면적 진실과 소리의 신성성, 훈기 어린 비경(秘境)을 제공하는 공간이라면, 숲길은 일상에 찌든 현대인의 내면을 정화하는 공간으로 작동한다. 그리하여 “늠름하고 도도한 아름드리 젓나무 숲길을 걸으며”, 시인은 “정직한 사람만이 하늘 깊이 내뻗은 나무 끝 우듬지의 / 떨림”에서 감동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경건함에 압도되”면서도 허심탄회한 젓나무들이 시인의 “슬픔과 눈물, 우쭐거리는 심정도 다 받아주었”음을 체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풍요로운 젓나무 숲길에서 시인은 “곧은 아름드리 마음 하나”(「내소사 젓나무 숲길을 걷다」)를 얻고 싶은 충동을 느끼며 ‘겨레의 속마음’ 같은 젓나무 숲길을 지나 내소사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2) 사계절의 변환 응시
산과 숲으로 향하던 시인의 시선은 꽃과 달과 나무를 거쳐 사계절의 변화를 주목한다. 먼저 봄은 동백꽃과 풀로부터 감지된다. 시인은 봄날이 되어 동백꽃이 “온몸으로 울부짖는 것”을 상상한다. 울부짖는 동백꽃을 보며 “오지 않는 봄이 아파서”(「오지 않는 봄」) ‘화들짝’ 동백꽃을 불러볼 정도로 동백꽃은 봄의 등가물로 인식된다.
여름은 교성 섞인 소리로 생의 뜨거운 숨결을 감지하게 한다. 백주대낮에 ‘맹렬한 여름 교성’ 소리로 우는 매미는 시인에게 “하루를 여러 백 년 살 듯”(「중복」) 치열하게 살아야 함을 가르쳐준다. 또한 열대야 속에서 울어대는 귀뚜라미는 “중대한 비밀 하나 알려주려”(「수상한 일들」)는 존재들로 환기된다.
가을이면 시인은 고요함을 만끽한다. 시인에게 사색의 지대로 의미화되는 본격적인 공간이 가을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단 한 줄의 문장도 없는 백지의 책을 읽는 가을”에 ‘한 잎의 단풍’이거나 ‘단풍이 뛰어드는 호수’이거나 ‘호수에 번지는 파문’이거나 “파문을 물고 하늘로 비상하는 기러기”(「가을이 가려 할 때」)가 되기를 고대한다. 시인에게 가을은 변신의 계절이 되어 다양한 자연적 존재로의 탈바꿈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추위의 계절인 겨울은 역설적이게도 시인에게 따뜻함을 사유하는 공간으로 의미화된다. 시인은 겨울산을 오르다 잔설 속에 핀 노란꽃을 본다. 나뭇가지들이 뿜어낸 훈기에 덮여 ‘외로움의 힘’으로 피어난 노란 꽃을 보면서 시인은 “보일러 없이도 /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게 겨울나는 / 집을 만났”(「잔설 속에 핀 꽃을 기림」)다며 그렇게 따뜻한 집들이 모여 사는 사람의 마을을 그리워하게 된다.
시인은 이렇듯 봄부터 겨울에 이르기까지 적막한 자연으로부터 다양한 생의 소리와 육감과 풍경을 포착한다. 봄의 동백꽃의 뜨거움과 풀의 착근, 여름의 매미의 교성과 나무 연주, 가을의 변신과 풍요로움, 겨울의 온기와 적막 등은 거기에서 피어난 생기로운 현상들이다. 이렇듯 ‘산객’인 시인에게 자연은 도시적 소음의 세계로부터 벗어나 ‘고요’의 참 의미를 일깨워주고 있는 것이다.
3) 동물들로부터 배우다
시인은 나무와 꽃들이 빚어내는 식물들의 세계에서뿐만이 아니라 동물의 세계에서도 성찰적 생의 감각을 배운다. 시인은 늪에서 헤엄치던 ‘쇠물닭 가족의 붉은 이마’를 ‘붉은 신호등’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것이 “여름 늪을 푸른 신호등”으로 여긴 자신에게 “서늘하게 일깨우는 자연의 말씀”(「어떤 등불이」)을 전해주고 있음을 파악한다. 그 ‘쇠물닭의 이마’는 ‘미물, 천지 사방, 우주’라는 상대에 대해 “말하자면, 예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생의 경계로서의 붉은 신호등인 것이다.
시인에게 인생은 ‘파도가 거칠고 높은 바다’로 인식되고, 사람이란 다양한 풍파를 겪으면서도 바다 위를 항해해야 하는 고달픈 존재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시인은 “삶이 아프고 외로운 날” 장생포에 가서 “가슴 가득 동해를 안고 헤엄치는 / 한 마리 힘찬 고래”(「고래를 꿈꾸며」)가 되고 싶어한다. ‘힘찬 고래’는 누추하고 고독한 일상을 견뎌내기 위한 시인의 대리 표상인 것이다.
고래를 욕망하는 시인에게 철새는 주거지를 옮겨 다니는 유목적 존재이기에 시인 자신의 가난한 생을 조감하는 거울이 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객지살이를 하는 기러기 가족들이 “흩어진 밥알 같이 빛나”(「별은 흩어진 밥알 같이」)는 별을 향해 휘어드는 모습을 보며 가난한 생의 모습으로 읽어낸다. 시인에게 기러기떼는 궁핍의 생을 환유하는 등가물로 존재하는 것이다.
4) 자연의 은유 되살리기
시인에게 자연물은 객관적 상관물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시인의 내면으로 스며들어 생의 방향을 상실한 시인에게 삶의 안내표지판처럼 작동한다. 시인에게 자연은 일상의 힘겨움을 치유해주는 공간이어서, 시인을 은유의 세계로 인도하는 숭고적 존재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자연의 은유를 되살리기 위해 성심성의껏 노력할 수밖에 없다.
시인은 늙은 복숭아나무의 싱싱한 꽃눈을 보며, “지치고 아픈 과거시간”(「전지(剪枝)」)의 비가시적이고 복잡하게 뒤엉킨 ‘삶의 곁가지’를 잘라 ‘환한 봄볕’ 아래에서 말려 ‘결실의 시간’을 예비하고자 한다. 그것은 ‘실한 열매’ 한두 개라도 얻기 위해 행하는 ‘삶의 전지(剪枝) 행위’에 해당한다. 자연으로부터 도시적 일상의 반성과 은유적 사유의 힘을 체득한 시인은 “낮에 담아둔 가을볕 한 그릇 냄비에 붓고 / 투명한 바람 줄기 썰어 넣어 된장국을 끓”이는 저녁에 “삶에다 온기 섞섞 비벼”(「된장국이 끓는 저녁」) 자연과 일상을 버무릴 줄 알게 된다.
하지만 자연으로부터 멀어진 도시는 시인에게 망명객의 삶을 강요한다. 자연을 닮고자 해도 시인은 도시적 삶에 길들여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고장 난 수도꼭지’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를 견디지 못해 수도꼭지를 묶어버리고 잠을 청하지만, “가야할 길을 가지 못하는 물의 괴로움을 탓했던 것”(「잠을 두드리는 물의 노래」)이 시인의 ‘괴로움의 원인’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노래하겠다는 새의 부리를 봉해버린 것처럼” 시인은 물의 자연스런 흐름을 막았던 것이다.
5) 대자연의 하수인
배한봉 시인은 대자연의 하수인이다. 자연이 부르면 부르는 대로 그 호흡의 무늬를 보여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대자연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의 크기를 겸손하게 인정한다. 시인이 생태시인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연이 시인의 인식론적 대상으로 외부적 공간에 대상화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내면에 끊임없이 생기 어린 숨결을 불어넣고 있는 존재임을 시로서 육화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연친화적 생태시인의 감각을 보여준다.
무의지적이며 무목적적인 자연은 시인에게 일시적 절망이나 좌절에 빠져 있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시인은 생의 굴곡에 대해 초연하게 대처하며 자연으로부터 희망을 읽어낸다. 시인에게 “나무는 봄을 기약할 때만 살아있는 나무”이기에, 사막 같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 역시 희망이라는 “내일을 기약할 때만” “아름답게 살아있는”(「내일은 해가 뜬다」) 존재일 수 있다. 또한 “아침이라서 해 뜨는 것이 아니라 / 해 뜨니까 아침”인 것처럼 희망을 소유한 존재는 비록 일시적으로 ‘만신창이 영혼’이 될지라도 언젠가는 “눈보라 끝에 꽃봉오리 터트리”(「희망을 위하여」)는 ‘눈부신 홍매’가 될 수 있다고 여겨진다. 이렇듯 시인에게 희망은 삶의 다른 이름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시인은 “창백한 얼굴의 겨울이 / 덜걱거리는 창문에 얼음별을 붙이는 밤”에 “부끄럽지 않은 가장이 되기 위해 밥을 생각하”면서도 “달빛과의 거리를 생각하”며 “아픈 가슴을 훑는 사람”(「길」)이 되어 길을 서성거린다. ‘달빛과의 거리재기’는 희망을 버리지 않기 위해 시인이 ‘한 끼 밥’과 같은 몸짓으로 자연을 응시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자연으로부터 배운 생의 희망은 시인이 비에 젖는 나무의자를 보며 “땅에 / 생각을 뿌리 내리고 있”는 나무 의자가 연꽃처럼 “낡으면서 완성되는”(「비 맞는 의자」) ‘꽃의 사색’을 제공하고 있음을 깨닫는 성찰로 이어진다. 이러한 태도는 한때는 ‘슬픔과 욕망과 속도’를 쉬게 했지만 이제는 헐거워져 뼈 수습 준비를 마친 의자를 보면서 시인이 “모든 의자가 비를 맞는다고 해서 / 연꽃을 피울 수는 없”듯이 “시가 비에 젖는다고 해서 / 다 연꽃을 피울 수는 없을 것”이라고 짐작하도록 만든다. 그리하여 시인은 ‘권태로운 자’와 ‘삶이 아픈 자’에게 ‘비 맞는 의자’를 보라고 요청한다. 그리하면 “시간의 궁핍을 꺼내 / 뿌리를 들이미는 / 나무의자의 영혼”(「비 맞는 의자:변주」)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인에게 낡고 쓸모없어져 버려진 채 비를 맞고 있는 의자는 비에 젖어 후줄근해진 인생을 환유한다. 그러므로 나무의자에게서 연꽃의 사유와 영혼의 성찰을 이끌어내는 시인의 모습은 희망을 내면화하라는 자연의 가르침을 시인이 몸소 실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