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주청의 사랑방 이야기 (330) 삼백냥
밤이 깊었다.
너와집 쪽마루에서 하염없이 팽나무 가지에 걸린 그믐달을 바라보며 연초를 태우던 변 서방이
곰방대를 두드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칠남매가 세상 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마지막 밤, 마누라 옆에 누웠다. 마누라도 그때까지 자지 않고 울고 있었다.
손바닥으로 눈물을 닦아주며
“삼년은 금방 가네.”
마누라 귀에 입을 대고 속삭이며 한손으로 마누라 엉덩이를 움켜잡았다.
산비탈에 콩 심고 조 심어 아홉식구 입에 풀칠하다 맏이와 둘째가 열네살, 열두살이 되자
보잘것없는 밭뙈기 농사는 식구들에게 맡기고 변 서방은 삼년 동안 구리 광산에 광부 일을 하러
멀리 함경도 무산으로 갔다.
삼년이란 세월은 후딱 지나가지 않았다. 고래심줄처럼 질겼다.
갱도가 무너져 광부들이 몰살할 때면 당장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광부 일은 고되고 목숨도 운에 달려 머슴살이 새경보다는 한배 반이 많았다.
죽을 고생을 했지만, 목숨도 건지고 세월도 채워 삼년치 새경을 삼베주머니에 싸서 전대로
말아 허리춤에 차고 마누라 줄 박가분에다가 아이들 선물을 한보따리 단봇짐에 지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것만 같았다.
삼복더위가 푹푹 쪄도 날 더운 줄 몰랐다. 날이 저물면 주막에서 자고 날이 새면 걸었다.
이레째, 머루 고개를 넘다가 고갯마루 약수터에서 단봇짐을 내려놓고 벌컥벌컥 타는 목을
축이고 층층나무 그늘에서 깜빡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서는 서둘러 고개를 내려갔다.
“어~엇!”
변 서방은 얼어붙었다!
하늘이 노래졌다.
전대는 찼는데 돈주머니는 없어졌다.
단봇짐을 벗어 내팽개치고 발길을 돌려 왔던 길을 전력 질주했다.
약수터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당나귀 한마리를 매어두고 말잡이 사동과 노인이 그늘에 앉아 있었다.
변 서방은 두손을 땅에 짚고 꿇어앉아
“나나나나나으리 돈주머니 하나 모모못보셨…?” 혀가 꼬여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누런 삼베주머니에.”
노인네가 돈주머니를 건넸다.
변 서방은 돈주머니를 움켜쥔 채 머리를 땅에 박고 엉엉 대성통곡을 하며
“나으리, 고맙습니다. 나으리~.”
노인네가 변 서방의 등을 두드리며
“일어나시오. 주워서 주인한테 돌려준 것뿐인데.”
정신을 차린 변 서방이 노인네를 바라보니 옥색 세모시 바지저고리에 유건을 쓴 모습이
귀하고 부티나는 분이라 돈을 꺼내 사례할 순 없어 말했다.
“어르신,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디 사시는 어르신인지요?
가을걷이 바쁠 때 소인이 한두달 도와드리겠습니다.”
노인이 빙긋이 미소 지으며“그럴 필요 없소.” 고개를 저었다.
변 서방은 다시 그 노인에게 큰절을 올리고 고개를 내려가다 풀숲에 처박아놓은 선물 단봇짐을 지고
걸음을 재촉했다.
고개를 다 내려가자 마을 어귀에 폭포소리 요란한 용소가 시커먼 물을 빙그르르 돌리고
그 너머 개울엔 새카만 아동들이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냇가엔 주막이 자리 잡고 있어 변 서방은 하도 놀란 하루라서 그날 밤은 일찌감치 그곳에서 자기로 했다.
바로 그때였다.
“사람 살려~.”
한 아이가 주막 안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평상에서 술 마시던 장돌뱅이들이 뛰쳐나가고 변 서방도 따라나갔다.
용소에 아이 하나가 빠져 용소 소용돌이 따라 천천히 돌며 잠겼다 떠오르고 또다시 잠기며 힘이 빠졌다.
아이들은 발을 동동 구르고, 어른들도 있었지만 누구 하나 뛰어드는 사람이 없었다.
변 서방은 헤엄을 칠 줄 몰랐다.
물에 빠진 사람 구하러 들어가면 둘 다 죽는다느니,
용소는 하도 깊어 명주실 한타래를 다 풀어도 닿지 않는다느니,
목숨을 끊은 처녀 귀신이 물속으로 잡아당긴다는 소문이 예부터 내려와 어른들도 겁냈다.
그때
“저 아이를 구해내면 삼백냥을 주겠소!” 크게 고함친 사람은 변 서방이다.
“참말이요?”
젊은이 하나가 나서자
“빨리빨리”라며 변 서방이 방방 뛰었다.
젊은이가 풍덩 뛰어들어 물에 빠진 아이와 잠겼다 나오기를 반복할 때 변 서방이 빼온
주막집 장대 끄트머리가 젊은이 손에 닿았다.
물가로 끌어낸 아이는 축 늘어졌다.
젊은이가 가슴을 계속 짓누르자 울컥 물을 토하며 아이가 눈을 떴다.
젊은이가 변 서방 팔을 잡고 주막으로 갔다.
변 서방은 말없이 전대를 풀어 그 젊은이에게 건넸다.
삼년 동안 목숨 걸고 구리 광산에서 일한 새경 삼백냥을 고스란히 건네주고 나자
아직도 꿈속에서 헤매는 듯 몽롱했다.
그때 흘려버렸던 돈을 주워 변 서방에게 건네줬던 노인네가 얼굴이 벌겋게 상기돼 주막으로 들어오더니
변 서방 두손을 잡고
“의인이요!! 내 손자를 살려주시다니! 이 은혜를…” 한다.
변 서방이 깜짝 놀랐다.
남향받이 산자락 양지바른 집터에 석공들이 기단을 다지고 목수들이 달라붙고
노인이 대들보에 상량문을 쓰고 기와장이들도 손놀림이 재빨라 시월상달에 열두칸 기와집이 솟아올랐다.
“깨갱깽깽.”
사물놀이패가 새집을 돌고 돼지를 잡고 술독을 걸렀다.
변 서방네 아홉식구가 이사를 왔다.
그 노인이 마련해준 기와집으로. 그리고 문전옥답 서른마지기 땅문서도 받았다.
첫댓글 한주를 마무리하는 금요일,,
하루 내내 좋은 일들로만 채워가며
환절기 건강관리 잘하시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