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123. 신라불교의 전개
대찰 황룡사 완공 등 진흥왕 때 본격 ‘진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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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선암 마애여래좌상> |
사진설명: 경주 남산은 신라 불교유적의 보고다. 7세기경부터 이곳에 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삼릉계곡에 있는 상선암 마애여래좌상 전경. |
신라 제23대 법흥왕 14년(527) 이차돈의 순교로 불교가 공인되기 이전, 불교는 신라 땅에 이미 상당히 퍼져 있었다.
〈삼국사기〉.〈삼국유사〉 등에 의하면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연대는 크게 네 가지설이나 존재한다.
제13대 미추왕 2년(263) 고구려 아도(我道)스님이 신라에 전교하러 온 것(박인량수이전. 삼국유사),
제19대 눌지왕 때(417~458) 사문 묵호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 모례(毛禮)의 집에 도착한 것(삼국사기),
21대 비처왕 때(479~500) 아도(阿道)스님이 시자 3인과 함께 모례의 집에 도착해 전파한 것(삼국사기),
양(梁) 대통 원년(법흥왕 14. 527) 3월11일 아도(阿道)스님이 모례의 집에 왔다가 “정방스님과 멸구자스님이 살해당했다”는 말을 들은 것(해동고승전) 등이 ‘이차돈 순교 이전’ 불교전파를 알려주는 기록들이다.
각각의 기록에 나오는 인물과 사건이 거의 비슷하지만 시대가 너무 달라 정확한 불교전래 연도를 파악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법흥왕 이전에 많은 전법승들이 신라에 전파하러 왔다는 사실”(동국대 김영태 명예교수)은 분명하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당시 신라인들은 불교를 알고 있었고, 신앙을 금해 표면적 신봉은 불가능했지만, 내면적으론 믿는 사람이 생기고 있었다.
시기적으로 신라인들이 불법(佛法)을 이해하게 됐을 그 즈음에 법흥왕(재위 514~540)이 즉위했던 것이다. 〈삼국사기〉 ‘법흥왕조’에 보이는 “왕이 즉위하자마자 불법을 일으키고자 고심했다”는 기록들에서, 즉위 이전에 법흥왕은 이미 불교를 이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차돈 같은 당시 신라를 대표하는 지성인들이 불교를 알고 있었다는 점에서, “일부지역 몇 사람만이 불교를 신봉한 것이 아니라, 많은 신라인들이 불교를 이해하고 있었으리라는 것을 짐작”(김영태)할 수 있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법흥왕은 감지하고 이었기에, ‘국민의 안심입명과 국가의 흥복(興福)을 위해’ 불교를 공인하려 했다. 완고한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 결국 ‘이차돈의 순교’(527년)로 불교는 신라 땅에서 믿을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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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진흥왕 14년(553) 2월 착공돼 17년만인 569년 완공된 신라 최대의 사찰 황룡사가 있었던 터. |
그러면 법흥왕은 무슨 이유로 불교를 받아들이고자 했을까. 아니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근본이념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고구려나 백제에서 불교가 성행하고, 새로운 문물이자 외래사상이기에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려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삼국유사〉 ‘원종흥법’조엔 법흥왕이 불교를 받아들인 이유가 나온다.
법흥왕이 즉위한 이래 “창생을 위하여 수복멸죄(修福滅罪)할 곳을 만들고자 원하였으나 신하들이 왕의 깊은 뜻을 모르고 한사코 반대”하자, 법흥왕은 “내가 대업을 이었으나 부덕해 위로는 음양의 조화가 모자라고 아래로는 백성의 환락이 없기에, 만기(萬機)의 여가에 불법에 마음을 두었던 것인데, 신하들이 모두 따르지 않으니 누구와 더불어 이 뜻을 펴볼 것인가”하고 탄식했다.
“불교야말로 모든 결함과 불완(不完)을 다 보완해주고, 모두를 충족시켜 줄 수 있다고 확신했기에 법흥왕이 그토록 흥법(興法)에 고심했던 것”(김영태)이다.
“국민과 국가에 이익되기에 불교 수용”
죽음을 앞둔 이차돈 역시 “불법(佛法)을 행하게 되면 온 나라가 평안하고, 경세제민(經世濟民)에 진실로 이익이 있다. 내가 불법을 위해 죽는 것은 모든 의(義)와 이익을 일으키고자 함이다”(해동고승전)고 강변한다.
이차돈도 법흥왕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국리민복을 위한 훌륭한 종교이며, 완전한 이상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이런 확신이 없었다면 이차돈이 어찌 스스로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였겠는가.
결국 법흥왕과 이차돈은 “복을 닦고 죄를 없애게 하는 천신(天神)이 받드는 대성(大聖)의 교”(해동고승전)이며, “진리는 심오하고 의와 이(理)를 일으켜 경세제민에 유익하며 국태민안하게 하는 신성한 가르침”으로 불교를 보았다. 그렇기에 불교를 받아들이려 했던 것이며, 국가를 발전시키고 백성들에게 이로운 사상이라는 관점에서 불교를 수용했다.
이웃 나라들이 신봉하고, 특정인에게 유리한 종교라고 수용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와 관련, 김영태 교수는 ‘신라불교 수용의 국가적 이념’이란 논문에서 “국가와 국민을 이익되게 한다는 근본사상이 신라불교의 방향이 되고 한국불교이념의 기초가 된다”고 분석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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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남산의 불적은 하나 하나가 다 아름답고 귀중하다. 용장계곡 탑상곡의 용장사지 3층석탑. |
반면 한림대 이기백 교수는 ‘삼국시대 불교 수용과 그 사회적 의의’란 글에서 “불교는 우리나라에서 중앙집권적 귀족국가가 성립.발전.완성되어가는 그런 과정에 전래되어 수용 발전된 것”이라며 “불교의 수용은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형성의 관념 형태적 표현이었다”고 지적한다.
“중앙집권적 귀족국가 형성과 불교의 수용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문제”라고 이기백 교수는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이 교수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적지않은 학자들은 불교의 종교적 측면을 무시한 결론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법흥왕때 공인된 불교는 진흥왕대(540~576)에 이르러 신라적 특색을 가지며 본격적으로 발전한다. 진흥왕 5년(544) 신라 최초의 사찰 흥륜사가 완성됐고, 같은 해 3월엔 사람들에게 출가가 허락됐다.
즉위한 지 10년 되던 549년엔 양나라 사신이 유학승 각덕스님과 함께 부처님 사리를 가져오자, 진흥왕은 흥륜사 앞길에서 맞이한다. 551년에는 고구려에서 온 혜량(惠亮)스님을 승통(僧統)으로 삼아 불교제반사를 통관하게 했다. 혜량스님은 신라에서 처음으로 백고좌법회와 팔관회를 열어, 신라불교를 새롭게 변모시켰다.
진흥왕이 세운 사찰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것은 황룡사. 진흥왕 14년 2월 월성 남쪽에 새로운 궁전을 지으려는데, 마침 그 땅에 황룡이 나타났다. 진흥왕은 궁전 대신에 절을 짓기로 결정하고 공사를 시작, 17년만인 569년 모든 공사를 마무리했다.
황룡사 창건 뿐아니라, 이곳에 봉안됐던 장육존상 또한 신라불교를 이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불상. 황룡사 연기설화에 따르면 황룡사 장육존상은 옛날 인도의 아쇼카왕(기원전 270~235)이 큰 배에 실어 바다에 띄웠다는 황철(黃鐵) 5만7000근과 황금 3만분으로 만들었다 한다.
인도를 통일했던 아쇼카왕이 부처님 생존시 태어나지 못한 것을 한탄하며 부처님 진신에 공양하고 싶어, 금과 철을 모아 불상을 조성하려 했다. 세 번을 조성했으나 모두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금과 철을 배에 싣고, “인연 있는 나라에 가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는 글과 함께 바다에 띄웠다.
배가 신라에 오는 동안 어느 나라에서도 불상이 만들어지지 못했다. 오직 신라 진흥왕이 조성하자, 훌륭한 불상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연기설화의 주된 내용이다.
이 설화는 신라가 부처님과 인연 있는 나라 즉 불연국토(佛緣國土)라는 것과, 진흥왕이 이뤄놓은 불교가 인도 아쇼카왕이 후원한 불교 보다 더 우수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설화에 다름 아니다. ‘진흥왕의 흥불(興佛) 업적’이 그만큼 뛰어났던 것이다.
법흥왕.진흥왕을 거치며 발전을 시작한 신라불교는 이후 수많은 불상 조성과 사찰 건축, 원효.의상스님 등 위대한 스님들의 출현으로, 한국불교사상사와 불교사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신라불교의 독창성과 우수성은 경주에 가면 곳곳에서 볼 수 있지만, 특히 경주 남산에 올라가면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남산은 신라인들의 꿈꾸었던 불국정토였기 때문이다.
남산엔 寺址 등 147곳, 확인된 불상만 118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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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 |
고위산(494m).금오산(468m) 2개의 봉우리로 이뤄진 남산은 남북 8㎞.동서 12㎞ 크기. 완만한 동남산과 골이 깊고 가파른 서남산으로 크게 나눠진다.
남산 동쪽엔 낭산.명활산, 서쪽엔 선도산.벽도산.옥녀봉, 북쪽엔 금강산.금학산이 솟아 있다. 게다가 토함산 줄기가 동해를 막는 성벽 구실을 하고 있어, 남산은 옛 서라벌을 지키는 훌륭한 요새였다.
남산은 또한 신라불교 유적의 보고다. 신라에 전파된 불교는 숭산신앙(崇山信仰).암석신앙(巖石信仰)과 연결, 남산에 집중적으로 불상이 조성됐다.
양질의 화강암이 다량 분포한 남산엔 7세기경부터 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했고, 8.9세기를 지나며 불상 양식은 다양하게 변화.발전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펴낸 〈경주 남산〉(2002년 발행)에 의하면, 남산에 산재한 60여 개의 계곡과 산기슭에 147개소의 사찰이 조영됐고, 주변 바위에는 환조.부조.선각(線刻) 형태의 각종 불.보살상이 조성됐다.
지금까지 확인된 불.보살상은 총 107위(位). 여기에 발굴.수습된 소형의 금동.청동불 11위를 포함하면 남산의 불상은 총 118위에 달한다. 불.보살상이 가득 찬, 신라인들의 정토가 바로 남산인 셈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있는 경주 나정(蘿井. 사적 245호), 신라 최초의 궁궐터인 창림사(昌林寺) 유적, 서쪽 기슭의 포석정지(鮑石亭址. 사적 1호), 신라시대 대표적인 화랑인 김유신의 효와 충절을 엿볼 수 있는 천관사지(天官寺址. 사적 340호) 등이 남산에 있는 것으로 미뤄, 신라 개국 이래 남산은 줄곧 신라인과 호흡을 같이하며 신성시돼온 산이기도 했다. 이곳이 불교전래 이후 정토로 탈바꿈 한 것이다.
경주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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