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대해전’ 한.중 합작영화 중국 제작팀, 남원 만인의총 방문
-조선. 명나라 연합함대의 노량해전에서 이순신 전사-
남원발전연구포럼 감사 서호련
이순신의 ‘명량’ 에 이어 이번에는
정유재란의 마지막 해전이요 이순신장군이 전사했던 ‘노량대해전’ 이 영화화 된다.
한중 합작영화로서 400 여억 원( 한.중 3;7)이 투입될 이 영화제작을 위해서 중국의 제작진( 취썽휘 제작자, 양보 프로듀서, 정방님 드라마 편성자, 왕윈 대본기획자, 검봉 기획, 찐따청 문학 기획자 및 감독, 작가, 촬영팀 등) 11명 이 북경과 상해로 부터 한국을 방문하면서 유인학 전 의원의 안내로 5월 13일 남원 만인의총을 참배했다.
제작진은 임진왜란과 노량대해전의 배경지와 관련 사적지인 아산 충무공 현충원 에 이어 남원 만인의총. 그리고 진주성과 노량 바다 전적지를 차례로 방문한 뒤 광주에 돌아와서 이영화 제작을 위한 대규모 세미나를 개최하게 된다. 만인의총 참배는 13일 오후 6시부터 7시 까지 남원시 문화관광과 테마 관광계 김려 의 중국어 통역. 미리 대기하고 있던 만인의총 이정호 관리팀장과 김희옥 문화관광과장의 안내와 해설로 이루어 졌으며 사적지를 돌아다 본 그들은 당일 5만6천명의 왜군을 맞아 옥쇄한 군관민 만 명의 순사에 대하여 크게 감동하는 모습이었다.
유인학 전 의원은, 역사의 산실인 남원을 별도로 소개하면서, 남원의 여자들은 모두 춘향이와 같은 미녀와 열녀들이고 남원의 남자들은 모두 만인의총의 열사들이라고 하여 웃음을 자아냈다. 참배를 마친 뒤 남원발전연구포럼 서호련 감사의 안내로 켄싱턴 리조트에서 만찬을 한 뒤 그들은 밤 늦게 진주를 향하여 떠났다.
노량 해전은 명량해전과 달리 이순신의 수군과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의 연합함대의 작전이었고 이 전투에서 명나라 수군 부총병 등자룡등 다수의 명군수군이 전사했을 뿐만 아니라 이순신장군의 전사에 대하여 특히 진린 도독이 애통해 했던 해전이었기 기 때문에 이번 ‘노량대해전’ 한. 중 합작 영화는, 수억 명의 중국인민에게 주는 감명이 남다를 것이다. 특히 중국 일본과의 관계가 불편한 이 시기에 이 ‘노량대해전’ 영화는 중국 측에 큰 의미를 가지고 있을 것이며 한국 중국과의 관계에도 더욱 도움이 될것으로 생각된다.
참고;
노량해전(露梁海戰)혹은 노량대첩(露梁大捷)은 임진왜란 당시 1598년(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이순신이 이끈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수군이 노량해협에서 일본의 함대와 싸워 크게 무찌른 대첩으로서, 이순신이 전사한 해전이기도 하다. 노량해전은 7년간 끌어온 임진왜란에 마지막 쐐기를 박은 대첩이었다. 침략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죽음을 계기로 적군이 철군하려 할 때 그 퇴로를 막고 최후의 일격을 가한 해전이었다. 또한 노량대첩은 이순신 장군의 장렬한 전사로 54년의 파란만장했던 한 삶의 막을 내린 역사적 마침표이기도 했다. 이순신의 전사일은 노량대첩일인 1598년 음력 11월19일 이다.
12월 16일 오전 8시경, 전투는 막바지에 이르고 이미 200여 척 이상이 분파되고 150여 척이 파손돼서 패색이 짙어진 일본 수군은 잔선 150여 척을 이끌고 퇴각하기 시작했으며, 조선-명나라 연합함대는 오후 12시경까지 잔적을 소탕하며 추격을 계속하였다. 이 추격전에서 이순신은 관음포에서 일본군의 유탄을 맞고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으며, 가리포첨사 이영남 · 낙안군수 방덕룡· 흥양현감 고득장 등과 명나라 수군 부총병 등자룡 역시 추격 도중 적탄에 맞아서 전사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맏아들 회와 조카 완(莞)에게 ‘방패로 내 몸을 가려라. 지금 전쟁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戰方急 愼物言我死)’라는 유명한 말을 마치고 세상을 떠났다.
. 전쟁이 끝난 후 진린 도독이 급히 배를 저어왔다. 진린은 뱃머리에서 완이 울면서 “ 숙부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라고 말하자 의자에서 넘어졌다. 그리고 펄쩍 펄쩍 뛰다 배위에 세 번 넘어지면서 바닥을 치고 대성통곡하며 가슴을 치고 말하길 “통제사는 죽은 후에도 나를 구원해 주셨다. 나는 통제사가 살아서 나를 구해주는 줄 알았는데 어쩌다가 죽었단 말이오. 이제 나라 일을 같이 도모 할 사람이 없어졌구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장군의 죽음을 온 군중에 알리니 조선군은 물론이요 고기를 먹고 있던 명군도 고기를 던져버리고 마치 아비 없는 자식처럼 슬피 울었다. 승전의 함성도 잠깐, 노량해협과 관음포 해상은 이내 통곡으로 떠나가는 듯했다. 전투가 대승으로 끝난 뒤 비보가 전해지자 바다는 온통 비통한 울음소리로 울렁거렸던 것이다. 그날 정오 무렵이 되자 노량해전은 마무리됐다. 노량해협에 들어온 300여척의 왜적 함대는 200여척이 불타거나 부서져 격침되고 수만명의 사상자를 내며 전멸하다시피 대패했다. . 승전의 함성도 잠깐, 노량해협과 관음포 해상은 이내 통곡으로 떠나가는 듯했다.
이 때 도주하던 150여 척의 일본 함선 중 100여 척을 나포하니 겨우 50여 척의 패전선만이 도주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