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의 고통 3 (계 9:6)
6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이 시간에 “양심의 고통”이라는 제목입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고 율법 아래서 고통당하는 심령만큼 불행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뜻도 율법도 모르고 불나비처럼 세상과 춤추다가 지옥으로 떨어질 영혼들은 현세에서는 고통이 없을 수 있겠지만, 바울이 사울일 때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신자이지만 복음을 알지 못할 때 오는 그 마음의 고통은 마음의 지옥을 경험하는 것과 같이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이 때 이단에게 가장 노출되기 쉬운 때이기도 합니다. 아직 기초가 없는 상태로 진리를 갈망하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혈의 공로에 서서 의로움의 확신을 갖는 것이 마음의 평화를 얻는 길일뿐 아니라 이 길이 모든 악의 저주를 물리치고 벗어나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율법 아래의 고통은 단순한 고통만이 아닙니다. 그 고통은 죽고 싶으나 죽지 못하는 고통입니다. 6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날에는 사람들이 죽기를 구하여도 죽지 못하고 죽고 싶으나 죽음이 그들을 피하리로다.” 죽기를 구해도 죽을 수 없고 죽음이 피하는 고통, 어때 소름 끼치는 느낌 들지 않나요?
여기 죽기를 구하는 것을 보니 상상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는 것 같습니다. 고통이 웬만해야 살려고 하지 진짜 고통이 심하면 죽고 싶어합니다. 자살하면 안 되지만 얼마나 고통스러우면 죽겠습니까? 그런데 황충에게 당하는 이 고통은 무슨 고통인지 죽으려고 해도 죽지 못하고 죽음이 피합니다.
죽음조차도 피한다는 이 말씀은 과연 무엇일까요? 신령한 관점에서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율법을 이야기하고 있고 양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정답을 말씀드리면 율법 아래서는 내가 죄와 상관없이 되기 위해 죄에 대해서 죽으려고 해도 죽어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 뿐 아닙니다. 더 내가 살아 죄를 짓게 되고 그러면 더욱 양심의 고통을 느껴 괴롭게 되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이것이 율법주의 혹은 완전주의자가 당하는 양심의 고통입니다. 율법 아래 있으면 죄를 더 짓게 됩니다. 복음을 알아도 확실히 자기에게 적용하지 못하면 똑 같은 결과가 옵니다. 죄를 떨어버리려고 죄에 대해서 죽기를 갈망하지만 죽음이 피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성도란 죄에 대해서는 죽은 자요 하나님과 의에 대해서는 산자입니다. 그래서 롬6:10-11에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했습니다.
그런데 잘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성령의 은혜 안에서 되는 것이지 율법 아래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산 십자가 복음을 알고 믿어도 아직도 율법의 정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죄가 살아날 뿐 죽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적생활에서 보혈의 공로가 가장 중요합니다. 칭의 없는 성화는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이 정죄상태에 있어 악령의 지배를 받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심령이 답답할 때 함부로 안수하는 것 아닙니다. 사탄의 영이 틈탈 수 있습니다.
죄나 비진리는 어둠입니다. 이 어둠의 지배자가 사탄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알지 못해 율법 아래 있게 되면 그 심령은 더욱 악이 기승을 부리며 나타납니다. 그 체험이 로마서 7장의 체험입니다.
롬7:13-15에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
그러므로 율법 아래서는 바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더 영적으로 심각한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양심의 정죄를 피하고 그 고통을 줄여보기 위해 이렇게 저렇게 요령을 부려 정당화도 시켜보고 어설픈 대안이라도 가지고 위안을 삼아보려고 하지만 잘되지 않고 양심은 더욱 예민해지기만 합니다.
불신자들은 죄를 짓고도 웃고 사는데 하나님을 믿는다면서도 진리를 알지 못해 불행하게도 율법의 노예가 되었으니 얼마나 난감합니까? 신앙을 버리자니 지옥 갈 것이고 계속하자니 정죄에 빠지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불행한 나날이 계속됩니다.
그 상태의 극치가 바로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이 만들어 지켰던 사람의 계명인 장로들의 유전은 하나의 완전주의로서 율법을 더욱 잘 지켜보기 위해서 만든 각종 추가적 조항으로서 언 듯 보기엔 목적이 좋아 보이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는 관계가 먼 행동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오해한 것입니다. 율법은 사회생활을 원활하게 할 뿐 아니라 인간의 죄악되고 무능함을 깨닫고 예수의 복음 앞에 나오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내 힘으로 이를 악물고 지켜 완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투사가 된다고 더 신령해지는 것 아닙니다.
그러자 그들 중에는 안 되겠으니까 거룩한 척하는 외식주의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살 수 없는데 사람들은 그들에게 거룩을 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죄를 살아나게 하는 율법을 가지고 죄를 다스리려고 했다니 얼마나 아이러니컬한 일입니까?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율법 아래서는 죄가 살아납니다. 죄에 대해 죽으려고 해도 죽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의 죄악은 국가의 법으로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지만, 마음의 죄악은 율법이 가입하면 할수록 더욱 드러나고 더 악해지고 더 넘어져서 심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의롭게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영적인 형편을 더욱 어렵게 한다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로서 진정한 양심의 자유를 찾으면 마음에 평안이 오고 악의 영은 떠나고 성령께서 주장하셔서 마음껏 죄에 대하여 죽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히9:14에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롬6:14에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했습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율법에서 구원하시려고 율법 아래 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대신하여 그 율법의 저주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복음 안에서는 율법이 정죄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의 복음과 성령 아래서만 죄에 대한 죽음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예수의 복음 안에서 양심의 자유와 성령의 은혜로 내가 죄에 대해서 온전히 죽는 가장 축복된 은혜를 누리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