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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 조앤 디디온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로 1934년 캘리포니아 주 새크라멘토에서 태어났다. UC버클리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으며, <보그>가 후원한 에세이 공모전에 당선되어 <보그>의 피처 에디터가 되었다. 미국 정계와 문화계의 가장 예리한 정객으로 통하는 디디온의 명성은 베스트셀러가 된 에세이집 <베들레햄을 향한 경배>와 <화이트 앨범>으로 더욱 확고해졌다. 그녀는 이후 <뉴요커>와 <뉴욕 리브 오브 북스>의 필진으로 활약했다. 저서로는 다섯 편의 소설과 일곱 편의 에세이집이 있으며, 남편 존 그레고리 던과 함께 여러 편의 시나리오를 공동 집필했다. 첫 소설 <강물아 흘러라>는 존과 결혼한 해에 출간되었다. 현재까지 가장 개인적이며, 가장 너그러운 작품으로 기록될 이 책에서 디디온은 이지적인 논리와 섬세한 감성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게 기록될 슬픔의 한 해를 그려낸다.」
[저녁 식탁에서 미망인이 되다]
모든 것이 너무나 평범했기 때문에 나는 그 사건을 실감하거나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거나 극복할 수가 없었다. 인생의 절반쯤에서 우리는 이미 죽어 있다.
인생은 빠르게 변한다. 인생은 한순간에 달라진다. 저녁식탁에서 지금까지의 인생이 끝나기도 한다. 자기연민의 문제.
그 일이 벌어지고 나서 내가 제일 먼저 적은 글이다. 컴퓨터의 MS워드 파일 에 기록된 날짜는 2004년 5월 20일 오후 11시 11분이지만, 아마 내가 파일을 열었다 닫으면서 반사적으로 저장한 시간일 것이다. 5월에는 그 파일을 수정한 적이 없다. 나는 2004년 1월, 그 일이 있고 하루나 이틀, 아니면 사흘 뒤에 이 글을 썼다.
오랫동안 나는 다른 글을 쓰지 않았다. 인생은 한순간에 달라진다. 평범한 어느 순간에.
사실 바로 직전까지 모든 것이 너무나 평범했기 때문에 나는 그 사건을 실감하거나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거나 극복할 수가 없었다. 이제 생각해보면 원래 그런 것이다. 갑작스럽게 재난이 들이닥치면 우리는 이 상상도 못할 일이 벌어지기 조금 전까지 모든 것이 얼마나 평범했는지에 모든 초점을 맞추게 된다. 비행기가 맑고 파란 하늘을 날다 추락했다든지, 일상적인 일을 처리하는 도중에 자동차가 불길에 휩싸였다든지, 아이들이 평소와 다름없이 그네를 타고 있는데 담쟁이덩굴에서 방울뱀이 나왔다든지 식으로 말이다.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2004년 10월 4일 오후다. 지금으로부터 9개월하고도 5일전, 그러니까 2003년 12월 30일 밤 9시경에 내 남편 존 그레고리 던이 뉴욕의 우리 아파트 거실에서 나와 함께 막 저녁 식사를 하러 앉았을 때, 그의 목숨을 앗아갈 중증 관상동맥 질환이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나는 지금 죽음, 질병, 운과 확률, 행운과 불운, 결혼과 아이와 추억, 슬픔, 인생이 끝났을 때 사람들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거나 부인하는 방식, 온전한 정신의 피상적인 측면, 인생 그 자체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이 제멋대로 춤을 추던 그때 이후 몇 주 그리고 몇 달을 설명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비통의 시간]
비통은 파도처럼, 발작처럼 찾아왔고 갑작스런 불안 때문에 일상이 지워졌다. 비통을 겪어본 사람들은 모두 이 과도 현생을 경험한다.
2003년 12월 30일, 화요일
우리는 베즈 이즈리얼 노스 6층의 중환자실에 있는 퀸태나를 보러 갔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저녁을 밖에서 먹을까, 집에서 먹을까 고민을 했다. 매가 불을 지필 테니 집에서 먹자고 했다. 나는 불을 지피고 저녁 준비를 하면서 존에게 술을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스카치위스키를 한 잔 따른 다음 거실로 건너가 습관처럼 벽난로 옆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존에게 주었다. 존이 그때 읽고 있던 것은 테이비드 프롬킨의 <유럽의 마지막 여름: 1914년 대전쟁은 누가 시작했을까?>의 교정지 묶음이었다. 나는 저녁 준비를 마치고, 벽난로와 가깝다는 이유로 단둘이 식사를 할 때 자주 이용하던 거실 테이블에 상을 차렸다. 내가 벽난로를 강조하는 이유는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캘리포니아에서 자랐고, 존과 함께 그곳에서 24년을 사는 동안 벽난로로 난방을 했다. 심지어 여름에도 저녁에 안개가 스미면 벽난로에 불을 지폈다. 벽난로의 불은 우리가 집으로 돌아왔고, 하루 일과가 끝났으며, 밤새도록 안전하다는 의미였다. 나는 촛불을 켰다. 존이 자리에 앉기 전에 술을 한잔 더 마시고 싶다고 했다. 내가 술을 주었다. 우리는 자리에 앉았다. 나는 샐러드를 섞는 데 집중했다. 존의 말소리가 이어지다 끊겼다. 존은 말을 멈추기 전 몇 추인가 몇 분 전에 두 번째 잔에 싱글 몰트 스카치위스키를 따랐느냐고 물었다. 나는 아니라고, 첫 잔과 똑같은 위스키를 따랐다고 했다. “잘했어.” 그가 말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섞으면 안 될 것 같거든.” 그 몇 초인가 몇 분 전에 그는 제 1차 세계대전이 20세기의 분기점이라고 할 만큼 중요한 이유에 대해서도 이야기 했다. 그가 말을 멈추기 직전까지 이야기했던 주제가 스카치위스키였는지 제1차 세계대전이었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내가 고개를 들었던 기억은 난다. 그는 왼손을 든 채 미동도 없이 구부정하게 앉아 있었다. 처음에는 힘들었던 하루의 분위기를 바꾸려고 쓸데없는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내가 “그러지 마”라고 말했던 기억도 난다. 아무 대답이 없기에 이번에는 저녁을 먹다 음식이 목에 걸린 게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하임리크 구급 법을 하려고 그를 뒤에서 힘껏 안아 올렸던 기억이 난다. 그러자 그가 테이블 위로 그리고 다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때 전해지던 무게감도 기억이 난다. 나는 부엌 전화기 옆에 뉴욕 프레즈비티리언 병원의 구급차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을 붙여놓았었다. 물론 이런 순간이 올 줄 알고 붙여놓은 것은 아니었다. 이 아파트의 누군가 다른 사람이 구급 자를 불러야 할 때를 대비해 붙여놓은 것이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을 위해. 나는 전화번호를 눌렀다. 안내원이 숨을 쉬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냥 빨리 와주세요”라고 대답했다.~~~<중략>
내가 응급실 입구에 도착했을 때 환자용 병상은 이미 안으로 사라진 뒤였다. 차도에서 어떤 남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남들은 모두 수술복 차림인데 그 남자만 아니었다. “이분이 부인이신가요?” 그가 운전사에게 물은 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는 담당 사회복지사입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사태를 짐작했던 것 같다. ~~~
“문을 열었는데 녹색 옷을 입은 남자가 보였어요. 그때 눈치를 챘죠.“ ~~~
나는 구급차를 부르고 구급요원들이 도착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렸는지 궁금해졌다. 눈 깜짝할 사이인 것 같았지만(이때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티끌’이라는 구절이 생각났다) 적어도 몇 분은 걸렸을 것이다.
“남편이 죽었군요. 그렇죠?” 의사에게 묻는 내 목소리가 들렸다. 의사가 사회복지사를 쳐다보았다. “괜찮습니다.” 사회복지사가 말했다. “굉장히 침착한 보호자세요.” 두 사람은 커튼이 쳐진 공간으로 나를 데려갔다. 존은 그곳에 혼자 누워 있었다. 그들이 목사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목사가 찾아와 기도문을 외웠다. 나는 고맙다고 했다.
뉴욕병원에서 혼자 돌아왔을 때의 아파트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단어가 ‘정적 靜寂’이다.
나는 프랭크 E. 캠벨에 도착했을 때 부적절한 반응(눈물, 분노, 오즈처럼 힘없는 웃음)을 자제하겠다는 결심이 워낙 확고했던 터라 모든 반응을 차단해 버렸다.
계약서에 서명을 한 사무실에 움직이지 않는 대형 괘종 시계가 걸려 있었던 기억도 난다. 내 옆에 있던 존의 조카 토니 던이 장의사에게 시계가 멈췄다고 말했다. 장의사는 설명할 기회가 주어져 기쁜 듯이, 그 시계는 멈춘 지 몇 년 되었지만 이곳의 전신前身을 기념하기 위한 ‘일종의 기념품’으로 남겨두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는 시계를 일종의 교훈으로 삼는 듯했다.
8개월 뒤, 나는 우리 아파트 관리인에게 도어맨이 12월 30일에 작성한 일지를 보관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날 일지에 기록된 사항은 두 가지였다. 주민들 대부분이 좀 더 따뜻한 곳으로 피신하는 때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평소보다 훨씬 적은 수였다.
메모: 구급요원들이 오후 9시 20분에 던 씨 댁에 도착. 던 씨는 오후 10시 5분에 병원으로 옮겨졌음. 메모: A-B 승객용 엘리베이터의 전구가 나갔음.
비통한 심정이라는 것은 막상 겪으면 예상과 전혀 다르다. 나는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비통하지 않았다. 우리 부모님은 몇 년 동안 점점 기력을 잃으시더니, 아버지는 여든 다섯 번째 생신을 며칠 앞두고, 어머니는 아흔 한 번째 생신을 한 달 앞두고 돌아가셨다. 나는 두 번 다 슬프고 외로웠으며(버림받은 아이는 나이에 관계없이 외로움을 느낀다) 두 분이 겪은 고통과 무기력감 육체적인 수모를 함께하지 못하고 심지어 진심으로 인정하지 못했다는 사실과 하지 못한 말 때문에 지나간 시간이 후회스러웠다. 나는 두 분의 죽음의 필연성을 이해했다. 나는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면서) 평생 두 분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두 분의 죽음은 계속되는 나의 일상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동떨어진 사건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나는 전직 메리놀 교회 신부로 시카고에 살고 있던 친구가 보낸 편지를 받았는데. 그는 내 심정을 정확하게 간파했다.
“부모님의 죽음은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준비하고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마음속 깊숙한 곳을 자극해, 예상치 못했던 반응과 오래전에 사라진 줄 알았던 기억과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우리는 ‘애도의 시간’이라고 부르는 그 막연한 기간 동안 잠수함을 타고 해저로 내려가 때로는 가까운 곳에서, 때로는 먼 곳에서 우리를 강타하는 추억의 폭뢰를 맞으며 조용히 있는 것인지도 몰라.”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나는 잠시 폭뢰를 조심해야 했지만, 그래도 아침이면 자리에서 일어났고 빨래를 맡겼다. 그래도 부활절 메뉴를 궁리했다. 그래도 여건 갱신기한을 잊지 않았다. ‘비통’은 달랐다. 비통에는 거리가 없었다. 비통은 파도처럼 , 발작처럼 찾아왔고 갑작스런 불안 때문에 무릎이 떨리고 앞이 안 보이고 일상이 지워졌다. 비통을 겪어본 사람들은 거의 모두 이 “파도‘현상을 경험한다.
1940년대에 메사추세스 종합병원에서 정신과장을 맡았고 1942년 코코아넛 그로즈 화재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을 숱하게 면담한 에릭 린더만은 그 유명한 1944년 논문에서 이런 현상을 아주 분명하게 정의했다. “20분에서 한 시간 동안 육체적인 고통이 파도처럼 느껴지는 기분, 목이 메고, 숨이 막히고, 한숨이 나오고, 속이 텅 빈 것 같고, 몸에 힘이 없는 느낌. 긴장상태나 정신적인 아픔으로 표현되는, 주관적이고 강렬한 고통. “
나에게 이런 파도가 찾아온 것은 2003년 12월 31일 아침. 사건이 벌어지고 일곱 시간 또는 여덟 시간이 지난 뒤 아파트에서 혼자 눈을 떴을 때였다. 전날 ㅂ마에 운 기억은 없다. 그 순간에는 일종의 쇼크 상태였기 때문에 해야 할 일들이 있다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낯선 두려움]
나는 나머지 신발들을 처분할 수가 없었다. 그가 돌아오면 신발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신발이 없으면 그가 무슨 수로 돌아올 수 있을까?
비통함이 이성을 어지럽히는 힘은 사실 철저하게 연구된 바 있다. 프로이트는 1917년에 발표한 <애도와 우울증>에서 “비통에 잠기면 일상적인 생활태도를 심각하게 이탈하게 된다.”고 했다. 하지만 비통으로 인한 정신착란은 특이한 사례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이 병이나 의학적인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 우리는 이것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극복할 수 있는 문제“라고 믿는다. ”간섭해도 소용없고 심지어 간섭하면 해로운 일“로 간주한다.
멜라니 클라인(1882~1960. 오스트리아출생, 영국의 정신분석학자)은 1940년에 발표한 <애도와 조울증의 관계>에서 프로이트와 비슷한 주장을 했다. “상을 당한 사람은 실제로 아프다. 하지만 이런 심리상태가 워낙 흔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때문에, 우리는 애도로 인한 증상을 병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내 결론을 좀 더 명확하게 설명하자면, 애도의 시간 동안 우리는 변형된 형태의 조울증을 일시적으로 거친 뒤 극복한다고 볼 수 있다.
[마법을 꿈꾸다]
그를 다시 불러오는 것은 처음 몇 개월 동안 나의 은밀한 목표이자 마법이었다. 늦여름이 되자 나는 그를 영영 불러올 수 없다는 걸 깨달았지만 그에게 필요한 옷을 버릴 수는 없었다.
나는 해냈다. 나는 그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가장 공개적인 방식으로 그의 죽음을 받아들였다.
C.S 루이스는 아내가 죽은 뒤 일기 형식으로 <헤아려본 슬픔>을 썼다.
토마스 만의 경우에는 <마의 산>에서 아내의 죽음이 헤르만 카스트로프에게 미친 영향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는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는 자기 안으로 움츠러들었다. 머리가 멍해진 탓에 업무상 실수를 저지르자 카스토르프 앤드 선 회사는 상당한 재정적 손실을 입었다. 이듬해 봄에 그는 바람 부는 부잔교의 창고를 살피다 폐렴에 걸렸다. 산산이 부서진 가슴으로는 열을 감당할 수 없어 하이테킨드 박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닷새 만에 눈을 감았다.”
1967년에 <영국의 의학저널> 4호의 13~16쪽에 실린 리스와 러스킨의 논문은, 친척을 잃은 903명과 그렇지 않은 878명의 통계집단을 6년 동안 비교한 결과 배우자를 잃은 사람의 첫해 사망률이 상당히 높았다고 보고했다. 국립의학연구소에서 1984년에 출간한 <사별>에서는 이처럼 사망률이 높은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금까지 연구결과에 따르면 비통은 여타의 수많은 스트레스 요인처럼 배분비계, 면역계, 자율신경계, 심장혈관계의 변화를 유발하는 경우가 많다. 이 모든 것은 기본적으로 뇌 기능과 신경전달물질의 영향을 받는다.
비통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중에서도 ‘성장’이나 ‘발달’과 연관이 있는, 보다 나은 쪽은 ‘단순비통’ 또는 ‘통상적인 애도’라 불린다. <머크 매뉴얼> 16차 개정판에 따르면, 이와 같은 단순비통도 ‘초기 불면증, 안절부절, 자율신경계 과민반응과 같은’ 전형적인 불안증을 보이지만, ‘기분장애 성향이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보통의 경우 병적인 우울증을 일으키지는 않는다.“ 두 번째로, 학계에서 ‘병적인 애도증’이라고 불리는 ‘복합비통’은 여러 상황에서 발생한다. 병적인 애도증이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상황 가운데 하나는 유족과 고인이 서로 유난히 의지한 경우였다. 컬럼비아대학교 정신의학과의 데이비드 페레츠는 진단 기준을 이렇게 제시했다. ‘유족이 고인에게 상당히 의지했던 이유가 즐거움을 주거나 든든한 버팀목이 되거나 존경하기 때문이었나? ’유족은 고인의 부재로 무기력감을 느끼는가?‘
돌고래들은 짝이 죽으면 음식을 거부했다. 기러기들은 이런 상황에 닥치면 하늘을 날며 울음소리로 짝을 찾는 방향감각을 잃었다.
이 소설의 주제는 믿음일까, 비통일까?
[추억과 탄식의 하룻밤]
사랑하는 누군가를 잃은 사람에게는 그런 표정을 지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표정이 있다. 너무나 약하고 무방비하여 이런 표정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나는 그를 돌려받고 싶었다.
[자기 연민의 문제]
나는 왜 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걸까? 그에게 벌어진 일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일까? 인생은 한 순간에 달라진다. 저녁 식탁에서 지금까지의 인생이 끝나기도 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느낀 적이 있었다. 빛이 만들어낸 효과 때문이었다. 순식간에 얼룩지던 햇살. 땅으로 떨어지던 노란 낙엽들(어디에서 떨어진 걸까? 57번가 서쪽에 가로수가 있었던가?) 황금색으로 반짝이며 쏜살같이 쏟아지던 빛의 폭포. 이후에도 그렇게 화창한 날에 비슷한 효과를 목격한 적이 몇 번 있지만,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일이 있고 찾아온 어느 봄날에 나는 <뉴욕타임스>를 집어 들고 1면에서 곧장 십자말퀴즈로 건너뛰었다. 당시에는 이것이 하루를 시작하는 방식이었고, 신문을 읽는, 아니 신문을 읽지 않는 방법이었다. 나는 원래 십자말퀴즈와 씨름할 만큼 끈기 있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퀴즈를 풀면 예전처럼 건설적인 지각활동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루치의 위로]
남편의 유해를 묻고 위기가 끝날 때 까지 딸아이를 보살핀다는 임무를 완수하고 아파트에 혼자 남은 나는, 내 인생을 다시 시작하려면 어떤 것들이 필요할지 난생 처음 생각에 잠겼다.
퀸태나는 2003년 12월 25일에 베스 이즈리얼 노스의 중환자실에 입원했다. 존은 2003년 12월 30일에 눈을 감았다.
3월 24일 아침. 남편의 유해를 묻고 위기가 끝날 때 까지 딸아이를 보살핀다는 임무를 완수하고 아파트에 혼자 남은 나는, 접시를 치우고 내 인생을 다시 시작하려면 어떤 것들이 필요한지 난생 처음 생각에 잠겼다.
나는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아빠는?’ 퀸테나는 나를 보자마자 이렇게 속삭였다. 3주 동안 관을 꽂고 있었던 터라 성대가 부어서 속삭임조차 들릴락 말락 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했다. 심장 병력이 있었으니 오랜 운이 결국 다한 셈이라고,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사실상 필연적인 일이었다고 강조했다. 퀸테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게리와 내가 안아주었다. 퀸테나는 다시 잠들었다.
[두 번째 상실]
퀸태나가 아스팔트 위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동공이 빛에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아득한 암흑의 동그라미로 확대되어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거실 바닥에 쓰러진 존의 눈에서도 이런 조짐을 느꼈을까?
게리의 말에 따르면, 퀸태나는 구급차 안에서 의식이 또렸했다고 한다. 응급실로 옮겨진 뒤부터 경련을 일으키고 횡설수설하기 시작 했다고 한다.
2004년 3월 25일. 뉴욕 시간으로 저녁 7시 10분. 퀸태나는 “어떻게 될지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에서 회복되었다 쪽으로 오다가 다시 그쪽으로 되돌아갔다.
[새로운 현실]
사람들은 대부분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만 알면 된다고 했다. 해답만 알면 된다고 했다. “예후”만 알면 된다고 했다. 나에게는 해답이 없었다. 나에게는 예후가 없었다.
[기억의 소용돌이]
소용돌이 현상을 피하려면 퀸태나와 존과 관계된 장소를 모조리 파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지만……. 갑자기 쏟아진 눈물로 장님이 된 채 운전을 한 날이 며칠인지 셀 수가 없다.
우리가 1978년부터 88년까지 살았던 브렌트우드 지역은 5주 동안 단 한 번도 찾아가지 않았다. 샌타모니카의 피부과에 가느라 우리가 살던 집에서 세 블록 안에 있는 곳을 어쩔 수 없이 지나가게 되었을 때에도 왼쪽이나 오른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우리가 1971년부터 78년까지 살았던 태평양 고속도로변의 집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자신의 집을 진 무어가 내 주었을 때 나는 비벌리 월셔에 묵어야 하는 이유를 여러 개 댔다.
[그대로 두기]
나는 과거에 저지른 실수를 모조리 떠올려야 하는 걸까? 길거리에서 커피를 마시다가도 지중해는 오염이 되었고 나는 다리에 상처가 있다는 이유로 달빛을 받으며 헤엄치자는 제안을 거절했던 그 밤을 떠올려야 하는 걸까?
UCLA에서 퇴원하고 뉴욕대학교 부속병원 러스크 재활 병동에 6주째 입원해 있었을 때 퀸태나는 UCLA뿐 아니라 러스크로 옮겨졌을 때의 기억까지 온통 흐리멍덩하다 고 말했다.
센프란시스코 종합병원의 중환자실 간호사들은 환자가 임종을 앞두었을 때 모니터를 끈다고 했다. 과거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가족들이 죽어가는 환자보다 모니터 화면에 집중하기 때문이었다.
왜 그렇게 기관형성술을 반대했는지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존이 죽은 이후 형성된 미신에서 비롯된 저항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퀸태나는 기관형성술을 받지 않아야 다음날 아침이면 식사를 하고 말을 하고 퇴원할 수 있을 만큼 괜찮아질 것이다. 기관 형성술을 받지 않아야 주말이면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기관형성술을 받지 않아야. 정신 나간 소리 같지만 내가 그런 상태였다.
“모든 게 평소와 다름없다가 별의별 일들이 생기고 그렇잖아.” 한 사람이 말했다.
퀸태나는 4월의 첫날인 목요일 오후에 기관 형성술을 받았다.
어느 시점에 이르자 나는 의사들을 인솔하는 양치기 개라도 된 것처럼 부종이 생기면 한 인턴에게 알리고, 소변 배양을 통해 도뇨관에 피가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또 다른 인턴을 일깨우고, 다리의 통증이 색전때문은 아닌지 도플러 초음파로 알아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초음파검사 결과 다시 혈전이 형성중인 것으로 밝혀지면 당장 전문가를 불러달라고 끈질기게 요청하게 되었다. 나는 원하는 전문가의 이름을 적었다. 그에게 직접 전화를 하겠다고 나섰다. 이로 인해 나는 UCLA의 젊은 의료진 사이에서 달갑지 않은 인물이 되었지만(그중 한 명은 보호자 분께서 직접 처리하실 생각이면 저는 빠지갰습니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그래도 자괴감을 덜 수 있었다.
나는 과거에 저지른 실수를 모조리 떠올려야 하는 걸까? 언덕에 자리 잡은 토니 리처드슨의 집에서 생트로파로 내려가 길거리에서 커피를 마시고 저녁거리로 생선을 사던 때가 어쩌다 생각나면, 지중해는 오염이 되었고 나는 다리에 상처가 있다는 이유로 달빛을 받으며 헤엄치자는 제안을 거절했던 밤을 꼭 떠올려야 하는 걸까? 초처기즈 벤드의 쌈닭이 생각나면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던 그 먼 길과 샌디에고 고속도로 근처의 정유소를 숱하게 지날 때마다 우리 둘 중 어느 한 사람이 저질렀던 말실수를 꼭 떠올려야 하는 걸까? 대화가 끊겼던 기억은 어떻고? 상대방이 대화를 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은 또 어떻고?
4월말이 되자 수술 후 충분한 시간이 지났으니 비행기를 타고 뉴욕으로 돌아가도 되겠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애도의 시간]
내가 무엇을 포기하면 존과 이런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내가 무엇을 포기하면 존과 대화라는 걸 나눌 수 있을까?
2004년 퀸태나가 5월과 6월을 지나 7월 중순까지 러스크 병동에 있는 동안 나는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다.
오후 느지막한 무렵이 되면 거의 매일 이스트 34번가로 문병을 갔지만, 퀸태나는 아침 8시부터 오후 4시까지 치료를 받았기 때문에 6시 반이나 7시면 녹초가 되어 있었다. 그 아이는 의학적으로 안정적인 상태였다. 음식을 먹을 수도 있었고, 급식 튜브는 여전히 꽂혀 있었지만 불필요한 도구였다. 오른쪽 팔과 다리도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치료가 없는 주말이면 게리가 퀸태나를 데리고 나가 점심을 먹고 영화를 보았다.
퀸태나는 건강이 회복되기만 하면 다시 독립할 단계에 도달해 있었다. 나는 여름동안 나도 그런 단계에 도달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일에 집중할 수는 없었지만 집을 치우고, 일을 정리하고, 열어보지 않은 우편물을 처리할 수는 있었다. 이로써 이제 겨우 애도의 첫 단계를 시작한 셈인데, 나는 그걸 모르고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비통해했을 뿐 애도하지는 못했다. 비통은 수동적이었다. 비통은 저절로 생기는 감정이었다. 애도는 비통한 마음을 처리하는 행위이자 주의와 집중을 요하는 일이었다. 그때까지 나에게는 주의를 삭제하고, 떠오르려는 생각을 떨치고, 새로운 아드레날린으로 하루의 위기를 감당해야 하는 시급한 이유가 있었다. 내가 지난 겨울동안 귀 기울여 들은 소리라고는 “U-C-L-A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뿐이었다.
나는 비로소 첫걸음을 내딛었다. 로스 안젤레스에 있는 동안 배달된 편지와 책과 잡지들 중에는, 존과 프린스턴대학교를 함께 다닌 동창생들이 50주년 동창회를 얼마 앞두고 두툼하게 만든 <54년의 열굴들>이 있었다. 나는 존의 소개를 찾아보았다. “윌리엄 포크너는 모름지기 작가라면 부고에 ‘그는 책을 썼고, 그러다 눈을 감았다’라는 말이 실려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글은 부고가 아니며(2002년 9월 19일 현재로서는)나는 여전히 책을 쓰고 있다. 따라서 나는 포크너의 말을 따를 생각이다.”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글은 부고가 아니며, 2002년 9월 19일 현재로서는. 나는 <54년의 얼굴들>을 덮었다.
눈을 감기 하루인가 이틀 전날 밤에 존은, 얼마 전에 출판사로 보낸 소설 <잃을 게 없다>에서 죽은 등장인물이 몇 명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는 작업실에 앉아 그들의 명단을 작성했다. 나는 그가 놓치고 지나간 한 명을 추가시켰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몇 개월이 지났을 때 나는 그의 책상에서 메모가 적힌 수첩을 집어 들었다. 그 수첩에 아주 희미한 연필로 명단이 적혀 있었다.
연필자국이 왜 이렇게 희미한 걸까? 나는 궁금해졌다. 왜 흔적이 거의 남지 않은 연필로 쓴 걸까? 그는 언제부터 자신을 고인으로 간주하기 시작한 걸까? “흑과 백처럼 분명히 구분할 수는 없죠.” 1982년에 생과 사의 경계에 대해 물었을 때 로스안젤레스 시더스-시나이 병원의 젊은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시더스의 중환자실에서 전날 밤 심하게 목이 졸린, 닉과 레니의 딸 도미니크를 지켜보고 있었다. 도미니크는 잠든 사람처럼 누워 있었지만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보조 장치에 대해 숨을 쉬는 상황이었다.
존과 내가 결혼식을 올렸을 때 도미니크는 네 살이었다. 도미니크는 퀸태나의 파티를 여러 차례 감독하고ㅡ 졸업파티 드레스를 함께 고르고, 우리가 다른 지방으로 출장을 떠나면 곁에 있어준 사촌언니였다. 장미는 붉고 제비꽃은 파랗고(발렌타인데이 카드에 주로 적는 구절이다: 옮긴이). 우리가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면 퀸태나와 도미니크가 쓴 카드가 식탁에 올려놓은 꽃병 밑에 놓여 있었다. 엄마가 안 오셨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도미니크 언니도 그렇대요. 사랑해요. 행복한 어버이날 보내세요. D&Q.
의사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도미니크는 그 중환자실에서 살아 있었다. 보조 장치의 도움 없이는 살아 있을 수 없었지만, 그래도 살아 있었다. 그것이 백白이었다. 그녀의 조직은 병원 측에서 보조 장치를 끈 지 몇 분 뒤 기능을 정지했고 그제야 도미니크는 고인이 되었다. 그것이 흑黑이었다.
고인에 대해서는 희미한 흔적도, 연필로 쓴 메모도 없었다. ‘그가 눈을 감기 하루나 이틀 전날 밤’이나 ‘1주나 2주 전’에 남겨진 희미한 흔적이나 연필로 적은 메모는 모두 결정적으로 ‘죽기 전’의 기록이다. 그것이 경계선이었다.
나는 UCLA에서 집으로 돌아온 뒤 늦봄과 여름 내내 이 경계선의 갑작스럽고 결정적인 측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나와 가깝게 지내던 친구 캐럴릴 릴리벨드가 5월에 슬론-케터링 기념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토니 던의 부인인 로즈메리 브레슬린은 6월에 컬럼비아-프레즈비티리언에서 눈을 감았다.
두 사람 모두 해방감과 안도의 한숨과 문제 해결의 표현으로 오해 사기 십상인 ‘오랜 투병생활 끝에’라는 말이 적용되는 경우였다. 캐럴린은 몇 개월 전부터, 로즈메리는 서른두 살이던 1989년부터 오랜 투병생활을 하는 동안 늘 죽음의 가능성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닥쳤을 때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공허한 상실감은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흑과 백의 문제였다. 두 사람 모두 마지막 1초까지 살아 있다 눈을 감았으니까.
어느 날 나는 <알케스티스>를 다시 읽어야 할 것 같은 충동을 느꼈다. <알케스티스>는 열여섯 살인가 열일곱 살 때 유리피데스(Euripides)에 대한 보고서를 쓰면서 읽은 것이 전부인데, 기억을 되살려보니 이 ‘경계선’의 문제와 연관성이 있었다. 나는 <알케스티스>의 내용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생과 사의 이동을 다룬 부분이 특히 훌륭했다.
죽은 자가 정말 되돌아온다면 어떤 진실과 함께 올까? 우리는 그들을 마주할 수 있을까? 그들을 죽게 내버려두었던 우리가? 청명한 햇살은 내게 존을 죽게 내버려두지 않았다고, 나에게는 그럴 만한 힘이 없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고 있을까? 존은 믿고 있을까?
살아남은 사람들은 과거를 돌이키다 못 보고 지나친 징조들을 발견한다. 그들은 죽어버린 나무와 자동차 보닛 위로 철퍼덕 내동댕이쳐진 갈매기를 떠올린다. 그들은 상징과 더불어 산다. 그들은 쓰지 않는 컴퓨터로 쏟아져 들어온 스팸메일, 고장 난 삭제 키, 삭제키를 바꾸기로 한 가상의 유기행위에 의미를 부여한다. 내 자동응답기에서는 아직도 존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지금 존의 목소리로 녹음되어 있는 것은, 자동응답기를 마지막으로 설정한 날 누가 옆에 있었느냐에 따른 임의적인 결과지만, 나는 이제 응답기를 다시 녹음해야 할 때가 되면 그를 배신하는 듯한 기분을 떨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날엔가 나는 존의 작업실에서 통화를 하다, 그가 책상 옆 테이블에 항상 펼쳐놓았던 사전의 페이지를 아무 생각 없이 넘겼다. 그러다 내가 한 짓을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찾아본 단어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내가 페이지를 넘기는 바람에 메시지가 사라져버린 건 아닐까? 내가 사전을 건드리기 전에 이미 메시지가 사라져버렸을까? 내가 메시지를 거부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남편도 죽을 때 그런 경험을 했을까? ‘사고의 필연적인 결과를 깨닫고 찰나의 공포를 느끼다 일순간에 영원한 어둠이’ 찾아왔을까? 어느 날 ㅂ마에 벌어진다는 점에서 심장마비는 기본적으로 불의의 사건이었다. 갑작스러운 경련으로 관상동백에 쌓여 있던 플라크가 터지고, 허혈이 뒤를 잇고, 산소를 빼앗긴 심장이 심실세동을 일으키고. 그런데 그게 어떤 경험이었을까? ‘찰나의 공포였을까? ’영원한 어둠‘이었을까? 그는 <하프>를 집필하면서 이런 일을 정확히 직감했을까? 어떤 대상을 정확히 기록하거나 인지했는지 확인할 때 우리가 흔히 쓰던 표현대로 ’제대로 감을 잡았을까‘?’영원한 어둠‘ 운운은 어떻게 된 일일까?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사람들은 항상 ’하얀 빛‘을 보았다고 하던데, 쓰고 나서 생각해보니, 엉뚱하게 내세의 증거이자 초월자의 상징이 된 이 ’하얀 빛‘은 사실 뇌로 공급되는 혈액의 양이 줄면서 산소가 결핍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혈압이 떨어진 사람들은 기절하기 직전에 “ 사방이 새하얗게 변했다“고 말한다. 내출혈을 일으켜 출혈이 심각한 지경에 이른 사람들은 ’백짓장처럼 하얗게‘ 변한다.
1987년에 있었던 일에 대한 존과 나의 관점이 달랐던 기억이 난다. 그는 사형선고를 이미 받은 상태에서 형 집행이 잠시 보류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1987년에 혈관형성술을 받은 뒤 어떤 식으로 죽게 될지 이제 감이 잡힌다는 말을 종종 입에 올렸다. 내가 보기에는 타이밍이 기가 막혔고, 중재가 성공적이었으며, 문제가 해결되었고, 조직이 고쳐졌다. “당신이 어떻게 죽을지는 아무도 몰라. 나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이렇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그의 관점이 훨씬 현실적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선물]
내 생일날 존은 나에게 큰 소리로 책을 읽어주었다. 그는 책장을 덮으며 내게 말했다. ‘다시는 글 솜씨가 없네. 어쩌네. 그런 말 하지 마. 이게 당신한테 주는 생일선물이야. “ 그때 그는 살날이 25일 남아 있었다.
나는 존에게 꿈 이야기를 즐겨 했다. 꿈을 이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꿈을 잊고 맑은 정신으로 하루를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나한테 꿈 얘기 하지 마.” 아침에 일어나면 그는 이렇게 말했지만 결국에는 귀를 기울여 주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나는 더 이상 꿈을 꾸지 않았다. 나는 초여름이 되었을 때부터 그 꿈이 있고 처음으로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제는 존에게 들려줄 수가 없으니 혼자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집에서 혼자 저녁을 보내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일이 있다는 핑계로, 8월 즈음에는 실제로 일을 시작했지만 밖으로 나가 나를 노출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불운과 불안]
남편이나 부인이나 아이를 잃은 사람은 생각해 본다. 그들은 하나같이 세상에 노출된 벌거숭이 같았다. 이제 생각해보니 모두들 연약해 보였다. 불안해 보였다.
여름의 언젠가부터 나는 연약하고 불안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샌들이 보도블록에 걸리면 넘어지지 않게 몇 걸음 껑충껑충 뛰어야겠지? 만약 뛰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만약 넘어지면 어떻게 될까? 어디가 부러질까? 다리를 타고 흐르는 피를 누가 보게 될까? 누가 택시를 잡아줄까? 응급실에서 누가 내 곁에 있어줄까? 집으로 돌아왔을 때 누가 옆에 있어줄까? 나는 더 이상 샌들을 신지 않았다. 퓨마운동화 두 켤레를 사다놓고 그것만 신고 다녔다.
나는 밤새도록 불을 켜놓기 시작했다. 집 안이 컴컴하면 일어나서 메모를 하거나 책을 찾거나 스토브를 껐는지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집 안이 컴컴하면 나는 꼼짝 않고 누워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이 떨어져 나를 때린다든지, 현관 입구의 깔개가 미끄러져 내가 넘어진다든지. 식기세척기 호스에서 물이 새 부엌이 잠긴다든지, 스토브를 껐는지 확인하러 불을 켠 사람이 그 때문인지 감점된다듣지 등등의, 집에서 벌어질 수 있는 온갖 사고를 상상할 것이 분명했다.
[또 하나의 소용돌이]
날마다 조금씩 더 사랑 한다. 존은 결혼식 날 딸아이와 함께 단상으로 걸어가기 전에 이렇게 속삭였다. 날마다 조금씩 더. 나는 그가 사라진 뒤 매일 밤낮으로 이렇게 속삭였다.
나는 이 모든 풍경을 존과 함께 감상했다. 나 혼자 어떻게 파리에 갈 수 있을까? 나 혼자 어떻게 밀라노, 호놀룰루, 보고타에 갈 수 있을까? 나는 보스톤 조차 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민주당 전당대회가 시작되기 1주일쯤 전에 <뉴욕타임스>의 테니스 오버바이가 스티븐 W. 호킹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더블린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한 호킹 박사가 블랙홀이 삼킨 정보는 복구할 수 없다는 지난 30년간의 주장이 틀렸다고 말했다는 기사였다.
호킹 박사의 주장이 맞다면 근대물리학의 기본원리에 위배되며 필름을 거꾸로 돌려, 이를테면 두 자동차가 충돌하거나 별이 붕괴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 사건을 언제든지 재구성할 수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기사를 오려 보스턴으로 들고 갔다.
나는 2003년의 마지막 날 아침, 그가 죽은 다음날 아침부터 시간을 되돌리려고, 필름을 거꾸로 돌리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8개월이 지난 2004년 8월 30일까지 나의 의도는 변함이 없었다.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면 그 8개월 동안에는 다른 필름으로 대체하려 했지만, 지금은 자동차의 충돌과 죽은 별의 붕괴를 재구성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영원히 알 수 없는 것들]
존이 ‘AAA단편적인 생각들’파일을 마지막으로 수정한 시각은 2003년 12월 30일 오후 1시 8분. 그가 죽은 날이다. 그가 그날 오후 1시 8분에 덧붙이거나 수정하거나 저장한 것이 무엇인지 나는 알 길이 없다.
존이 사는 게 재미없다고 했을 때 나는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고 있다고 했다.
그가 하고 싶어 한 말은 1980년 12월에 인도네시아에서 만난 조와 거트루드 블랙 부부와 연관이 있었다.
오랫동안 존은 가장 바람직한 미국인의 전형으로 조와 거트루드 블랙 부부를 종종 거론했다. 존이 생각하기에 두 사람은 실천정신의 상징이었다. 그가 원하는 삶의 표상이었다. 존은 죽기 며칠 전에도 두 사람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조와 거트루드 블랙이 되고 싶어 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우리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날 아침 십자말 퀴즈에 나온 설명은 ‘시간을 낭비하다’였다. 이 말이 설명하는 단어는 ‘허송세월’이었다. 우리는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을까? 존은 우리가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했을까? 사는 게 재미없다고 했을 때 나는 왜 그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을까? 나는 왜 생활을 바꾸려고 시도하지 않았을까?
[상실, 아무도 모르는 곳]
비통함이란 막상 겪기 전에는 어떨지 아무도 모르는 곳이다. 비통한 일이 닥치면 저절로 치유 되겠거니 상상한다. 끝없는 부재와 공허, 무의미 그 자체를 경험하게 될 잔인한 순간의 연속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테니.
알고 보니 비통함이란 막상 겪기 전에는 어떨지 아무도 모르는 곳이다. 우리는 가까운 사람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상상 속의 죽음이 현실화되고 며칠이나 몇 주가 지난 뒤는 생각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그 며칠이나 몇 주의 본질을 오해한다. 우리는 갑작스러운 죽음이 닥치면 충격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충격이 심신을 말소시켜 혼란을 야기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상실감으로 쓰러지고 무너지고 미쳐버릴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침착한 보호자’가 남편이 곧 돌아오면 신을 구두가 있어야 한다고 믿을 만큼, 말 그대로 미쳐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우리는 비통한 일이 닥치면 저절로 ‘치유’될 거라고 짐작한다. 시간이 지나면 점점 나아질 거라고. 상을 당하고 며칠 동안이 가장 끔찍할 거라고. 우리는 장례식 때가 가장 힘들고, 그 이후에는 예상했던 대로 치유과정이 시작될 거라고 짐작한다. 장례식을 앞둔 상황에서는 ‘끝까지 견딜’ 수 있을지, 올바르게 대처할 수 있을지, 죽음을 맞이하는 올바른 자세를 말할 때 늘 거론되는 ‘의연함’을 보일 수 있을지 걱정될 거라고 추측한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할 거라고 추측한다. 과연 조문객들을 맞이할 수 있을까, 식장을 떠날 수 있을까, 옷을 갈아입을 수나 있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이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 방법이 없다. 장례식 그 자체는 진통제이며, 다른 사람들의 보호와 장례식의 무게와 의미에 파묻혀 일종의 최면성 퇴화를 경험하는 때라는 사실을 알 방법도 없다.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이후에 찾아오는 끝없는 부재와 공허, 무의미 그 자체를 경험하게 될 잔인한 순간의 연속(상상 속의 비통함과 실질적인 비통함의 가장 큰 차이가 이런 것들이다)을 알 방법도 없다.
어렸을 때 나는 ‘무의미’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당시에는 무의미가 세상에서 가장 부정적인 단어였다. 나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추천한 분야에서 몇 년 동안 의미를 찾으려다 실패한 뒤, 지질학에서 찾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결국 성공했다. 덕분에 성공회의 장황한 문구 속에서도 의미를 찾게 되었는데, 특히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영광송의 일부이다: 옮긴이)는 지구의 끊임없는 변화, 해변과 산의 지속적인 침식작용, 산과 섬을 토해내기도 하고 마찬가지로 산과 섬을 가져가버리기도 하는 지질구조의 냉혹한 움직임을 표현하는 문장으로 해석되었다.
나는 심지어 지진의 현장에 있을 때에도 진행 중인 계획의 증거가 갑작스럽게 드러난 것 같아서 너무나 만족스러웠다. 그 계획으로 인해 인간의 업적이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은 개인적으로 유감이었지만, 내가 깨닫게 된 좀 더 큰 그림 속에서는 어디까지나 대수롭지 않은 문제였다. 참새를 보시는 그 눈은 없었다. 나를 돌보는 사람은 없었다(찬양곡<참새를 보시는 그 눈으로>의 가사를 응용한 문장: 옮긴이)
결혼을 하고 아이가 생긴 뒤에는 반복되는 가정의 일상에서 똑같은 의미를 발견하게 되었다. 상차리기, 양초에 불붙이기, 벽난로에 불 지피기, 요리하기, 수없이 만든 수플레와 크렘캐러멜과 도브와 알봉디가스와 검보. 깨끗한 시트, 쌓아놓은 깨끗한 수건, 폭풍 대비용 램프, 그 어떤 지질 사건이 벌어지던 날도 버틸 수 있을 만큼 넉넉한 식수와 식료품.
이 단편들로 나는 내 폐허를 지탱해왔다(T.S 엘리엇이 쓴 <황무지>의 마지막 구절: 옮긴이). 그 다음으로 생각난 구절이 이것이었다. 이 단편들이 나에게는 중요했다. 나는 그것들을 믿었다. 내가 아내와 어머니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분야에서 의미를 찾았다는 사실과, 지질학과 실험발사를 관통하는 무심함 속에서 의미를 찾았다는 사실이 서로 상반되는 느낌은 없었다. 내가 보기에 두 세계는, 특히 지진과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 이따금 하나로 수렵되는 평행선이었다. 아직 검증을 거치지 않은 발상이었지만, 존과 내가 눈을 감으면 이 평행선은 마지막으로 한데 합쳐질 것이었다.
우리가 파도치는 맑은 물속에서 동굴을 향해 헤엄을 치고 있을 때 우리를 둘러싼 바닷속으로 갑岬(바다 쪽으로, 부리 모양으로 뾰족하게 뻗은 육지 :편집자) 전체가 주저앉을 수도 있었다. 우리를 둘러싼 바닷속으로 갑 전체가 주저앉는 것이야말로 내가 기대하던 것이었다. 저녁식탁에서 심장마비를 일으키는 결말은 기대한 적이 없었다.
비통에 젖은 사람들은 자기연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는 걱정하고 끔찍해하며 자기연민의 조짐이 보이지 않는지 머릿속을 샅샅이 뒤진다. 자기연민에 ‘젖은’행동을 하게 될까 두려워한다. 우리들 대부분은 자기연민에 ‘젖은’사람을 혐오하는 심정으로 이해한다. 애도의 심정을 겉으로 드러내는 행위는 죽음을 떠올리게 만들고, 부자연스러우며, 상황을 제대로 관리하는 데 실패한 증거로 간주된다.
당사자는 한 사람이 사라졌지만 온 세상이 비어버린 듯 한 심정이 된다. 필립 아리에스는 <서양인들의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서. 사람들이 가시적인 태도를 어느 정도로 혐오하는지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그 심정을 표현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죽은 사람이 겪은 상실에 비하면 우리의 상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끊임없이 상기한다. 이처럼 자기교정적인 사고방식은 우리를 자아성찰의 심연 속으로 더욱 깊숙이 밀어 넣을 뿐이다(나는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나는 왜 이렇게 이기적일까 하는 식으로 말이다).
자기연민을 언급할 때 쓰이는 표현을 보면 우리가 자기연민을 얼마나 혐오하는지 알 수 있다. 자기연민은 ‘자기 자신을 딱하게 생각하는 감정’이고, ‘엄지손가락 빨기’이며, ‘흑흑 난 너무 불쌍해’이고, 자기 자신을 딱하게 생각하는 감정에 ‘탐닉’하고 심지어는 그 속에서 ‘뒹구’는 상태다. 자기연민은 성격적인 결함 중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가장 보편적으로 손가락질당하는 것이며, 귀찮은 파괴적 성향이 기정사실로 간주된다.
헬렌 켈러의 표현에 따르면, 자기연민은 ‘최악의 적’이다. 나는 스스로를 동정하는/ 야생의 생물을 본 적이 없다./ 뻣뻣하게 굳음 몸으로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죽는 조그만 새도/ 자기 자신을 동정하지 않을 것이다. D.H 로렌스가 말한 이 네 줄짜리 설교는 자세히 살펴보면 선전적인 의미 외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자주 인용되어왔다.
로렌스는 야생의 생물들이 그렇다고 믿고 싶겠지만, 짝이 죽으면 먹이를 거부하는 돌고래들을 생각해보자. 길을 잃고 죽을 때까지 짝을 찾아 헤매는 기러기들을 생각해보자. 사실 비통에 젖은 자들은 절박한 이유가, 심지어는 절박한 필요가 있기 때문에 스스로를 동정하는 것이다. 남편이 집을 나가기도 하고 아내가 집을 나가기도 하며 부부가 갈라서기도 하지만, 이런 경우에도 연상(징글징글한 기억이겠지만)으로 이루어진 거미줄이 고스란히 남는다. 두 사람의 생활을 구성하던 관계들 - 친밀했던 관계와 대수롭지 않았던(그러다 끊긴) 관계들 - 이 모두 사라진 뒤에도 말이다.
존과 나는 40년을 부부로 지냈다. 존이 <타임>에서 근무하던 신혼 초 5개월을 제외하고 나머지 기간 동안에는 우리 둘 다 집에서 일을 했다. 그러니까 하루 종일 붙어 있었던 셈인데, 우리 어머니와 이모들은 이 사실을 두고 좋아하는 한편으로 걱정스러워했다. “부자일 때나 가난할 때나 어쩌고저쩌고 해도, 점심은 같이 먹는 게 아닌데.” 신혼 때만 해도 이런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불쑥 생각나는 경우가 하루 평균 몇 번 이었는지 셀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런 충동은 그가 죽은 뒤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을 들을 가능성은 사라져 버렸다. 신문을 읽으면 그에게 읽어 주고 싶은 기사가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그가 관심을 보일만한 변화들이 눈에 띈다. 71번과 72번가 사이에 자리 잡은 랠프 로렌 매장이 화장을 했다던 지, 매디슨 에버뉴 서점이 있었던 빈 공간에 드디어 새로운 주인이 들어왔다든지…….
8월 중순의 어느 날 아침에는 센트럴파크를 산책하다가 긴급 뉴스를 가지고 급하게 집으로 들어섰던 기억이 난다. 여름 동안 나무들은 수놓았던 짙푸름이 하룻밤 사이에 사라지고 계절이 벌써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가을 계획을 세워야겠다. 이렇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와 연말을 어디에서 보낼지 결정해야겠어. 나는 현관 앞 테이블에 열쇠를 내려놓다 깨달았다. 이 소식을 들려줄 사람이 없구나. 미완의 계획과 미완의 생각을 가지고 떠날 곳이 없구나. 내 말을 듣고 찬성하거나 반대하거나 의견을 이야기해줄 사람이 없구나.
“나는 비통한 심정이 아슬아슬한 긴장감과 비슷한 이유를 느끼기 시작한 것 같다.”아내가 죽은 뒤 C.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습관이 되어버린 수많은 충동들이 좌절당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행동과 수많은 감정과 수많은 행동의 대상이 H였다. 그런데 이제 타깃이 사라진 것이다. 나는 습관처럼 시위에 화살을 걸다 문득 깨닫고 활을 내려놓는다. 걷다 보면 H가 생각나는 길이 너무 많다. 나는 그중 한 길을 걷는다. 그런데 이제는 길 위에 넘지 못할 기둥이 가로놓여 있다. 예전에는 길이 너무 많았다. 지금은 막다른 골목이 너무 많다.”
즉, 관심의 대상이 자기 자신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상황이 반복되니 자연스럽게 자기연민이 생길 수밖에 없다. 나는 이런 상황이 놓일 때마다 영원히 건널 수 없는 경계선에 부딪친다.
배우자를 잃은 사람들 중에는 그의 존재가 느껴지고 그의 충고가 들린다는 경우도 있다. 프로이트가 <애도와 우울증>에서 “환영을 갈구하는 데서 비롯된 정신이상을 통해 대상에 집착하는 상태”라고 지적했다시피, 실제로 배우자의 모습을 보았다는 사람들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환영을 본 것은 아니지만 “존재를 분명히 느꼈다” 고 이야기 한다. 나는 어느 쪽도 경험한 적이 없다. 가끔(예를 들면 UCLA에서 기관형성술을 하겠다고 했을 때와 같은 경우) 존에게 어떻게 할까 직접적으로 물어본 적은 있다. 나는 도와달라고 했다. 나 혼자서는 못하겠다고 했다. 이런 말을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
나는 작가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유추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그가 곁에 있어주길 간절히 바랄 때면 우리를 갈라놓는 결정적인 침묵이 더욱 강하게 인식된다. 그가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그것은 내 상상과 편집 속에서만 존재한다. 나로서는 그의 대답이 내 편집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생각이 불쾌한 권리침해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알고 싶지 않은 경우에도 서로의 생각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고 자부해왔지만, 이제 와서 보니 알아야 할 것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모르고 있었다.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그는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아무 일 없을 거야.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하지만 만약 그러면, 만약 그러면. 그는 말을 잇곤 했다. 만약 그러면 작은 아파트로 이사 가지 마. 만약 그러면 사람들하고 늘 함께 있어. 만약 그러면 1년 안에 재혼을 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사실 그는 아무것도 몰랐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서로가 없는 생활을 상상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재혼을 시도했던 친구의 친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결혼은 시간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시간을 부정해야 되는 부분도 있다. 40년 동안 나는 존의 눈을 통해 나를 보았다. 그동안 나는 나이를 먹지 않았다. 나는 올해 들어 내가 생각하고 있던 나의 이미지가 실제보다 훨씬 젊었다는 사실을 스물아홉 살 이후 처음으로 깨달았다. 퀸태나가 세 살이었을 때의 기억이 내 옆을 너무나 자주 스치고 지나갔던 한 가지 이유를 올해 들어 처음 깨달았다. 퀸태나가 세 살이었을 때 나는 서른 네 살이었던 것이다.
나는 딜러 토머스의 미망인 케이틀린이 남편을 떠나보내고 쓴 <헛되이 보내야 할 남은 인생>을 경멸했던 기억이 난다. 그녀의 ‘자기연민’과 ’우는소리‘와 ’탐닉‘을 무시하고 심지어는 비난했던 기억이 난다. <헛되이 보내야 할 남은 인생>은 1957년에 출간되었다. 그때 나는 스물두 살이었다. 시간은 우리를 가르치는 학교다.
「푸른 도화선 속으로 꽃을 몰아가는 힘이」 -딜런 토머스
푸른 도화선 속으로 꽃을 몰아가는 힘이 푸른 내 나이 몰아간다; 나무들의 뿌리를 시들게 하는 힘이 나의 파괴자다. 하여 나는 말문이 막혀 구부러진 장미에게 말할 수 없다 내 청춘도 똑같은 겨울 열병으로 굽어졌음을.
바위틈으로 물을 몰아가는 힘이 붉은 내 피를 몰아간다; 모여드는 강물을 마르게 하는 힘이 내 피를 밀랍처럼 굳게 한다. 하여 나는 말문이 막혀 내 혈관에게 입을 뗄 수가 없다 어떻게 산 속 옹달샘을 똑같은 입이 빠는지를.
웅덩이의 물을 휘젓는 손이 모래수렁을 움직인다; 부는 바람을 밧줄로 묶는 손이 내 수의(壽衣)의 돛폭을 잡아끈다. 하여 나는 말문이 막혀 목 매달린 자에게 말할 수 없다 어떻게 내 살(肉)이 목을 매다는 자의 석회가 되는지를.
시간의 입술이 샘물머리에 붙어 거머리처럼 빨아 댄다; 사랑은 방울져 모인다, 그러나 떨어진 피가 그녀의 상처를 달래 주리. 하여 나는 말문이 막혀 기상(氣象)의 바람에게 말할 수 없다, 어떻게 시간이 별들을 돌며 똑딱똑딱 천국을 세는지를.
하여 나는 말문이 막혀 애인의 무덤에 말할 수 없다 어떻게 내 시트에도 똑같이 구부러진 벌레가 기어가는지를. -편집자
[잔인한 집착]
“어떤 식으로 죽게 될지 이제 감이 잡혀.” “당신이 어떻게 죽을지는 아무도 몰라. 나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2004년 10월에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존이, 왜, 언제 죽었는지 알지 못했다. 구급요원들이 그를 되살리려고 애쓰는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1년이 되었을 때 드디어 부검보고서와, 그 일이 있고 2주 후이자 퀸태나에게 소식을 알리기 하루 전인 1월 14일에 뉴욕병원에 요청했던 응급실 기록이 나왔다.
부검보고서에 따르면, 좌주간지와 좌전하행지동맥 양쪽 모두 95퍼센트 이상의 협착증을 보였다.
순환이 멈추면 혈액은 중력에 의해 바닥과 닿는 부위에 고이게 되어있다. 그렇게 고인 혈액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밖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나면 나타나기 시작하는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나는 존이 책상 위 책꽂이에 꽃아둔 <법의 병리학 편람>이서 ‘시반’이라는 단어를 찾아보았다. “편차는 있지만 시반은 보통 사망 직후에 형성되기 시작해 한 두 시간 안에 분명히 식별할 수 있는 정도가 된다.” 10시 10분쯤 초진을 받았을 때 이미 시반이 식별 가능할 정도였으니 한 시간 전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는 뜻이 된다. 한 시간 전이면 내가 구급차를 부르고 있던 때다. 그러니까 존은 그때 숨을 거두었다는 뜻이었다. 식탁에서 쓰러진 직후에는 아직 숨을 거두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나는 아스피린이 어떤 식으로 심장미비의 위험을 낮춰주는지 알고 있었다. 아스피린은 혈전 형성을 예방한다. 나도 알고 있었다시피 존은 그보다 훨씬 강력한 항응혈제인 쿠마딘을 복용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용량 아스피린을 간과했다고 괴로워했다.
나는 크리스마스와 정월 추하루가 낀 14일 동안 심장병으로 인한 사망률이 4.65퍼센트 증가했다는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와 터프츠대학교의 연구 결과에 대해서도 안달복달했다. 이리스로마이신을 일반 심장약과 함께 복용하면 심장마비 발병률이 네 배가 된다는 밴더빌트대학교의 연구 결과에 대해서도 안절부절못했다. 스타틴 복용을 중단하면 심장마비 발병률이 30~40퍼센트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에 대해서도 안달복달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있다는 끈질긴 메시지를 얼마나 쉽게 받아들이는가 싶다. 그리고 이 메시지에 늘 붙어 다니는, 만약 죽음이 우리를 덮치면 원망할 사람은 자기 자신뿐이라는 잔인한 대구對句까지.
나는 부검보고서를 읽은 뒤에야 지금까지 줄곧 들어왔던 말을 믿기 시작했다. 존이나 나는 그의 죽음을 앞당기거나 방지할만한 일과 무관하다는 말을, 그는 허약한 심장을 물려받았다. 결국 그것이 그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가 목숨을 빼앗긴 날은 수많은 의학적인 개입 덕분에 이미 이루어졌다. 그날이 드디어 찾아왔을 때에는 내가 우리 집 거실에서-세동제거기도, 심폐소생 기구도, 완벽한 응급구조 카트도, 정맥주사 이후 몇 초 이내에 심박동 전환술을 실시할 수 있는 전문 시설도 없는 그곳에서- 무슨 짓을 했더라도 그의 모숨을 하루 더 연장시키지는 못했을 것이다.
날마다 조금씩 더 사랑해 당신이 나한테 늘 했던 말처럼.
나는 부검보고서를 읽은 뒤에야 자동차의 충돌과 죽은 별의 붕괴를 재구성하려는 노력을 중단했다. 보이지도 않았고 생각지도 못했을 뿐 붕괴의 가능성은 처음부터 존재했다.
[다시. 또 다시]
서랍을 정리하다 ‘계획’이라는 라벨이 붙은 파일을 발견했다. 이런 파일을 만들었다니, 얼마나 계획 없이 살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였다.
나는 미망인이라는 단어가 어색하다. 처음으로 어떤 서류의 결혼 여부란 에 동그라미를 칠 때 망설였던 기억이 선하다. 나는 아내라는 단어도 어색해했다.
나는 결혼하고 오랫동안 결혼반지를 어색해했다. 나는 왼쪽 넷째손가락에 끼고 있던 반지가 너무 헐거워지자 1년인가 2년 전부터 오른손에 끼기 시작했다. 오븐에서 팬을 내리다 오른손 손가락을 덴 뒤에는 금줄에 끼워 목에 걸고 다녔다. 퀸태나가 태어났을 때 받은 아기반지까지 줄에 걸어 끼웠다. 괜찮아 보였다. 나는 지금도 그런 식으로 반지를 하고 다닌다.
“당신은 남들하고 다른 아내를 바라잖아.” 나는 신혼시절이 존을 향해 종종 이렇게 이야기했다. 이 말은 보통 시내에서 저녁을 먹고 포처기즈 벤드로 돌아오는 길에 자주 등장했다. 샌디에이고 고속도로 근처의 정유소를 지날 때면 시작되던 말다툼의 포문을 여는 대사였다. “당신은 레니 같은 여자랑 결혼했어야 하는 사람이야.” 레니는 형님, 그러니까 닉의 부인이었다. 레니는 친구들을 불러 점심대접하기를 즐겼고, 집안일을 손쉽게 해치웠으며, 예쁜 프랑스제 원피스와 정장을 입었고, 집을 보거나 출산 예정 파티를 하거나 타지에서 온 손님들을 모시고 디즈니랜드에 가야 할 때 빠지는 법이 없었다. “내가 형수 같은 사람이랑 결혼하고 싶었으면 형수 같은 사람이랑 결혼을 했겠지.” 이렇게 대답하는 존의 목소리는 점점 짜증스럽게 변했다. 사실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은 아내가 될 수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신혼시절에 나는 머리에 데이지를 꽃아 ‘신부’ 효과를 연출했다. 나중에는 퀸태나와 함께 맞춘 체크무늬 치마를 입어 ‘젊은 엄마’를 연출했다. 내가 기억하기로, 이 시절에 존과 나는 임시변통으로 연명하며 되는대로 덤볐다. 얼마 전에 나는 파일서랍을 정리하다가 ‘계획’이라는 라벨이 붙은 두툼한 파일을 발견 했다. ‘계획’이라는 라벨에 붙은 파일을 만들었다니, 우리가 얼마나 계획 없이 살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였다. 우리에게는 ‘계획회의’라는 것도 있었는데, 수첩을 앞에 두고 앉아 큰 소리로 그날의 문제점을 이야기한 뒤 해결할 생각 없이 그냥 점심을 먹으러 나가는 식이었다. 그런 날의 점심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은 일을 자축이라도 하는 듯 흥겨운 분위기였고, 장소는 보통 샌타모니카의 마이클스였다.
이 계획 파일에는 1970년대에 만든, 크리스마스 때 받고 싶은 선물 목록과 통화내용을 기록한 메모 몇 장이 들어 있었고, 역시 1970년대에 작성한 수입, 지출 계획서가 나머지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런 쪽지에는 절망감이 배어 있었다. 말리부의 집을 팔아 이미 5만 달러를 쏟아 부은 브렌트우드 파크의 집값을 충당하려고 1978년 4월 19일에 길 프랭크를 만났을 때 작성한 메모도 있었다.
[어떤 전조]
“나는 못 견딜 것 같아.” 퀸태나를 두고 집으로 오는 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나는 택시 안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에게는 과연 선택의 여지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나는 1년 전에 비해 융통성이 떨어진다. 위기상황이 발생하면 아드레날린이 분출되던 기제가 소진되어버렸다. 느리거나 아예 발휘되지 않는 실정이라 나의 동원능력을 믿을 수가 없다.
8월과 9월에는 존이 죽은 뒤 처음으로 글을 썼다. 선거에 관한 글이었다. 1963년 이래 존이 원고상태에서 읽어본 뒤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고, 무엇이 더 필요하며, 여기에서는 어떤 식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저기에서는 어떤 식으로 분위기를 죽여야 하는지 일러주지 않은 글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원래 글을 단숨에 써본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이번 기사는 평소보다 훨씬 더 오래 걸렸다.
나는 기사를 보내기에 앞서 다시 한 번 읽어보다 너무나 많은 실수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 불안했다. 단순 오자도 있었고, 이름과 날짜가 틀린 곳도 있었다. 나는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동원능력의 문제라고, 스트레스나 비통함에서 비롯된 인지장애라고 스스로를 달랬지만 불안한 마음은 여전했다. 내가 다시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틀리지 않다고 나를 믿을 수 있을까? 왜 항상 당신 말이 맞다고 생각해?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당신이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아예 못하는 거지?
그는 크리스마스 밤에 CAA에서 온 상자를 열었을 것이다. 그리고 책 더미 제일 위의 어떤 책에서 이 장서표를 끼워 넣었을 것이다. 그때 그는 수명이 120시간 남아 있었을 것이다. 만약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면 그는 이 120시간을 어떻게 보냈을까?
이런 시간표에서 풍기는 어떤 전조 때문에 나는 처음부터 책 더미를 건드리지 않았다.
난 못 견딜 것 같아. 그날 밤인가 그 다음날 밤인가, 베스 이즈리얼 노스에서 택시를 타고 집으로 오는 길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다시 한 번 퀸태나를 남겨두고 떠나야 하는 상황을 두고 한 말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나는 택시 안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에게는 과연 선택의 여지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거꾸로 흐르는 시간]
지금까지 한 일이 모두 아무 소용없다고 그가 말했을 때, 그때 그의 수명은 고작 3시간 남아 있었을까. 그는 자기 수명이 몇 시간 안 남은 걸 알고 있었을까. 이제 곧 떠나야 한다는 걸 느끼고 있었을까.
[마법을 꿈꾸던 한 해]
이 글을 끝내고 싶지 않다. 한 해를 끝내고 싶지 않다. 광기는 점점 줄지만 명료함이 빈자리를 채우지는 않는다. 우리가 살려면 어느 시점에 이르렀을 때 고민을 단념하고, 떠나보내고, 저승의 사람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테이블 위의 사진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도.
「나는 지질학자의 손녀답게 언덕과 폭포와 섬의 절대적인 변덕스러움을 일찌감치 터득했다. 언덕이 무너져 바다가 되어도 내 눈에는 그 안에 담긴 이치가 보인다. 리히터 규모 5.2의 지진이 바로 이 웰터크가의 우리 집, 내 방의 책상을 비틀어도 나는 계속 타자기를 두드린다…….」
이 구절은 내가 1980년대 초반에 쓴 <민주주의>의 도입부다. 민주주의라는 제목은 존이 지은 것이었다.
나는 리히터 규모 9.0의 지진이 수마트라 섭입대의 600마일을 강타하자 이로 인해 발생한 쓰나 미가 인도양과 맞닿은 해안지대를 대거 휩쓸었다는 구절과 맞닥뜨렸다. 나는 이 사태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상상하려는 장면은 촬영된 적이 없다. 해변이나 물이 넘친 수영장이나 폭풍을 만난 썩은 말뚝처럼 산산 조각난 호텔 로비도 등장하지 않는다. 내가 보고 싶은 곳은 지표면 밑이다. 버마판 밑으로 떠밀리면서 뒤틀린 인도판, 아무도 모르게 심연 속을 움직이는 해류, 인도양 측심도는 없지만, 나는 판지로 만든 랜드 맥낼리 지구본만 봐도 대강의 아우트라인을 그릴 수 있다. 반다아체에서 780미터, 수마트라와 스리랑카 사이로 2300미터. 안다만 제도와 타이 사이로 2100미터를 가다 푸켓으로 향하는 길고 하얀 모래톱. 보이지 않는 해류의 선두가 대륙 봉으로 인해 속도가 느려지던 순간. 대륙봉 바닥 때문에 수면이 얕아지기 시작하면서 한곳으로 모인 바닷물.
이제는 1년하고 하루가 지난 2004년 12월 31일이다. 크리스마스이브인 12월 24일에 나는 1년 전 크리스마스이브 때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나는 퀸태나를 위한 자리라고 되뇌었지만 사실은 나를 위한 자리이기도 했다. 특별 케이스로, 손님으로,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으로 남은 인생을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의미였다. 나는 벽난로에 불을 지피고, 양초를 켜고, 거실 뷔페테이블에 접시와 은 식기를 배치했다.
나는 1년 내내 작년 달력을 보며 날짜를 따졌다. 작년 이날에는 무슨 일을 했더라? 어디에서 저녁을 먹었더라? 작년 이날에 퀸태나의 결혼식을 마치고 호놀룰루로 날아갔던가? 작년 이날에 파리에서 돌아왔던가? 작년 이날에? 작년 이날의 기억에는 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는 오늘 난생 처음으로 깨닫는다. 작년 이날은 2003년 12월 31일. 존은 1년 전에 이날을 겪지 못했다. 존은 고인이었다. 이런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렉싱턴가를 건너고 있었다. 사람들이 고인을 살려내려고 애쓰는 이유를 나는 알고 있다. 사람들이 고인을 살려내려고 애쓰는 이유는 자신의 곁에 두기 위해서다. 살려면 어느 시점에 이르렀을 때 고인을 단념하고, 떠나보내고, 저승의 사람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다. 테이블 위의 사진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도. 신탁계좌의 이름으로 만족해야 한다는 것도. 물속으로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도. 그렇다 하더라도, 그를 물속으로 쉽게 떠나보내지는 않는다.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이 내 일상의 중심에서 점점 멀어질 거라는 깨달음이 오늘 렉싱턴가에서는 어찌나 선명한 배신으로 느껴지던지 나는 달려오는 자들을 잊어버렸다.
나는 1979년과 80년에 존과 함께 인도네시아와 말레시아와 싱가포르를 여행했다. 그때 있었던 섬들 가운데 몇몇은 사라지고 지금은 모래톱만 남았다. 나는 그와 함께 포처기즈 벤드의 동굴로 헤엄쳐가던 기억과, 파도치던 맑은 물과, 파도가 변하던 모습과, 갑 기슭의 좁은 바위 사이를 지나면서 속도와 세기가 더해지던 기억을 떠올린다. 바닷물의 높이가 마침 적당했다. 우리는 바닷물의 높이가 마침 적당했을 때 물속에 있었다. 그곳에서 산 2년 동안 그런 경우가 고작 대여섯 번에 불과했지만, 내 머릿속에는 그 기억이 남았다. 바닷물의 높이가 마침 적당했을 때마다 나는 파도를 놓칠까, 뒤로 떠밀릴까, 타이밍을 잘못 계산하지 않았을까 두려워했다. 존은 그러지 않았다. 파도의 변화를 느껴야 돼. 변화와 보조를 맞춰야 돼. 그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참새를 보시는 그 눈은 없었지만, 그는 나에게 그렇게 말했다.■
[Review]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일방적이며 서로 다르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해 준다. 그렇다면 부부는 어떤가? 성서에서 부부는 돕는 배필이라고 한다. 서로의 역할은 다르지만, 함께 도우며 의지한다는 점에서 그 관계가 일방적이지 않고 동등하다는 전제가 따른다.
부부의 관계가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그 사랑은 흔히 말하는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라 함께 사랑을 이루어가는 또 다른 차원의 사랑, 서로가 서로의 의무를 다할 때만 이루어지는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각 가정이 처한 양상은 서로 다르고 갈등도 있을 수 있다.
함께 저녁을 먹는 식탁에서 갑작스럽게 남편의 심장이 멎은 후 일 년간, 그녀가 겪은 일상의 심정을 적은 책이다. 부부 모두가 유명한 칼럼니스트로서 또 작가로서 40년도 더 함께 지내며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왔기에 각별한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존과 나는 40년을 부부로 지냈다. 존이 <타임>에서 근무하던 신혼 초 5개월을 제외하고 나머지 기간 동안에는 우리 둘 다 집에서 일을 했다. 그러니까 하루 종일 붙어 있었던 셈인데, 우리 어머니와 이모들은 이 사실을 두고 좋아하는 한편으로 걱정스러워했다. “부자일 때나 가난할 때나 어쩌고저쩌고 해도, 점심은 같이 먹는 게 아닌데.” 신혼 때만 해도 이런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본문>
인생을 살아가며 부부라면 누구에게나 겪게 되는 일이지만 작가의 예리한 감정 묘사가 잘 표현되어 독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책이다. 부부가 같은 날 함께 떠날 수 없다는 것을 평소에 생각 안 한 것도 아니었다. 어쩌면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막상 현실은 달랐다 . “비통은 파도처럼, 발작처럼 찾아왔고 갑작스러운 불안 때문에 일상이 지워졌다.” <본문> 그 감정은 막상 겪기 전에는 어떨지 아무도 모르는 곳이라고 그녀는 단언한다. “알고 보니 비통함이란 막상 겪기 전에는 어떨지 아무도 모르는 곳이다. “<본문> 심한 자책감에 시달리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죽음을 이곳저곳에서 찾아보며 그들이 느꼈을 심정과 자신이 처한 상황을 비교해보기도 하였다.
책의 전반부는 남편과 함께 지낸 날들의 회상, 연필로 쓴 글씨처럼 희미한 죽음의 경계로 인해 그녀는 남편이 자신의 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기가 힘들었다. 차츰 그녀는 남편의 죽음이 오래전부터 알아온 심장병으로 이미 예견된 일이었음을 깨닫게 되고, 그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중반부에 이르러 흡사 급박하게 바뀌는 상황극처럼 그녀의 생각이 이곳저곳을 넘나드는 탓으로 독자는 약간 어리둥절해진다. 그가 아직도 자기 곁에 있다는 생각, 어쩌면 다시 살아 돌아 올 수도 있다는 착각에서, 블랙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 흔적조차 사라진 물질의 재구성이 가능한가라는 스티븐 호킹의 견해에도 한 가닥 희망을 품어보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들이 어쩌면 비통한 상황에서 이성이 길을 잃고 방황하는 자신의 모습을 솔직하게 표현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책의 종반부에서 작가가 차분한 마음으로 자신의 내면을 찾아가는 진솔한 모습도 감동을 준다.
부부의 관계는 모든 사람이 저자의 경우와 같을 수는 없다. 오랜 시간 병마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운 관계도 있다. 이 책과 비슷한 책 “상실 연습”의 저자 <아가타 투진스카>는 오랜 시간 남편의 병시중에 시달리며 오히려 죽을병의 고통을 바라볼 필요도, 싸움도 떠남도 지켜볼 필요도 없는 <디디온>의 경우를 부러워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지극히 개인적이다.
그러나 한 가지 모두에게 주는 분명한 메시지는 “인생은 한순간에 달라진다. 저녁 식탁에서 지금까지의 인생이 끝나기도 한다. “<본문>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는 그 날이 오기 전에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날마다 조금씩 더 사랑해 당신이 나한테 늘 했던 말처럼. “<본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