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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사하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별들이 바로 1미터도 안 되는 거리의 눈앞에 펼쳐졌다.
하늘도 너무 무거워서 그만 쏟아버리고 싶은 마음인지 힘겨운 표정이었다.
주위를 얼른 둘러보았다.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 않았다.
아름다워야 할 이 풍경은 삽시간에 공포가 되어 시형을 엄습했다.
놀라 두려움에 떨던 시형의 눈앞에 갑자기 뱀 한 마리가 나타났다.
“Where are the people?”
(사람들은 어디에 있어?)
자신도 모르게 영어가 술술 시형의 입에서 원어민처럼 흘러나왔다.
“It’s a little lonely in the desert… I feel lonely even when i'm with people.”
(사막에서는 조금 외로워..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도 역시 외로워.)
말을 하면서 뱀이 혀를 날름거렸다.
순간, 그 입속에서 방울들이 튀어나와 고막을 찢는 소리를 내었다.
‘꿈이었구나! 벌써 몇 번째야!’
멀리 문 입구에 던져놓은 휴대폰에서 알람이 몸살을 부리고 있었다.
밤 11시.
알람이 아니었어도 어금니까지 달달거리는 추위 때문에라도 일어나긴 일어났을 시간이다.
서둘러 작업복을 걸치고 헝클어진 머리에 비니를 푹 눌러쓴 채 집을 나섰다.
솔직히 집이라고 하기엔 부끄러운 고백이다.
다닥다닥 붙은, 창도 없는 고시원 방을 빠져나와 몸 하나 겨우 빠져나갈 만한 긴 복도의 끝에 다다르면 새로운 세상으로 나갈 수 있었다.
무릎 안쪽이 다시 시큰거렸다.
절뚝거리며 서둘러 나오면서, 습관적으로 시형은 출입구 문을 열 때까지 숨을 참는 미션에 오늘도 성공했다.
진눈깨비도 녹기 전에 수없이 쌓고 쌓이다보면 저렇게 하얗게 세상을 다르게 변화시킬 수 있구나 하는 감탄도 잠시, 순간 이 낭만의 풍경이 결국 빙판길이 될까 두려운 마음이 시형의 가슴에 반전을 몰아왔다.
편의점에서 삼각 김밥과 타이레놀을 산 후 남은 동전 200원.
이걸로는 물 한 병도 못산다.
입안에서 침을 많이 분비해 김밥을 우걱 한 입 베어 물고서 차에 시동을 켜자 경고등이 요란하게 울렸다.
연료계의 바늘이 바닥에 포복중이다.
이걸로 오늘 버틸 수 있을까?
다시 나가 편의점 밖의 ATM 기에 지갑에 있는 온갖 카드들을 꽂아본다.
250원. 170원. 91원.
그럼 그렇지. 단 돈 만원이면 되는데...
뻔한 결말을 알면서도 왜 자꾸 시형은 자꾸 기계에 카드를 꽂는 버릇을 버리지 못 하는지 스스로 의심되었다.
어쨌든 다 합치면 물 하나를 살 수도 있었겠지만, 이 돈들을 하나의 통장으로 모으기라도 할라치면 수수료가 더 들게 되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 될 것이다.
기댈 데 없는 쓸쓸한 맘으로 방한 장갑을 찾느라 점퍼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을 때였다.
순간, 이 촉감이 불러온 돈 냄새는 뭐지?
돈에 대한 갈증이 시형의 후각 능력만 키워놓은 듯했다.
14,000원?
아, 어제 후불 택배 물품을 전달한 후 받은 돈이구나!
업체에 바로 갖다주어야하지만 업체까지 가기도 전에 차가 설 것 같은데?
내 코가 석자인 상황에, 더구나 월급에서 차감해도 되는 사항이니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겠다는 생각이 일었다.
이렇게 간단간당 임종 환자 마냥 목숨 줄 가늘게 이어지는 데서 시형이 느끼는 건 희열보다는 어떤 불안감 같은 게 더 강했다.
- 굴러 ~ 굴러 간다 ~ 내 몸이 부서져도 한 줌의 흙이 돼도 ~
라디오에선 가수가 지난날의 굴러가던 자신의 인생을 쇳소리를 내며 울부짖고 있었다.
세상은 모두 잠든 공간에 혼자서 굴러가는 인생이라니!
살얼음판을 굴러가는 조심스런 시형의 차완 달리 블랙박스 카메라에 걸어놓은 사진이 경쾌하게 춤을 춘다.
아들 녀석 사진과 사하라 사막의 별무리 사진.
눈을 부비며 잠을 쫓을 요량으로 창문을 스르르 내렸다.
눈 속에도 하늘의 별들은 빼곡하지만 나름 제 자리들을 찾아 앉아 어김없이 자기 자리에서 빛을 내는 풍경이 펼쳐졌다.
‘지금 이게 내 자리인 건 맞는 걸까?’
사실 별은 하늘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지구상의 서울, 아까 전 5시 퇴근길.
앉을 자리가 없는 지하철에서 서로 몸을 부딪고 빼곡히 실려 가는 사람들도 별들처럼 일정한 거리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던 순간 사람들에 밀려 출입문까지 흘러온 시형은 그 자세로 눈을 감았다.
별은 사무실에서도 찬란했었다. 비록 시형의 차지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한참 어르신과 계약 통화를 하던 중 헤드셋을 서둘러 벗을 수밖에 없었던 건, 귀를 쟁쟁대는 철공소 쇠 깎는 듯한 소음의 침범 때문이었다.
“그렇다니까요. 그거 옛날 거라서 보장이 많이 안 돼요. 해약하는 게 맞다니까요. 속고만 사셨나? 제가 비밀히 알게 된 걸 아버님께만 말씀 드린 거예요. 진짜 행운을 잡으신 거예요. 네네.”
바로 등만 돌리면 닿는 뒷자리의 동료가 화통을 삶아먹은 듯한 고함소리를 사무실을 가득 뱉는 바람에 도저히 통화를 이어갈 수 없는 지경이었다.
그런데 팀장은 갑자기 통화를 막 끝낸 동료를 앞으로 불러내더니 손을 덥석 잡아 끌어안고 어쩔 줄 모른다.
“자, 자! 김등업 씨 덕에 이번 우리 사무실 실적이 전국 최고를 찍었습니다. 박수!! 정말 대단하세요. 어떻게 한 달 내내 공치는 사람도 많은데 하루도 빠짐없이 이렇게 계약 건을, 그것도 3, 4만 원짜리도 아니고 20만 원짜리를 그렇게 쉽게, 쉽게...진짜 대단하십니다. 이번 달 1위는 이번에도 김등업씨! 다음 달 봉급은 천만 원 찍겠어요! 자, 다들 다시 한 번 박수!!!!”
팀장은 연신 박수를 유도하면서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손으로 벽에 붙어 있는 커다란 실적 그래프에 금색의 커다란 별을 달고 있었다.
시형은 지친 표정으로 자기 눈앞 파티션보드에 써 붙인 <어린왕자>의 한 구절과 그 옆의 사하라 사막에서 쏟아지는 별들이 찍힌 사진 한 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뭘요! 모두 하나님의 덕분이죠. 이런 소명을 통해서 부족한 저를 들어 쓰시려는 계획을 차차 실현시키시는 거죠. 저는 이렇게 계약자에게도 제게도, 그리고 장차 제가 만들 요양원 어르신들에게도 모두 행운이 돌아가는, 빅 픽쳐가 점차 눈앞에 그려지고 있는 지금이 매우 행복합니다! 함께 힘냅시다! 파이팅!”
시형은 간식으로 나온 빵을 한 쪽을 쭉 뜯어먹으며 영혼 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시형씨! 그렇게 빵을 너무 좋아하시니까 이번 달 내내 빵이잖아요! 같이 들어온 동료는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이따 좀 남으세요.”
빵조각이 목구멍에 걸려버렸다.
“누군 계약 안 하고 싶어서 이러고 있나? 참! 그런데 이 사진은 뭐야? 여기 갔다 온 거야? 어디야? 근데 여긴 맛집도 없을 것 같고 인스타에 올릴 만한 스팟도 안 나오겠다. 휴대폰 카메라 빛 때문에 저 별들이 담길 리는 만무하고... ”
가슴을 두드리는 시형을 보고 물을 얼른 떠온 여자 동료가 투덜거렸다.
“리비아 사하라 사막이에요...”
“아프리카까지 언제 갔었대? 거기 막 불결하고...말라리아 그런 거 있고, 막 그렇지 않나?”
“가려고요...”
물을 한잔 꿀꺽 마신 시형은 마침 자리로 돌아와 퇴근 준비를 하는 동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축하해! 부럽다! 그런데 아까 그 통화...방금 해약한 보험도 자네가 계약했던 거 아니었어? 그게 훨씬 좋은데 그걸 해약하고 이것저것 어르신한테 평생 안 일어날 것 같은 병들을 다 끼워 넣어서 보험료 최대치로 올려서 계약하는 건 좀 아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그냥 걱정 되어서...”
“자넨 그게 문제야! 여기 돈 벌러 나왔지 복지사업 하러 나왔어? 언제 자네처럼 2만원, 3만원 이렇게 해서 그 감옥 같은 고시원을 벗어나냐고! 뛰어도, 뛰어도 모자랄 판에 만날 그 자리인 게 지겹지 않아? 내 영업 스타일을 벤치마킹을 할 생각은 안 하고 뒤에서 질투나 하고...쯧쯧!”
“난 자네처럼 거짓말을 못해서 그래. 그렇잖아! 그 21만 원짜리 옵션 중에 칠순이 넘으신 분한테 소용이 닿는 게 몇 개나 있어? 노령연금이나 받는 사람들 혀로 살살 굴려서 내 이익을 취하고 싶지는 않은데...빵을 치더라도 뻥치는 건 못하겠던데. 그냥 내 보폭으로 정직하게 걸어갈 거야!”
“참나! 사람이 자기 능력 밖이면 아무리 꾀더라도 자네 같으면 덜컥 계약하겠어? 그 노인네, 꼬불쳐 둔 돈이 있나보지. 어쨌든 난 하나님의 은혜로 자네보다는 몇 걸음 훌쩍 건너뛰었으니까 넘 부러워 말고! 자네 문제점이 뭔지도 좀 점검해보고..그럼 난 이만!”
김이 휘파람을 부며 자리를 떠난 후, 팀장에게 불려간 시형을 포함한 부진아들은 사또 앞에 오라를 두른 죄인들처럼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다.
“시형씨!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란다.’? 이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시니까 자꾸 실적이 안 나오는 거에요. 그 어려운 걸 해내는 게 영업사원들이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우리가 얼마나 보람된 일을 합니까? 이건 기독교에서 하는 복음 전도와 똑같은 거예요! 안 그래요?”
똑같은 레퍼토리로 팀장이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내내, 시형은 멍한 눈빛으로 고개만 건성 끄덕이며, 속으론 앞으로 오늘 남은 자신의 동선을 그려보는 중이었다.
“그거...<어린왕자>에 나오는 글귀예요!”
누군가 속삭이는 어조로 반응하는 말에 검은 물감을 훅 들이 붓는 팀장.
“설마... 늙은 왕자라면 모를까. 호호호!”
이따 11시에 새벽배송 택배 일터에 늦지 않게 나가려면 지금 달려가 지하철을 타고 한 시간, 그리고 감옥이 아니라 흡사 무덤 같은 고시원에서 어렵사리 눈을 잠깐 붙이는 시간...
‘그러니까 4시간 밖에 안 되네.’
항상 잠시간이 모자란 시형에게 1, 2분 마저 아까운 이 시간은 정말 황금과도 같았다.
“저, 택배 일 때문에 지금 나가봐야 할 것 같아요.”
“저렇게 사람 욕심이! 투잡을 뛸 게 아니라 여기다가 올인 하시란 말이에요! 빵만 먹고 갈 거면 그 시간에 잠이라도 더 자시든가! 그 많은 돈은 다 벌어서 대체 뭘 하길래 아직도 고시원이래? 시형씨 자신에게 좀 큰 돈을 선물 하세요! 제발 남의 잠든 집 앞에 배달하는 거 말고!”
듣는 둥 마는 둥 ‘늙은 왕자’는 묵묵히 자기 짐을 싸서 밖으로 나오는 내내 이런 험한 비아냥이 쓰나미처럼 뒤에서 자신을 덮쳤지만, 일부러 더 꼿꼿이 걸어 나왔다.
잠깐일지언정 서서라도 눈을 붙여야했다.
지하철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터널을 통과하고 있었다.
무릎 안쪽으로 시베리아 한랭전선이 드리운 듯 갑자기 시려왔지만, 시형은 습관적으로 다시 숨을 꾹 참았다.
사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것 같은 이 흐리멍덩하니 애매한 상황은 시형에겐 마치 끝도 없는 터널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언제쯤 이 암흑 같은 곳에서 벗어나 쏟아지는 별빛 아래 맘 편히 한 번 볼 수 있을까 생각하던 순간이었다.
아니, 저 시그널 음악은?
- 당신의 아침을 누구보다 빨리 준비해 드립니다. 초스피드 시대 택배의 혁명!
이제 당신의 느긋하고 행복한 아침을 책임져드립니다.
지금 바로 주문 넣으시면 잠 자는 사이에 우리 산타클로스들이 문 앞에 선물을 몰래 배달 할 겁니다.
단, 양말을 걸어놓을 필요는 없어요! 하하하!
주식회사 ‘플래닛’!
이젠 지하철 광고까지 진출을 했구나!
자부심이 일어야 마땅할 텐데, 시형은 무지막지하게 쏟아지는 주문 물량과 라우팅 숫자를 생각하곤 순간 머리를 흔들었다.
<이번에는 오래 갈 것 같은데...아빠! 바쁘면 안 오셔도 돼요.>
입원한 아들 녀석의 문자 읽기를 마치지도 않았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지금 지하철이라 전화 못 받아!”
“그렇게 죽어라고 벌면 뭐해? 근데 벌기는 버는 거야? 병원비에, 이젠 축구를 못할 것 같다고 의사가 말하는데...그럼 10년 가까이 축구선수 만들어보겠다고 쏟아 부은 우리는 뭐가 되는데..그리고 보험 하는 사람이 애 보험료는 어떻게든 건들지 말았어야지? 쌩으로 다 물어낼 판이잖아! 이것뿐인 줄 알아? 입원 전까지 밀린 레슨비에, 지난 여름 전지훈련비에, 코치 비용까지 이거 다 어떡해? 에휴...진짜!”
이혼한 전 와이프의 헐떡헐떡 숨넘어가는 공격은 통째로 시형을 자꾸만 죄책의 심해 속으로 밀어 던지고 있었다.
그런데 아까는 이게 왜 눈에 안 보였지?
사람들한테 밀려 출입문 쪽으로 밀려온 시형의 눈앞에 문구 하나가 떡하니 들어왔다.
< 춤추는 별을 낳으려면 마음속에 혼돈을 품고 있어야 한다. -니체 >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그러니까 취미로 그냥 하라고 하면 될 것을, 초딩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왜 10년간 모터를 달아줘선 이런 사달을 만드냐고! 그 놈의 이상주의는 언제쯤 끝을 낼 건데?”
“...그땐 유망주였잖아...”
그래, 너도 어딘가에 쏟아내고 싶겠지!
“세상물정을 저렇게 모를 줄 꿈에나 내가 알았을까? 알았으면 결혼 했겠냐고! 자기가 벌어서 먹여 살릴 테니 애들이나 잘 키우라고 해서 그 좋은 회사도 때려치우고...경력 단절된 여자를 누가 다시 채용을 해? 10년 간 사람 하나 완전히 바보 됐어!”
“......”
전 와이프의 신세한탄이 잦아질 때까지 귀에서 멀찍이 휴대폰을 뗀 후, 시형은 졸린 눈을 부비며 당근마켓 어플을 작동시켰다.
<빌딩 계단 청소. 경력 무관. 오전 7시 ~ 9시. 시급 9,870원. 선착순 2명. 남성 우대. 안양 근처 거주자 우대.>
벌써 지원자가 11명? 얼른 문자를 보냈다.
택배를 좀 빨리 감기로 돌리면 얼추 시간이 맞을 것 같은 계산 때문이다.
<41세. 남자. 성실합니다. 인덕원 근처 거주. 기동성이 좋아요. 연락처 010-***...>
“아빠! 미안해요! 18세 이하 청소년 국가대표 선발전이 바로 코앞인데 이렇게 무너져서.”
“괜찮아! 아빠는 우리 아들 믿어! 축구 아니면 어때? 가끔 꿈도 위치 이동을 할 때가 있지. 아빠도 경영 컨설턴트가 꿈이었잖아! 그런데 이제는 시인이 되는 꿈을 갖게 되었고! 우리 아들도 축구 안 했으면 천체과학자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었어?”
“고창 청보리밭 같이 갔을 때 했던 말이 생각 나! ‘너의 장미꽃이 그토록 소중한 이유는 그 꽃을 위해 공들인 시간 때문이야.’ <어린 왕자>에 나온 말 맞지?”
“이젠 늙은 왕자가 되었지 뭐니? 하하하. 그리고 그 장미꽃이 질 때가 되었나보지. 이제 다른 꽃을 찾아 돌보면 되지 않을까?”
“아빠! 축구랑 나랑 원래부터 안 맞는 거였나 봐! 만날 부상이나 입고...”
시형은 아들이 지난 번 입원하기 전에 어렵게 휴가를 냈었다.
하루 빠지면 40만원이 날아가는 상황인데도 어쩔 수 없었다.
하기야 친부모가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려고 결근을 해도 대차를 쓰는 돈을 자기가 물어내야 하는 택배 영업자의 비애를 가족들이 알 리 없었다.
“맞고 안 맞고가 어딨어? 중간에 넘어지기도 하는 거지. 잠시 넘어졌다고 해서 골대가 저 앞인데 그냥 벤치로 나가는 건 좀 나약해 보이는데? 하하하”
목발을 짚고 앞서가는 아들을 보다 못한 시형이 달려가 얼른 등에 업었다.
“아빠 다리도 안 좋으면서...저 괜찮아요. 내려줘요!”
한 여름의 끝자락, 땀이 찬 시형의 등 뒤에서 아등바등 하는 아들 다리에 힘을 꽉 주었다.
“우리 둘 다 직업병인걸로! 하하하!”
고창 청보리밭은 8월 말이라 그런지, 이름과 다르게 청보리는 이미 해바라기로 대체되어 있었고, 그마저도 저쪽에서 트랙터가 그걸 깔아뭉개며 서서히 변두리에서 중간 쪽으로 갈아엎으며 다가오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땅이 비옥하니까 저렇게 주인공이 계속 바뀌어도 나름, 나름 저마다 다른 색과 향을 피워내는 모양이었다.
“아빠! 저기 봐요. 저기...쓰러진 해바라기가 웃고 있네?”
“너 닮았네! 살인미소 축구신동님!”
“아냐! 아빠랑 닮았구만! 오뚝 인생 신동아빠님!”
“나 슈주 신동 아빠 아닌데? 하하하!”
“아빠! 나 그래서 말인데, 미국항공우주국 있잖아! 거기서 이번에 프로젝트 같은 걸 했는데...”
“유학 가게? 그건 많이 부담 되는데?”
“그게 아니고...있어! 그런 거!”
낭만적인 회상에서 빠져나와 시형은 손을 쭉 내밀어 하늘 쪽으로 뻗어보았다.
별은 혼자서 고상하게 저렇게 손닿을 수 없는 거리 멀리서 마치 전지적 시점으로 시형을 내려다보는 듯 했다.
‘다들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
단톡방에서 택배기사들이 우글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53집 134 박스.>
<46집 98박스. 에잇! 2,200원한테 밀렸네!>
덜 하고 덜 받고 싶어도 다들 어떤 사정이 있기 때문일까?
50집을 기준으로 한 집 당 배달료가 1,500원에서 2,200원으로 훌쩍 건너뛰었는데 본인 물건이 이에 못 미친데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 것이다. 이 700원이 시형 같은 사람에겐 70만원의 무게로 다가왔다.
얼른 라우팅을 열어보았다.
<50집 121 박스>
오늘 같이 돈이 절실히 필요한 날은 더 주지, 하는 마음이 일렁였다. 시형도 순응된 상태가 되고 만 것이다. 택배노동자들의 고혈을 빨아 사는 기업이 어떻게든 덜 주려고 애쓰는 걸 보면 세상엔 정의가 없는 게 분명했다.
예전 30집 정도였던 평균 택배 물량이 요사이 제 맘대로 45집을 기본으로 삼으면서, 그것도 기본 배달료를 삭감한 탓에 일은 많고 돈은 적게 받는 구조로 변해버렸다. 때문에 한두 집 더 돌리더라도 예전 받던 수준의 임금에 맞춰보려는 택배기사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다들 투덜대기만 할 뿐 현실을 개선할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오히려 관리자들에게 찍혀서 자신에게 배당 되는 물량이 적어질까봐 전전긍긍하는 동료들을 그저 배신이란 딱지를 붙이는 것으로 끝낼 일이 아니었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눈물을 흘릴 일이 생긴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분명, 세상은 별의 운행처럼 질서가 잡힌 곳은 아니었다. 조직은 이렇게 사람들을 나약하게 길들여 순응하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을 가진 곳이었다.
단톡방에선 물량 비교를 하며 가벼운 농담들이 오갔으나 시형은 배송지역을 무심히 열어본 후 화들짝 놀라 잠시 말을 잃고 말았다. 오늘 저녁, 아니 정확히는 내일 새벽에 물건을 돌리는 곳에 시형이 과거에 살았던 아파트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도 이 아파트만은 빼달라고 요청했건만, 생각 없이 그냥 툭툭 물량 숫자 맞추기만 하다가 벌어진 일인 게 분명했다.
서둘렀는데도 벌써 물류센터 앞엔 택배차량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눈발도 굵어지고 있었다. 별이 떠도 눈은 오는구나!
마치 별이 지상에 내려와 순간적인 시각 재료만 주고선 사라져버리는 허망한 쇼처럼 보였다.
부르릉부르릉 ~ 부르르르 ~
센터 안으로 들어가는 경사진 언덕에서 미끄러운 바닥 때문에 헛바퀴가 돌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브레이크를 빨리 밟았으나 오히려 방향이 더 휘는 바람에 하마터면 운전석을 건물 기둥에 박을 뻔했다.
순간, 시형의 등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그나마 이 차라도 없으면 이 캄캄한 현실을 어쩌랴 싶었기 때문이다.
겨우 자리를 잡고 물건을 챙기고 라벨 작업을 하는데도 흥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커피 한 잔 할 시간 없어? 미리 나온 명세서 받고 일해!”
군대 동기 녀석이었다. 어쩌다, 아니 생각해보면, 심심해서 이 고단한 일을 하려는 사람은 없을 테니, 사회에서 거의 끝까지 간 사람들이 저마다 가면을 쓰고 들어온 이곳의 속성상, 군대 이후로 얼굴 한 번 못 보던 놈을 여기서 만난 건 미루어 짐작건대 그도 시형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지 불문율처럼 서로 묻지 않을 뿐이다.
“모레가 월급날이네? 이번이 마지막이니까 알았지? 거긴 정말 이렇게 춥지 않겠지?”
주변 다른 기사들이 들었을까 싶어 얼른 놈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미 알고 있거든? 팔자 좋아! 아프리카까지 여행도 가고.”
조롱하는 사람은 집에 있기 심심해서 나왔다고는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한 눈치의 박형이다. 심심하면 이게 목숨줄인 사람들 택배 물량까지 사바사바해서 더 많이 가져가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낮에 보험일 까지 합치면 거의 억대 연봉 아냐? 그렇게 돈 깔고 앉아서 고시원은 대체 뭐야! 재벌이 가난 코스프레 하는 것도 아니고!”
비아냥은 계속 됐다. 왜 사람들은 사정도 모르고 저렇게 함부로 다른 사람을 재단하려는 걸까?
어쨌든 군대 동기 녀석과의 처음 기억은 별로 좋지 않았다. 동기라고 해도 먼저 들어온 날짜로 고참 행세를 하던 놈이었다.
군대시절, 내무반 귀퉁이에서 뭔가를 한꺼번에 입에 쏟아 붓는 녀석의 모습이 시형의 눈에 포착되었다.
“입 벌려봐! 또 내 것 다 먹었지?”
“무슨 초딩도 아니고 별사탕만 모아서 뭐 하려고 그래? 군대에선 먼저 본 놈이 임자지! 메롱!”
사건 이후로 아예 창고에 별사탕을 숨겨두었다. 그러나 스토킹을 하는 건지, 숨겨봤자 매번 다음 날이면 녀석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긴 했지만.
함께 전역하던 날이었다.
전역신고를 마치고 내무반에 들어왔을 때 시형은 털썩 침상 위로 무너졌다. 내무반 천장에 색색이 알록달록한 별들이 저마다의 빛을 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고참님께서 수고 좀 했다!”
사물함에 붙여놓은 사하라 사막 별 무리 사진을 본 것인가?
녀석은 졸병들을 시켜 형광색으로 덧칠해 천정에 달아놓는 이벤트를 기획한 것이었다. 조명을 끄자 더 아름다운 성운이 아주 눈앞 가까이에 내려와 시형의 온 몸을 물들였다.
“자! 누워봐! 어때? 은혜를 베푸사 친히 사하라 사막을 재현한 내 솜씨가!”
“난 진짜 가고 말 거야! 이런 가짜 말고!”
“이 쫄따구가 고참의 정성을 무시하네? 근데 너 사하라에 로또라도 숨겨놨니?”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별을 보면 얼마나 좋을까? 잡을 수 없는 꿈 말고, 이렇게 찾다보면 언젠가 그 꿈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시그널 같은 걸 경험해 보고 싶어...”
지난 주엔 녀석과 강릉 안반데기에도 갔었다.
“멍에 전망대가 폐쇄됐네? 아쉽다! 가까이 보고 싶었는데...”
“그래도 보름 아니고 삭이길 얼마나 다행이야! 우와 저 별들 좀 봐!”
구불 길을 올라오는 동안 시형은 몇 번이나 주저앉을 뻔했었다. 그래도 그 수고로움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 겨울의 하늘은 별들이 수다라도 떠는 것처럼 반짝반짝 영롱하게 은하수를 펼쳐놓았었다.
“사하라는 여기보다 몇 백배는 더 좋겠지?”
“사진이랑은 또 다르겠지! 그간 고생했어. 돈 모으느라고!”
“고시원 사는 놈이 사하라에 별 보러 간다고 하면 다들 미친 놈이라고 하겠지? 하하하”
“너 미친 놈 맞아! 하하하”
기억도 잠시, 째려보는 시형을 달래려 군대동기 녀석이 옆으로 와서 박스 테이핑 하는 걸 도왔다.
그런데 갑자기 긴급 기자회견이 물류창고 안에 울려 퍼졌다.
최근 쿠펑 택배기사들의 파업사태로 협상 테이블에서 난항을 겪고 있다는 얘기가 들렸으나, 자신들 이야기인데도 시형을 포함해 모두가 관심 밖이었다.
노동부장관은 지친 표정이었으나 결연한 자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밤샘 릴레이협상을 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택배노조 여러분, 저도 노동자 출신입니다. 지금도 제가 서민아파트에 사는 사람으로서 누구보다도 서민들의 고충을 잘 압니다. 택배노조와 민주노련은 쟁의를 풀고 대화의 자리에 나와 주시기 바랍니 다. 이렇게 해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머리를 맞대고...”
TV 앞에 옹기종기 보였던 사람들이 무표정으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히야! 진짜 한 3년 걸렸나? <별꿈여행> 카페 회원들도 다들 신났어! 별사탕이 진짜 별무리로 변하는 마법을 덕분에 경험하게 생겼네? 다음 달 초 안 나오려면 이번 주부터는 특근이라도 해야겠는 걸? 일주일이나 비우면 280만원 아냐! 이번 달은 하루도 못 쉬는 거네.”
흥분하는 녀석과는 달리 시형은 벌써부터 배달할 예전 살던 아파트 때문에 걱정이 태산이었다. 게다가 박싱한 걸 체크하느라 켜놓은 휴대폰으로 음울한 문자까지 이 밤중에 도착했다. 녀석은 계속 중얼거렸다.
“가령 네가 오후 4시에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질 거야. 이거 <어린 왕자>에 나오는 구절이지? 히야! 내가 별 오타쿠인 너 때문에 한 번도 안 읽어 본 책을 다 읽은 기분이다, 야!”
<일 하는 시간인 줄 알면서도 알아야할 것 같아서 문자한다. 엄마가 좀 많이 이상해. 병원에선 처음엔 단순히 섬망이라더니, 연세가 있으셔서 그런가? 중증 치매 환자처럼 막 그래. 요양원에 모셔야할지 어쩔지, 내일 일 마치면 전화 좀 주고.>
안성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형이었다. 무릎이 시려왔다. 센터 안에 휘몰아치는 눈바람의 찬 기운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슴에 휑하니 검정 비닐봉지들이 질서 없이 마구 떠다니는 듯한 황량함이 일었다.
무거운 마음으로 탑차에 올랐다.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이제 나가는 시간이 2시니까 오늘 끝내는 시간은 새벽 4시는커녕 5시가 훨씬 넘게 생겼다. 게다가 그동안 돌리던 곳이 아닌 지역이 두 개나 추가된 걸 감안하면 물건 배달하는 시간보다 도로에 쏟는 시간이 더 길어질 듯 했다.
<내일 새벽, 아니 오늘 새벽 7시에 청소하실 건물 앞으로 오세요. 지역 가까운 분이 낫겠어요. 아참, 여자 분 한 분이랑 함께 하시게 될 거예요.>
당근에서 온 답글이다.
그래, 한 푼이라도 아쉬운 상황에 지금 잠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을 마치면 9시, 씻고 부리나케 보험 영업소에 가면 10시. 지금 상황에선 쓰리잡도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봐봤자 뻔한 명세서가 이제야 시형 눈에 들어왔다.
기본급 390에 보너스 180이면 570만원.
또 적자다.
고시원 월세에, 탑차 할부금에, 개인회생 분할금에, 보험 해약 된 거 매우는 돈에, 아들 녀석 축구할 때 레슨비 빌려 쓴 돈에 입원비에, 엄마 용돈에, 차 기름 값 당겨쓴 거 갚을 돈에, 이런저런 공과금에, 마지막 사하라 여행비에, 게다가 차 높이가 있어서 지하에 주차하지 못 해 눈치 보며 밖에 세운 차를, 살짝 횡단보도를 밟았다고 명예로운 시민께서 공익제보 하는 바람에 날아온 과태료에, 모두 나가면 5만원도 안 남게 생겼다.
이걸로 어떻게 버틸까 싶은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늦었지? 새벽일 하느라 고생이 많다. 코로나로 허덕이다가 이번에 내가 사업을 접게 되었어. 너 아들 축구할 때 목돈 빌려준 거 있잖아! 그거 조금씩이라도 갚아주면 안 될까? 네 사정 알고 3년간 아무 말 안했는데 내가 사정이 급해서 그래. 미안하다.>
미안한 사람들 투성이다.
어려울 때 흔쾌히 쾌척해준 친구들 봐서라도 열심히 살았는데 현실이 따라주지 않아서 미안했다. 이혼만 안 했어도 모친을 모셔 와서 돌볼 수 있었을 텐데 그것도 미안했다. 그 좋은 대기업을 때려치우고 나와서 결국은 밤에 택배를 돌리는 자신의 신세를 바라보는 와이프나 애한테도 시형은 미안했다.
“아빠! 언제 와?”
시형이 다섯 번째 집에 물건을 갖다 주고 내려오는 길에 갑자기 모친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별 보러 가기로 했잖아! 만날, 만날 거짓말만 하고! 백번이나 잤는데...절대로 오늘은 못자!”
“엄마....”
“알퐁스도데 <별>, 너무 읽어서 책이 다 찢어졌어! 가장 밝은 별 하나가 내려오는 건 언제야, 아빠?”
“엄마...”
“라이트 끄시고요! 여기는 못 들어옵니다. 들고 올라가세요!”
20개짜리 물을 두 박스나 들고 어떻게 저 계단을 올라가라는 건지!
무릎이 더 시려왔다. 트레이를 새로 산다는 게 언제 적인지, 장갑이 미끄러워 그냥 맨손으로 얼른 배달해야겠다는 생각에 서둘렀지만 찬바람 때문인지, 모친 전화의 여파 때문인지 눈물이 끝도 모르고 흘러나왔다.
골고다 언덕 같은 3층 계단을 오를 때쯤, 순간 시형의 무릎이 훅 접히고 말았다. 생수병들이 저 아래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눈물은 더 거세졌다.
절뚝이며 차에 올라 다음 집으로 가는 동안 센터에서 전화가 왔다.
<오배송입니다. 매니저님이 확인 사진 보내신 곳은 옆 동입니다. 동 호수 다시 보시고요. 다시 주문자님께 배달해주시기 바랍니다.>
눈물 때문이었다.
원래 계산보다 시간이 한참 늦어졌다.
별들은 아직도 우두커니 시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발도 거칠어졌다. 낑낑대며 차를 조심해서 운전해도 삐끗삐끗 오래 된 타이어가 자꾸 옆길로 가는 걸 간신히 잡아당기느라 손에 땀이 흥건해졌다.
마주치더라도 나중에 마주하고 싶었던 것일까?
시형은 가는 길에 들러도 충분한 그 아파트를 빼고 모두 돌린 다음 마지막 차례에 배정해두었다.
고급아파트인 <로얄스타> 에 도착했지만 경비원이 이것저것 검사하고 물어보는 바람에 안으로 들어가기까지 오래 걸렸다. 결국 마스터키를 갖고 따라와 엘리베이터를 열어주고 돌아가는 경비원을 뒤로하고 201동 801호 문 앞에 도착했다.
그러나 시형 눈에 배달한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머뭇하다가 조심스럽게 초인종 눌렀다. 잠시 후, 부스스한 차림의 한 남자가 반쯤 눈을 감고 문을 살며시 열었다.
담배 냄새와 술 냄새가 확 풍겨오는 바람에 순간 아찔했다.
남자의 잠옷에 귀여운 곰들이 수없이 박힌 것을 보다가 하마터면 웃음이 새나올 뻔했다.
그런데 낯이 익은 이 사람은?
헝클어진 채, 취해서 흔들거리는 몸을 겨우 지탱하고 서있는 사람은 아까 기자회견에 나왔던 노동부장관이 아닌가?
그런데 노동자 출신에 서민아파트에 산다던 그는 들어오는 데만 수십 분이 걸리는 철옹성에 살고 있었다.
“혹시.. 아까 여기 둔 물건, 보셨어요?”
“무슨 물건이요? 배달시킨 적 없는데...”
목소리까지 휘청거렸다.
말할 때마다 안주로 무얼 먹었는지 알아챌 만큼 냄새가 공격해왔다.
“제가 실수로 오배송을 해가지고... 이거 없으면 저 벌금 물어야 해서...”
“아니...그러니까 무슨 물건이요? 모른다니까요. 택배나 하면서 어딜 감히 장관 잠자는 걸 깨우기나 하고...허허!”
그때 안쪽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야...뭐야! 배달음식 왔어?”
“아니야! 더 자! 아니다. 내가 데려다 줄게. 어서 옷 입어!”
“아까는 담배 피우러 나가고. 지금은 뭔데? 배달음식 아니면 문 닫아! 아, 배고파! 아까 들고 들어온 건 먹을 것도 아니고...”
당황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배달하는 것들이 다 그 모양이지, 뭐! 어서 옷 입어!”
“그래도 생각해 보시...”
장관은 시형의 차림새를 경멸의 눈으로 훑었다,
“아, 모른다잖아요. 아침부터 참! 플래닛 안되겠네! 쿠펑 때문에 머리 아파 죽겠고만. 택배 하는 사람들은 다 이렇게들 무례한가? 그까짓 거 돈 얼마나 한다고! 민원 넣기 전에 얼른 가세욧! 에헴!”
쾅!
문을 닫아버리는 바람에 시형은 한동안 문 앞에 우두커니 현관문만 바라보며 서있을 수밖에 없었다. 숨을 깊이 참은 채로.
50번째 집.
너무 느리게 온 탓인지 벌써 시간이 6시를 넘기고 있었다. 천천히 아파트로 불을 약하게 하고 들어갔다. 시형이 올려다 본 위치, 지금 와이프와 처가 식구들이 사는 집은 모두 잠든 시간인지 적막했다. 그 옆에 놀이터 안 기구들이 눈 속에 자취를 서서히 감추고 있는 게 보였다.
“너는 뭐야! 다리가 이렇게 두꺼운 눈사람이 어딨어? 크크크”
“축구신동 눈사람이다, 뭐? 근데 아빠! 아빤 꿈이 뭐야?”
“너의 꿈이 내 꿈이지!”
“에이! 내 꿈 말고 아빠 꿈!”
아들 녀석과 즐거웠던 한 때가 놀이터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이러다간 누구라도 아는 사람 마주칠까 두려운 생각이 번뜩 시형의 머리를 때렸다. 누가 보는 것도 아닌데 괜히 더 살금살금 택배상자를 구매자 집 앞에 갖다놓고 서둘러 나왔다. 그런데 너무 조심했던 탓일까? 출구 쪽 마지막 계단을 헛짚어 그만 그 자리에 넘어지고 말았다.
무릎을 달래며 어렵게 차에 숨어들어와 한숨을 쉬며 시동을 켜는 순간, 저쪽 아파트 입구에서 손을 호호 불며 나오는 사람이 눈에 띠었다. 얼른 라이트를 껐다.
아!
와이프였다.
순간, 시형의 동공이 방향을 잃고 크게 동요했다.
‘이 새벽에? 새벽기도 가나? 그런데 걸어서? 아들 녀석 병원 가기엔 너무 이른데...’
마지막 배송까지 마친 시형은 추위와 허기를 느꼈다. 편의점에서 따뜻한 뭐라도 사먹을까 싶어 서둘러 들어가 사가지고 나왔을 때 아뿔싸, 와이프의 발자국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새벽이라 어둡고 무서울 텐데 차에 좀 태워 목적지에 데려다 줄 걸 그랬나 싶은 자책이 순간 일었다.
죄책감이 시형의 망설임을 재촉한 탓에 선뜻 그리하지 못했던 것이다. 남편 잘 못 만나서 경제적으로 파탄 나고 이혼녀까지 된 그녀를 마주보기가 겁이 났던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해주는 건 기적이야.>
그 달콤한 <어린왕자>의 대사를 속삭이던 그녀는 거친 삶의 바람에 휘갈겨져 기적보다 더 고통스런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시린 무릎에 핫팩을 두르고 삼각 김밥으로 허기를 때웠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비염이 도진 것인지 김밥 위로 소스처럼 콧물이 줄줄 덮였다. 뜨거운 우유로 속을 덥힌 시형은 천천히 이제 건물 청소 시간에 맞춰 가면 그만이었다.
그래, 일찍 가서 좀 눈을 감고 있자!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 네, 워싱턴입니다. 미국항공우주국 나사에서 이번에 진행한 프로젝트에 응모한 대한민국 국민 320명을 포함, 세계 1,453,267명의 지원자의 <드림패키지> 레터를 모은 위성이 미국 현지 시각 오후 3시에 워싱턴 발사대에서 대기권으로 올랐습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각자의 소망과 비전을 담은 타임캡슐 형태로서 오늘부터 50년간 지구를 달처럼 공전하게 될 예정인데요, 전 세계에선 육안으로 충분히 북극성 위치의 상방에서 그동안 없었던 별의 정체를 발견할 수 있을 텐데요. 사하라에서 알라스카까지 모든 곳에서 관측이 가능합니다. 아참, 지금 한국이 7시 전 이니까 해 뜨기 전에 볼 수 있으시겠군요. 지금 이 방송을 들으신다면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십시오. 당신의 꿈이 머리 위에서 별이 되어 빛납니다.
아들 녀석이 말했던 그 프로젝트구나!
“새벽배송기사님! 아빠! 뉴스 들었어?”
“응! 잠깐만!”
건물 앞에 서서히 정차하면서 본 장면이 시형을 순간 얼어붙게 했다.
와이프가 건물 관리인과 대화를 하더니 안으로 들어가 청소도구를 챙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그때 문자 메시지가 울렸다. <별꿈여행> 회장이었다.
<모두 입금 완료! 마지막으로 완결지어주신 준규님과 시형님, 땡큐!>
이 놈이 내 것까지?
준규 녀석이 오지랖을 부린 게 확실했다.
“아빠! 내가 거기에 소원 뭐라고 넣은 줄 알아?”
광은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정신의 반은 와이프의 동선을 쫓고 있었다.
동시에 시형은 라이트를 끄고 앉아 자기도 모르게 눈을 돌려 차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에서 나사의 <드림패키지> 별을 찾고 있었다.
갑자기 단톡방의 소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라고요? 준규 형님이 즉사라니요! 흐억!>
<인덕원 사거리에서 빙판 길에 음주차가 신호 기다리던 준규형님 차를...>
<시형 형님! 가까운데 계시죠? 얼른요!>
충격 받아 멍한 시형은 차를 얼른 유턴을 돌려 서둘러 속도를 높였다.
도착한 사고현장은 그야말로 목불인견이었다.
서둘러 앰뷸런스로 달려가자 막 문을 닫으려는 중이었다.
첫 번째 앰뷸런스엔 여자사람 하나가 흰 천을 덮고 있었다.
두 번째 앰뷸런스에 막 옮겨지는 사람으로 다가서자 구급대원들이 막아섰다.
그런데 흰 천 밖으로 나온 저 다리와 팔을 감싼 잠옷은 분명히 곰 그림들이었다.
그렇다면 노동부장관이 취한 채로 운전을?
세 번째 앰뷸런스에 와서야 준규 입에 산소마스크 씌우고 심폐소생술 하는 응급구호사의 바쁜 손길을 마주했다.
점점 힘을 빼는 응급구호사를 뒤로 잡아당기며 시형은 안으로 막무가내로 들어갔다.
의식 없는 준규의 가슴을 압박하고 소생술을 하며 울부짖었다.
“안 돼... 새꺄...사하라 가야지! 안 돼...준규야... 안 돼...”
“자, 이제 그만하십시오. 이미 늦었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안 돼! 안 된다고요!”
시형은 곧 앰뷸런스 밖으로 밀어내는 구호사의 손길에 의해 내쳐졌다. 그러나 앰뷸런스 떠나는 뒷문을 끝까지 잡고 뛰어가다가 시형은 눈길에 그만 미끄러지고 말았다. 넋이 빠진 얼굴로 준규의 탑차가 처박힌 가로등 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다 무릎이 훅 접히던 찰나, 다른 동료 기사가 서둘러 달려와 가까스로 시형을 잡아주었다.
보도 위 눈길에 앉은 두 사람.
“형님! 이거 준규 형님 휴대폰... 첨부파일 형님께 보내고 계셨나 봐요. 저기... 신호 대기하면서. 경찰이 형님 것인지 확인하고 다시 갖고 오래요.”
“......”
“저 미친 흰색 차가 음주운전으로 신호 무시하고 달리다가 준규 형님 차를 받아가지고...죽으려면 혼자 죽지. 개새끼!”
“노동부장관....”
“뭐? 이런 개새끼!”
문자 알림음 소리가 계속 준규의 휴대폰에 울렸다. 피 묻은 액정을 닦고 펼쳐보았다.
준규의 아들이었다.
<아빠! 왜 안 와? 약속했잖아! 아이스크림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그거 안 먹으면 학교 안 갈 거야! 아...빨리!>
시형의 탑차 안에서는 이런 사정을 알 리 없는 광은의 목소리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메일 받았어. 나사에서...흐흐흐...우리 아빠 엄마 힘들지 말고, 할머니 오래 살고, 그리고 내 꿈도...아빠 꿈도 잃지 않게 해달라고... 잘 했지?”
“아빠도 지금 별 보고 있어? ‘넌 내게 이 세상에서 오직 하나 밖에 없는 존재가 될 거야’라고 말해주었잖아, 아빠가! 그러고 보니 아빠 말은 아니네. <어린왕자> 대사니까. 흐흐흐. 하나 밖에 없는 존재인 우리 아빠! 내가 띄운 저 별을 보면서 꿈을 지켜나가자, 아빠!”
“흐... 흐흐흑...”
달려가는 시형의 차 위로 날이 밝아오면서 하늘의 별들도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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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지금 서민들이 살아가는 힘든 삶이 보이네요.
물가는 천정부지로 올라 겨우 겨우 목구멍에 풀칠을 하고,
난방비 폭탄이 무서워서 차디찬 방에서 버티고 있는 혹한의 나날들
오늘도 눈 내리는 미끄러운 길을 달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 등장인물과 많은 사건을 가독성 있게 잘 엮어 내었군요. 굿!!
슬픕니다. 하나님은 아직도 시험 중인가 봅니다.
시형에게 찬란한 별빛이 쏟아지기를~
잘 읽었습니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은
왜 계속 힘들어야하는지
마음이 아프네요
이른 새벽에
잠이 깨어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