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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의 내용을 짧게 다시 설명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창세기 1-11장은 하느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그런데 그 보시니 좋은 세상이 더 이상 그렇지 않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바로 인간의 범죄 때문이었습니다. 그 인간의 범죄의 유형은 타락과 폭력입니다.
타락은, 하느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는 그런 수직적인 의미로 알아들을 수 있고 폭력은, 인간과 인간사이에 우리들이 이웃을 거슬러 저지르는 범죄였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에 그 창조 의지대로 세상이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창조 의지라고 하셨는데 신약으로 와서 예수님께서는 그 창조 의지를 아버지의 뜻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은 같은 카테고리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 성령, 보이지 않는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아버지의 뜻 내지는 하느님의 의지입니다.
우리 인간도 육과 영으로 되어있습니다. 인간의 영을 말할 때는 인간의 여러 가지 의지입니다. 그 의지란? 우리가 살면서 이루려고 하는 것들.
나의 의지와 나의 영, 그리고 아버지의 영, 하느님의 뜻이 하나가 되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가장 이상적인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구약에서는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으니 하느님을 닮아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신약에서는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닮아간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성형 수술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우리나라 K-POP의 유행으로 유럽의 젊은이가 우리나라 가수를 좋아한 나머지 무려 서른여섯 번을 성형했다고 합니다. 그 기사를 보시고 '왜? 이러지?'라는 생각도 하셨지만 이 사람은 누군가를 사랑해서 닮으려고 세속적인 노력을 이 정도로 하는데, 신부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하는지... 생각해 보셨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뜻을 알고 나의 의지가 하느님의 의지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나도 원하고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것을 나도 사랑할 수 있도록 신앙의 관점에서 같은 카테고리의 말입니다.
영 : 성령 : 뜻 : 신학적으로 의지
창세기 1-11장까지의 내용은 하느님이 원하신 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창세기 12장에서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십니다.
천주교 교리서를 영어판으로 읽게 되면은 "Enterprise"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사업을 시작하시면서 아브라함을 선택하고 그를 축복하시면서, 그를 통해서 온 세상의 모든 민족에게 복을 내리는 구원 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기업하나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이 잘 될까? 그 성패는 어디에 달려있을까요?
첫 번째 ; 성조사에서는 성조들이 세속적인 관점에서 굉장히 힘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축복을 지켜내는가? 그렇지 않은가?
두 번째 ; 그리하여 그들을 통해 온 세상이 축복을 받았나? 그렇지 못했나? 의 문제였습니다.
이 두 가지 질문을 위해서 성조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 안에서 그들이 가졌던 신앙의 여정을 돌아보게 됩니다. 성조들과 함께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그 여행, 창세기 12-50장과 함께 결론은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요셉은 여러 가지 힘든 일을 겪고 때로 비틀거렸지만 하느님의 축복만큼은 꼭 움켜쥐고 놓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여행? 파랑새라는 동화를 아십니까?
틸틸과 미틸이라는 남매가 행복을 찾기 위해서 여행을 하고 나중에 보니까 그 행복을 주는 파랑새가 집에 있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신부님은 어른이 되고 난 후 거꾸로 읽어보셨어요. 그리고 이렇게 이해하셨어요.
'아!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있는 거야.' 그것이 이 이야기가 주는 일차적인 교훈이라고 한다면, 거꾸로 읽어보시고 난 뒤
'그 남매가 그런 여정을 하지 않았더라면 집안에 있는 파랑새를 발견할 수 있었을까?'라고...
성조들과 함께 우리도 그 여정을 함께한 시간이었습니다. 공간적으로 우리는 이곳에서 함께 있지만 시간적으로 우리 모두는 시간 여행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어제를 떠나서 오늘로 왔고 오늘을 떠나서 내일로 가겠지요?
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 세상에 태어났고 언젠가는 이 세상을 떠나겠지요?
그 여행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나중에 집으로 돌아갔을 때 우리는 파랑새를 알아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성조들과 함께 우리는 여정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요셉과 함께 이집트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갔을 때 굉장히 해피한 이야기입니다.
요셉은 이집트에 가서 승승장구하였고 요셉의 가족들이 왔다고 하니 파라오는 그들에게 고센의 땅을 주었어요. 그 고센 땅이 어디인지는 모릅니다. 그 고센 땅에서 유다인들이 함께 살 수 있었습니다.
이집트에 들어갈 때는 70명? 72명?이었는데
성경에서는 70? 72? 가 늘 애매하게 등장합니다.
루카복음에서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한 번은 사도들을 파견하시고 한 번은 70명의 제자들을 파견하시는데
루카복음을 손으로 쓴 다양한 수사본에서(1500년? 1600년? 정도 되는 것들이었습니다)는 72명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의 그리스어 번역본 우리가 칠십인역이라고 부릅니다.
옛날의 고대의 기록들을 찾아보면, 그것이 70명이 번역해서 칠십인역이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일흔두 명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따라서 70과 72는 항상 약간씩 붙어 다니는 것 같습니다.
이집트로 간 이스라엘의 숫자도 70이라고 하는데 요셉과 야곱을 추가로 계산하면 일흔두 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정확한 것은 하늘나라에 가서 물어보면 되겠지요?
70? 72? 명이 고센 땅에서 살다가 야곱이 죽어서 약속의 땅으로 와서 묻고 돌아가는 이야기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탈출기가 시작됩니다.
70명이 들어갔는데 그 숫자가 엄청나게 불어납니다. 그 숫자가 불어난 이유는? 인과 관계에서 따져보면 사실은 하느님의 축복 때문이에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을 축복하실 때 "너희의 자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알처럼, 땅의 먼지처럼 많게 해 주겠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정말 70명의 숫자가 불어났습니다. 나중에 탈출기의 뒷부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오게 되는데 그 숫자가 육십만 가량이 되었습니다.
숫자가 불어나니까 이집트 사람들이 그리고 파라오가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더 큰 문제는? 탈출기를 시작하면서 그 새로운 파라오에 대해서 "새 파라오는 요셉을 몰랐다."하고 이야기합니다. 안다와 모른다에서 중대한 차이가 있습니다.
구약에서 하느님을 알아가는 첫 번째 단계는 "보다와 듣다"
두 번째 단계는 "알다와 믿다"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파라오는 요셉을 몰랐다고 말합니다. 요셉을 모르고 두려움만 갖고 있는 것입니다. 몰랐기 때문에 두려운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우리가 괴기영화를 볼 때 괴물이 나올 때 까지가 무섭습니다. 괴물이 나오면 문제는 해결됩니다. 따라서 정말 무서울 때는 괴물의 정체를 모를 때, 원인을 찾을 수 없을 때 무서움을 느끼게 됩니다.
파라오는 요셉을 몰랐고, 이스라엘을 몰랐고, 이스라엘의 하느님도 몰랐습니다. 그래서 두려웠다.
인간이 두려웠을 때 나타나는 반응은? 폭력입니다. 그 폭력의 기저에는 두려움이 있다고 심리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파라오와 이집트의 백성들은 이스라엘을 두려워합니다. 그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을,
'우리가 다른 나라와 전쟁이라도 하게 되었을 때, 저 이스라엘인들이 적들의 편에 선다면!!!'
지금 유럽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문제 중에 하나가 난민 문제입니다. 그 난민들은 자식들을 많이 낳습니다. '그들의 자손의 수가 점점 늘어나면 우리보다 더 많아질 수도 있겠네?'라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두려운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박해하기 시작했고 이스라엘은 이집트의 노예로 전락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주로 도시 건설하는 일을 시켰습니다. 그 도시를 건설하면서도 이스라엘의 숫자가 늘어나니 박해의 강도가 더 높아집니다.
처음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재료를 제공해 주고 벽돌을 만들라고 하였는데, 당시의 벽돌을 만들 때에는 진흙과 지푸라기를 이용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 지푸라기까지 구해서 만들라고 합니다.
박해의 첫 번째 모습입니다.
박해의 두 번째 모습은 산아제한이었습니다. 파라오는 산파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들을 낳으면 죽이고 딸을 낳으면 살려주라고 은밀히 명령합니다. 하지만 산파들이 그 말을 듣지 않았어요.
그러자 두 번째로 파라오는 공개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남자아이들 낳으면 죽여버리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산아제한의 첫 번째 단계가 실패하자 두 번째의 강도는 더 높아집니다.
그러자 이스라엘이 부르짖습니다. 히브리어 본문을 보면 그야말로 절실하게 부르짖습니다. 그 소리를 하느님께서 듣고 성조들에게 했던 자신의 약속을 기억하셨다로 탈출기의 첫 번째 파트가 마무리됩니다.
탈출기의 두 번째 파트가 시작됩니다. 모세가 레위 집안에서 태어납니다. 그 모세가 태어나고 탈출기 텍스트를 보게 되면은, 그 아이가 잘생겨서 부모가 죽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잘못이해한다면, "예나 지금이나 잘생기고 볼일이다."
잘생겼다는 말을 히브리어로 Tov라고 합니다. 이 단어가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보시니 좋았다."라는 말에서 나옵니다.
그 보시니 좋았다는 모습이 모세에게 있었다. 그래서 그 아기를 죽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보시니 좋았다"는 말을 중세의 신학자들이 토론을 하다가
Tov라는 단어에는 세 가지 덕목이 있다. 진, 선, 미 즉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다. 그 세 가지 덕목이 조화롭게 함께 있을 때 '보시니 좋았다'라고 해석을 했습니다.
모세를 어느 정도 키우다가 더 이상 키울 수 없게 되자, 그 모세를 바구니에 넣어서 강에 띄웁니다. 그 바구니를 테바라고 합니다. 그 테바는 창세기에서 노아가 만든 방주가 테바입니다. 따라서 테바는 크기와 상관없이 무언가 거기에 공간이 있고 타르나 역청을 발라서 물에 빠지지 않게 만든 것을 말합니다.
이 히브리말 테바를 창세기에서는 방주라고 해석했고 탈출기에서는 바구니라고 해석했습니다.
파라오의 공주로부터 구출을 받은 모세는 궁중에서 자라게 됩니다. 그 파라오의 공주는 어떻게 되었는지 탈출기에서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다 전통이 전하는 다른 문헌에서는 모세가 이스라엘을 데리고 탈출할 때 그 공주도 함께 나오게 되고 하느님을 섬기는 여인으로서 살아갑니다. 또한 모세가 자신의 정체에 관해서 잘 알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자신이 파라오의 핏줄이 아니라 유다인의 핏줄이고 공주에게 입양되었다는 사실정도는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정도 성장하고 청년이 된 모세는 이집트인이 이스라엘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아마도 때려죽였던 것 같아요...) 그 이집트인을 때려죽인 다음에 무서워서 미디안 땅으로 도망을 갑니다. 그곳의 우물가에서 미디안 사제의 딸들을 만나게 됩니다.
구약성경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장소는 우물가입니다. 이사악이 레베카를 만나는 곳도 우물가, 모세가 사제의 딸들을 만나는 곳도 우물가이고 나중에 신약에서도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을 우물가에서 만났습니다. 우리나라로 표현하면 물레방앗간정도가 되겠습니다.
모세는 미디안의 사제의 딸과 결혼하고 그 사제의 양 떼를 돌보는 일을 하게 됩니다. 어느 날 모세는 호렙에 가서 이상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호렙은 시나이 산의 또 다른 이름으로 시나이 산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게 되는 경우,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계약을 맺은 산인데
모세오경의 마지막 책인 신명기를 쓴 신명기학파는 그 시나이라는 단어를 피하고 싶어 합니다.
왜냐면 신명기는 이스라엘이 유배를 갔다 온 전후에 쓰여졌는데 이스라엘이 유배를 갔다 온 바빌론 사람들이 섬기는 신중에서 달의 여신의 이름이 신이었습니다. 시나이와 발음이 비슷해서 그 시나이라는 이름을 피하고 싶어 합니다.
따라서 신명기 학파가 쓴 다른 글들도 그 글들에서 하느님이 이스라엘과 계약을 맺은 산을 호렙이라고 합니다.
호렙 : 삭막하다는 의미
그 삭막한 곳에서 모세가 떨기나무 하나를 보는데, 그 떨기나무가 불타는 것처럼 보이지만 떨기나무가 불타지는 않더라는 체험을 합니다. 그에 관해서 신학자들이 설명합니다.
떨기나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속적인 것에 속한 그 무엇이고 모세가 본 불은 초월적인 세상에 속해있는 하느님의 현존 중에 하나의 표상입니다. 모세에게 초월적인 세상과 세속적인 세상이 겹쳐서 보인 것입니다.
모세가 가까이가니까 "신을 벗어라."라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신을 벗고 하느님의 부르심을 마주하게 됩니다.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많은 부분을 이슬람의 경전인 쿠란도 갖고 있다고 하셨는데, 그 쿠란에서는 이 내용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 같아요. 그래서 모스크에 들어갈 때는 신발은 꼭 벗어야 합니다. 아랍 사람들도 집에 들어갈 때 신발을 벗거나 하지는 않는데 모스크에 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습니다.
저희들은 집에들어갈 때는 신발을 벗지만 성전에 올 때는 신발을 벗지 않습니다. 거룩한 장소에 들어갈 때는 신을 벗어야 한다는 것을 이슬람을 잘 지키고 있고 우리는 그와 같은 전통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핵심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관해서 모세는 다섯 번이나 못하겠다고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느님이 화를 내시며 "네가 말을 못하겠다고 하는데 너의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아론과 함께 파라오에게 가서 내가 하라고 한 말을 전하도록 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집트로 와서 파라오에게 가서 하느님의 뜻을 전합니다.
하지만 파라오는 모세가 전한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여러 가지 표징들을 보여주는데 이집트의 마술사들도 어느 정도의 쉬운 것들은 할 수 있었고, 마지막 열 번째 재앙을 제외한다면 아홉 가지 재앙이 3개씩, 3개씩, 3개씩으로 비슷한 문학적인 구조를 가지면서 세바퀴를 돌아갑니다.
1. 2. 3/ 4. 5. 6/ 7. 8.9
그리고 마지막 이집트의 맏아들과 맏배가 죽는 것이 열번 째 재앙이 됩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떠날 수 있게 됩니다.
이 부분에서 신부님은 파라오의 딜레마라고 하셨어요. 파라오는 왜 열 번째의 재앙을 겪으면서 까지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지 않았을까요?
파라오는 이스라엘을 해방시킬수 없었을 거라고 하셨어요.
고대 경제 시스템은 노예 경제였어요. 노예들이 기본적인 일을 해주어서 경제가 돌아갔는데 그들이 떠나가게 되면 경제 시스템은 무너지게 됩니다. 그걸 안 파라오에게는 대안이 없었던 것입니다. 숱한 재앙을 겪으면서도 이스라엘을 놓아줄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파라오가 지혜로웠다면, 이스라엘이 떠나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대안을 모색해야 했는데 그는 이스라엘의 발목만 붙잡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탈출기에 나오는 파라오의 딜레마가 오늘의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딜레마와 통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세상은 자본주의 세상입니다.
자본주의 세상은 생산하고 소비하는 사이클을 통해서 지탱합니다.
공장과 기업에서 상품을 생산하고 국민들은 그것을 소비합니다. 그러면서 생산과 소비에 규모가 점점 더 커집니다. 우리나라 GDP가 몇 프로씩 성장했다고 신문에서는 말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반대로 생각한다면 성장했다는 것은 더 생산하고 더 소비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러기 위해서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고 더 많은 쓰레기가 쌓이겠죠?
그러다가 지구라는 작은 별이 그것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까지 왔는데 우리는 계속해서 굴러갑니다. 절벽을 향해서...
신부님이 어릴때 읽었던 동화중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는 동화가 있었어요. 그 거위의 주인은 나중에 어리석게도 황금알을 낳아주는 거위의 배를 갈라버립니다. 그와 비슷한 선택을 2025년을 살고 있는 지구인들이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절벽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들에게 "이제 멈춰야 해!"라고 아무도 말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이번에 대통령의 공약 중에 생태에 관련된 것이 있어서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하시는데, 그것만 가지고 충분할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고 하셨어요.
현재를 충분히 살만큼 살았고 보통의 삶을 살아오면서 희노애락도 느낄 만큼 느꼈다고 생각하며 하느님께서 지금 당장 부르고 데려가셔도 의연할 수 있는 나이를 체감하는 우리들에게는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 세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조금 미안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다음 세대를 생각했을 때 정말 우리가 어떤 세상을 남겨두고 떠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진지하게 던져봐야 할 것입니다.
파라오의 딜레마는 지금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생태계가 우리들의 탐욕 때문에 무너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보아야 할 우리들의 딜레마입니다.
또 한 가지.
재앙의 부분에서 하느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와 같은 재앙을 통해서 내가 이집트인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 이 재앙을 통해서 이집트인들이 나를 알게 되는 것."이라는 내용이 몇 번에 걸쳐서 나옵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합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해방의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집트에게 있어서도 해방의 사건입니다. 불의한 구조 안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과 폭력을 당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불의한 구조가 깨진다면 폭력을 당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폭력을 행하는 사람에게도 해방입니다.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라 스스로 자부하는 우리가 자녀들에게 "너희 앞으로 갑질하면서 살아라."하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가 자녀들에게 유익한 교육활동을 시키면서 자녀들이 어디가서 갑질당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갑질의 희생자가 내 자식들이 되지 않기를...
하지만 그렇게 하다보면 어느 순간 나는 갑질을 하던 안하던 그런 위치에 와있는 겁니다.
누군가가 사람들이 만나면 갑과 을이 되는 그런 구조를 개선한다면 그것은 모두에게 좋은 일입니다.
몇년 전에 학생 인권 조례가 발표되면서 떠들썩한 일이 있었습니다. 학생이 잘못을 하면 체벌을 해도 된다, 안된다에 대한 토론이 있었어요.
대치2동 신자분들에게도 물으셨어요. 자라나는 아이들이 잘못을 하면 선생님들이 때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그렇지 해서는 안된다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그 결과는 본당마다 비슷한 것 같다고 하셨어요.
다음 질문으로 신자가 잘못하면 신부님이 때릴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질문하셨습니다.
결국 체벌이나 폭력을 통해서 인간이 교정될 수 있다고 믿느냐? 아니면 그것은 좋은 일이 아니고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있을 것이다! 에 대한 차이일 것입니다.
폭력적인 수단을 통해서 인간이 교정될 수 있다면 곤장을 치는 게 맞죠.
그 학생 인권 조례를 겪으면서 신부님이 어느곳에 기고를 하시게 되었는데요. 그 문제에 대한 기고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어요.
"학생 인권이라는 말에 관해서 나는 불편하게 하나 있습니다. 세상에 학생 인권이 따로 있고 교사 인권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옳은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인권은 모든 인간이 누려야 할 보편적인 권리입니다. 그것은 학생도 교사도 누려야 할 보편적인 권리입니다."
여성 인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과 남성은 젠더라는 측면에서 다릅니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측면에서는 동일합니다. 따라서 인간이 누려야할 권리가 남성과 여성에게 있어서 차별적으로 존재한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 인간의 역사를 되짚어 보면 여성에 대한 남성의 어떤 폭력적인 관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신부님도 이십년 전에 본당에서 사목하실 때에 아무런 생각없이 아이들이 다투고 있을 때 "야, 남자가 참아야지."하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별 생각없이 하신 그 말씀을 남성과 여성 그리고 인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면서 아이들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다고 느끼셨다고 합니다.
남성이 여성을 보호해야지!! 아닙니다. 이곳에 있는 여성분들 중에서도 상당수는 신부님보다 힘이 세요.
힘이 센 사람이 약한 사람을 보호해 주어야 합니다.
따라서 남성과 여성에게 잘못된 인권이 정상적으로 적용되었을 때 그것은 남성에게도 좋은 일입니다.
결국 여성 인권 해방은 남성 인권 해방이기도 합니다.
이십 년 전에 신부님이 강의 때에 "우리나라에서도 아이가 태어나면 남성과 여성이 함께 육아휴직을 쓸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학생신부로 유럽에서 생활을 했는데, 유럽에서 아이가 태어나면 남자가 오전에 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여자가 오후에 출근해서 일하면서 각자 자신의 직업을 통해서 성장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이었습니다." 하고 이야기하셨어요. 그러면 많은 분들이 신부님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하는 표정을 지으셨다고 해요.
그리고 그 당시에 신부님들에게 강의를 하시면서 "우리 사회가 생각해야 할 문제가 세 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가 생태문제, 두 번 째는 통일, 그리고 세 번 째는 여성입니다." 하고 말씀하시면 신부님들도 세 번째 문제에 관해서는 고개를 갸웃거리셨어요.
그때 가톨릭 여성지도자들을 만나시면 그분들도 "이정도면 여성 인권 문제없는 것 아니에요?" 하고 말씀하셨어요.
세월이 많이 흘러가면서 무엇이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 우리 사회의 생각도 바로잡게 되가는 것 같아요. 물론 변화라는 것은 힘들지만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 나라로 한 발자국 더 가는 것입니다.
신부님이 신학생때 탈출기를 읽으면서 이집트인들에게 하느님은 얼마나 잔인한 신이었을까? 하고 생각하셨어요.
하지만 이런 텍스트를 읽고 공부하면서 '아, 그것이 아니구나. 이스라엘의 해방 사건은 이집트에게도 해방 사건이었구나. 더 이상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부릴 필요가 없는 세상을 이집트와 이스라엘이 함께 꿈꾸기 시작했구나.'라는 것에 대해서...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오면서 그 열번 째 재앙이 조금 무섭습니다. 동물의 맏배는 모르는데, 이집트의 맏아들까지 하느님께서 죽게 하셨다... '하느님, 조금 너무하시는 것 같아.' 하는 생각을 하실 수 있어요.
하지만 탈출기 저자의 입장에서는 그 안에서 문화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또 탈출기 저자의 입장에서는 그 열번 째 재앙을 통해서 하느님의 정의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탈출기 시작부분에서 파라오가 이스라엘의 아들들을 죽여버렸습니다. 거기에 대한 동태복수("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실현되었을 때 정의롭다는 것입니다.
그 죽음에 대한 동태복수 법에 대한 정의가 열번 째 재앙을 통해서 실현된 것입니다.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시다"라는 고백을 그부분에서 들을 수 있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로부터 나오는데 그래도 파라오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병거를 이끌고 이스라엘을 뒤따라 오다가 갈대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자신들의 병사들을 잃고 맙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해방될 때 그 해방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축제를 만듭니다. 파스카와 무교절(예수님 부활과 관련)
파스카는 양을 잡아서 그 피를 상인방과 문설주에 바르는 축제입니다.
무교절은 누룩 없는 빵을 일주일 동안 먹는 축제입니다.
파스카는 유목축제 였을 것 같습니다. 어딘가로 유목민들이 떠나서 새로 양들에게 풀을 먹어야 해서 텐트를 칩니다. 그 새로운 지역의 신들에게 그 유목민들은 불청객일 수 있고 그들에게 공격받을 수 있을 겁니다.
탈출기 안에서도 모세의 부인 치포라가 아들을 데리고 오다가 하느님앞에서 위협을 받고 치포라가 아들의 포피를 벗겨서 피를 낸 다음에 하느님과 계약을 맺는 장면이 나옵니다.
비단 구약의 세계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지역사회와 문화 안에서 일어나는 종교적인 현상입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나라에 존재했던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같은 장승들이 그 마을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장승들에게 돌을 하나라도 주어야 했죠.
그처럼 유목인이었던 그들도 새로운 곳에 가서 자리잡기 위해 양을 잡아 피를 발랐을 거에요.
또 드라큘라 영화를 보면 드라큘라를 막기위해 십자가와 마늘을 두는 경우가 있기도 하죠? 드라큘라가 절대로 우리나라에는 올수 없는 이유중에 하나죠? ㅎㅎ
요즘에도 집 근처에 부적을 붙이는 분들도 계시죠?
우리 그리스도교 전통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즘에 집축복하실 때에는 신부님들이 거실 응접실에 있는 십자가에 성수를 드립니다.
그런데 한 20~30년전이나 유럽의 신부님들은 집축복을 하실 때에 집의 현관문에 성수를 드립니다. 다른 부정한 것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하려는 표시인것 같아요.
인간이 갖고있는 종교적인 심성들이 그리스도교 안에도 일정부분 있는 듯 합니다.
파스카 예절이 있었구요.
반면에 무교절은 파스카 저녁식사부터 시작해서 7일동안 누룩없는 빵을 먹는 축제이고 농경 축제입니다.
파스카의 시간은 보리 추수의 시기에요. 그로부터 50일이 지난 오순절, 구약성경에서는 주간절이라고도 합니다. 그때는 밀 추수의 시기입니다.
무교절은 보리 추수이고 오순절(주간절)은 밀 추수에 관련된 농경 축제였는데, 이것을 하느님의 축제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을 폼나게 이야기하면 신학적 치환이라고 합니다. 본래 있었던 세속적인 축제를 신앙의 축제로 바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도 그런 축제가 있습니다. 바로 성탄절이에요.
예수님이 언제 태어나셨는지........몰라요~~~!!
그럼 어떻게 12월 25일로 정했을까요?
12월 25일은 로마 제국에서 태양신을 섬기는 축제에요. 왜?? 12월 25일일까요?
우리식으로 생각하면 동짓날로 일년 중에 해가 가장 짧은날이에요. 그날부터 해가 길어지기 시작해요. 즉 빛이 어둠을 이기는 시간들의 시작.
그 태양신을 섬기는 시간을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그 태양신을 섬기는 시간의 이름만 바꾸는 거에요.
"우리들에게 빛이되어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로서 우리가 기억하자!"는 겁니다.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서 예수님께 물었는데, "아니야, 나는 8월에 태어났어."
라고 하시면!!!!
하지만 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기념하고 싶어하는 그날을 로마에서 가장 큰 태양신을 섬기는 시간이었던 그날로 정한것이에요.
같은 심볼리즘이 부활에도 적용됩니다.
부활은 유다교회의 달력 니산달 15일인데, 니산달 15일, 파스카와 부활이 겹쳐서 돌아가는데 그게 바로 춘분이에요.
춘분은 낮과 밤이 똑같아요. 그리고 그 춘분부터 낮이 밤보다 더 길어지기 시작해요.(빛이 어둠을 이기는 시간)
물론 예수님의 부활의 시점은 우리가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부활의 시간이에요.
그렇지만 묘하게도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12월 25일, 빛과 어둠의 갈등 구조를 통해서 12월 25일을 이해할 수 있듯이, 예수님의 부활 역시 빛과 어둠의 갈등 구조를 통해서 동일선상에서 있음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탈출할때에는 두 가지 축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파스카와 무교절
하나의 유목축제와 농경축제로,
축제란?
신학적인 관점에서 하늘과 땅이 맞닿는 시간입니다.
우리가 알고있는 축제는 술과 춤, 놀이라고 생각하죠? 하지만 축제가 갖고 있는 고대어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신과 그 신에게 속한 백성이 조우하는 시간입니다.
그렇다면 그 시간에 왜? 술을 마시고 춤을 출까요? 하느님과 조우하는 그 시간은 일상을 살아가는 평범한 시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상을 살아갈 때 우리의 호흡과 맥박과 뇌파가 있습니다. 그런데 신적인 체험은 그 일상을 넘어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인간은 조금 다른 호흡과 다른 맥박, 뇌파를 가져야 하는데, 고대인들에게 가장 수단은 술, 그리고 신비롭게하기 위해서 연기는 내는 것(담배의 기원이기도 합니다), 춤을 통해서 신적인 체험으로 들어가기 위한 도구로써 사용했습니다.
춤은 인간이 갖고 있는 종교성이라 생각합니다. 왜? 젊은이들이 클럽에 갈까요?
그 역시 종교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일상을 살아가다가 그 일살을 초월하고 싶은 것입니다. 클럽에 가면 음악과 춤이 있습니다. 그런것들은 자신이 일상 안에서 만나지 못했던 모습으로~ 신적인 조우와 비슷한.
무당들이 굿을 할때 춤을 추며 초월적인 단계로 넘어갑니다. 비슷한 모습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호흡과 맥박, 뇌파가 위로 올라가서 신적인 체험을 하는 방향도 있구요.
거기에서 아래로 내려가서 신적인 체험을 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묵상한다고 합니다.
평소와는 다른 더 깊이 있게, 호흡도 심장도 느려지고 뇌파도 잠잠해지는 그 단계로 내려가서 '하느님, 말씀하십시오. 당신종이 듣고 있습니다.'라는 단계를 심리학자들은 알파의 단계라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이야기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개신교보다도 불교와 비슷한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 단초가 어디있습니까? 가톨릭 교회도 불교도 위로 올라가지 않아요. 위로 올라가는 경우로 성령기도회가 있겠죠.
가톨릭 교회라고 하면 성당에서 성체조배하면서, 불교에서도 참선하는 것으로, 밑으로 내려가는 모습인데 개신교에서는 부흥회하는 모습들, 더군다나 우리나라에 들어온 개신교는 미국쪽에서 들어온 프로테스탄트 교회라서 그 경향이 더 짙습니다.
그런데 위로 올라갔을 때에는, 못내려오는 경우가 있어요.
그렇게 흥분했다가 못내려와서 질환으로 자리잡은 경우가 있습니다. 본당 사목하실 때도 주의를 기울이셨던 부분이 본당에 성령 기도회가 있으면, 그 인도자들을 만나셔서 "함께하시는 분들이 성령 기도회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는 좋은 체험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잘 조절해 주셔야 합니다. 성령 기도회를 하다가 정신질환을 얻게되는 예들이 있습니다."하고 말씀드렸다고 합니다.
아래로 내려가는 경우에, 그런 문제가 없는데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잠이 들어요.....
그래서 스님들은 죽비를 듭니다.
신부님도 신학교때,
신부님은 아침잠이 많으시다고...그래서 자주 기적을 체험하셨습니다!
5시 30분에 일어나서 미사를 드렸는데 분명히 올라갈 때는 빵이 올라갔는데, 내려올 때는 잔이 내려오는 거에요!!
'와!! 대개 신기하다!"생각하셨다고...ㅎㅎ
전설적으로 내려오는 선배 신부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어요.
그분이 아침에 새벽 미사를 드리면서 깜빡 잠이들었는데, 꿈에서도 미사 드리는 꿈을 꾼거에요.
그래서 앞에서 교수 신부님이 강론을 하고 있는데, 미사를 드리는 꿈을 꾼 신학생이 꿈에 영성체 때가 된 모양이에요. 일어나서 앞으로 나오더래요. 강론을 하고 있는데,
더 웃긴 것은 그 신학생이 앞으로 나오니까,
그 줄이 있던 사람들이 다 일어나서 뒤를 따라나오는 거에요.ㅎㅎㅎㅎㅎㅎㅎ
신학교에서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 젊으실 때는 특히 아침 잠이 많잖아요~~
아무튼 위로 올라가는 것도 끝없이 올라가면 질환이 되니까 문제가 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쉽지는 않아요.
따라서 묵상하는 것도 처음에 익숙해질 때까지는 지도자가 있는게 좋습니다. 아니면 묵상하시면서 10분에 한번은 누군가가 성경 구절을 읽어주는 것도 좋습니다. 평범한 사람이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은 15분정도 라고 해요. 15분이 지나면 분심에 빠지던지 잠이 들던지,....
그것을 계속해서 훈련하게 되면 3시간, 4시간, 신비가들은 하루 7~8시간 묵상이 가능해진다고 합니다.
신부님들은 신학교에서 훈련을 받으셔서 피정때에 2~3시간 묵상이 가능하시다고 합니다. 간혹? 피곤하신 분들의 코고는 소리도 함께 ㅎㅎ
신부님이 우리에게 강의해 주시는 형태는 텍스트를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라면,
기도의 단계 안에서 하느님과 어떤 텍스트를 신비하게 만나는 것도 필요하다고 하셨어요. 우리가 텍스트를 읽고 그것을 가지고 묵상해보는 훈련들을 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그 묵상의 즐거움을 알아가셨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어요.
축제는? 기억하기 위해서, 잊지 않기 위해서 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기억은 누군가가 우리에게 전해준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미사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그 구원사업을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서 입니다.
우리는 또 우리들의 다음세대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다면 이 다음세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이유가 없습니다.
파스카 예절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너의 어린이들에게 꼭 이 이야기를 해주어야 한다. 우리가 왜? 이 축제를 지내는지, 이 이야기를 잊지 않아야 한다."
사회적인 문제에 관해서 신부님과 다른 의견을 지니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진솔하게 신부님의 생각을 말씀해주셨어요.
계엄과 탄핵 사태를 지나면서, 대한민국이 1980년에 광주를 잊지 않았다는 것이 지금 2025년 우리를 지켜주는 것이구나!에 대해서...
한강이라는 작가가 말했어요. "과거가 현재를 구할 수 있을까?"
그러면서 신부님은 '오늘날 우리들이 과거에 그 희생자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에 대해서 생각해 보셨어요.
장례 미사를 신부님이 하실 때 돌아가신 분의 가족들을 만나면 그분들에게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여러분이 할수 있는 일이 무얼까요?" 하고 물으시면 그분들이 정답을 이야기하시다고 합니다. "기도해야죠."
"좋습니다.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요?" 하고 물으시면 가족분들의 얼굴에 물음표가 찍힙니다.
신부님이 말씀하십니다. "우리들이 가톨릭 교회에서 고백하는 신경에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 말은 성인들이 쌓은 모든 신앙의 업적이 나의 구원에 도움이 된다는 뜻입니다. 제가 저희 아버지 돌아가실 때에도 그렇고 어머니 돌아가실 때에도 부모님을 장지에 모시고 돌아오면서 차 안에서 두 번다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느님, 제가 살아가는 동안 사제로서 하느님을 기쁘게 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저희 아버지, 어머니의 구원을 위해서 봉헌합니다. 반대로 저희 부모님이 살아계시는 동안 하느님을 슬프게 하거나 화나게 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제가 보속하게 해 주십시오.' "
신부님의 부모님은 행복하실 겁니다.
저희들이 무언가 하느님을 기쁘게한 일을 하고 그것을 먼저 하늘 나라에 가신 분들을 위해서 봉헌할 수 있을까요?
있습니다.
저희들이 무언가 하느님을 위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을 위해서 착한 일, 선한 일을 하고 올바른 선택을 하고 그것을 이미 하늘나라에 가신 분들을 위해서 봉헌하는 것.
사제가 미사를 할 때 항상, 교황을 위해서 주교를 위해서 기도하고 다른 분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망자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가 식사의 끝기도 때에도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하지만 말로하는 기도뿐만 아니라 살아가면서 하는 여러가지 공덕들을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봉헌하는 것, 살아있는 이들이 죽은 이들을 위해서 또 죽은 이들이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수 있다는 것을 알수 있어야 합니다.
자!
축제를 통해서 기억하는 것이, 기억하는 첫번 째 방법입니다.
두번 째는, 이스라엘이 갈대바다를 건넙니다. 그 갈대바다를 건너고 나서 탈출기 15장을 보면 모세의 노래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노래가 끝나자 마자 미르얌의 노래가 나옵니다. 미르얌의 노래는 후렴같은 내용입니다.
노래는 왜? 부를까요? 기억하기 위해서 입니다.
기억하는데 우리는 두 가지 방법으로 봅니다. 하나는 축제를 통해서, 다른 하나는 노래를 통해서
중요한 것은 잊지 않으려는 그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시나이 산을 향햐서 여정을 시작해 나갑니다.
자료를 보여주셨어요.
다음의 슬라이드 화면은 야곱의 집안이 이동하는 경로입니다.
시나이 산에와서 헤매다가 약속의 땅으로 가는 두 경우입니다.(전통적으로 생각하는)
그런데 요즘은 잘 모르겠다고 생각합니다. 많은 성서고고학자들의 의문중에 하나가 "도대체 갈대바다가 어디냐??"라는 것을 가지고 성서고고학자들이 고민을 했어요.
그러다가 시나이 산이 여기다!고 하고 정해진 것은 십자군 전쟁때입니다.
그전까지는 몰랐는데 십자군 전쟁을 지나면서 여기가 아닐까? 하고 생각을 한 것이죠. 그런데 학자들은 그것에 만족하지 않고 다른 가설을 세우는데, 심지어 이집트에서 이렇게 온것은 아닐까?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진을 보여주셨습니다.
하얀선이 보이시죠? 그 하얀선과 이집트 내륙의 가운데서 물이 있겠죠? 그곳이 호수입니다. 저 하얀선이 육지고 , 시르보니스라는 호수와 사람들이 통행할 수 있는 그곳으로 지나간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의 경우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시나이 산 성지순례에 다녀오신 분들에게 심심한 사과의 말씀을 드리신다고 하셨습니다. 교회가 전통적으로 시나이 산이라고 믿는 곳은 카타리나 수도회가 있는 곳이지만, 성서고고학적으로 학문적으로 연구한 결과는 아니다라는 정도로 이해하셨으면 좋겠습이다.
옛날 사람들도 샌달을 신었을까요?
고고학적으로 샌달의 모습입니다.
주전 3300년에 이집트의 어떤 귀족이 신었던 샌달이 발굴되서 고대사람들도 샌달을 신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파라오의 병거의 모양도 추측합니다.
구약성경에 제대로 번역해야 하는데 아직까지 이집트를 탈출하는데는 기병은 없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말을 타고 앉는 것은 나중에 나왔습니다.
당시에는 병거에 말을 이어서 수레를 끌어가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바다를 건넌 이스라엘이 시나이로 가게되는데, 그곳에서 갈대바다를 건널 때까지는 야훼와 파라오의 대결구도였다면 갈대바다를 건넌 뒤에는 이제는 야훼와 이스라엘 백성이 대결하는 구도입니다.
마라의 쓴물 ; 마라에 갔는데 물이 쓰더라, 그래서 모세에게 불평했더니 마실 수 있는 물로
마싸와 므리바 ; 먹을 것이 없어서 하느님께 불평하니 만나를 주신 이야기, 그리고 아말렉과 전투한 이야기들이 있는데, 모세오경의 구조를 설명하시면서, 창세기는 안나오고 신명기는 앞에 이야기가 반복되니까 제외하고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가 가운데 있습니다.
그런데 탈출기 20장을 넘어가게 되면 그때부터 법전입니다. 탈출기 20장부터, 레위기, 민수기 10장까지.
따라서 모세오경의 첫번째 책과 다섯 번째 책은 빼고 중간의 레위기를 둘러싸고 있는 탈출기 후반부와 민수기 전반부를 빼면, 탈출기 1~20장, 그리고 민수기 10장부터 마지막까지의 이야기가 두 부분이 남습니다.
그 두부분의 이야기가 마치 거울에 비친 모습같아요.
민수기에서도 물이 써서 먹을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오고, 마싸와 므리바에서처럼,
아말렉 전투는 아니지만 기드온족과의 전투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렇듯 탈출기에 나오는 야훼와 이스라엘의 대결의 이야기가 민수기에서 순서만 다를뿐 비슷한 내용으로 모두 나옵니다.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그런데 이야기의 서술적인 구조는 비슷하지만 신학적으로는 차이가 있습니다.
탈출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에게 불평합니다. 그 불평의 내용은?
" 내가 너 믿고 여기까지 따라나왔는데 야훼라는 하느님이 있기는 있는거냐?" 라고 질문합니다.
민수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를 통해 야훼에게 질문합니다.
"아, 시나이 계약을 통해서 당신이 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런데 당신의 능력이 우리에게 약속의 땅을 줄 정도의 능력은 됩니까?“
탈출기에서는 야훼의 존재에 대한 질문이,
민수기에서는 야훼의 권능에 대한 질문이 있습니다.
나중에 예수님 사건에서도 똑같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 위에서 내려와 보시지.” 하고 예수님 존재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권능에 대에서도.
복음에서도 똑같습니다. 예수님의 존재에 관한 질문, 권능에 관한 질문으로 대결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민족으로 광야에서 40년 동안 보내다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반면에 신부님은 탈출기, 민수기에서 이스라엘의 여정을 다른 관점에서 읽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을 알아가는 과정, 일종의 이스라엘의 성장기라는 관점에서 그 이야기를 읽습니다.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넘어집니다. 하지만 일어납니다. 모세라는 좋은 지도자를 만났고 하느님께서 동행하는 여정이었습니다.
탈출기와 민수기의 이스라엘 여정에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내용입니다.
신부님도 신앙의 여정에서 넘어지신적이 있으셨어요. 하지만 다시 일어나셨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가 넘어졌을때 광야에 이스라엘을 기억해야합니다. 그것을 통해 하느님을 더 알게 되었고 더 성장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일부러 넘어질 필요는 없겠지만, 우리가 넘어지는 그 사실을 뛰어넘어 하느님을 체험하는 우리들의 신앙은 더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리 넘어져도 하느님은 우리를 일으켜 세우신다. 그것이 탈출기와 민수기의 여정 가운데에서 우리들이 들어야할 하나의 메시지일 것입니다.
강복해주셨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감사합니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