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작 활동
우치무라는 1893년 『기독교 신도의 위안』 간행에 이어 『구안록』(1893), 『전도의 정신』(1894), 『지리학고』(1894), 『나는 어떻게 크리스천이 되었는가?』(1895) 등을 잇달아 출간했다. 놀라운 다산(多産)이고 오늘날에도 널리 읽히는 명저들이 저작된 시기였다.
『기독교 신도의 위안』의 제3장 ‘기독교 교회에 버림을 받았을 때’에는 ‘무교회’라는 말이 처음으로 나온다. 교회에 다니던 신도가 하나님과 성서가 아닌, 외국에서 도입된 예배 의식 때문에 성직자, 교직자의 중재를 인정하지 않아서 교회의 미움을 사 버림을 받는다. 그러나 오히려 그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가 흰 벽과 붉은 기와 속에 있지 않고 하늘 아래 자연 속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온 우주가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이다. 여기에는 우치무라가 외국의 원조로부터 교회가 독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해서 교회로부터 소외된 체험이 깔려 있다.
『구안록』에서 우치무라는 죄로부터의 탈피를 목적으로 탈죄술(脫罪術)과 망죄술(忘罪術)을 갖가지로 시험한 끝에, 죄는 하나님에 대한 배반이고, 속죄의 예수를 믿음으로써만 구원될 수 있음을 발견한다. 이를테면 우치무라의 신앙고백이다.
『전도의 정신』은 건물이 아닌 우주가 하나님의 교회라고 주장한 우치무라의 ‘무교회론’과 연결된다. 우치무라는 전도자의 자질로서 다방면의 세상 지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전도자는 우주 만물에 관한 하나님의 진리를 세상에 나타내 보일 직책에 있으므로 전도자가 몰라도 좋을 지식은 이 넓은 우주에 없다는 것이다. 지식이 넓어짐에 따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더욱 깊어지고 지식이 더해짐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더욱 밝히 알게 된다. 그러므로 전도자에게는 다른 누구보다도 학문의 필요성이 절실하다. 신학만을 아는 전도자는 신학생의 교사는 될 수 있을지 모르나, 목수·미장이·농민·서민·학자·정치가 등 평신도의 지도자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치무라는 특히 다음 분야의 지식을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첫째로, 경제학과 사회학 등 사회과학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전도자는 사회의 지도자이며 사회를 하나님이 정하신 진리로 이끌어가는 것이므로 이 사회를 지배하는 원리를 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자연과학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과학은 물질의 원리와 법칙을 연구하는 것이므로 이를 배워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법칙을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셋째로, 인문학, 특히 역사학을 공부해야 한다. 역사학은 인류 발달의 기록이며 하나님의 섭리를 가장 밝히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역사학은 인간성의 폭과 깊이에 대한 이해를 높여 관용의 정신을 갖게 해준다. 역사학은 국민은 인류보다 작은 것이며 인류 전체의 발전은 한 국민의 발전보다 긴요한 것임을 가르쳐 준다. 전도자는 역사학을 통해 시야를 넓히고 인류가 하나라는 것을 알게 된다.
끝으로, 이상적인 전도자가 되려는 사람에게는 성서의 원어를 비롯하여, 충분한 성서 연구가 필요하다. 성서 연구 없이 전도에 나서려는 것은 수학 지식 없이 천문학을 연구하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일이다.
요컨대 우치무라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 성경을, ‘사람’을 알기 위해 역사와 사회과학을, 그리고 ‘자연’을 알기 위해 과학을 연구할 것을 주장한다. 우치무라는 이 세 가지가 합하여 ‘트리니티’(三位)를 이루며, 하나가 빠지면 다른 나머지도 충분히 이해할 수 없게 된다고 말한다. 셋이 합하여 비로소 완전하고 건전한 지식을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지리학고』는 초판 간행 3년 뒤 재판본(1897)부터 『지인론』으로 제목을 고친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인류의 역사를 땅과 사람과의 교섭 속에서 바라본 것이다. 이 책에서 우치무라가 가장 역점을 둔 것은 제9장 ‘일본의 지리와 그 천직’이다. 그는 섬나라 일본이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 대륙을 매개하는 위치에 있다고 보고, 일본이 하나님에게 부여받은 인류 문명사적 사명이 있다고 보았다. 우치무라의 제자인 지리학자 김교신이 「조선지리소고」를 쓰는데 자극제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어떻게 크리스천이 되었는가?』는 우치무라의 전반(前半) 생애의 자서전이다.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삿포로농학교에서의 기독교 입신, 독립 교회 설립, 미국에 건너가 지적 장애아 병원 근무, 애머스트대학에서의 학업 등을 일기를 기초로 해서 쓴 책이다. 이 책은 영어, 독일어, 핀란드어, 스웨덴어, 덴마크어,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었고, 특히 독일에서는 판을 거듭해 인기를 끌었고, 신학자 에밀 브루너, 신학자이자 의사인 슈바이처 등이 애독했다.
일본의 양심
1897년 초 어느 날 일간지 『요로즈초호(萬朝報)』 사장이 우치무라를 필진으로 모시기 위해 찾아왔다. 우치무라는 평생의 사업으로 전도자가 되기로 방향을 이미 정해놓고 있었다. 학교 교사로 근무할 때도 그것이 넓은 의미의 전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문기자라는 직업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속세의 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도 결국 입사하기로 동의한 것은 우치무라의 저작이 출판가에 어느 정도 반향을 일으켜서 펜의 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우치무라는 신문기자로서 ‘펜을 통한 전도’에도 기대를 걸게 되었다.
1897년 2월 14일 『요로즈초호』 제1면 톱에 우치무라의 필진 합류 소식이 실렸다. 우치무라가 얼마나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입사했는지 알 수 있다.
우치무라 간조 씨 입사. 농학사 우치무라 간조 씨는 이번에 당사의 간청에 응하여 『요로즈초호』 편집국에 들어왔다. 진지한 평론가로서 오늘의 사상계에서 어떤 위치를 점하는가는 독자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터이다. 『요로즈초호』는 이 기회에 지상에 몇 가지 쇄신을 단행하여 전진하여 마지않는 본래의 정신을 발휘하고자 한다. 독자가 지켜주기를 바란다.
『요로즈초호』에서 우치무라의 직책은 영문(英文) 지면 주필이었다. 우치무라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아무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당당하게 논평했다. 자신의 주장과 견해가 일본을 대표한다는 심정과 기개로 글을 썼다. 그는 서양 대국의 남부끄러운 비행을 가차 없이 공격했다. 그중 하나가 터키에 항거하여 용감하게 싸우던 작은 나라 그리스를 지지한 일이었다. 극동의 한구석 일본에서 보낸 성원은 멀리 그리스에까지 알려져 아테네의 언론사 『엠프로스(Empros)』가 우치무라의 기사를 취재해 기사로 다루기도 했다. 펜으로 쓴 한 편의 글이 멀리 떨어진 소국을 격려했다는 사실은 우치무라에게도 커다란 보람과 만족감을 주었을 것이다. 우치무라의 기본 입장은, 기독교적인 정의관에 근거해서 세계의 가난하고 억압당하는 소국을 두둔하고, 대국( 그것도 기독교국을 자처하는 대국)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메이지(明治) 사상사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 중 하나는 자유와 민권과 평화의 챔피언들이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잇달아 국가주의와 제국주의의 군문(軍門)으로 항복해 들어가는 모습이다. 청일전쟁 직후 언론인이자 비평가인 도쿠토미 소호(徳富蘇峰, 1863-1957)는 평민주의에서 군국주의로 ‘전향’했다. 그는 어제까지 원수처럼 탄핵했던 정부의 칙임참사관 자리에 올랐다. 그 과정은 너무나 극적이고 노골적이어서 세간의 손가락질과 조롱거리가 되었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은, 1890년 전후 관료 국가주의자들에게 과감하게 공격했던 나카에 조민(中江兆民, 1847-1901), 야마지 아이잔(山路愛山, 1864-1917) 등 기독교인들이, 그로부터 채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일본제국주의의 사상적 나팔수 역할을 스스로 자임했다는 사실이다.
이런 도도한 흐름에 저항하면서 예전 동지들의 전향에 배신감을 느끼며 지켜보던 인물이 있었다. 일간신문인 『요로즈초호(萬朝報)』를 기반으로 활동한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 1871~1911) 등 몇몇 사회주의자들, 그리고 기독교인 중엔 단 한 사람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가 있었다.
우치무라 간조도 결코 처음부터 반전(反戰) 사상가는 아니었다. 그는 청일전쟁(1894) 때 「조선 전쟁의 정당성」이란 논문을 영어로 써서 해외에 널리 호소했을 정도로 적극적인 주전론자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 역시 전쟁에 관한 한 ‘전향자’였던 셈이다. 다만 대부분의 사상적 전향은 객관적 정세에 떼밀려 ‘흐름을 따르는’ 전향인 데 비해, 우치무라의 경우는 반대로 일반적인 사조의 ‘흐름과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청일전쟁의 승리는 국민의 국가적 자부심을 급속히 고양했으며, 굴러들어온 2억 냥(兩)의 보상금은 일본 자본주의에 많은 양의 기름을 부어 일본의 자본주의는 급격히 발전하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우치무라는 승리의 현실에서 비전(非戰)의 논리를 도출했다. 청일전쟁은 일본 국민의 도덕적 타락만 가져왔을 뿐이며, 동양 전체를 위태로운 지경까지 몰고 갔다는 것이다. 청일전쟁에 즈음하여 타올랐던 그의 애국적 열정은 격렬했던 만큼이나 실망과 회한 또한 그만큼 컸으며, 이것은 그대로 전쟁을 부정하는 정신적 에너지로 작용하게 되었다. 1901년 우치무라는 이렇게 썼다. “특히 나의 큰 과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청일전쟁 때 나의 졸렬한 붓을 휘둘러 세계를 향해 일본의 행위를 변호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판에 이르러 그것이 완전히 탐욕을 위한 전쟁이었음을 깨닫고 나는 양심에 대해, 세계 만국에 대해 실로 면목이 없다고 느꼈다. 나는 이후 모든 메이지 정부의 행동을 옹호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의 과감한 노선 변경이었다. 그가 가장 강력하게 비전론을 주장하고, 메이지 정부에 대해 가차 없는 필봉을 휘둘렀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때마침 일본이 제국주의에 대한 식민지 저항을 대표하던 역할에서 벗어나 정반대 방향, 즉 제국주의 노선으로 갈아타던 시기였다. 제국주의 일본은 중국 분할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거대한 국제적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치무라는 영일동맹을 이 같은 전환의 결정적인 조짐으로 보았다. 영일동맹은 영국 제국주의가 보어전쟁(Boer War)에서 위선과 파렴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줄 때 체결되었다.
일장기(日章旗)와 유니언 잭(Union Jack)이 거리에 범람하는 광경을 『요로즈초호』사(社) 집필실에서 바라보면서 우치무라는 이렇게 썼다. “조지프 체임벌린(Joseph Chamberlain) 정부와 동맹하여 일본은 체임벌린의 적을 적으로 삼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 체임벌린과 동맹함으로써 남아프리카에서 그들 자유의 전사들을 적으로 삼게 되었다. 그들의 실망과 낙담을 어떻게 헤아릴 것인가. 그들은 동양에 군자의 나라(君子國)가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 군자의 나라는 사쓰마-조슈 출신의 가장 저열한 자들이 지배하게 되어, 강한 자에게는 굽히고 약한 자는 억누르는 기술에 익숙해졌다.”
그리하여 보어인들이 마지막까지 고투를 계속했음에도 결국 영국군에게 압도당했을 때, 우치무라는 “아, 내가 사랑하는 보어여, 너는 마침내 너의 자유와 독립을 잃어버렸구나. 너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한 자가 일본이라는 것을, 나는 이 일을 생각하면서 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정부의 일본에서 태어난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라고 하며 영일동맹의 의미를 세계사적 연관 속에서 이해했다.
그러나 우치무라는 러일전쟁이 일어난 후에는 출정(出征) 유가족의 원호와 하루빨리 평화를 회복하기 위해 힘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비전론자로서는 이례적인 모습이다. 그는 적극적인 반전운동을 전개하지 않고, 다만 개전 후에도 결코 전쟁을 옹호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확고히 지켰다. 이것은 그의 사상에 일관되게 흐르는 비(非)정치적·반(反)정치적 성향에 뿌리내리고 있다. 정치 지상주의를 배격하는 이런 성향은 무교회 그룹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도쿠토미 소호와 이광수
‘불경사건’으로 직장을 잃고 교토에서 불우한 시절을 지내던 시절, 우치무라는 기독교 저작을 다수 집필하면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우치무라는 한때 저술 활동으로 입신할 것을 고려할 정도도 많은 저작을 출간했다. 그러나 생활은 넉넉하지 않았다. 이 불우했던 교토 시절 우치무라를 도운 인물 중에는 도쿠토미 소호(1863-1957)가 있었다. 우치무라는 수많은 글을 『국민의 벗(國民之友)』에 발표함으로써 생활비를 벌고 그의 필명을 높일 수 있었다. 도쿠토미 소호는 1887년 출판사 ‘민우사(民友社)’를 설립하고 『국민의 벗』을 창간했다. 우치무라는 평생 그의 은혜를 잊지 않았다.
그 도쿠토미 소호가 청일전쟁 직후 군국주의자로 변신해 제2차 마쓰카타(松方) 내각에 내무성 칙임참사관으로 취임했다는 소식을 듣자 우치무라는 그의 ‘변절’에 가차 없는 분노를 터뜨렸다. 『국민의 벗』으로 이름을 날린 ‘민우사(民友社)’의 사장이 정부 관료로 변신했으니, 민우사라는 이름을 ‘관우사(官友社)’로 바꾸라고 빈정댔다. 도쿠토미 소호는 『국민의 벗』을 통해 우치무라를 세상에 알린 은인이었고 우치무라는 그 은혜를 일생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은혜는 은혜이고 그것을 의(義)와 혼동할 수는 없었다.
도쿠토미 소호는 식민지 조선과도 긴밀한 관계를 맺었던 인물이다. 문학평론가 임헌영은 그를 ‘조선의 정신적인 초대 총독’이라 부른다. 언론학자 정일성은 그를 ‘일본 군국주의의 괴벨스’요, ‘선전 선동 정치의 귀재’라고 부른다. 그는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와 막역한 사이로, 조선의 언론을 통폐합했다. 공식 직함은 『경성일보』 감독이지만 사실상 언론 정책 총책임자였다. 언론인의 직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은 데라우치 마사다케 당시 조선 총독에게 식민정책을 조언하는 정책보좌관이나 다름없었다.
데라우치의 조선 통치 시책은 도쿠토미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성일보』에 쓴 「조선 통치의 요의(要義)」에는 그가 만들어낸 ‘민족동화정책’이 요약되어 있다. 총칼로 조선을 짓밟았던 공포의 무단통치로 나아가는 길을 활짝 열어준 ‘조선 통치의 교과서’라 할 수 있다. “통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조선인들이 일본의 조선 통치를 숙명으로 받아들여 일본에 동화되도록 체념케 하고, 만약 제대로 말을 듣지 않을 때는 힘을 사용하라”라는 구절은 그의 민족동화정책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그가 식민지 조선의 언론 감독을 위해 ‘꼬붕(子分)’으로 박아둔 인물이 아베 미츠이에(阿部忠家, 1862-1936)였고, 아베의 눈에 띄어 중용(重用)된 식민지 지식인 청년이 바로 춘원 이광수(1892-1950)였다.
이광수는 1910년 3월 26일 일본 메이지학원 보통부(5학년 과정)를 졸업하고 귀국해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 교사 생활(1910년 4월~1913년 11월)과 중국, 시베리아 등지의 유랑생활 끝에 23살이던 1915년 인촌 김성수의 후원 덕분에 다시 일본 유학을 할 수 있었다. 9월 30일 와세다대학 고등예과에 입학한 그는 이듬해 7월 이 학교를 2등으로 졸업했다. 청년 이광수가 유학 생활에서 경험한 바로는 일본이 너무나 발전해 조선 독립은 도저히 이룰 수 없는 허황한 꿈으로만 느껴졌다. 따라서 그는 일본 눈치를 보아 적당히 처신하며 기회가 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정일성은 춘원의 친일은 이때부터 머릿속에 계산되었으리라고 추정한다.
창작 의욕이 왕성했던 그에게 발표 무대가 눈에 띄었다. 총독부 기관지이자 우리말 신문으로는 국내에 하나밖에 없던 『매일신보』였다. 24살 청년 이광수는 1916년 9월 이 신문에 「대구에서」라는 서간체 기행문을 기고한다. 독립투쟁을 강도 사건으로 조작한 이 글을 『매일신보』는 9월 22일과 23일 이틀로 나누어 실었다. 이 글에서 이광수는 당시 가는 곳마다 화제였던 ‘강도 사건’을 거론한다. 독립운동가 몇 명이 대구의 이름난 친일파 부호 세 명에게 독립자금을 대라고 요구했고, 부호가 불응하자 권총으로 위협한 사건이다. 이광수는 독립투쟁 목적으로 벌어진 이 사건의 주동자들을 파렴치범으로 정죄했다. 임헌영은 「대구에서」가 이광수의 첫 번째 친일 행적을 드러낸 글이라고 평가한다.
이 글 한 편으로 이광수는 출셋길에 오른다. 조선 언론의 사령탑이자 도쿠토미 소호의 ‘꼬붕’인 아베 미츠이에를 감동하게 한 것이다. 이광수는 아베의 소개로 1917년 8월 도쿠토미를 만난다. 이때 도쿠토미는 54살의 중년, 이광수는 25살 청년이었다. 이들의 만남은 도쿠토미가 탄 관부연락선이 도착하는 부산항 부두에서 이루어졌다. 이광수는 미리 부산에 와있던 아베 사장과 함께 마중을 나갔다. 세 사람은 스테이션 호텔 라운지로 옮겨 아침을 먹고 1시간가량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아베는 이광수의 글재주를 극찬하며 『매일신보』에 실린 글들을 자세히 소개했다. 도쿠토미도 이광수의 글을 칭찬하며 맞장구를 쳤다. 그가 이광수를 이처럼 치켜세운 까닭은 이광수의 뛰어난 문장력에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광수를 『매일신문』에 묶어두고 동화정책의 하수인으로 써먹을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도쿠토미 소호의 ‘조선 아들’과 ‘친동생’
1936년 아베가 죽은 뒤 이광수가 일본으로 건너가 민우사에서 도쿠토미 소호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도쿠토미는 이광수의 어깨를 안으며 “자네도 내 아들이 되어주게. 내 조선 아들이 되어주게. 일본과 조선은 하나가 되지 않으면 안 되네. 크게 되어주게. 알겠나?”라면서 마치 아들을 타이르듯 말했다. 그는 이광수가 인사를 하고 돌아가려 하자 의자에서 일어나 이광수의 손을 잡고 “잘해주게. 감옥에 들어갈 일은 하지 말아 주게. 자네는 일생을 문장으로 나아가게. 문장보국(文章報國) 말일세”라고 당부했다. 이광수는 감읍했다.
이광수는 1940년 2월 12일 이름을 가야마 미츠로(香山光郞)로 고치고(創氏改名) 경성부 호적계에 신고한 다음 도쿠토미에게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은 편지로 토로한다.
‘내 자식이 되어다오’라는 선생의 말씀을 들은 지 5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에야 비로소 선생의 간곡한 부탁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조선이야말로 천황중심주의로 나아가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야마토(大和)와 조선 두 민족은 천황을 끈으로 이음으로써 일가(一家)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조선의 올바른 민족운동은 황민화의 한길만이 있을 뿐입니다. 다행히 옛 역사와 문화, 그리고 혈액의 교류는 인식상이든 정치상이든 두 민족의 동일국민화를 자연 복귀로 생각게 해 실로 홀가분한 느낌마저 듭니다.
나이를 초월한 이광수와 도쿠토미의 교제는 일본이 패망하던 1945년까지 계속되었다. 이광수는 조선과 일본이 같은 뿌리라는 신념을 간직한 채 일제를 위해 더욱 있는 힘을 다했다.
이광수가 도쿠토미 소호의 ‘조선 아들’다운 삶을 살았던 반면, 도쿠토미 소호의 친동생 도쿠토미 로카(徳冨蘆花)는 단호한 반(反)제국주의 노선을 걸었다. 그는 심지어 도쿠토미와 형제의 연마저 끊었다. “경세의 수단으로서 형은 제국주의를 취하고 나는 인도(人道)의 대의를 취했다”라고 선언하며 형제지간의 의를 끊겠다는 「고별의 말」(1903)을 공개하고, 성을 고쳐 형 이름의 부(富)자와 달리 갓머리 위의 점을 없애(冨)버렸다.
1910년 5월, 일본은 일제의 조선 침략을 비판하는 진보 인사들을 일망타진하려고 ‘대역(大逆)’ 조작 사건을 일으켜 3심제가 아닌 단심으로 처형한다. 그러자 로카는 명문 도쿄 제일고 변론부가 주관한 특별강연에서, 국가란 모자와도 같아서 “머리 위에 쓰지만, 머리를 지나치게 누르지 않게 해야” 하는데, 머리를 무겁게 하면 모반(謀反)할 수밖에 없다고 열변을 토했다.
“모반이란 반역이고 배반이다. 그럼 무엇을 배반하는가? 낡은 상식을 배반하는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생각할 수 없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해야만 시대가 변하는 것 아니던가. 모반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모반인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스스로 모반인이 되는 것을 두려워해서도 안 된다. 여러분, 우리는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살아가려면 항상 모반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에 대하여, 그리고 주위에 대하여.”
일본 문단은 동생 로카의 인격과 품성, 괴팍한 신앙심, 또는 형에 대한 열등감이 형제간 불화의 원인이었다며 동생의 평화주의를 깎아내렸지만, 도쿠토미 로카를 지지한 인물도 있었다. 기독교 평화사상가 우치무라 간조, 작가이자 사회운동가인 기노시타 나오에(木下尙江) 등이었다. 당시 일본 사회의 거물급 인사였던 도쿠토미 소호와 형제의 의를 끊으면서까지 신념을 고수한 동생 도쿠토미 로카, 그리고 도쿠토미 소호의 ‘조선 아들’로 살았던 이광수, 두 사람의 삶이 엇갈린다. 혼탁한 시대는 의로운 삶과 불의한 삶을 구분하는 시금석이다. 그리고 이런 선택의 시간이 올 때마다 우치무라는 양심 세력과 함께했다. 역사 앞에서 산다는 게 무엇인지를 보여준 삶이다.
일본의 예언자
우치무라가 1898년 6월 창간한 『도쿄독립잡지(東京獨立雜誌)』의 영문 제목은 The Tokyo Independent로 표기되었다. 창간호의 영문 면에는 『구약성서』 「아모스」 3장 8절이 인용되었다. 일본의 예언자로서 기독교 정신에 근거하여 논평하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아니하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아니하겠느냐.
『도쿄독립잡지』는 20쪽 남짓한 작은 잡지였지만 내용은 매우 다채로워서 ‘사회, 정치, 문학, 교육, 종교 등 다양한 문제’를 다루었다. 정부, 군인, 부자, 귀족 등 상류 사회의 부패, 배금주의, 편협한 애국주의를 공격했다. 반면 농민, 어부, 상인, 인력거꾼 등 평민을 벗 삼아 자유, 평등, 세계주의, 고결한 윤리·도덕을 주장했다. 우치무라는 진리가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진리에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식민지 청년 김교신, 함석헌 등이 우치무라를 스승으로 삼았던 이유를 다시 확인한다.
『도쿄독립잡지』 12호(1898년 11월 5일)에는 「우리가 원하는 개혁」이라는 제목으로 다음 7항목을 내세워 우치무라가 일본 사회에 바라는 개혁이 어떤 것인지를 밝혔다.
○군비를 축소해서 교육을 확장할 것.
○화사족(華士族)·평민의 신분제도를 폐하고 전체를 일본 시민으로 칭할 것.
○군인을 제외하고는 위훈(位勳) 제도를 전폐할 것.
○지방에 완전한 자치제를 펴고 자치단체장은 민선할 것.
○정치적 권리에서 금전적 제한을 없앨 것.
○상원을 개조하여 지식수준이 낮은 자가 그 의원이 되지 못하게 할 것.
○번벌(藩閥) 정부의 잔재를 소탕할 것.
우치무라는 “이런 대담한 개혁이 오늘의 정치인이 결행할 수 있을 것으로 믿지 않지만, 하늘이 만일 일본을 버리지 않고 올리버 크롬웰 같은 위인을 우리에게 내린다면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의 말대로 이 개혁안은 당시의 정치인들이 도저히 결행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서 그대로 실행되었다. 군비 축소, 의무교육의 확대, 신분제도의 철폐, 위훈의 폐지, 지사·시장의 민선, 지방자치제, 참의원의 설치 등 ‘크롬웰 같은 위인’의 역할을 맥아더의 ‘일본점령군사령부(GHQ)’가 해낸 것이다. 자체 역량으로 이를 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게 일본 사회의 한계일 것이다.
『도쿄독립잡지』는 청년들의 사적인 불만이나 분노를 공적 분노로 바꾸어 놓았고, 도시 청년뿐만 아니라 농촌 청년 사이에도 많은 독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러한 청년 중에서 나중에 사회주의 운동가가 많이 나왔다. 그러나 독자들 사이에서 차차 자신의 개혁을 돌아보지 않고 바깥세상의 개혁만을 부르짖는 단순한 불평꾼들이 늘어나게 되었는데, 이것은 우치무라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결과였다. 우치무라는 얼마 후 사회주의 개혁운동과 선을 긋게 된다. 『도쿄독립잡지』는 1900년 7월에 폐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