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수행이야기]〈27〉억겁 만겁의 소중한 인연, 부모
부모 인연이 발단돼 백중의식 자리 잡아
“효도시기 놓치지 않아야 한다”
부처님도 부모공양 당위성 강조
명나라를 대표하는 선사 한분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코 운서주굉(1532~1612)이다. 주굉은 27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30세에 어머니 상을 당했다. 주굉은 매우 슬피 울며 ‘어버이의 은혜는 망극하다. 내가 이 은혜를 갚으려면 바로 이 길밖에 없다’라고 생각하고 출가를 결심했다. 1565년 섣달 그믐날, 주굉은 부인 탕(湯) 씨와 차를 마시며 이렇게 말했다.
“은애(恩愛)란 허망한 것이요, 생사는 어느 누구도 대신해 줄 이가 없소. 나는 이 집을 떠나 출가하려고 하니, 그대는 스스로 갈 길을 정하십시오.”
부인은 주굉의 말을 듣고 놀라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당신이 먼저 떠나십시오. 저도 출가할 예정입니다.”
부인 탕 씨는 이생의 마지막 인연이 될 남편을 먼저 보내고, 가산을 정리한 뒤 출가하였다. 그녀는 법명을 ‘주금’이라고 하고 효의암에 살았다. 행실이 청정하고 고귀하여 ‘보살 비구니’라고 불렸다고 한다. 부인은 주굉보다 한해 먼저 입적하였다.
이렇게 부모님이 돌아가시자마자, 부부가 동시에 출가한 예가 또 있는데, 두타제일 가섭 존자이다. 가섭은 일찍이 출가하려는 마음이 간절했으나 부모님의 간곡한 부탁으로 출가하지 못했다. 존자는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가산을 정리해 하인들에게 나누어 주고 부인과 함께 출가자의 길을 걸었다.
32세에 주굉은 서산(西山)의 무문성천 문하에 출가하였다. 출가 후, 주굉은 행각을 하였는데, 행각 중에도 모친의 3년상이 끝나지 않아 걸망 속에 늘 위패를 모시고 다니면서 공양 때는 먼저 어머니께 올리고, 공양을 하였다고 한다.
중국 근현대 선지식 허운(1840~1959)은 양무제의 후손으로, 19세에 출가하였다. 허운은 43세에 절강성(浙江省) 보타산을 출발해 산서성(山西省) 오대산까지 3보1배를 하였다. 절을 하는 목적은 태어나자마자 돌아가신 어머니와 출가로 인해 화병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허운은 3보1배하면서, 3년이 소요됐고 거리로 4000km에 해당한다. 또 허운은 58세에 절강성 영파 아육왕사에서 부모의 은혜를 생각하며, 부처님 사리에 하루 3000배를 하여 100만 배를 채운 뒤, 소지공양을 하였다. 이처럼 스님들의 부모공양은 지극했다.
한국의 효자 스님으로는 진묵(1562~1633)이 있다. 진묵 스님은 홀로된 모친을 사찰에서 모시고 살았다. 어느 날 그의 어머니가 ‘아들이 출가해 대가 끊어졌으니, 내 묘소를 누가 지켜줄 것인가’라고 탄식하자, 스님은 어머니께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스님의 말대로 어머니 묘소가 현재 전북 김제 성모암(聖母庵) 내에 위치해 있는데, 불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졌을 무렵, 몇 차례의 법난이 있었다. 그때마다 승려가 출가함으로써 부모를 봉양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삭발하는 문제가 유교 문화와 충돌하였다. 하지만 석가모니 부처님도 어머니 마야부인을 위해 도리천에 올라가 세 달 가량 머물다 내려오기도 하셨고,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부모의 은혜는 매우 위대하다. 우리들을 안아 길러 주셨고, 수시로 보살펴 시기를 놓치지 않고 병을 살펴주셨기에 저 해와 달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부모의 은혜가 막중하므로 은혜 갚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 비구들이여, 마땅히 부모에게 공양해야 할 것이요, 항상 효도하는 시기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증일아함> ‘선지식품’)
이렇게 부처님을 위시해 스님들이 출가자라고 하여 부모를 멀리한 것이 아니라 인연을 귀하게 여겼으며, 소중한 인연에서 발단되어 후대에 불교에서 백중 의식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정운스님… 서울 성심사에서 명우스님을 은사로 출가, 운문사승가대학 졸업, 동국대 선학과서 박사학위 취득. 저서 <동아시아 선의 르네상스를 찾아서> <경전숲길> 등 10여권. 현 조계종 교수아사리ㆍ동국대 선학과 강사.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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