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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순간에 선택이 중요하다
열왕기하 12: 17-21
17. 그 때에 아람 왕 하사엘이 올라와서 가드를 쳐서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고자 하므로
18. 유다의 왕 요아스가 그의 조상들 유다왕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구별하여 드린 모든 성물과 자기가 구별하여 드린 성물과 여호와의 성전 곳간과 왕궁에 있는 금을 다 가져다가 아람 왕 하사엘에게 보냈더니 하사엘이 예루살렘에서 떠나갔더라
19. 요아스의 남은 사적과 그가 행한 모든 일은 유다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20. 요아스의 신복들이 일어나 반역하여 실라로 내려가는 길 가의 밀로 궁에서 그를 죽였고
21. 그를 쳐서 죽인 신복은 시므앗의 아들 요사갈과 소멜의 아들 여호사바드였더라 그는 다윗 성에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마샤가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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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만남이 있는가?
페이스북에서 어떤 목사님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결혼주례를 앞두고 쓴 글입니다.
“내일 결혼하는 수철이 순서지입니다. 정성껏 만들었습니다.
내일 주례는 되도록 짧게 해주려 합니다.
하나님, 부모님, 배우자. 늘 생각하라고. 2013년 33세의 나이로 설날 즈음 위암으로 죽은 슈스케 영웅 임윤택 이야기를 좀 하려고요.
결혼승낙을 위해 찾아온 위암 말기의 환자에게 딸의 결혼을 허락하며 신부 어머니가 말했답니다.
"살아보니 사랑은 길이가 아니라 깊이더라고…."
결혼은 함께 있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니라 헤어지면 죽을 것 같아서 하는 거라고 말해야겠습니다.
오늘 요아스의 이야기는 만남의 의미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의 삶의 전반기에 있었던 좋은 만남, 그리고 만남이 사라지고 난 후에 일어난 무너짐.
오늘 본문은 위기의 순간을 맞이한 요아스 왕의 이야기입니다.
열왕기하 11장 2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요아스가 왕이 될 때에 나이가 칠 세였더라”
구약성경을 보면서 느끼는 것인데, 마치 우리나라 조선에 있었던 왕들의 이야기를 보는 것처럼 드라마틱한 일이 많습니다.
그 중의 요아스 이야기는 권력 때문에 어머니가 자식도 죽일 수 있다는 무서움을 보게 됩니다.
왕이 된다는 것이 단순히 계보를 통해서 만이 아니라 누군가의 지략을 통해 통치가 이루어진다는 것이죠.
마치 요즘 유행하는 ‘정도전’이라는 드라마를 보면서, 옆에 있는 지략가가 얼마나 중요한지도 보게 됩니다.
요아스는 정말 기구한 운명을 타고납니다.
만일 여호야다라는 인물을 만나지 않았다면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잠깐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요아스는 남유다의 8번째 왕인데, 그의 아버지 아하시야가 예후라는 북이스라엘의 장군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자 요아스의 할머니 아달랴가 왕이 될 만한 아하시야의 아들들을 모두 죽이는 일을 저지릅니다.
그리고 스스로 왕이 됩니다.
그때 간신히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내이며, 누나인 “여호사브앗”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성전에서 6년 동안 숨어서 삽니다.
그리고 7년째 되는 해에 대제사장 여호야다가 레위 사람들과 백부장 그리고 족장들의 힘을 규합해서 아달랴를 몰아내고 요아스를 왕으로 옹립합니다.
그런 이유로 요아스는 어린 시절을 성전에서 제사장 여호야다의 가르침을 받고 자라납니다.
우리가 그 시대의 정황을 잘은 모르지만, 7살에 왕이 되고 정적들이 있는 곳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었겠습니까?
요아스는 그 위험한 시기를 잘 이겨왔을 것이고, 그가 자란 성전이 훼손된 것을 보며 성전을 보수하려고 합니다.
할머니 아달랴가 통치하던 6년 동안 하나님께 예배하던 성전이 방치되었고, 성전에 있던 성물들은 우상에게 사용되기 위해 파괴되었던 것이죠.
요아스가 왕이 되자 성전을 보수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성전을 보수하도록 명령을 내렸지만, 그 명령은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정직하지 못한 제사장들 때문에 성전은 보수되지도 못하고 돈은 누군가에 의해 없어지고 있었죠.
열왕기하 12장 7~8절을 보면 당시의 상황이 나와 있습니다.
7. 요아스 왕이 대제사장 여호야다와 제사장들을 불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성전의 파손한 데를 수리하지 아니하였느냐? 이제부터는 너희가 아는 사람에게서 은을 받지 말고 그들이 성전의 파손한 데를 위하여 드리게 하라
8. 제사장들이 다시는 백성에게 은을 받지도 아니하고 성전 파손한 것을 수리하지도 아니하기로 동의하니라“.
이제 제사장 여호야다의 지휘 아래 성전을 보수하기 시작합니다.
어려운 순간에 좋은 멘토를 만나는 것은 참 중요한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역대하 24장 14절의 말씀이 아주 중요합니다.
“공사를 마친 후에 그 남은 돈을 왕과 여호야다 앞으로 가져왔으므로 그것으로 여호와의 전에 쓸 그릇을 만들었으니 곧 섬겨 제사 드리는 그릇이며 또 숟가락과 금은 그릇들이라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여호와의 전에 항상 번제를 드렸더라”
여기에서 중요한 말이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여호와의 전에 항상 번제를 드렸더라”입니다.
이 말은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는 요아스가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은 요아스가 하나님을 떠남으로 말미암아 찾아온 위기의 순간입니다.
아람 왕 하사엘이 블레셋의 가드를 점령하더니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오는 상황입니다.
문제는 위기가 아니라 위기 가운데서 어떻게 행동하느냐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직면하게 되는 분노의 순간이 문제가 아니라 그 분노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우리에게 순간순간 솟아나는 여러 욕망이 문제가 아니라 그 욕망에 넘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중요한 교훈은 문제없이 살아가는 방법이 아니라 끊임없이 직면해야 하는 문제 가운데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주인공인 요아스는 위기 가운데서 어떻게 행동했나요?
“유다의 왕 요아스가 그의 조상들 유다왕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구별하여 드린 모든 성물과 자기가 구별하여 드린 성물과 여호와의 성전 곳간과 왕궁에 있는 금을 다 가져다가 아람 왕 하사엘에게 보냈더니 하사엘이 예루살렘에서 떠나갔더라”(18절)
요아스는 왜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을까요?
그의 삶의 멘토였던 제사장 여호야다는 어디로 갔을까요?
불행하게도 이 땅의 누구도 우리의 영원한 멘토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의지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영원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죠.
오늘 본문과 평행구절인 역대하 24장을 보면, 2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세상에 사는 모든 날에 요아스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였으며”
그리고 15절에 보니까, 여호야다가 백삼십 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이제 17절과 18절을 보십시오.
17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 유다 방백들이 와서 왕에게 절하매 왕이 그들의 말을 듣고
18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을 버리고 아세라 목상과 우상을 섬겼으므로 그 죄로 말미암아 진노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임하니라
모든 왕에게서 여지없이 반복되는 일이지만, 요아스에게도 기회는 있었습니다.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가 하나님의 영에 감동되어 왕에게 나와 돌이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요아스는 나쁜 무리의 꾀를 따라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를 여호와의 전 뜰에서 돌로 쳐 죽이고 맙니다.
그러고 나서 일어났던 사건이 오늘 본문입니다.
열왕기하 12장 17절입니다.
“그때에 아람 왕 하사엘이 올라와서 가드를 쳐서 점령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오고자 하므로”
말씀을 준비하다 저에게 떠오른 말씀입니다. 잠언 27장 17절입니다.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는 것같이 사람이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하느니라”
우리의 삶을 빛나게 해줄 좋은 신앙의 친구를 가졌느냐는 것이죠.
제가 요즘 남성성경공부를 하며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남자들이 모여 함께 성경공부 하는 가장 큰 축복이 있다면, “함께한 이 사람들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는 것입니다.”
제사장 여호야다는 요아스의 좋은 멘토였고, 그와 함께하는 동안 요아스의 얼굴이 빛이 납니다.
멘토는 누군가에게 좋은 리더가 되어주는 사람, 삶을 인도해 주는 가이드가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자녀에게는 부모가 좋은 멘토가 되어야 하고, 신앙생활에도 좋은 목회자를 만나고 좋은 동역자를 만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우리 주변에 좋은 멘토가 있어도 멘토로 삼으려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실패했던 사람들을 종종 봅니다.
좋은 멘토를 만났으나 하나님을 붙들지 않은 사람들은, 사람이 떠나면 잘못됩니다.
말씀이 멘토가 되어야 하는데…
시편 119편 105절의 말씀을 아시죠?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영적인 권면입니다.
사도 바울이 세상을 떠나기선 로마의 감옥에서 보낸 글이죠.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참 좋은 멘토가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멘토가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셨나요?
이스라엘과 유다의 왕들이 악을 행하는데 빠짐없이 들어가 있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났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멘토가 되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씀을 생각나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라는 것을 말이죠.
요한복음 16장 8절에서는,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라고 하였고, 요한복음 14장 26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혜사 성령님을 기다리라고 하신 이유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아무리 좋아도, 훌륭해도 우리를 떠나갑니다.
요아스에게 참 좋은 스승, 그가 영원히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그가 모든 곳에 동행할 수도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우리가 선택을 잘못하지 않도록 도우시는 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지 않고 지혜로운 결정을 하도록 도우시는 분, 그분과 동행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식이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선택을 하도록 하지 못합니다.
지난 주간 CBS에서 “솔로몬”이라는 프로를 녹화하며 성령의 열매를 강의했습니다.
이전에 제가 준비했던 말씀인데 그 프로를 녹화하며 제가 은혜를 받은 것 같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나면 짧은 시간이지만 패널들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사회를 보는 김필원 아나운서가 말씀이 끝날 때마다 그런 이야기를 하더군요.
‘절제’를 이야기하면 “어머, 목사님 그게 제 삶의 문제예요!”
‘온유’를 이야기하면 “어머, 그게 진짜 해결되지 않는 문제예요!”
‘사랑’을 이야기해도 “어머, 그게 진짜 제 문젠데 어떻게 아셨어요?”
성령의 열매 하나하나를 다룰 때마다, 그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한 일인지를 깨닫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해도 그렇게 열매를 맺는 것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열매구나!”
우리의 성격과 품성을 가지고 될 수 없고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가능한 것이구나!
우리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갈 능력이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민감하도록 노력하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압니다.
우리가 조금 잘못될 수 있지만,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교정될 수 있음을 압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님을,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삶의 멘토로 여기며 사느냐는 것이죠.
요아스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겠습니까?
그를 이끌어주던 멘토가 없으니 말입니다.
문제는 그가 고민은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합니다.
우리의 최선이 무엇일까요?
단지 우리가 생각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의 최대치입니다.
어떻게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을까요?
강대한 이웃 나라의 아람 왕 하사엘이 쳐들어왔을 때 요아스의 최선은 오늘 본문의 말씀이었습니다.
잘못된 선택
오늘 본문 18절을 보세요.
“유다의 왕 요아스가 그의 조상들 유다왕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구별하여 드린 모든 성물과 자기가 구별하여 드린 성물과 여호와의 성전 곳간과 왕궁에 있는 금을 다 가져다가 아람 왕 하사엘에게 보냈더니 하사엘이 예루살렘에서 떠나갔더라”
아주 중요한 역사의 교훈은 “잘못된 선택”은 “잘못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죠.
그가 생각한 것은 금과 은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사람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잃었습니다.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데 변하는 사람의 마음을 얻으려 잘못된 선택을 한 것입니다.
물질로 사람의 마음을 산다고 얼마나 오래가겠습니까?
더구나 사람의 마음을 사기 위해 성전에 있는 금은보화를 가져다 바쳤다는 것은 또 하나의 우상 숭배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보다 사람의 마음을 더 귀하게 여긴 것.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하나님을 버린 사람! 잠시의 위기를 모면했는지 모르지만, 그의 마지막이 비참합니다.
오늘 본문 20절과 21절입니다.
20. 요아스의 신복들이 일어나 반역하여 실라로 내려가는 길 가의 밀로 궁에서 그를 죽였고
21. 그를 쳐서 죽인 신복은 시므앗의 아들 요사갈과 소멜의 아들 여호사바드였더라. 그는 다윗 성에 그의 조상들과 함께 장사되고 그의 아들 아마샤가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니라
평행본문인 역대하 24장 24절도 보십시오.
“아람 군대가 적은 무리로 왔으나 여호와께서 심히 큰 군대를 그들의 손에 넘기셨으니 이는 유다 사람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버렸음이라. 이와 같이 아람 사람들이 요아스를 징벌하였더라.”
이게 무슨 일인가요?
돈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고 위기를 모면한 것 같았으나 그 마음이 다시 변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변하는 인간의 마음을 돈으로 붙잡아 둘 수 있겠습니까?
돌아갔던 아람 사람들이 다시 쳐들어왔습니다.
결국, 그 전쟁에서 요아스는 상처를 입고 도망하는 신세가 됩니다.
본문에 보면 참으로 비참하게 요아스의 신복들이 반역을 일으켜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말씀을 준비하며 가만히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왜 요아스의 부하들이 반역을 일으켰을까요?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던 요아스의 주변에 있었던 사람들 역시 진정한 마음을 바쳐 충성한 사람들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잘못된 삶을 살았던 사람의 잘못된 결과입니다.
오늘 요아스를 통해 몇 가지 교훈을 생각하게 됩니다.
어려운 순간을 만났을 때 우리가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먼저 삶의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위기의 순간을 맞이하면 우리는 반사적으로 이런 생각을 합니다. “무엇을 붙들지?”
그때 우리의 눈에 들어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붙드는지를 보면 우리의 신앙이 어떠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요아스는 아람 왕의 군대가 쳐들어오자 긴박하게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 나라를 구하지?
그때 그의 마음에 떠오른 생각이 무엇이었나요?
성전을 보수하면서 많은 사람의 헌신으로 성전에 쌓아놓았던 성물, 금은보화가 떠올랐습니다. 사람들이 위기에 처하면 ‘정도’를 잃어버립니다.
그 물건이 무엇을 위함인지 보다는 그것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를 생각합니다.
그는 단순히 적군의 왕에게 물건을 바쳤다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그 순간 그의 ‘신앙’도 버린 것입니다
그는 속으로 이렇게 변명했을지 모릅니다. “백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
그런데 그가 잊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물로 백성을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지켜주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어쩔 수 없었어!”라는 변명처럼 치사한 것이 없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없습니다.
단지 자신이 그렇게 결정했을 뿐입니다.
솔직하게 내면을 들여다본다면, 그 위기의 순간에 요아스의 마음을 움직인 ‘동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물질이었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하신 말씀은 거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정확한 지적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둘 다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놓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거대한 기준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이 커다랗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종종 우리는 하나님을 선택함으로 다가오게 될 엄청난 고통과 위기도 감지합니다.
하지만 이 순간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우리의 신앙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위기를 모면하는 것이 아니라 “의의 최후 승리를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서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당장 성공이 늦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소유권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인데요, 많은 사람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를 축복해 주세요. 그래서 하나님의 일에 잘 사용되도록 도와주세요.”
이렇게 기도할 때 소유권이 확실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우리에게 허락해 달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을 일단 가지고 나면 생각이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일단 내 손에 들어오면 내 것으로 생각하죠.
하나님께서 가져가시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망각하고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아스를 축복하신 것은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할 때” 일어난 일입니다.
그로 하여금 백성을 잘 다스리도록 주신 것입니다.
만일 성전에 있는 물건을 하나님의 소유라고 생각했다면 “하나님께 묻지 않았겠습니까?”
죄는 착각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똑같은 일을 해도 자신이 마음대로 한 일과 허락을 맡고 한 일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소유권의 소재는 책임의 소재와도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이 곤고해지는 이유는 삶의 무게의 책임을 자신이 지려고 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여기서도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삶의 곤고함은 언제나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곤고함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단의 세력들, 악한 세력들이 하나님을 대적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때 우리의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해야 제대로 싸움을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루터가 그의 삶의 곤고함 가운데서 종교개혁을 시작했지만, 감당할 수 없는 무게 가운데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도와주세요!”
그리고 이렇게 찬양합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요아스의 삶을 보면 그가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을 때와 하나님을 버리고 대적했을 때로 분명하게 나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다루지 않았지만, 열왕기하 12장 2~3절의 말씀입니다.
2 요아스는 제사장 여호야다가 그를 교훈하는 모든 날 동안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
3 다만 산당들을 제거하지 하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여전히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
다른 많은 왕에게서 같게 나타났던 현상인데 뿌리 뽑지 못한 악의 근원이 머리를 들고 나타난다는 것이죠.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요아스의 행적은 그의 스승이자 제사장이었던 ‘여호야다’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를 키워주고 교육했던 여호야다와 함께 있을 때에는 정직하게 행하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죽고 나자 박멸되지 못한 악의 씨가 다시 싹을 틔우게 된 것이죠.
어거스틴은 ‘악’을 ‘선의 결핍’이라고 보았습니다.
선한 영역이 줄어들면 악의 세력이 커지는 것입니다.
선한 빛이 컴컴한 어둠의 영역에 깃들기 시작하면 악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교훈인데, 결국 우리가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악의 세력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제거하지 못한 악의 쓴 뿌리는 언젠가는 고개를 들게 되어 있습니다.
여호야다가 죽고 나서 요아스 주변에는 새로운 인물이 나타났습니다.
왕의 마음을 얻기 위해 절하고 아부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사람들의 말에 마음을 뺏기기 시작하자, 풍요를 상징하는 신들에게로 자연스럽게 그의 마음이 가고, 모든 일을 말씀이 아닌 물질의 원리로 풀어가려고 합니다. 결국, 그의 삶에 악의 고리가 다 연결된 것이죠.
악이 성행하는 것 같으나 곧 심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의인은 악인의 즐거움에 참여하지 말아야 하며, 악인의 번성함을 보고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요아스의 최후가 무엇입니까?
그가 마음을 얻으려고 돈을 바쳤던 아람도 그를 버렸고 달콤한 말에 넘어갔지만, 유다 사람들도 요아스를 버리고 배신했습니다.
성경은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의 핏값이라고 말씀합니다.
역대하 24장 25절입니다.
“요아스가 크게 부상하매 적군이 그를 버리고 간 후에 그의 신하들이 제사장 여호야다의 아들들의 피로 말미암아 반역하여 그를 그의 침상에서 쳐죽인지라 다윗 성에 장사하였으나 왕들의 묘실에는 장사하지 아니하였더라.”
그의 비참함은 죽음 이후에도 이어졌습니다.
왕들이 묻히는 무덤에 묻히지도 못한 채 쓸쓸하게 말이죠.
끝까지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얼마나 쉽게 유혹에 넘어갈 수 있는지를, 유혹에 넘어간 사람이 얼마나 비참해질 수 있는지를 너무나 명확하게 보여주는 이야기가 바로 요아스의 역사입니다.
항상 좋은 사람을 옆에 두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삶의 소유권을 늘 생각하며 기도하고 결정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