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눈박이 씨앗 외 4편
김 용 칠
늦은 오후 어둠의 기침소리가 장터에 요란하다
골목마다 축축 처진 채소들
여기저기 상처 난 어제의 모습을 잊은 채 널브러져 있다
햇살을 마주한 할머니는 비닐봉지에
멍에 같은 이파리를 자꾸만 밀어 넣고 있다
행인 두 사람이 살진 밤 어두운 사슬에 묶여 걷고 있는데
두 주먹 불끈 쥔 손 안에서 울음이 터지듯
바람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생각이 깊으면 멀어지는 것들 모두 아름답기만 하다
검게 그을린 씨앗에서는 감성을 잃은 피가 흐르고 있다
이파리에선 짙푸른 전설이 켜켜이 쌓이고
외눈박이 씨앗의 세포들 새벽시장을 기다리고 있다
가을 둥근 살점들이 익어가면 지상의 무한한 생명들에게
새로움의 시작이 될 것이다
어쩌다가 부딪히는 찰나의 무한함이다
낯선 영혼의 씨앗으로 태어난 나는 외눈박이입니다
물 연꽃
어제를 배반하지 않은 해묵은 당돌함으로
여름의 표시이다
저 넓은 연못 위에 그 꽃이 피어나면
오렌지처럼 옷을 갈아입고 내부를 드러내 놓는다
짧고 뜨거운 역사를 말하고자 한다면
아침에 서둘러 햇살처럼 쉼 없이 일을 해야만 한다
한 개의 백조 같은 알을 품기 위해 부풀어 오르는
출렁거린 몸부림 속에서
어떤 생각으로 피어 있을까
벌써 하얀 꽃이 푸른 그릇 속에서 열화를 견디고
물과 해의 순결한 손녀를 낳았구나
물의 관조에서 아름다운
그 가벼운 유혹의 색조가 없었다면 꽃잎들은
제가 하얗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으리라
바람이 채워주는 넓은 하늘과 진흙밭으로 뒤섞인
그때마다 입 맞추는 빛깔
여름의 손바닥보다 가시가 돋는 발톱
미망의 질투 물결로 휩쓸려 가며
반은 잠겨진 채 긴 뿌리가 건조되는 반대편에서
물 연꽃 그림자 위에
가슴 절반을 내놓고 있으리라
도시에서
그 얼마나 그리웠던가
당골네가 천년을 두들기는 그리움으로
이 가을 목청을 흔들대는 해자락에서
웅크린 채 울먹거리는 가을 낙엽들
도시에는 저마다 낯설은 꽃심이 있을 것이다
아직은 모른다 통통히 살찐 밤 고해를 하듯
너를 기다리고 있을 테지만
이 도시는 새로운 꽃 덤불 속에 피는 꽃심이다
지난해 어둠에 갇힌 듯
아직도 유성처럼 표류하고 있는 것일까
밤 풍경 창마다 마지막 커튼이 드리워져 있고
꿈속 사연들 알 수 없는 거품으로
메말라 죽은 사체들을 끌고
부활의 술을 뒤섞어 붓고 있을 것이다
도시는 세찬 물결만 없으면
넘치는 욕망으로 몸부림치는 날을 기다리는 거다
나는 달무리에 걸린 촉각의 손마디에
鄕愁를 뿌리며
이 도시에서 우거진 푸른 숲 흔들리지 않는다면
비둘기처럼 날아오른 여행길 반려자처럼
춤추는 꽃심 살갗도 만지며
천년을 높이 들어 내 모든 시간을 정리할 것이다
루나의 이야기
첫 봄빛 발자국을 밟아보신 적 있나요
그도 가벼운 햇살의 몸짓들을
보드라운 송이로 피어나기 전에는 길 없는
길을 걸었답니다
그가 묻지 않았을 들판을 가로지르며
누군가를 만나야 한다는 일념으로
흔적을 남겨 놓았고
내가 지금 앉아 있는 황톳빛 들판에서 죽어가는
한 생명을 껴안고 있답니다
사랑은 언제나 늦었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연둣빛 세상이 지나가고
시든 푸성귀 같은 세상이 온다 해도
사랑은 늘
생각의 열쇠를 찾고 있을 테니까요
지난가을 기억이 나요
구름처럼 떠돌던 가을빛 피부 한 채를 거둬들여
침묵으로 단단히 묶어
시간 속에 걸어 두었답니다
언제부턴가 투명한 봄빛 사랑 마디에서 생명을 두드리는
아랫배가 팽팽히 불러오기 시작할 테니까요
고속 열차
어두운 골목을 지나
큰길 가에 서 있자 콜택시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역으로 달리는 택시는 시간을 맞추기 위에 안달이 났다
토요일 오후 시간이라 그런지 외국인들이 많았고
한옥마을 찾는 관광객들인가 싶었다
빙하를 물고 떠다니며 왔는지 표백된 구름이 차갑고 더 하얗다
구름의 부피를 재며 푸른빛이 돋은 하늘이 무한히 높았고
나는 침묵을 목 안으로 넘기며 가라앉은 생각에 잠긴다
먼 역과 이곳의 역 사이에서
마음과 마음이 열차처럼 헐떡거렸다
경직된 다리를 펼치고 가끔 아픈 무릎을 만지며
차창 밖 햇빛을 쬐고 있다
잠깐 눈을 붙이고 싸그락거린 눈알이 계절을 게워내고
붉은 신음을 내는 눈꺼풀 갈색 나뭇가지 귀처럼
천 개 상처를 가진
동경의 봉우리가 나타났다 꽃이 환하게 피고
닫힌 망막의 질긴 뼈와 함께
노동에 갇힌 묵은 몸무게가 여백을 전신에 흩트려 놓는다
먼 길을 달려 도착하자 고속 열차역 건물이 하마처럼
입술을 벌린 채
수많은 사람들을 집어삼키고 있다
내 시의 모던하우스를 짓고 싶다
김용칠
‘별이 총총하게 빛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리산 종주 등반 시 장터목산장 부근에서 새벽 2시 즈음 보게 된 별들은 보석 같은 향연이었습니다. 그런 별의 신비에 압도당한 추억을 되돌려 보고 싶습니다. 아마 당시 그 모습은 대우주의 분출이며 제 시(詩)의 감흥과 영감이 돋아나게 하는 대표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지금은 인공지능(AI)이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입니다. 그러나 AI가 아무리 음악을 잘 만든다 해도, 그림을 잘 그린다 해도, 글을 잘 쓴다 해도 거기에는 영성이 깃들어 있지 않습니다. AI도 결국 인간이 만듭니다. 윤리와 도덕은 컴퓨터나 휴대폰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이성과 감성이 발달된 인간의 영감이 훨씬 더 아름답습니다.
예술의 대표적인 분야는 문학이며, 문학의 꽃은 시(詩)의 세계라고 평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시의 집을 짓기 위해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우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시의 집을 짓는데 여러 건축 기법을 나름 공부해 왔습니다. 그것은 동화 속에서 나오는 그림 같은 집도 아니고, 자연을 곁에 둔 운치 있는 주택도 아닙니다. 바로 나만이 느낄 수 있는 세련미가 넘치는 내 시의 모던하우스입니다.
인생은 성년이 되기까지의 1막에서, 성년 이후 생계와 관련한 2막의 과정을 통해 인생의 본질적인 꿈과 의지를 펼칠 수 있는 3막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3막 인생이 본격적 시작됨의 소식임을 이번 반경환 ‘애지’ 주간님이 보내주신 당선 메시지를 보고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론 기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내 영혼이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자만하지 않고 차근차근 다져나가겠습니다.
총총하게 빛나는 별들이 모여있는 대표적인 곳이 ‘애지’와 함께하는 시인들이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함께 할 수 있게 되어 기쁨이며 행복이며 영광입니다.
끝으로 저에게 문학의 주춧돌을 놓아주시고, 추천해 주신 신영규 선생님, 심사위원님, 그리고 반경환 ‘애지’ 주간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돌아가신 부모님께도 이 소식을 전합니다. 또한 이 영광을 저를 알고 있는 많은 친구·지인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생을 다하는 날까지 시의 끈을 놓지 않겠습니다. 더불어 ‘애지’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프로필
김용칠 본명 김용만 청주출생. (前)케이티앤지 근무. 문학의숲 사무국장 및 감사 역임. 한국신문학인협회 전북지회 동인. 이메일 goldface21c@naver.com
첫댓글 김용칠 선생님
당선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김선옥시인님! 감사합니다 새해복많이 받으십시요~
좋은시 당선 축하드립니다 김용칠 시인님~^^
이선희 사무국장님! 감사합니다 애지문학회와 함께하게 되어 영광이며 기쁨입니다. 새해복많이 받으십시요...
축하드립니다
최병근 회장님! 고맙습니다 애지문학회 그리고 애지와 함께하는 별님(시인)들과 동행하게 되어 감사할따름입니다 새해복많이 받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