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시인 박은의 요체시
朝鮮의 天才 詩人 高靈 朴氏 은(誾)의 拗體詩 談論
대한한시모임 학술부 편
박은(朴誾,1479,성종10∼1504,연산10) 조선 전기의 문신 시인/자는 중열(仲說)/호는 읍취헌(挹翠軒)/본관 고령 /총명 미남/15세에 문장 능통/대제학 신용개(申用漑) 사위/1495년(연산1) 진사/ 1496년 문과 급제/홍문관 정자 사가독서/천추사 북경행/1498년 전경, 저작/ 1499년 유자광(柳子光),성준(成俊), 이극균(李克均) 탄핵 상소/ 1500년 부수찬, 1501년 수찬/ 상소 건,투옥 후 파직/ 22세 – 26세 유람과 시와 술로 세월/ 1503년에 아내 신씨 25세 사망/가 1504년 지제교(知製敎) 임명/ 갑자사화 시 연산군 사냥 직간 이유 동래 유배/의금부 압송/에 사형 26세/ 한시의 귀재/ 이행(李荇) 해동강서시파(海東江西詩派)/ 친구 남곤(南袞, 1471-1527), 挹翠軒遺稿 발행 /
152수 중 율격에 맞는 정격은 26수, 나머지는 이른바 정성(正聲/근체시격,운,평측,대우)이 아닌 요체(拗體/삐뜨러진 변격)이다.
그러나 <金昌協>은 읍취헌의 시가 絕調라고 평하였고,1金春澤 또한 동국의 시는 읍취헌이
최고이며, 그에게 나이를 빌려준다면 소동파를 이길 것이라고 평하였다. 許筠
<正祖대왕>은 '조선조 제일가는 시인' 이라 추앙하며《읍취헌. 유고》에 친히 어제서문을 내렸다.
허균(許筠)·신위(申緯)·김만중(金萬重)·홍만종(洪萬宗)·이수광(李睟光) 등 여러 대가들로부터 우리나라 제일의 시인으로 추대되었다. 박은은 정조가 지적한 바와 같이 ‘당조송격(唐調宋格)’이란 독자적인 시풍을 모색한 것이다. 즉 당나라의 서정적인 것과 송나라의 논리성을 가미한 것이라는 것이다. 정조는 원래 실사구시를 좋아하면서 일면 서정적인 인물이었고, 당시 조선의 부흥의 절호의 찬스가 사라짐은 이 천재시인 박은의 운명과 같은 것이다.
읍취헌의 시는 당인의 情境과 송인의 事實을 겸비하였으니, 타고난 자
질이 빼어난 점에 있어서는 비록 중국의 제가들 속에 놓더라도 그다지 뒤
지지 않을 것이다
인용문은 박은이 당시와 송시의 장점을 겸비하였고, 게다가 천부적인 재
능이 높았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 내용이다. 주지하다시피 박은은 요절한 시
인으로 그의 천재성과 기발한 시풍은 정조 이전에 여러 문인들이 이미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유득일이 숙종 35년(1709)본의 서문에서 이미 그의 시가
(挹翠之詩, 以唐人之情境,兼宋人之事實, 其天才絶高處, 雖置之中朝諸家, 未必多讓).
“天機에서 나왔고 인공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라고 했고,김창협은 박은
의 시가 비록 황정견과 진사도를 본받았지만 그 정신과 의경은 당시와 유사
하다고 평가하였다. 김창협의 고평 이후에 김창흡, 신정하가 그 의견에
동조하였고, 위 인용한 정조의 박은에 대한 평가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그런
데 정조가 박은의 시를 인정하는 데에는 위 문인들과 다른 이유가 더 있다.
읍취헌은 시를 잘하여 國風의 남긴 음향이 있어 東方의 끊어진 학통을
일으켰다 할 수 있으며, 나는 특별히 읍취헌의 시가 시의 근본에 거의 가까
이 다가간 점을 아낀다.
불과 26세에 폭군과 간신배의 모함으로 죽으니, 이는 중국 위진조의 천재 왕필(王弼, 226-249)의 죽움이 애석하다면 박은의 죽음은 원통 그 자체이다.
정조도 이 중차대한 시기에 성씨의 로맨스로 낳은 세자가 죽고 겨우 11살의 순조를 두고 죽으니 그 전 경주 김씨 정순왕후 문제에 겹쳐서, 순조의 장인 장동 김씨 문제로 망국으로 가는 길을 열고야 말았으니, 정조와 박은의 묘한 오버랩은 역사의 눈은 또 원통하고 안타까움이 겹치게 한다.
조광조를 죽게한 유자광 일파를 묵인한 박은의 친구 남곤(소극 대응)과 심정(적극 음모)은 ‘곤쟁이(작은 새우)로 남아 신숙주의 변절을 숙주나물이라 비하 하듯이 그헣게 된 것이다.
남곤도 신숙주도 당대의 천재요 엘리트이나 오늘날 삐뚜러진 법언경의 엘리트의 행태 마냥 먼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여간 시로 돌아가서, 그의 시를 몇 수 감상하고 필요한 논문들을 실어 보려한다.
강남대 홍순석 교수의 저서와 분석이 매우 뛰어나다.
요체시란 어그러질 요(拗)이니 정법과 다른게 많다. 투춘체(偸春體)라고 수련에서 대우를 하고 함련에서 산구하는 것, 봉요체(蜂腰體)라고수련과 함련에서 대우를 쓰지 않다가 경련에 와서 대우를 하는 것등이 있다.
자세한 것은 그것을 보면 좋고, 우선 박은의 몇 개 율시에서 평측등이 가장 어그러진 몇 개를 실어본다.
복령사에서 (福靈寺)
伽藍却是新羅舊 이 가람은 바로 신라의 옛 절인데
千佛皆從西竺來 천분의 부처는 다 천측국 인도에서 왔네.
終古神人迷大隗 옛날부터 신인이 대외에서 길을 잃었는데
至今福地似天台 지금의 복된 땅은 천태산과 같구나
春陰欲雨鳥相語 흐린 봄날 비 오려니 새들이 지저귀고
老樹無情風自哀 늙은 나무 무정한데 바람 절로 슬퍼한다
萬事不堪供一笑 모든 일은 한바탕 웃음거리일 뿐
靑山閱世只浮埃 청산에서 세상을 보니 한갓 뜬 먼지일세.
(挹翠軒遺稿 卷3)
이 시는 그가 파직당한 후, 1502년(연산8) 2월에 개성으로 유람을 갔다가 송악산 서쪽 기슭에 있는 복령사에서 지은 칠언율시로 회(灰)운이다. 연산군 4년(1498)에 유자광이 김일손의 사초를 문제 삼아 무오사화를 일으켜 김종직을 부관참시하고 그 제자들을 죽였는데, 이듬해 그가 유자광의 간사함과 이를 비호한 성준, 이극균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파직당했다. 이 시에 당시의 암담한 심정이 얼마간 투영되어 있다. 수련은 사실을 직서한 것이다. 절을 둘러보고 복령사가 신라 때에 창건된 옛 절이고 거기에 모신 부처가 서쪽 천축국에서 온 것임을 밝혔다. 함련은 자신의 혼란스런 심정과 세속의 일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토로한 것이다. <장자> 잡편에 황제(黃帝)가 대외(大隈)에서 길을 잃었다는 말을 빌려서 자신도 옳은 일을 상소했다가 오히려 파직당한 정치 현실이 마치 길을 잃은 것같이 혼란스럽지만, 이곳에 오니 복된 땅이라 신선이 사는 천태산에 온 것처럼 세상의 번민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경련은 날씨와 절 앞에 선 고목을 묘사한 것인데, 시인의 서정이 어우러진 절창이다. 봄날 비가 오기 전에 새들이 시끄럽게 지저귀는 현상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바람이 일어 늙은 나무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묘사했다. 그런데 여기에는 말 많고 어지러운 정치 상황과 거기에서 희생된 사람에 대한 슬픔이 객관화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미련은 절에 올라 느끼는 자신의 심정을 드러낸 것이다. 세상에서 벗어나 청산에서 세상을 돌아보니 한바탕 웃음거리이고 뜬 먼지에 불과하다고 자신의 체관(諦觀)을 토로했다. 이렇게 그는 산수간에 유람하며 정치현실에서 좌절한 심정을 위안코자 하였다. (네이버 전재)
夜臥有懷士華承旨 (밤에 누워 승지 남곤을 생각하다)
故人自致靑雲上 친구는 스스로 청운에 올랐는데
老我孤吟黃菊邊 나는 외로이 국화 곁에서 읊조리네.
高蓋何堪容陋巷 높은 일산이 어찌 골목에 오겠는가마는
酒杯終不負新篇 술잔은 마침내 새 시를 저버리지 않으리.
一年秋興南山色 한해 가을 흥은 남산 빛깔인데
獨夜悲懷缺月懸 외로운 밤의 슬픈 회포는 이지러진 달에 걸렸구나.
旅雁似知無伴侶 기러기가 내 친구 없는 것을 아는 듯이
數聲飛過泬㵳天 끼룩거리며 아득한 하늘을 날아가네.
(挹翠軒遺稿 卷3)
이 시는 친하게 지냈던 남곤을 생각하면서 1502년 가을에 지은 칠언율시로 선(先)운이다. 박은과 이행은 1502(임술)년 봄에 개성 천마산에 가서 놀았고, 같은 해 7월 16일에 남곤과 셋이서 잠두봉(蠶頭峰, 절두산) 아래 서강에서 놀았다. 그 때 지은 시를 모아 간행한 것이 <천마잠두록(天磨蠶頭錄)>이다. 이 시에서는 남곤이 승지에 오른 것을 부러워하며 자신의 적막하고 외로운 처지를 대조시켜 한탄하고 있다. 수련은 남곤과 자신의 대비다. 남곤은 벼슬에 열중하여 정3품 승지에 올랐는데 자신은 수찬에서 파직되어 국화를 읊으며 늙어간다는 것이다. 함련도 역시 두 사람의 처지를 대비시킨 것이다. 당상관에 오른 남곤의 행차가 자신이 사는 좁은 골목에 오겠느냐고 묻고, 그래도 자신은 오로지 자신의 고집대로 술과 시로 세월을 보내겠다고 했다. 비록 그들이 함께 뱃놀이를 하고 놀았지만 가는 길이 다르다는 말이다. 함련은 깊어가는 가을 풍경에 자신의 감정을 투사한 것인데, 여기에도 친구와의 대비를 함축하고 있다. 붉게 물든 남산의 풍경을 가을 흥취라고 하여 남곤의 영달을 상징하게 하고, 가을밤의 이지러진 달이 자신의 외롭고 슬픈 회포를 자극한다는 말로 서로 마주보게 하였다. 미련은 자신의 외로운 처지를 기러기에 투사한 것이다. 벼슬에서 떨어지고 시주로 세월을 보내니 찾는 친구도 없어 마치 외로이 아득한 하늘을 나는 기러기 같다고 하였다. (네이버 전재)
宿葛山 갈산에서 자다
昨夜踏月懶翁塔 간밤에는 나옹탑에서 달을 밟았고
今朝避雨葛山口 오늘 아침은 갈산 어귀에서 비를 피하네.
西江落景亂金箭 서강의 낙조는 금화살을 어지럽게 쏘고
東嶽怒雲騈蒼狗 동악의 성낸 구름은 검은 개를 모는구나.
鸕鶿窺魚立漁磯 가마우지는 고기를 노리며 낚시터에 섰다가
人語舟行忽驚飛 사람 떠들고 배 지나가니 놀라서 난다.
雙雙自入煙霧裏 쌍쌍이 날아서 안개 속으로 사라지니
我不如君早見幾 나는 일찍 기미를 보는 것에 그대만 못하네.
(挹翠軒遺稿 卷2)
이 시는 그가 1503년 남한강을 따라 유람할 때 지은 칠언고시로 유(有), 미(微)운을 차례로 썼다. 갈산과 나옹탑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양주 회암사를 거쳐 지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수련은 여행한 노정이다. 양주 회암사에서 나옹화상의 부도탑을 보고 달을 밟았으며, 양평의 갈산 어귀에서 비를 피했다고 직서하였다. 함련은 한강에서 배를 타고 석양과 구름을 바라본 경치를 역동적이고 시각적인 이미지로 제시한 것이다. 서쪽 강에 비치는 석양은 마치 해가 금빛 화살을 쏘는 것 같고, 동쪽 산에 부딪치는 성낸 구름은 마치 검은 개를 몰아가는 것 같다고 했다. 경련은 배에서 바라본 강변 풍경이다. 가마우지가 강변에서 고기를 노리고 있다가 배가 지나가자 놀라서 날아오르는 사실적인 풍경을 보여준다. 이 구절은 이규보의 ‘여뀌꽃과 해오라기(蓼花白鷺)’에서 “사람을 보고는 홀연 놀라 일어나 (見人忽驚起)”와 유사하다. 미련은 날아올라 구름 속으로 사라지는 새와, 정치현실의 기미를 알아채고 몸조심하지 못했던 자신을 비교한 것이다. 가마우지는 사람들이 다가오자 날아올라 피했지만 자신은 폭군의 시대에 그 기미를 눈치채지 못해 파직당하고 말았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연 속에 자유롭게 사는 새들을 부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는 송나라 강서시파의 여러 기교를 배워 한국 한시의 세련성을 한 차원 높였지만, 그의 시정신은 천진난만한 시심에 있었다고 할 것이다. (네이버 전재)
敲門夜政急 밤에 급히 문을 두드리는 소리,
有客來悤悤 누군가 바삐 서둘러 찾아왔구나.
却帶漢江雨 도리어 한강의 비를 몸에 띠었고,
滿袖南山風 남산의 바람은 소매에 가득하여라.
久訝佳期誤 약속이 어긋났나 오래 의아했는데,
悠然一笑同 한가로이 함께 모여 담소하누나.
玆遊無不遂 이 놀이에 모든 게 흡족하건만,
但恐酒尊空 술동이가 빌까 그게 걱정일세.
主人官高勢薰灼 주인이 벼슬이 높고 세력이 불꽃처럼 타오르니
門前車馬多伺候 문 앞에 문안드리는 거마들이 많도다
三年一日不窺園 3년에 하루도 동산을 돌보지 않으니
倘有山靈應受詬 만약에 산신령이 있다면 응당 허물을 받으리라
主人有多多金玉 주인이 재물이 매우 매우 많으니
什襲豈輕授放置 세간인들 어찌 함부로 방치하여 두겠는가
緘縢固鐍守夜半 단단히 잠가 놓고 밤중에 지켜도
未信溪山移白晝 내와 산을 대낮에 옮겨 가지 않을까 의심스럽도다
我持不貪以爲寶 나는 욕심내지 않음을 보배로 삼으니
了無一物掛心膈 마음 속에 한 물건도 걸림이 없네
金珠在前視如泥 금과 구슬이 앞에 있어도 흙처럼 보니
視猶不見況更擲 보아도 못 본 체, 하물며 집어 던지리
松煤楮膚有何好 그런데 먹과 종이만은 무엇이 좋길래
乃獨令吾手未釋 나로 하여금 손에서 줄곧 못 놓게 하는지
此心有欲皆不廉 마음에 욕망 있으면 다 청렴하지 못하나
於此戀戀無奈癖 이것들에 연연함은 벽이라 어쩔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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