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힌 가슴
류인채
아침밥을 거른 적 없는 여든다섯 울 엄니 한겨울에도 반소매 차림
가요무대에서 조항조가 나오자
“사나이 눈물을 부른 사람인디 복면가왕에도 나왔댜”
재방송으로 '대물'의 고현정을 보며
“이혼허구 애들 못 보니께 티비로 에미 보라고 드라마도 찍었댜”
오 남매의 맏이인 울 엄니 멀미약을 먹고 자주 시외버스에 몸을 싣는다
대전에 사는 이모들은 멀미 나서 못 온다고 사는 게 바쁘다고
점 백짜리 고스톱을 치러 인천에서 대전으로 달려간다
비가 내리고 젖은 플라타너스 잎이 한쪽으로 쏠리며 흔들리던 아침
삼 년 만에 만나기로 한 친구와의 약속을 깨고
극구 대전에 가겠다는 엄니와 CGV에 갔었다
'도둑들'을 보는데 옆에서 잠만 쿨쿨
“쌈질만 허드니 다 끝난 겨? 근디 전지현은 담배도 잘 펴, 욕도 잘허드라”
친정아버지도 가시고 친구분들도 가시고
잠시도 혼자 있는 걸 못 견디는 울 엄니
요 며칠 숨이 가빠지더니 폐암 진단을 받았다
무엇을 그리 삭히고 삭혔길래 한쪽 가슴이 시커매졌을까
한평생 기침소리 한 번 시원하게 내지르지 못했던 울 엄니
소파를 배경으로 흐려지는 겨울 골짜기는 자꾸만 깊어가고
엄니가 빈 컵 같은 눈으로 부산한 딸을 바라본다
―류인채, 『계절의 끝에 선 피에타』, 천년의시작, 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