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봉조헌문학상응모작품
성 명: 홍 윤 기
생년월일: 1946년 8월28일 생
주 소: 서울시 성북구 삼양로 16길 길음동 신아 아파트 602호
전 화: 02-2244-5671 HP: 010-6322-5671
약 력:〇2009년 4월 문학저널 신인상
〇 한국방송대학 국어국문과 재학 중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은 율곡 이이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한국 도학의 정맥을 계승하고, 16세기 말인 임란 직전에 義理정신과 務實정신을 실천한 인물이다. 중봉의 위대함은 의병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전의 당시 현실 속에서 국가 위기에 대처하는 도학자들의 현실인식과 대처 양상을 이해하는 데에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기 때문이다. 중봉은 節義와 學問과 經世를 겸비한 眞儒였다. 그는 학문과 군자를 좋아하고 후세에 도학을 전하고자 헌신한 교육자였고, 국가와 백성을 위해 고심한 경세가였다. 중봉은 道德, 義理와 經世를 일관하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고, 修養과 濟民을 실현하기 위하여 時弊를 개혁하고 倭侵에 대비하는 대책을 구체적으로 주장했다. 특히 중봉과 700 義士는 인간 세상의 인도주의가 유린되는 부조리한 시대를 당하여 국가를 구했으며, 국가 존망의 위기와 道의 존망을 같은 문제로 인식하고, 국가와 도의 수호를 위해 殉國, 殉道했다. 그들은 국가와 仁義의 도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다는 의식을 바탕으로 국가와 인도를 수호하는 강렬한 저항정신을 발휘하여 영원한 民族精氣가 되었다. 중봉의 의리사상은 김상헌, 김집, 송시열 등 한국도학파의 선비들에 의해 적극 현창되고 계승되었다. 중봉 조헌과 700 義士의 義擧 정신은 한국 선비정신의 정맥이며, 한국의 미래를 열어갈 고귀한 인간 정신을 담고 있으므로 이들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더욱 현창해야 할 것이다. 또한 중봉 조헌과 700 義士의 순국 정신은 인의에 기초하여 세계 평화를 추구하는 人道精神을 발휘한 것이므로, 그들의 정신은 동북아의 평화와 세계 평화의 정신적 기초가 될 수 있다.
사 진 :
을미년 벽두에 우리를 흥분시킨 소식은 호주에서부터 불어왔다. 우리의 태국전사들이 아시아축구대회결승전에서 2:1로 석패했다는 소식이다. 젊은 우리 선수들은 아쉬움에 펑펑 울었다. 그들의 눈물은 늙은 내게도 전이되어 아내 몰래 눈물을 닦아야 했다. 그들의 눈물도 눈물이거니와 이역만리 호주하늘아래 휘날리던 엄청난 우리 국기가 내 젊은 날을 다시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내 나라는 공기 같은 것이어서 국내에 있을 때는 그 고마움과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데 외국에 나가면 늘 그리워지고 애국가를 듣거나 국기를 보면 울컥하며 코등이 아려온다. 젊음을 주체하지 못하던 스무 살 청년이 생사가 불분명한 이국의 전선에서 국가의 지엄한 명령을 수행하면서 조국이 그립고 어머니가 그리워 향수병을 앓았던 그 시절 우린 진정 애국이 무엇인지 몸으로 깨닳아갔다. 그래서 혹자는 외국에 나가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했었나 보다. 격전을 치룬 우리 선수들이 귀국하고 중계방송을 하던 방송국에서 마침 ‘불멸의 명승부’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하는데 그제목이 ‘1994년 히로시마의 기적’ 이다.
1994년 일본의 히로시마에서 개최되었던 아시아게임에서 우리의 여자배구팀이 선전하여 건국이래. 구기 종목 첫 금메달을 획득하는 가슴 짜릿한 순간을 당시 우리 낭자군의 사령탑이었던 김철용 감독(현 해설위원)과 당시 선수로 뛰었던 장윤희 해설위원이 당시의 감격스런 영상을 실감나게 해설해 주는 화면이다. 우리의 낭자군은 거함 중국을 격파하고 숙적 일본을 맞아 내리 2세트를 내주고 마지막 한 세트만 남긴 벼랑 끝에서 패색이 짙었다. 일본은 아시아 최강을 자랑하며 중국을 상대로 결승전을 치루게되리라 예상해서 한국정도는 안중에두지않았다. 게다가 그들은 이미 2세트를 선취해서 우승을 확신하고 있었다. 객관적인 실력으로 우리는 일본의 상대가 아니었던 때이니 우린 진다고해도 잃을 것이 없었지만 우리의 낭자군은 한일전이라는 숙명의 한판을 이대로 무너질 수 없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게 된다. 당시 선수였던 장윤희 해설위원은 “우리는 이를 갈았다.”고 회상한다. 코트에서 쓰러지는 한이 있어도 질 수는 없다는 오기가 그녀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고 김철용감독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배수진을 친다. 마치 신립장군이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쳤던 그 비장한 마음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다. 정신무장으로 하나가된 우리의 태극낭자군은 몸을 내던지는 투혼으로 그들의 강 스파이크를 받아내고 그들의 진영을 초토화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단 3점만을 내주고 3세트를 뺏어온 우리 팀은 내친김에 4세트 5세트를 확보하면서 마침내 대 역전극을 연출하며 ‘히로시마의 기적’을 완성한다. 20년 전의 스포츠 경기였지만 또 한 번 눈물을 흘려야 했다. 상대가 일본이었기 때문이라는데 누가 이의를 달겠는가? 우리에겐 어쩌면 태생적으로 일본에게만큼은 질 수 없다는 DNA가 우리의 혈관 속에 잠재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일본에 대한 恨이 어찌 없으랴 가깝게는 일제36년으로부터 멀게는 임진왜란을 어찌 우리민족이 잊을 수가 있는가? 어쩌면 우리들의 가깝고 먼 친족 중에 그들의 만행으로 희생된 조상들이 없다고 누가 자신 있게 말 할 것인가? 그들의 침략이 있을 때 마다 이 나라의 민초들은 하나가 되어 들불처럼 일어나 저항했고 마침내 불꽃이 되어 산화했다. 조정의 고관대작들이 당리당략에 빠져 정쟁을 일삼고 있을 때 이 나라 우리 땅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의 생명을 던지기를 서슴치 않았던 의병들이 그 얼마였던가? 그 선봉에 서서 의병을 이끌고 목숨을 초개같이 버렸던 의병장 중에 중봉 조헌 선생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