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즈버거 안파는 이스라엘 맥도날드…
이스라엘로 가는 비행기에서 내 옆자리에는 삼십 대 중반의 유대인 남성이 앉았다.
기내식으로 비빔밥을 택한 그는 비빔밥에 고추장을 듬뿍 풀었다.
나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한국 음식을 좋아하세요?”
“매콤해서 좋아요.”
“유대인은 음식을 먹을 때도 지켜야 할 율법이 많지 않나요?”
“나는 정통파 유대교인은 아니에요. 성경보다는 과학에 더 의지하죠.
유대 율법에는 쇠고기와 소에서 나오는 우유나 치즈를 함께 먹지 말라고 합니다.
가령 쇠고기를 먹었으면 여섯 시간이 지난 뒤에야 우유나 치즈를 먹을 수 있어요.”
자신은 '여섯 시간이 지나야'라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했다.
대신 소고기와 치즈를 동시에 먹지는 않는다고 했다.
유대교인은 고기와 유제품을 동시에 먹지 않는다.
고기를 먹고 여섯 시간이 지나야만 우유나 치즈를 먹을 수 있다. [중앙포토]
이스라엘 맥도날드에는 왜 치즈 버거가 없을까
“그럼 기내식으로 쇠고기와 치즈가 같이 나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쇠고기를 먼저 다 먹은 다음에 치즈를 먹어야죠.
쇠고기를 다 먹기 전에는 치즈를 먹지 않을 겁니다.”
스스로 과학을 더 중시한다고 말하는 유대인이지만
그에게도 생활 속에 녹아 있는 율법의 영향력은 무척 컸다.
유대 율법에는 고기와 치즈를 동시에 먹지 말라고 돼 있다.
구약 성경에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는
구절이 수 차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유대인에게는 지켜야 할 율법으로 굳어졌고,
고기와 유제품을 함께 먹지말라는 뜻으로 확장됐다.
그래서 이스라엘에 있는 맥도날드에서는 치즈 버거를 팔지 않는다.
아예 메뉴에도 없다. 유대교인은 치즈와 고기를 함께 먹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 왜 고기를 먹고 여섯 시간이 지나야 치즈를 먹을 수 있일까.
왜 하필 여섯 시간일까. 그래야 먼저 먹은 고기가 소화가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면 배 속에서 고기와 치즈가 섞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까지 따질 정도이니 유대 율법이 엄격한 건 사실이다.
유대교는 율법의 종교다.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고, 그런 유대인에게 신은 구원을 준다고 믿는다.
그게 유대인과 하느님 사이의 계약이다. [중앙포토]
유대교는 율법의 종교다.
구약의 모세는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하나님)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다.
율법은 신과의 언약이다. 유대인은 율법을 지키고, 하느님은 구원을 약속한다.
모세가 자신의 아들에게 할례(생식기의 포피를 잘라내는 일)를 행하지 않자
구약의 하느님은 모세를 죽이려 했을 정도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목숨처럼 여기는 배경이기도하다.
2000년 전에도 그랬다.
예수는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이스라엘의 많은 장벽과 싸워야 했다.
그중 하나가 유대 율법이었다.
예수가 설교를 할 때 많은 율법학자들이 찾아와 예수를 공격했다.
“우리의 율법은 이러한데 당신은 왜 그렇게 가르치느냐?” 하고 묻고 따졌다.
예수는 이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했다.
복음서에는 그 장면이 이렇게 기록돼 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복음 5장 17절)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5장 20절)
예수는 십자가를 짊어지고서 이 길을 지나갔다.
예수는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서 나를 따라오지 않는 이는
나의 제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중앙포토]
예수는 분명히 못 박았다. 자신은 ‘폐지’가 아니라 ‘완성’을 위해 왔다고 말이다.
또 사람들에게 “율법학자와 바리새인들보다 의롭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라고 선언했다.
당시에는 굉장히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예수의 말을 뒤집어보면 이렇다.
“지금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들보다 의로운 이들만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온유하게만 들리지만 예수의 말은 유대 율법 사회를 향한 ‘선전 포고’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방식에는 구원이 없다고 했으니 말이다.
예수는 각별한 물음을 던졌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묻지 않는 물음이었다.
예수는 ‘어떻게 해야 율법을 철저히 지킬 수 있나’가 아니라 ‘왜 율법을 지키는가’를 되물었다.
유대인들이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옷의 단추(율법)를 끼우느라 정신이 없을 때, 예수는
“무엇을 위해 단추를 끼우는가?”라고 물은 셈이었다.
그건 유대인들이 망각하고 있던 ‘종교의 첫 단추’였다.
율법은 일종의 고속도로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빠른 길이다.
예수도 율법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복음 5장 19절)라고 했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올리브 동산의 겟세마네. 아름드리 올리브 나무가 인상적이다. [중앙포토]
율법의 목적지는 부산이다.
부산에 도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율법을 지키며 고속도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애쓴다.
그래서 사람들은 율법을 중시한다.
세월이 흐른다.
1년, 2년이 아니라 100년, 200년이 흐르고 1000년, 2000년이 흐른다.
그 와중에 주객이 바뀐다.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다.
율법을 중시하던 사람들은 갈수록 엄격해지고,
율법을 어기는 이들에게 가혹해진다.
어느새 율법 자체가 목적이 돼버린다.
사람들은 이제 부산이라는 목적지를 잊고 만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를 잊어버린다.
고속도로 위를 달리지도 않는다.
얼마나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고 있는가. 오직 그것만을 따진다.
예수 당시에도 그랬다.
유대인들은 ‘부산’을 망각했다.
종착지를 향해 나아가지도 않았다.
그들은 고속도로의 가드레일만 붙들고 있었다.
그게 율법주의였다.
예수는 그들에게 되물었다.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
“어디로 가고자 하는가?”
“당신이 붙들고 있는 가드레일이 목적지인가 아니면 부산이 목적지인가?”
예수는 설교를 통해 그렇게 묻고 또 물었다.
비단 율법만 그럴까.
종교도 마찬가지다.
종교도 하나의 고속도로다.
부산에 닿기 위한 길이지,
종교 자체가 목적지는 아니다.
그럼 물어야 하지 않을까.
‘나의 목적지는 어디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나.
부산인가 아니면 고속도로 자체인가.’
사람들은 종종 착각한다.
주일을 지키고, 십일조를 내고, 교회를 섬기는 것 자체를 ‘부산’이라 여긴다.
거기가 목적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고속도로일 뿐이다.
그 길을 통해 우리는 ‘부산’으로 가야 한다.
고속도로 자체가 종점은 아니다.
예수가 십자가를 짊어지고 지나갔던 '비아 돌로로사(십자가의 길)'. [중앙포토]
2000년 전의 유대인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고속도로의 가드레일만 붙들고 있으면 저절로 부산으로 간다고 말이다.
율법만 지키면 천국에 간다고 말이다.
그러니 예수의 지적이 지독하게 부담스럽지 않았을까.
“우리가 옳아.
우리는 부산으로 가고 있어”라고 철석같이 믿는 이들에게 예수는 “거기는 부산이 아니야.
너희는 도로 위에 가만히 서 있을 뿐이야”라고 지적했으니 말이다.
케빈 레이놀즈 감독의 영화 ‘부활’에서도 예수는 유대 율법 사회를 위협하는 1순위 위험인물로 나온다.
영화에서 유대의 제사장과 사제들은 빌라도 총독에게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예수의 주검까지 철저히 감시해달라며 요청했다.
두려움에 떨면서 말이다.
예수의 메시지는 그만큼 그들의 세계에 위협적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하라고 주장하지도 않았을 터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숨졌다고 전해지는 장소에 성묘교회가 세워져 있다.
그 교회 안에서도 십자가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곳에 세운 십자가 제단이다. [중앙포토]
당시 예수의 가르침은 박제가 되어 굳어가는 율법 종교, 유대교의 심장을 찔렀다.
예수는 천국의 문을 여는 열쇠는 율법이 아니라고 했다.
대신 다른 열쇠를 내놓았다. 그 열쇠의 이름은 ‘자기 십자가’였다.
〈36회에서 계속됩니다. 〉
[백성호의 예수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