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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면의 동남쪽 변경에 위치한 동리(洞里)로 밀양군 내에서도 가장 오지(奧地)에 속하며 산천과 수석이 빼어난 명승지이다. 서북쪽의 이웃 동리(洞里)인 범도리(泛棹里), 아불(阿佛)에서 구절양장(九折羊腸)과 같은 고사천(姑射川) 계곡을 거슬러 남하하면 평리(平里), 고례(古禮), 사희동(四熙洞), 덕달(德達) 등 자연 부락이 그림 같은 산수 속에서 차례대로 전개되고, 동북쪽에는 또 다른 승경(勝景) 속에 소월리(所月里)(바드리)와 풍류동(風流洞)이란 산상(山上) 별구(別區)가 숨어 있는 곳이다. 동남쪽에는 향로봉(向路峰)의 높은 산줄기가 병풍처럼 둘려쳐진 가운데 양산군 하서면(과 군계(郡界)를 이루었고, 서쪽에는 뇌암산(雷岩山)을 사이에 두고 국전리와 이웃해 있으며, 북쪽으로 높다란 산봉우리 너머에 구천리, 범도리와 경계를 짓고 있다. 밀주구지(密州舊誌)에는 이 동리(洞里)에 대하여 산명수려(山明水麗)하고 계류(溪流)와 전답(田畓)이 아름다우며 기암절벽이 마치 옥(玉)기둥을 세워 놓은 듯 깨끗한 인세(人世)의 진경(眞境)이라 한 기록이 있거니와 고사천(姑射川) 상류(上流) 맑은 계류(溪流) 가에 있는 농암대(籠岩臺)는 그 대표적인 명승지라 할 수 있다. 조선조 초기에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제자들과 함께 이 곳을 찾아 유상(遊賞)했으며 승경(勝景)을 읊은 시(詩)도 남기고 있으니 마을의 여러 지명도 선생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고례리는 이미 오랜 옛날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는 흔적이 남아 있고, 당초의 지명은 고예(庫藝)라고 했다. 또 동리(洞里)의 형국이 마치 서북쪽에 있는 범도행주(泛棹行舟)를 마고 할미가 끌어들이고 있는 것과 같다 하여 고예(姑曳)라고도 했으며, 그 뒤 신선이 사는 곳을 가상하여 고사리(姑射里), 고사산(姑射山), 고사천(姑射川) 등으로 아름답게 바꾸기도 했다. 점필재 선생이 이 곳을 유력한 이후에는 언제부터인지 이 마을이 고례리로 표기되었다 하며, 통안의 다른 자연 부락들도 도덕(道德)이 통달한 덕달(德達) 마을, 상산(商山)의 사호(四皓)가 놀던 곳이라는 사호리(四皓里) 등 뜻 깊은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에 구천리(九川里) 일부와 양산군 원동면의 중선리(中善里) 일부를 병합하여 고례리(古禮里)의 법정리(法定里)를 구성하였다. 소속된 행정단위 부락은 평리(平里), 고례(古禮), 덕달(德達) 등으로 나누어져 있고, 이 곳의 특산물은 은어(銀魚)가 많이 잡힌다.
(1) 평리(平里, 坪里, 평지마)
동리(洞里)의 서북쪽 범도리(泛棹里)에서 들어오는 들머리에 있는 마을이다. 고사천(姑射川)을 끼고 있으며 비교적 들판이 넓은 이 지대는 농암대(籠岩臺)서 흘러내리는 급류로 많은 토사(土沙)가 쌓여서 이루어진 비옥한 평지지대(平地地帶)이다. 평리(平里) 또는 평리(坪里)라고 하는 것은 평평한 들판 마을이라는 뜻인데 이 통 안에서는 전답(田畓)이 제대로 갖추어진 행정 부락의 하나이다. 이 부락 건너 하천(河川) 가에 모래동(사동(沙洞))이라는 땀이 있고 동편으로 골짜기를 한참 들어가면 풍류동(風流洞)이라는 아름다운 땀이 자리 잡고 있다. 또 구천(九川) 삼거리쪽으로 길이 나 있는 산상(山上)의 별구(別區)인 소월리(所月里)(바드리)와 번데기마도 행정적으로는 평리(平里)에 소속된 취락이다. 조선조 정조때에 월간(月磵) 구(具)경이 이 마을에 시거(始居)한 후 능성(綾城) 구씨(具氏)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으며, 1975년에 추모재(追慕齋)를 세워 보존하고 있다.
■ 홍골(紅谷)
평리 위쪽 마을 이름으로 붉은 단풍이 아름다운 골짜기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 모래밭(모래동, 沙洞, 沙亭)
평리마 맞은편 산기슭 강가에 위치한 마을인데, 고사천(姑射川) 상류(上流)에서 모래가 흘러내려와 형성(形成)된 지대이다. 모래동, 사정이라는 일명도 있다.
■ 벼락드미(雷崖, 雷岩)
평리 맞은편 산비탈 아래쪽에 있는 땀이다. 당초에는 윗벼락드미, 아래벼락드미 등 두 땀이 나누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폐동(廢洞)이 되었다. 벼락드미란 바위에 벼락이 떨어진 곳이라 하여 붙인 이름인데, 뒷산을 벼락드미산(雷岩山)이라고 한다.
■ 박미(博山, 白山)
고례리(古禮里) 들머리에 있었던 땀이었으나 지금은 폐동(廢洞)이 되었다. 박미는 햇빛이 늘 있어 밝은 뫼, 곧 백산(白山)인데 박산(博山)으로 표기하였다. 산 중허리에 퇴로리(退老里) 여주(驪州) 이씨(李氏) 문중에서 지은 도원(桃源) 이종극(李鍾極)의 별업(別業)이 있으나 행정구역은 범도리(泛棹里)에 속한다.
■ 바드리(所月里)
평리마 뒷산 중턱에 있는 마을인데 산등성이가 펑퍼짐하고 제법 넓은 들이 있는 고지대 부락이다. 옛날부터 일오치(一烏峙), 이소월(二所月), 삼감물(三甘勿)이라 하여 밀양군내의 세 고지대의 하나로 꼽는 마을이다. 일조(日照)가 좋아 고냉지(高冷地) 채소(菜蔬) 재배로 유명한데 특히 바드리 무는 전국에서 도 유명하다. 이 마을 뒷산은 백마산(白馬山)으로 아득한 옛날에 산사태가 져서 반달 모양으로 형성된 산(소월산(所月山))이 있다 하여 마을 이름이 바드리가 되고 소월리(所月里)로 표기하였다. 마을은 오래 전부터 평택(平澤) 임씨(林氏)가 터를 잡아 세거지(世居地)가 되어 있다. 또 마을 근처에는 '소월산태두외(所月山泰斗外)'라고 하는 명당 자리가 있다고 전해진다. 행정상으로는 평리마에 속한다.
■ 풍류동(風流洞)
평리 마을에서 바드리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골짜기 마을이다. 바드리 아랫마라고도 한다. 이 마을에서 바라보이는 곳에 여러 가지 지명(地名)이 있는데, 마을 앞에는 풍수지리의 옥녀혈(玉女穴)이 있다 하고, 동서쪽으로는 둥둥재라는 고개가 있으며, 아래쪽 물 가운데 북바위(鼓岩)가 서 있고, 그 위쪽에는 퉁소바위(簫岩)가 있다. 또 이 바위 위쪽에 있는 산을 칭칭이산이라 하니 모두가 풍류와 관계되는 지명이다. 곧 퉁소를 불고 북을 치며 칭칭나네를 부르고 춤을 추는 풍류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풍류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 배방구들(舟岩坪, 배방우)
평리 마을 앞들을 가리킨다. 배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 들이라 하여 붙인 지명이다. 이들의 수리는 배방우보(洑)에서 물을 댄다.
■ 방갯들(방깻들, 栗浦坪)
평리마 배방구들 아래쪽 하천 가에 있는 들 이름이다. 밤나무가 많은 갯가였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방깻들 봇물로 농사를 짓고 있다.
■ 새봇들(新洑坪, 새들, 新坪)
평리마 방갯들 밑에 있는 들 이름이다. 새로 조성한 들이라 하여 생긴 이름이다.
■ 모래밭들(沙田坪, 沙洞坪)
평리 마을 맞은편 강 건너에 있는 모래동(沙洞)의 이름이다. 모래밭 위에 조성되었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 섬들(島坪)
모래밭들 아래쪽에 붙어 있는 들이다. 하천으로 둘러싸여 섬처럼 생겼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 배락방우칭덤(雷岩崖)
평리 마을 앞에 있는 절벽의 이름인데, 벼락을 맞은 바위가 있는 층덤이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 시리봉(甑]峰, 시루봉)
평리 마을 앞에 솟아 있는 산봉우리의 이름인데, 마치 시루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녹두골(綠豆谷)
평리 마을 시리봉 뒤의 동편 골짜기의 이름이다. 골짜기에 있는 밭에서 녹두가 많이 난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 큰골(大谷)
시리봉 뒤에 있는 골짜기의 이름으로 가는골(細谷)과 대비되는 지명이다.
■ 가는골(細谷)
시리봉 뒤의 서쪽 골짜기 이름이다. 골짜기가 가늘고 길다 하여 큰골과 대비시켜 붙인 지명이다.
■ 세칭바알(三層嶝)
평리 마을 녹두골 아래쪽에 위치한 펑퍼짐한 비탈을 가리킨다. 비탈이 세 층으로 이루어졌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비알은 비탈의 사투리이다.
■ 당등(堂嶝)
평리 마을 뒤쪽 산등성이 위에 당나무가 있다. 당(堂)이 있다 하여 당등이라 한 것이다.
■ 성지곡(聖智谷)
평리 마을 당등 동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옛날에 지사(地師) 성지(聖智)가 다녀간 곳이라 하여 붙인 지명이다.
■ 고뱅이등(高坊嶝)
평리 마을에서 바드리로 가는 길을 가리킨다. 길이 등성이를 따라 길게 나 있고 높은 언덕길이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진지소(長池沼)
평리 마을 벼락드미 아래쪽 하천에 있는 소(沼) 이름이다. 길다란 못과 같다 하여 붙인 지명이다.
■ 소나무소(松沼)
평리 마을 건너편 박미 앞 하천에 있는 소(沼)의 이름이다. 물가에 오래된 소나무가 있어 붙여진 지명이다.
■ 가산(加山)
바드리(所月里)동쪽 양산군(梁山郡) 경계 지점에 있는 높은 산 이름이다. 그 서쪽 산기슭에 가산(加山)이라는 산중(山中) 땀이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 강정(江亭, 洛洲亭)
고례(古禮) 양지마 앞, 시리소 위쪽에 있는 인동(仁同) 장씨(張氏)의 문중 정자이다. 낙주정(洛洲亭)이라 하며 일명 강정(江亭)이라고도 했다.
(2) 고예(古禮, 姑射, 姑曳, 庫藝)
평리 남쪽에 위치해 있으며 이 통 안에서 가장 오래되고 중심 되는 부락이다. 고사천(姑射川) 계류(溪流)를 사이에 두고 북쪽에 양지마(陽地), 남쪽에 음지마(陰地), 물 건너에 구석마(龜石村) 등 세 땀으로 나누어져 있다. 고예(庫藝)와 고예(姑曳) 또는 고사(姑射) 등의 옛 이름은 이 부락을 두고 일러 온 것이며, 지금도 고례초등학교와 버스정류장 등이 있어 생활 중심지라 할 수 있다. 양지마에는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처사(處士) 장내강(張乃絳)이 피난지로 정한 곳이며 그 이후 인동(仁同) 장씨(張氏)의 마을이 되었다. 후손들이 1957년에 옥봉(玉峰) 아래에다 옥봉정(玉峰亭)을 세워 보존하고 있다. 음지마도 인동(仁同) 장씨 일파의 마을로 순조(純祖) 때 진사 장창익(張昌翼)이 살았으며, 그 아들 장응구(張膺九)는 효자로서 나라의 명정(命旌)이 있었는데 1898년(광무 2)에 동구(洞口) 밖에다 삼성각(三省閣)이라는 효자각(孝子閣)을 세워 기리고 있다. 구석마는 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다 하여 구석촌(龜石村)이라 하는데 역시 인동(仁同) 장씨의 세거지(世居地)이다. 조선조 숙종 때에 낙주(洛洲) 장선흥(張善興)이 시천(始遷)한 곳으로 1918년에 장씨 문중에서 입촌한 선조와 그 후손인 농산(聾山) 장영석(張永錫)을 추모하기 위하여 낙주정(洛洲亭)이란 재사를 세웠다.
■ 양달마(陽村, 양지마, 陽地)
고례(古禮) 본동은 양달마, 음달마, 구석마 등 세 땀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양달쪽이라 하여 양지마, 또는 양달마라고 한다.
■ 음달마(陰村, 음지마, 陰地)
고례(古禮) 본동에 소속된 땀으로 음달쪽에 있다 하여 음달마 또는 음지마라고도 한다.
■ 구석마(龜石村, 隅村)
고례(古禮) 본동 양지마 건너편 산기슭에 있는 땀 이름이다. 동네에 거북 모양의 바위가 많다 하여 구석촌(龜石村)이라 한다.
■ 중림등(中林嶝)
고례 본동 앙달마의 뒤쪽 산등성이 이름이다. 나무갓이 성하여 붙인 지명이다.
■ 우대골(上大谷)
중림등 중간에 있는 암벽 골짜기의 이름인데, 이 골짜기 안에는 전답(田畓)과 우물이 있다.위쪽에 있는 큰 골짜기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 덤방우골(加岩谷)
고례 양달마 뒷산 동쪽에 있는 첫째번 골짜기의 이름이다. 덤으로 튀어나온 바위가 있는 골짜기이다.
■ 소산막골(牛山幕谷)
고례 담방우골 맨 안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소를 방목하면서 지은 산막(山幕)이 있었던 골짜기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 배암등(蛇嶝)
고례 덤방우골 안쪽에 있으며 소산막골 동쪽에 위치한 산등성이로, 등대의 모양이 뱀이 기어가듯 꾸불꾸불하다 하여 붙인 지명이다. 이 산등성이에는 명당이 있다고 전해온다.
■ 큰갓굼티기(大林穴)
배암등 너머에 있는 우묵한 굼티기의 이름이다. 큰 나무갓 속에 있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 곰골(熊谷)
큰갓굼티기에서 남쪽으로 나 있는 골짜기이다. 곰이 살고 있었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 바람매기
곰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바람이 몹시 세게 부는 곳으로 바람으로 메우는 골짜기라 하여 붙인 지명이다.
■ 살매등
바람매기 동쪽에 있는 산등성이이다. 싸리나무가 많이 자생(自生)하는 산등성이라 하여 살매등이라 한다.
■ 병암등(屛岩嶝, 屛風 바위嶝)
고례 곰골 남쪽에 있는 산등성이이다. 바위가 병풍처럼 둘려 쳐진 등성이라 하여 얻은 지명이다.
■ 양지앞등(陽地前嶝)
고례 양지마 동쪽에 있는 산등성이이다.
■ 굴대배기(窟岩)
양지앞등 동쪽에 있는 산등성이이다. 그 아래쪽에 굴이 있다 하여 굴대배기라 했다.
■ 굴골(국골, 窟谷)
굴대배기 옆에 있는 골짜기이다. 그 곳에 자연적인 굴이 있다 하여 굴골 또는 국골이라 했다.
■ 선방우(入岩)
굴골 안쪽으로 깊숙히 들어가면 산중턱에 바위가 서 있다. 서 있는 바위라 하여 생긴 이름이다.
■ 일리갓(一里林)
굴골 남쪽에 있는 갓(山林)인데, 본래는 고례일리(古禮一里)의 동유림(洞有林)이었다고 한다.
■ 항우골(下南谷)
일리갓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동네의 아래 남쪽에 있다 하여 하남골(下南谷)이었는데, 항우골로 음이 바뀌었다.
■ 삼밭골(痲田谷)
고례 당등 뒤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삼밭이 있었다 하여 붙인 지명이다.
■ 꾀꼬리봉(鶯峰)
고례 뒷등 위쪽에 있는 산봉우리의 이름이다. 형국(形局)이 꾀꼬리처럼 생겼다 하여 붙인 지명이다.
■ 통장골(桶匠谷, 통정골)
통정골이라고도 하는데 고례 꾀꼬리봉 아래쪽에 있다. 옛날 이 골짜기에 통(桶)을 만드는 통장(桶匠)이가 살고 있었다 하여 통장골이라 한다.
■ 절태산
고례 통장골 남쪽에 있는 산이다. 절태골이라고도 하는데 옛날에 절이 있었다고 한다.
■ 함박등
절태미골 안쪽에 있는 산등성이인데, 모양이 함지박을 엎어놓은 것 같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 진주골등(進舟谷嶝)
함박등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있는 산등성이이다. 산 너머에 국전리(菊田里) 진주동(進舟洞)으로 길게 뻗어 있는 산등성이라 하여 생긴 지명이다.
■ 미느리체골
진주(進舟)골등 남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골짜기 속에 미나리꽝이 있었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 배나무등(梨木嶝)
미느리채골 남쪽에 있는 등성이 이름이다. 돌배나무가 많은 골짜기라 하여 붙인 지명이다.
■ 길등(路嶝)
배나무등 옆에 있는 산등성이의 이름인데, 등대배기 위에서 국전리(菊田里), 감물리(甘勿里), 삼랑진(三浪津) 등으로 가는 길이 나누어져 있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 자래들(鱉嶝)
길등 남쪽에 있는 산등성이로, 지형이 자라가 엎드려 있는 모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돈구더기(錢坎)
자래등 아래쪽 골짜기에 있는데, 나무꾼들이 돈치기를 하고 놀던 장소였다.
■ 행상등(喪輿嶝)
자라등 남쪽에 있는 산등성이인데, 지형이 상여처럼 생겼다 하여 붙인 지명이다. 행상은 상여를 말한다.
■ 충충골(層層谷)
행상등 남쪽에 있는 골짜기의 이름으로, 층층(層層)으로 이루어졌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충충은 층층의 변음(變音)이다.
■ 꽃밭들(花田嶝)
충충골 옆에 있는 등성이 이름인데, 봄에 진달래꽃이 많이 핀다고 하여 붙인 지명이다.
■ 갓골동(冠谷嶝)
꽃밭등 옆에 있는 산등성이로, 지형이 갓(冠)처럼 우뚝하게 생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 구들등(溫突嶝)
갓골등 안에 위치해 있는데, 골짜기의 모양이 길고 협소하여 마치 대롱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말장백이(馬頭山, 馬山, 馬相山)
갓골 남쪽에 있는 산 이름이다. 마두산 또는 마산이라고도 하는데, 형국(形局)이 말머리 꼭대기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말장백이는 말의 짱배기 곧 말의 상판이라는 뜻이다.
■ 독쟁이골(饔匠谷)
고례 말장백이산 옆에 있는 골짜기의 지명이다. 옛날에 옹기를 파는 독쟁이가 살았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 어리빗등(疏梳嶝)
독쟁이골 남쪽에 있는 등성이 이름이다. 등성이의 모양이 어리빗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어리빗은 빗살이 성근 것을 말한다.
■ 미골(墓谷])
어리빗등 옆에 있는 골짜기 이름이다. 골짜기 속에 무덤이 있다 하여 묘곡(墓谷) 또는 미골이라 했다.
■ 국골(窟谷, 굴골)
미골 옆에 있는 골짜기인데, 이 곳에 굴이 있었다 하여 굴골이라 했다. 국골은 굴골의 변음(變音)이다.
■ 시리소(甑沼)
고례 양달마 맞은편 냇가에 있는 소(沼)의 이름이다. 모양이 떡시루처럼 생겼다 하여 붙인 지명이다. 시루소 뒷편은 국전리와 경계를 이룬 장재산(長者山)이다.
■ 톱방우(鋸岩)
시리소 가운데 있는 바위 이름인데, 모양이 톱같이 생겼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장달방우
이 바위도 시리소 안에 있는데, 바위 모양이 장닭 같이 생겼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장달은 장닭 곧 수탉의 사투리이다.
■ 구곡천(九曲川)
사희동(四熙洞)에서 사연리(泗淵里)까지 흐르는 계류(溪流)의 지명이다. 아홉 굽이를 돌아 흐른다 하여 생긴 이름인데 채지당(採芝堂) 박구원(朴龜元)의 고사구곡가(姑射九曲歌)에서 연유(緣由)한 것이다. 구곡(九曲)은 사연(泗淵), 정각산(正覺山), 범도리(泛棹里), 승학동(乘鶴洞), 단애(丹崖), 증소(甑沼), 도장연(道藏淵), 농암대(籠岩臺), 선소(船沼)를 가리킨다.
■ 꼬깔방우(僧帽岩)
고례 시리소 아래쪽 냇가에 있는 바위인데, 생긴 모양이 꼬깔과 같다 하여 꼬깔방우라 했다. 꼬깔은 중이 쓰는 고깔모자의 된소리 발음이다.
■ 담방소
고례 대방곡 아래쪽 강가에 있는 소(沼)의 이름이다.
■ 아랫굴(下窟)
고례 담방소 위에 있는 굴이다. 굴 안의 넓이가 50여 평이나 되는 자연적인 동굴이다.
■ 윗굴(上窟)
아랫굴 위쪽에 있는 굴이라 하여 붙인 이름이다. 아랫굴보다는 작은 편이지만 매우 깊숙한 굴이다.
■ 복고소
고례 담방소 위에 있는 느리(절벽)밑에 있는 소(沼) 이름이다.
■ 선방우(立岩)
고례 굴골 앞에 서 있는 바위 이름이다. 마치 성문을 지키는 것처럼 서 있다 하여 붙인 지명이다.
■ 중보(僧洑)
고례 본땀 앞들에 물을 대는 보(洑)의 이름인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본래 이 보(洑)는 나무로 홈통을 길게 만든 다음 하천 절벽에 튀어나온 큰 바위를 둘러 매달아 수로(水路)를 삼았다. 그러나 큰물이 지나가고 나면 곧 수로(水路)는 떠내려가고, 다음 해에는 또 새로운 작업을 해야 하니 주민들의 수고가 여간 아니었다. 그러한 어느 해에 또 마을 사람들이 동원되어 보(洑)의 축조 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한 노승(老僧)이 이 현장을 지나가다가 동민(洞民)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묻는 말이, 저 큰 바위를 부수어 그 사이로 봇도랑을 내면 될 것을 공연하게 고생하고 있는가 하고 타일렀다. 마을 사람들은 할 일 없는 중을 다 보겠다는 듯 노승(老僧)의 말을 귓가로 흘리며 작업을 계속했다. 그러자 중은 별안간 짚고 있던 지팡이를 바위 쪽으로 휙 내던지고는 그 자리를 떠나갔다. 그러자 그 날 밤에 별안간 푸른 하늘에 먹구름이 모여들고 귀를 찢는 천둥소리가 한참이나 계속되었다. 밤새 무서움에 떨던 동민들이다시 작업을 하기 위해 현장에 나갔더니 이게 웬일인가. 문제의 그 큰 바위가 둘로 쪼개어져 그 사이로 물이 흐르고, 어제의 그 노승(老僧)이 지팡이를 내던져 부린 도술(道術)로 바위가 갈라진 것이라 탄복하고, 갈라진 바위 사이로 봇도랑을 내어 비로소 안전한 보(洑)를 축조(築造)했다. 그 후부터 이 보(洑)를 노승(老僧)의 신기한 조화로 이룩한 것이라 하여 승보(僧洑)라 했다.
(3) 덕달(德達,떡달이)
고례 마을의 남쪽 골짜기 안에 있으며, 고사천(姑射川) 상류(上流)에 위치한 자연 부락이다. 조선조 초기에 점필재선생과 같이 도덕과 문장에 통달한 명현(名賢)들이 유상(遊賞)한 곳이라 하여 덕달(德達)이라는 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떡달이는 덕달의 된소리 발음으로 별다른 뜻이 없는 지명이다. 행정상으로는 덕달 본동 이외에 죽촌(竹村) 마을과 농암대(籠岩臺) 어구에 있는 사희동(四熙洞)이 이 부락에 소속되어 있다. 덕달마에는 조선조 숙종때 덕산(德山) 이경범(李敬範)이 입촌(入村)하여 경주 이씨 일파의 세거지(世居地)가 되었으며, 1960년에 그 후손(後孫)들이 덕산재(德山齋)를 세워 보존하고 있다. 사희동(四熙洞)은 조선조(朝鮮朝) 성종(成宗) 때 채지당(採芝堂) 박구원(朴龜元)의 구거(舊居)로 본래 이 곳에는 별업(別業)이 있었는데 점필재 김종직,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등 세 명현(名賢)이 방문하여 소요(逍遙)한 곳이라 한다. 점필재 선생이 옛날 중국 상산(商山)의 고취(高趣)를 모방(模倣)하여 별업(別業)의 편액(扁額)을 사호정(四皓亭)이라 했다고 한다. 사호동(四皓洞)은 사호정(四皓亭)에서 파생(派生)한 이름이며, 그 후 사희동(四熙洞) 또는 사의동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지금 보존되고 있는 사호정(四皓亭) 건물(建物)은 1606년(宣祖 39)에 채지당(採芝堂)의 현손(玄孫)인 악춘(樂春) 박이화(朴而華)와 양재(讓齋) 박이문(朴而文) 형제가 중건(重建)한 것을 그 후 몇 번의 흥폐(興廢)를 거듭하다가 1958년에 재건(再建)하여 밀성 박씨 문중에서 재사(齋舍)로 삼고 있다.
■ 동맷들(東山坪)
덕달 앞에 있는 들 이름이다. 동쪽에 있는 뫼 앞의 들이라 하여 동맷들이라 했다.
■ 손찰방들(孫察訪坪)
덕달과 고례 양달마 사이에 있는 들 이름이다. 사연리(泗淵里) 동화전(桐花田)에 거주(居住)했던 손찰방(孫察訪)이라는 사람의 소유(所有) 전답(田畓)이 많았다 하여 붙인 지명이다.
■ 밤밭골 정자(栗田谷 亭子)
사희동 동쪽에 있는 정자터이다. 본래 이 곳에 사호정이 있었으나 해방 후에 구석촌(龜石村)으로 옮겼다. 오목골에 있었다 하여 오목골 정자라고도 했다.
■ 별장들(別莊坪)
사희동 앞에 있는 들 이름이다. 옛날 이 곳에 별장(別莊) 사호정(四皓亭)이 있었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 양삼(陽蔘)
사희동 동북쪽에 있었던 산 중 땀 이름이다. 인삼을 심은 삼밭이 있었다 하여 생긴 지명인데 6.25동란 이후에 없어졌다.
■ 석싯들
사희동 서쪽에 있는 들 이름이다.
■ 죽촌(대마, 竹村)
사희동에 인접한 자연 부락으로 대밭 밑에 있다 하여 죽촌(竹村)이라 한다. 지금도 대밭이 있고 품질 좋은 큰 대가 생산되고 있다.
■ 굴밑(窟底)
고례에서 사희동으로 가는 길가에 있다. 뒤쪽은 덧덜겅산이라 하는데 그 밑에 하천이 흐르고 산 중허리 절벽 사이에 이 굴이 있다. 굴 안이 비교적 넓어서 행인들이 소나기를 피할 수 있는 곳이다.
■ 독매산(獨山)
사희동 덧덜겅산의 위쪽 봉우리를 가리킨다. 독뫼처럼 생겼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 고둑골(高堤谷)
사희동 덧덜겅상 서쪽으로 연달아 있는 골짜기와 산등성이를 아울러 가리킨다. 높은 산두둑과 골짜기라는 뜻이다.
■ 둥딩이고개(동댕이 고개)
사희동에서 양산군 원동면 대리(大里)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물건이 수북하게 쌓인 것 같다 하여 둥댕이 고개라고 했다.
■ 살매등
독뫼 위쪽의 등성인데 싸리나무가 많다고 하여 생긴 지명이다.
■ 궁굴방우(孔洞岩)
살매등 옆에 있는 바위인데, 바위 밑이 궁굴어(孔洞)있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 오목골(凹谷)
살매등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 이름이다. 골짜기가 오목하다 하여 붙인 지명이다.
■ 매봉재(鷹峰峙)
오목골 산봉우리를 가리킨다. 아득한 옛날에 천지(天地)가 개벽(開闢)되어 홍수가 졌을 때 이 봉우리에는 매(鷹)한 마리가 앉을 만큼 남아 있었다고 하는 전설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 삼밭골(蔘田谷)
매봉재 동쪽 골짜기 이름인데, 이곳에서 산삼이 났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아랫산 너매(下山越)
삼밭골 아래쪽 산 너머라는 뜻이다.
■ 병마갯등(甁蓋嶝)
아랫산너매로 넘어가는 산등성이이다. 병마개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모래등양달
아랫산너매 위 동쪽에 있는 산비탈을 말하는데, 머루가 많이 난다고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모래는 머루의 사투리이며 머루등(嶝)이 양지바른 곳이므로 모래등양달이라 했다.
■ 목골장재
사희동 앞에 있는 산등성이 일대를 가리킨다. 산 너머에 있는 못골(池谷)과 장재(長者谷)가 있다 하여 목골장재라 했다.
■ 수박소
사희동 마을 들머리의 냇 가에 있는 소(沼)의 이름이다. 수박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넙득소(廣沼)
수박소 위쪽에 있는 소(沼)의 이름이다. 소(沼)의 모양이 널찍하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 도장소(道藏淵)
수박소 아래쪽 마을의 입구에 있다. 고사구곡(姑射九曲) 가운데 하나로 그 깊이를 알 수 없고 근처의 경승(景勝)이 아름답다.
■ 빌소(祈所)
사희동 마을 동쪽에 있는 농암대(籠岩臺)에서 흘러온 물이 고인 소(沼)를 말한다. 무녀(巫女)들이 이 소(沼)에서 정성을 드리며 빈다고 하여 빌소라 한다.
■ 진웅딩이(長沼)
마을 동쪽의 농암대 앞에 있는 기다란 물 웅덩이이다.
■ 배방우보(船岩洑)
사희동 진웅딩이 위쪽에 있는 보(洑) 이름이다. 보(洑) 가운데 배처럼 생긴 배방우가 있다 하여 붙인 지명이다.
■ 양산방우(밀양방우, 梁山岩, 密陽岩)
농암대에서 1㎞ 정도 계천(溪川)을 따라 올라가면 양산군과의 경계 지점의 물 가운데에 바위 두 개가 이마를 맞대고 서 있다. 밀양쪽에 있는 바위를 밀양바위, 양산쪽에 있는 바위를 양산바위라고 한다. 양산쪽 바위보다 밀양바위가 조금 크다.
■ 농암대(籠岩臺)
사희동에서 2km 정도 동쪽 계류를 따라 올라가면 이른바 고사구곡(姑射九曲)의 마지막 경승지라고 하는 농암대(籠岩臺)가 전개된다. 이 일대 청계상(淸溪上)에 있는 바위들이 모두 하얗고 마치 농(籠)을 쌓은 것 같다 하여 농암대가 되었다. 이 곳을 지나면 양산군과의 경계를 이룬다.
■ 디비진방우(飜岩)
농암대 위쪽 계천(溪川) 가운데에 있는데, 바위의 모양이 되바라져서 뒤집어 놓은 것 같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디비진이라는 말은 뒤집어졌다는 말의 사투리이다.
■ 용간방우(용방우, 龍行岩, 용금방우)
농암대(籠岩臺) 아래쪽에 있는 바위의 이름인데, 용(龍)이 기어간 흔적이 있다 하여 용(龍)이 지나간 바위라는 뜻으로 생긴 지명이다. 용방우, 용금방우라는 다른 이름도 있다.
■ 수리덤(鷲崖)
농암대 아래쪽 맞은편 산 중턱에 병풍처럼 둘려진 절벽을 가리킨다. 이 곳에 독수리가 서식(棲息)한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덩덩걸
농암대 수리덤 위쪽에 있는 산등성이를 가리킨다. 일대에 큰 산석(山石)이 널려 있는 돌덜겅이다.
■ 농암웃치미(籠岩山上)
농암대 맞은편 산비탈 일대를 가리키는데 농암대 위쪽에 있는 뫼라 하여 붙인 지명이다.
■ 배수큰골짝(梨川大谷)
수리덤 동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양산(梁山) 배내(梨水)와 맞닿은 큰 골짜기라는 뜻에서 붙인 지명이다.
■ 당등(堂嶝)
배수큰골짝 동쪽에 있는 산등성이 이름이다. 당집이 있었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 챙이골(箕谷, 칭이골)
농암대 당등 동쪽에 있는 골짜기 이름이다. 지형이 챙이, 곧 키(箕)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지명이다.
■ 감나무골(枾木谷)
사희동 마을의 동쪽인 농암대(籠岩臺) 뒷산에 있는 골짜기인데, 사희동 마을의 동쪽인 농암대 뒷산에 있는 골짜기인데, 감나무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다.
■ 범방우(虎岩)
사희동 감나무골 웃치미에 있는데, 바위의 생김새가 범 같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또 범이 이 곳에 실제로 서식하고 있다 하여 범골이라 한다.
■ 큰산너매(大山越)
사희동 동쪽 문방우골이 있는 산비탈을 가리킨다.
■ 문방우(門岩)
사희동 큰산 너머의 비탈 가운데 있는 두 개의 바위를 가리킨다.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서 있는 두 개의 큰 바위가 마치 대문처럼 보인다하여 문바위라 한다.
■ 문방우골(門岩谷)
문방우 사이에 있는 골짜기의 이름이다.
■ 불개미등(火蟻嶝)
사희동 문방우골 위쪽에 있는 산등성인데, 불개미가 유별나게 많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 큰굼티기(大穴)
문방우골 위쪽 동편에 있는 깊은 골짜기의 이름이다.
■ 진등(長嶝)
사희동 마을의 동쪽에 있는 길다란 등성이다.
■ 밤밭등(栗田嶝)
사희동 아래쪽에 있는 산등성이인데, 옛날 밤밭이 있었다고 한다.
■ 밤밭고개
사희동에서 농암대로 가는 나지막한 고개의 이름이다. 옛날에 큰 밤밭이 있었다.
■ 당집(堂舍)
사희동 밤밭고개 언덕바지에 당나무집이 있었다. 매년 대보름날에는 지금도 당제(堂祭)를 올리며 동신(洞神)을 제사(祭祀) 지내고 있다.
■ 샘방우(泉岩)
사희동 당집 뒤쪽에 있는 바위인데, 그 곳에 샘이 있다 하여 생긴 이름이다.
■ 불자리(火處)
사희동 진등 산꼭대기에 있는데, 이 일대는 거의 면유림(面有林)이다. 일제 때 행정 명령으로 동민(洞民)들을 동원(動員)하여 풀베기 작업을 했을 때 새벽 같이 동민들이 이 곳에 집결하여 불을 밝히고 풀베기 준비를 했다. 불을 지핀 자리라 하여 지금까지 불자리로서 지명이 전해 온다.
■ 사리밭골
사희동 마을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사리나무가 많았다 하여 붙인 지명이다. 옛날 양산으로 넘어가는 길목이었는데, 조그마한 마을도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
■ 팥밭골(小豆谷)
사리밭골로 가는 길 오른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의 이름이다. 팥을 심는 밭이 있었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 범놀이터(虎遊地)
사희동 팥밭골 산꼭대기부에 있는 바위의 이름이다. 범이 노는 장소였다 하여 생긴 지명이다.
■ 곰골(熊谷)
사희동 사리밭골 마을 위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옛날에 곰이 서식한 곳이었다고 한다.
■ 다람재고개
사희동 사리밭골에서 양산(梁山) 선리(善里), 장선 등지(等地)로 넘어가는 고개 이름이다. 다람쥐가 많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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