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철 ＜다산 선생과 주막집 주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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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선생과 주막집 주모

--사의재 四宜齋-

김학철

‘파리는 죽여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이는 굶주려 죽은 민초들의 전신(轉身)이다. 아아! 기구하게 사는 생명이다.… 파리야, 날아와 훌쩍훌쩍 울지만 말고 너의 부모와 처자를 모두 거느리고 와서 여한 없이 한 번 실컷 포식하라.… 파리야, 날아가려거든 북쪽으로 날아가라. 북쪽 천리를 날아가 구중궁궐에 들어가서, 그대의 충정을 호소하고 그 깊은 슬픔을 전달하라.…’

다산 선생의 수필 〈파리를 조문하는 글(弔蠅文)〉을 읽은 적이 있다. 강진 유배시절 글을 썼다는데 이 글에서 파리는 흉년과 탐관오리들의 수탈에 못 이겨 굶고 병들어 죽은 민초들의 시신이 파리로 환생한 것으로 본 것이다. 어쩌면 다산 자신이 파리가 되었다는 심정으로 이 글을 쓰지 않았나 싶다. 봉건 왕조시대 잘 나가는 양반출신으로 정조대왕의 총애를 받아 중앙 및 지방 관료까지 지낸 학자가 어떻게 천민의 입장에서 그런 글을 쓸 수 있었을까,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훗날 학자들은 다산을 가리켜 조선왕조 5백년 이래 제일의 ‘경세가’라고 찬양했는가 하면, ‘다산 선생 한 사람에 대한 깊은 연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전 조선의 성쇠존멸에 대한 연구’라고 했다. 또 선생을 일러 위대한 민권사상가로 한국의 ‘루소’요, ‘몽테스큐’라고 한 바 있다. 이른바 ‘민족의 스승’이라고 백번을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에게도 두 번의 죽을 고비가 있었다. 그 중 첫 번째는‘황사영의 백서사건’으로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참형을 당할 때 잡혀와 처형될 위기에 처했을 때이고, 두 번째는 겨우 목숨만을 건져 전라도 강진 땅으로 유배를 당해 처음 도착했을 때다.

강진으로 귀향 올 때는 1801년 12월로 혹한의 겨울 바닷바람이 살을 에일 정도로 추웠는데 강진읍 동문밖에 내쳐진 다산은 기거할 곳을 찾지 못했다 한다. 이미 한양에서 대역죄를 짓고 귀양 온 사람, ‘천주학쟁이’로 낙인찍힌 사람으로 소문이 나서 가까이 하면 자신도 어떤 화가 미칠지 몰라 사람들은 모두 그를 꺼려 외면했다 한다.

낯선 타향에서 서성거리며 마땅히 숙식조차 해결할 곳도 찾지 못한 다산에게 하늘의 도움이었던지 구원의 손길을 내민 이가 있었으니, 술을 파는 동구 밖 허름한 주막집 주인 할머니였다. 그 할머니의 배려로 주막집 바로 뒤 안채에 두 평도 못되는 골방 하나에서 기거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곳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다산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 때문에 바깥출입도 삼간 채 골방에서 홀로 멍하니 앉아 있거나 책을 읽으며 소일 하던 중 주모 할머니의 권유로 서당을 열게 되었다. 여섯 명의 아이들을 가르치게 되었는데 그 서당 명칭을 사의재(四宜齋)라 했다. ‘사의’는 생각은 맑게, 용모는 엄숙하게, 말은 과묵하게, 행동은 무겁게 하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올바른 생각과 용모와 말과 행동을 해야겠다는 다짐이다.

졸지에 생사를 가늠하기조차 힘든 열악한 환경과 절박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이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을까? 이것 하나만 봐도 과연 군자다운 의연한 기상이 엿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사의재에서 생활하던 중 장남 학연이가 아버지를 찾아왔다. 장남이 하는 말이 남양주에 살고 있는 집에는 옛날에는 그렇게 많이 찾아오던 일반인은 물론이고 친척들마저 외면한 지가 오래여서 세상인심이 원망스럽다고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주목사로 있던 아버지 정재원은 세상을 떠난 지 오래고, 둘째형 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를 갔으며, 셋째형 약종은 처형당하고, 다산 본인마저 강진으로 유배당해 그야말로 잘 나가던 집안이 풍비박산, 졸지에 폐족이 되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 다산은 아들에게,‘남의 은혜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도와라. 남이 어려울 때 은혜를 베풀지 않으면서 남이 먼저 은혜를 베풀기를 바라는 것은 너희들이 지닌 그 오기 근성이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며 오히려 아들을 질책했다 한다.

또 큰아들과 둘째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어려운 삶에서도 항상 학문을 게을리 하지 말 것과 근(勤)과 검(儉) 두 글자를 유산으로 준다는 편지를 보냈다. 내가 벼슬하여 너희들에게 물려 줄 밭뙈기는 장만하지 못했으나 오직 정신적인 부적 두 글자를 물려주니 마음에 지녀 잘 살고 가난을 벗어날 수 있도록 하라. 너무 야박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한 글자는 ‘근(勤)’이고 또 한 글자는 ‘검(儉)’이다. 이 두 글자는 좋은 밭이나 기름진 땅보다도 나은 것이니, 일생동안 써도 다 닳지 않을 것이다.”라는 자식들을 훈육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또 그곳에서 기거할 때 〈주역사전〉, 〈아학편훈의(兒學編訓義)〉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는데, 특히 〈아학편훈의〉는 어린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쓴 책이다. 나라의 장래를 짊어질 어린이들이 책을 많이 읽어 올바르게 배우고 익혀야만 나라의 미래가 밝게 열린다고 강조하는 내용의 글이다. 그리고 다산은 ‘황상’이라는 조선 후기의 제일가는 시인 등 6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한다.

나는 사의재 골방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봤다. 방안에는 내 눈길을 사로잡는 물건들이 몇 가지 눈에 들어왔다. 벽에 걸려있는 허름한 광목천 두루마기 하나와 그 위에 말총으로 엮어 만든 검은 갓이 걸려 있고, 방바닥 윗목에는 역시 얇은 솜을 넣어 바느질로 만든 옛날식 낡은 요와 이불이 한 장씩 가지런히 개어진 채 놓여 있었다. 그는 어둑한 이 방에서 등잔불을 켠 채 아이들을 가르쳤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나면 그 두루마기를 입고 갓을 쓴 채 짚신을 신고 해변이나 ‘보은산 우두봉’ 산봉우리에 올랐다고 한다. 생존 시 은총을 베푸신 정조대왕과 흑산도에 유배가 있는 둘째형 약전을 그리워했다 한다. 그리고 오가며 고달프게 살아가는 백성들의 힘겨운 삶의 모습도 유심히 살펴보았을 것이다. 또 주막에서 술을 먹어 취기가 거나해져 늘어놓는 백성들의 고달픈 세상살이 푸념을 듣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주모가 차려준 소박한 음식상으로 끼니를 때우고 책을 읽다가 잠자리에 들어서는 백성걱정, 가족걱정에 몸을 뒤척이다 가까스로 선잠에 들곤 했을 것이다.

이렇게 사의재 생활 4년을 거친 뒤 보은산방으로 이거하여 1년, 또 제자 이학래의 집에서 2년 등 도합 7년을 거쳐서 마침내 ‘다산초당’으로 옮겨 11년간 본격적인 저술활동에 전념했다.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 등 무려 500여 권의 책을 저술했고, 특히 앞서 말한 그의 수필 〈파리를 조문하는 글(弔蠅文)〉등을 쓰는데 사의재 생활 때 오며가며 목격했던 상황이 참고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이 사의재는 여러 번 일반인 손에 넘어 갔던 것을 강진군이 10년 전 10억여 원의 예산을 들여 이 땅을 아예 매입하고, 고증을 거쳐 옛날 모습대로 복원했다 한다. 사의재 뒤편에는 정성을 들여 다산을 보살폈던 주막집 할머니와 과년한 그의 딸을 조각해 놓았고, 교육장은 물론 정자와 연못도 만들어 운치를 살렸다. 그 주막집에는 온갖 전통적인 방법으로 전을 부쳐 막걸리를 일반인에게 판매하고 있다.

만약 주막집 주모할머니의 따뜻한 배려가 없었더라면 다산의 운명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목민심서’등 영원불멸의 명저는 물론‘정약용’이란 이름 석 자도 아예 남기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이렇게 우리의 영원한 스승 다산 선생을 지켜준 사람은 본인 말대로 무학이며 이름 없는 천민출신인 주모 할머니였다. 나는 ‘사의재’아니 주막집과 주모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씨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언젠가 또 이곳에 찾아 올 것을 기약하며 전주로 향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