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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Moses는 히브리 남자아이는 태어나자마자 한 명도 남기지 말고 모두 다 죽이라는 바로의 추상같은 명령이 내려졌던 두렵고 떨리는 시기에 태어났습니다. “탁월하다, 복되다, 찬란하다, 귀하다, 아름답다, 보배롭다, 탐스럽다, 좋다.” 등의 감탄사를 총동원해서 설명해도 모자랄 정도로 “준수טוֹב(토브)”했습니다. 내적으로는 더할 나위 없이 순결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안에 넣어주신 탁월한 면이 출생과 함께 오롯이 드러났습니다. 생모는 왕의 명령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했습니다. 자신에게 닥쳐올 위험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삼 개월 동안 숨겼습니다.
모성애의 진면목을 보여주었습니다. 더 이상 키울 수 없다고 판단되자, 갈대로 상자를 만들었습니다. “상자תֵּבָה(테바)”는 모형模型입니다. 사랑하는 당신 백성을 죄악과 죽음이 넘실대는 위기 속에서 온전히 지켜 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처소를 가리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거룩한 몸을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품을 가리킵니다. 어떻게든 사랑하는 아이를 살려보려는 어머니의 간절한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흘러넘치고 있던 강에 던져졌습니다. 하나님께 맡겨졌습니다. 바로의 공주 눈에 띄었습니다.
공주는 순식간에 긍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를 모르는 척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대로 떠내려가도록 버려둘 수 없었습니다. 건져냈습니다. 양자 삼았습니다.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당신께서 쓰실 일꾼을 지키시고 보호해주시는 하나님께서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절대 주권으로 섭리해 주셨습니다. 이후, 그는 중근동지역을 호령하던 대제국 이집트의 왕궁에서 왕자로 생활했습니다. 바로가 되기 위하여 법, 정치, 경제, 문학, 예술 등 당대 최고의 학문들을 익혔습니다. 히브리인들의 전통에 따르면, 히브리인이 되기 위해서는 히브리인 어머니의 무릎에서 자라야했습니다.
히브리인 어머니로부터 정신 교육을 받아야했습니다. 필수적으로 갖춰야할 조건이었습니다. 생모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정신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를 준수하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그에게 꼭 필요한 은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인지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때에 맞는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 역시 때에 맞는 하나님의 은혜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의 겉모습은 완전히 이집트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실제로는 뼛속까지 히브리 사람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필요한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갖춘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바로의 자리는 따 놓은 당상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스스로도 거칠 것이 전혀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마흔 살이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동족을 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습니다. 거리로 나갔습니다. 고되게 노동하는 동족을 목격했습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이집트 관리에게 매를 맞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울분이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좌우를 살펴보았습니다.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이집트 관리를 쳐 죽여 버렸습니다.
그대로 모래 속 깊이 묻어 버렸습니다. 이튿날 다시 나가 보니, 이번에는 히브리 사람 둘이 서로 싸우고 있었습니다. 이미 이집트 관리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던 동족을 구해준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었던 그는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재판관이 되었습니다. 잘못한 사람을 향해서 그렇지 않아도 힘든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는 동족을 왜 때리기까지 하는 것이냐고 엄히 꾸짖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따라줄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아니 당연히 따라주어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누가 너를 우리를 다스리는 자와 재판관으로 삼았느냐? 네가 이집트 사람을 죽인 것처럼 나도 죽이려느냐?”(출2:14a)라는 증거에 따르면, 대단한 착각이었습니다. 완벽한 실패였습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예상 밖의 상황의 직면한 그는 간담이 뚝 떨어질 정도로 깜짝 놀랐습니다. 당황했습니다. 당장은 해결 방법을 전혀 찾을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설상가상, 그가 이집트 사람을 죽였다는 소식을 들은 바로가 잡으려 한다는 소식까지 들려왔습니다.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와서 더 이상 뛸 수 없을 때까지 달렸습니다.
동족 누구나 다 인정하고 따르는 탁월한 지도자가 되기는커녕, 존재하는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드러났던 온갖 능력들을 충분히 발휘해 보기는커녕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아니 스스로 자신의 신분과 능력을 철저히 감출 수밖에 없는 도망자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저와 여러분이 원한다고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탁월한 능력과 함께 불굴의 열정을 갖추고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때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집니다. 자신은 철저히 비우고, 하나님으로 충만해진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성경은 이후 40년 동안 그가 어떻게 생활했는지에 대해서 철저히 침묵합니다. 부인할 수 없는 너무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과정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실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마음과 자세를 갖추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이었습니다.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는 이 과정을 통해서 동족 구원은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공의로우신 방법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너무나 중요한 사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잊혀 진 채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빠져나오지 못할 절대 절망이란 없습니다. 오히려 절망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가장 이상적인 모습으로 다듬기 위해서 사용하시는 거룩한 도구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그의 생명을 노리고 있었던 이집트 왕이 죽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고된 노동 때문에 탄식했습니다. 하늘을 향해서 부르짖었습니다.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고통 소리를 들으셨습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었던 언약을 기억해주셨습니다. 그들의 처지를 생각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무르익었습니다.
그날도,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돌보고 있던 양들과 함께 길을 나섰습니다. 하나님의 산에 이르렀습니다. 순간, 하나님의 천사가 떨기나무 가운데서 일어나는 불꽃으로 나타났습니다. “나타났다רָאָה(라아)”는 “주목하다, 제시하다, 보이다” 등의 뜻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름 없는 목자로 사십년이라는 긴 세월을 살아내고 있었던 그를 한 순간도 놓치지 않으셨습니다. 항상, 언제나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그를 위한 당신의 위대한 작정을 보여주실 때가 찼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을 바로의 손으로부터 구원해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그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나타나셨습니다.
놀랍게도, 불이 붙은 떨기나무는 타지 않았습니다. 떨기나무는 주변의 고상하고 당당한 나무들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앙상했습니다. 볼품없었습니다. 노예로 전락한 채 가난하고 궁핍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던 성민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을 가리킵니다. 이름 없는 목자로 전락해 버린 그를 가리킵니다. 불꽃은 모든 불의한 세력을 완전히 태워서 진멸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를 가리킵니다. 특히, 떨기나무 가운데서 일어난 불꽃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민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고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을 가리킵니다. 그와 함께 하실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나는 지금 너를 바로에게 보내려고 한다. 그러니 (너는) 가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 사람들을 이집트로부터 인도해 내라!”(출3:10)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는 두려웠습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천하를 호령하는 바로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로부터 이끌어 내겠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외쳤습니다. 정말 못할 일이라며 거절했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이 저를 자신들에게 보내신)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면 되겠습니까?”라고 외쳤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며 거절했습니다.
“그들이 저를 믿지 않고, 제 말도 듣지 않고, 하나님께서 저에게 나타나지 않은 것 아니냐고 따져 물으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외쳤습니다. 아무리 양보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며 거절했습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원래부터 말재주가 없는 사람입니다. 전에도 그랬었고, 주님께서 이 종에게 명령을 내리고 계신 지금도 그렇습니다. 저는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딘 사람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생각을 제대로 전달하지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거대한 민족을 바로로부터 구원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며 거절했습니다.
“떨기나무 같이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있겠습니까? 성민 이스라엘을 다른 나라도 아니고 이집트로부터 건져내라니요?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제발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십시오.”라고 외쳤습니다. 자신은 성민 이스라엘을 바로로부터 건져낼만한 사람이 아니라며 거절했습니다. 동족을 모질게 때리는 이집트 관리를 쳐 죽였던 패기와 열정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한편, “...누구이기에”(출3:11a)라는 표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겸양謙讓”입니다. 겸손한 태도로 양보하거나 사양한다는 뜻입니다.
겸손이 짙게 배어 있었습니다. 또 하나는, “비하卑下”입니다. 자신을 겸손히 낮춘다는 뜻입니다. 역시 겸손이 배어 있습니다. 40년 전, 그는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동족의 구원자와 재판관으로 여겼습니다. 40년이 지난 지금, 그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목자였습니다. 내세울 것도 없었습니다. 무기력했습니다. 불가항력적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동족 곧 나라와 민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낮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사도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아래에서 겸손 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5:6)라고 외쳤습니다.
선지자는 “...겸손한 자들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기쁨을 다시 누리게 될 것이다.”(사29:19)라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높이 들어주십니다. 기쁨을 충만하게 채워주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쫓으십니다. 설득하십니다. 있어야할 자리에 세워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즐겨 사용하시는 역설입니다. 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철저히 지워졌습니다. 흔적도 남지 않았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고난을 통해 “온유ענו(아나우)” 곧 가장 이상적인 겸손의 상태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그로 말하자면,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온유했다.(그는 매우 겸손했다...땅 위에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었다.)”(민12:3)라는 증거는, 조금도 더하지 않은 사실 그대로였습니다. 비로소 하나님 한 분만 온전히 섬길 준비가 되었습니다. 특히, “모세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출4:20b)라는 증거에 따르면, 그는 지팡이 하나 들고 이집트로 들어갔습니다. 더 이상 양을 치던 지팡이가 아니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지팡이였습니다. 그가 지팡이를 들면 온갖 재앙이 순식간에 임했습니다. 지팡이를 들면 온갖 재앙이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바로와 따르던 세력은 이 지팡이 앞에 철저히 굴복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는 이후 다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자신만의 고유한 특징 곧 준수함을 드러내는 삶을 살았습니다. 탁월하고, 복되고, 찬란하고, 귀하고, 아름답고, 보배롭고, 탐스럽고, 좋은 삶을 살았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다 투자해서 하나님 한 분만 섬겼던 또 입만 열면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고 보란 듯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숭배에 빠진 성민 이스라엘을 섬겼던 그에게 부어진 또 다른 은혜였습니다. 이렇게 “섬김דבע(아바드)”은 자신의 전존재를 다 바쳐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창2:15)라는 증거에 따르면, 에덴 곧 하나님 나라는 사람의 경작이라는 행위를 통해서 지켜집니다. 곧 자신의 전부를 다 투자해서 서로를 섬기는 행위를 통해서 지켜집니다. 또 섬김은 예배입니다. 섬김과 예배는 한 뿌리를 가진 두 가지입니다. 섬김과 예배는 지극히 죄 친화적인 자아를 철저히 죽이고, 거룩하신 하나님 한 분만 높인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싶고, 자신의 가치를 높이고 싶은 생각이 앞선다면 그것은 섬김이 아닙니다. 예배도 아닙니다.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먼저 진정으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우리 몸을 설계하신 방식이야말로, 우리가 교회를 이루어 함께 살아가는 삶을 이해하는 데 적합한 모형입니다. 우리가 언급한 지체이든 그렇지 않은 지체이든, 눈에 보이는 지체이든 그렇지 않은 지체이든 간에, 각각의 지체는 저마다 다른 지체를 의지합니다. 한 지체가 아프면, 다른 모든 지체도 그 지체의 아픔과 치료에 동참합니다. 한 지체가 잘되면, 다른 모든 지체도 그 지체의 풍성함을 (함께) 누립니다.”(고전12:25-26)라고 외쳤습니다.
한국 문학사의 대작 “토지土地”의 작가인 그녀朴景利는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내가 죽어 흙이 된 대지 위에 더욱 굳세게 자녀를 서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을 지속시키는 것이며 그 생명이 우리의 내일이며 미래이다...우리는 사랑하는 것, 섬기는 것을 겁내서는 안 된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섬김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입니다. 저와 여러분에게서 반드시 찾으시는 삶의 방식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예배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 한 분만 섬기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성민 이스라엘이 아직 당신의 작정 속에만 있을 때 곧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때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그의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많게 만들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삭과 야곱에게도 똑같이 약속하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그와 그의 후손에게 기업으로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제, 가나안 정복 전쟁은 완벽한 승리로 끝났습니다. 여호와께서 성민 이스라엘의 사방의 대적을 다 진멸해 주셨습니다. 성민 이스라엘은 더 이상 주변 가나안 족속들로부터 위협당하지 않았습니다. 평화롭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이때, 하나님과 함께 쉽지 않은 전쟁을 이끌었던 백전노장인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습니다. 온 백성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습니다. “너희가 일구지 아니한 땅과 너희가 세우지 아니한 성읍을 내가 너희에게 주어서, 너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다. 너희는 너희가 심지도 아니한 포도밭과 올리브 밭에서 열매를 따먹고 있는 것이다.”(수24:13)라는 증거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성민 이스라엘에게 일구지 않은 땅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세우지 않은 성읍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심지도 않는 포도 열매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올리브 열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로서는 수고한 것보다 훨씬 많은 은혜를 값없이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민 이스라엘이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아 누리고 있는지 기억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수24:14)라고 권면했습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섬기라”는 하나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자신의 전존재를 바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되 경외하는 마음으로 섬기라고 권면했습니다.
“경외ירא(야레)”는 겸손謙遜한 마음입니다. 무엇으로도 갚을 수 없는 크고 놀라운 사랑을 받은 사람은 누구나 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가질 수밖에 없는 너무나 소중한 마음입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죄는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절대로 간과하지 않고 반드시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지극히 자연스럽게 가질 수밖에 없는 너무나 소중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되 겸손하고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섬길 수 있어야합니다. 그는 또 그는 하나님을 섬기되 온전함과 진실함 곧 전심全心으로 섬기라고 권면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 이미 조상들과 가나안 족속들이 섬기는 온갖 종류의 우상들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그는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라고 외쳤습니다. 섬길 자를 오늘 곧 당장 선택하라고 외쳤습니다. 다시 한 번 더 결단하라고 외쳤습니다.
“너희는 한꺼번에 두 신神을 예배할 수 없다. 결국 한 신은 사랑하고 다른 신은 미워하게 될 것이다. 한 쪽을 사모하면 다른 쪽은 업신여기게 마련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돈을 다 예배할 수 없다.”(마6:24)라는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마음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는 그것이 진짜 주인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전부를 주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저와 여러분 안에서 너무나 쉬게 찾아볼 수 있는 모습입니다.
얼마나 많은 축복을 값없이 선물로 받아 누리고 있는지 깨달아 알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자신의 마음에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솔직하게 돌아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지극히 죄 친화적이고, 죄의 경향상이 농후며, 지극히 작은 죄조차 이길 수 없는 무기력한 자신을 철저히 내려놓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겸손히 설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으로 충만한 복된 삶, 하나님 한 분만 섬기는 복된 삶, 자신 안에 이미 존재하는 준수함을 온전히 드러내는 복된 삶, 하나님 한 분만 받으실 수 있는 영광을 온전히 돌려드리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