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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名之樸(무명지박) : 이름 없는 통나무(無名之樸)는
夫亦將無欲(부역장무욕) : 대저 무욕(無欲)으로 이끌지니,
不欲以靜(불욕이정) : 욕심내지 않음(不欲)으로 고요함(靜)에 이르면,
天下將自定(천하장자정) : 천하는 스스로 안정되리라(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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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항상 무위(無爲)하되,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無不爲).
만일 임금이 도를 지킬 수 있으면,
만물 스스로 교화(化)될 것이다.
만물 스스로 교화(化)됨에도 일을 떠벌이고자 하면(欲作),
나는 이름 없는 통나무(無名之樸)로 그 욕구를 억누르리라.
이름 없는 통나무(無名之樸)는
대저 무욕(無欲)으로 이끌지니,
욕심내지 않음(不欲)으로 고요함(靜)에 이르면,
천하는 스스로 안정되리라(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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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강남 역>
道常無爲而無不爲(도상무위이무불위) : 도는 언제나 무위하지만 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侯王若能守之(후왕약능수지) : 임금이나 제후가 이를 지키면
萬物將自化(만물장자화) : 만물이 저절로 이루어진다.
化而欲作(화이욕작) : 저절로 이루어지는데 인위적으로 뭘 도모하려는 욕심이 생기면
吾將鎭之以無名之樸(오장진지이무명지박) : 이름 없는 통나무로 이를 억누른다.
無名之樸(무명지박) : 이름 없는 통나무로
夫亦將無欲(부역장무욕) : 욕심을 없애니
不欲以靜(불욕이정) : 욕심이 없으면 고요하게 되고
天下將自定(천하장자정) : 천하는 저절로 평화가 깃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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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언제나 이름이 없으니
후왕이 그것을 잘 지키면
만물이 스스로 교화될 것이다.
교화되면서도 욕심이 일어나면
나는 이름 없는 통나무로 누를 것이다
이름 없는 통나무로 누르면
장차 욕심이 없어질 것이니
욕심이 없어져서 고요해지면
천지가 스스로 바르게 된다.
道恒无名, 侯王若守之, 萬物將自化. 化而欲作, 吾將鎭之以无名之樸. 鎭之以无名之樸, 夫將不欲. 不欲以靜, 天地將自正
[道恒无名,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노자(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2003. 6. 30., 김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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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바당 역>
도는 언제든지 억지로 일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안 되는 것이 없다
임금이나 제후가 이를 지키면
온갖 것 저절로 달라진다.
저절로 달라지는데도 무슨 일을 하려는 욕심이 생기면
이름없는 통나무로 이를 누른다.
이름없는 통나무로
욕심을 없애노니
욕심이 없으면 고요가 찾아들고
온누리에 평화가 깃들 것이다.
<임채우 역>
37 도는 하는 것이 없지만 하지 못하는 것도 없나니
도는 하는 것이 없지만,
하지 못하는 것도 없나니,
후왕(侯王)이 만약 도를 지킨다면
만물은 자기들 나름대로 자생자화할 것이다.
저절로 자생자화하고 있는데
욕심이 일어나면
나는 장차 무명(無名)의 질박함으로 그것을 진정시킬 것이다.
무명의 질박함에 욕심이 사라질 것이요,
조용히 욕심내지 않음으로써
천하는 저절로 안정될 것이다.
<James Legge 역>
1. The Tao in its regular course does nothing (for the sake of doing it), and so there is nothing which it does not do.
2. If princes and kings were able to maintain it, all things would of themselves be transformed by them.
3. If this transformation became to me an object of desire, I would express the desire by the nameless simplicity. Simplicity without a name Is free from all external aim. With no desire, at rest and still, All things go right as of their will.
<Lin Derek 역>
The Tao is constant in nonaction
Yet there is nothing it does not do
If the sovereign can hold on to this
All things shall transform themselves
Transformed, yet wishing to achieve
I shall restrain them with the simplicity of the nameless
The simplicity of the nameless
They shall be without desire
Without desire, using stillness
The world shall steady itself
<장 도연 역>
제37장 道는 자연에 순응하면서 못하는 일이 한 가지도 없다
道는 자연에 순응하면서
못하는 일이 한 가지도 없다.
제후들이 만약 그것을 지킨다면
만물은 생성하고 발전할 것이다.
생성하고 발전하면서 탐욕이 생길 때
우리는 道의 순박함으로 안정시키면서
그 탐욕을 잠재울 수 있다.
탐욕이 없으면 고요가 찾아오고
천하가 저절로 안정되어 갈 것이다.
<왕필 노자주 / 임채우 역>
도는 항상 하는 것이 없지만,
道常無爲,
저절로 그러한 대로 따른다.
順自然也.
하지 못하는 것도 없나니,
而無不爲,
<주석>
‘道常無爲 而無不爲’가 백서본에는 ‘道恒無名’으로, 곽점죽간본(郭店竹簡本)에는 ‘道恒亡爲也’로 되어 있다.
만물이 이로 말미암아 움직이니, 그로써 다스려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
萬物無不由爲以治以成之也.
후왕(侯王)이 만약 그것을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은 장차 저절로 자생자화할(혹은 교화될) 것이다. 저절로 자생자화하고 있는데도 욕심이 일어나면(혹은 조작하려고 하면) 나는 장차 무명의 질박함으로 그것을 진정시킬 것이다.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화이욕작’(化而欲作)은 욕심을 내서 이루려고 하는 것이요, ‘오장진지무명지박’(吾將鎭之無名之樸)은 주인 노릇을 하지 않는 것이다.
化而欲作, 作欲成也. 吾將鎭之無名之樸, 不爲主也.
무명의 질박을 쓰면 욕심이 없어질 것이요,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다투려고 하지 않는다.
無欲競也.
욕심내지 않고 조용히 있으니 천하가 저절로 안정될 것이다.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주석>
백서본에서는 앞의 ‘무욕’(無欲)과 ‘불욕’(不欲)의 ‘욕’(欲)이 ‘욕’(辱)자로, 끝 구절은 ‘天地將自正’으로 되어 있다. 초간본(楚簡本)에는 이 부분이 ‘夫亦將知足 知足以靜 萬物將自定’으로 되어 있다.
<Stefan Stenudd 역>
The Way is ever without action,
Yet nothing is left undone.
If princes and kings can abide by this,
All things will form themselves.
If they form themselves and desires arise,
I subdue them with nameless simplicity.
Nameless simplicity will indeed free them from desires.
Without desire there is stillness,
And the world settles by itself.
Nameless Simplicity
Tao Te Ching is traditionally divided into two parts. One is called Tao, the Way, simply because its first chapter begins with that word, and the other is called Te, virtue, because that’s the word its first chapter begins with. This, the 37 th chapter of the book, is the last of the first part.
In the two manuscripts found in Mawangdui, dating to around the year 200 BC, the two parts have the opposite order. There, the whole book ends with this chapter – quite suitably with the words about the stillness in which the world settles by itself.
In spite of the Mawangdui manuscripts, I present the book in its traditionally established order. Otherwise it would get complicated for the reader to compare different versions of the text. Also, it’s the path taken by most experts on this classic.
Myself, I find that the first chapter defining Tao, and the last one stating the purpose of the noble man’s Tao, make perfect sense as the beginning and the end of the book. So, in spite of the Mawangdui manuscripts, I am inclined to trust the traditional order of the chapters more.
pu-uncarvedwood-kanji-3cm.png
P’u, uncarved wood, simplicity.
Simplicity
As for the word ‘simplicity’ used in this chapter, its pictogram is the one for the uncarved wood, which is an image of utter simplicity that Lao Tzu favors in the book. He has used it several times before this chapter.
This image presents simplicity as a rough and unrefined state of affairs, a natural form before altered by cultural or other ambitions. Things as they are before human intervention.
When Lao Tzu also calls it nameless, he hints on its close relation to Tao, the Way, since namelessness is one of its traits. This was pointed out already in the first chapter, which states that the way that can be walked is not the real Way, and the name that can be named is not the real name of it.
The uncarved wood lacking a name is similar to Tao, in the sense of being beyond description. The simplicity that can free all things of desire is not just any simplicity, but that of Tao, the simple truth behind all.
Tao needs not act, since its law decides how everything else has to act. If rulers abide, they follow the same law instead of fighting it. Then things will happen by themselves and the turn of events will be natural, according to the terms of the universe. Things move on as they should.
Desire
The word desire is used in 15 of the 81 chapters of the Tao Te Ching (chapters 1, 3, 15, 19, 29, 34, 36, 37, 39, 46, 57, 61, 64, 66, 77). The Chinese word, yu , isn’t directed just at sexual desires, but at any kinds of longings, wants, lusts, and wishes.
Lao Tzu doesn’t really ban it, but he is clear about the benefit of being free of it. Desire is part of the human character, and therefore hard to avoid. There is no point in trying to suppress it completely, but those who follow Tao will find a way to make it dissolve.
In the sage, it no longer decides what action to take.
Desire is what risks interfering with the natural process, this chapter tells us. Greed is a kind of desire. So is hunger for power, and that for making a mark in history. When people interfere with the natural chain of events, they want to change them into more personally profitable outcomes. That disturbs the order of all. It has no chance of succeeding, but it can cause a lot of damage before failing.
Personal desire is as easy to understand as it is likely to appear, especially with people who have the power to make them imagine that they can fulfill it. We all want to make the most of our lives. If that means countering the natural cause of things, then we will make a lot of noise, cause a lot of trouble, but at the end we will find that we accomplished nothing durable.
We do better to accept things as they are, and find our place inside these patterns. There is a good place to be found for everyone, without upsetting the harmony. Actually, only by joining with the harmony are we ever likely to find that place.
<사봉 역>
道常無爲而無不爲(도상무위이무불위)
도란 무위(無爲)를 말하지만 불위(不爲)는 아니다.
侯王若能守之(후왕약능수지)
임금이 무위를 지킬 수만 있다면
萬物將自化(만물장자화)
세상만사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
化而欲作(화이욕작)
세상일에 욕심이 생기면
吾將鎭之以無名之樸(오장진지이무명지박)
내가 순박한 마음으로 그걸 눌러야 한다.
無名之樸(무명지박)
순박한 마음이란
夫亦將無欲(부역장무욕)
욕심을 부리지 않는 것이고
不欲以靜(불욕이정)
욕심을 내지 않으면 고요하게 되니
天下將自定(천하장자정)
천하가 저절로 평안을 찾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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道經의 대미를 이루는 章
無爲로 하고
無欲으로 하고
無名之樸으로 하라 한다
無爲 도덕경 비교
(2장) 是以聖人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3장) 常使民無知無欲 使夫智者不敢爲也 爲無爲則無不治
(10장) 明白四達 能無爲乎
(37장) 道常無爲而無不爲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38장) 上德無爲而無以爲 下德爲之而有以爲
(43장) 不言之敎 無爲之益 天下希及之
(48장) 爲學日益 爲道日損 損之又損 以至於無爲 無爲而無不爲
(57장) 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無欲而民自樸
(63장) 爲無爲 事無事 味無味
(64장) 是以聖人無爲故無敗 無執故無失
無欲 도덕경 비교
(1장) 故常無欲以觀其妙, 常有欲以觀其교
(3장) 常使民無知無欲, 使夫智者不敢爲也
(34장) 衣養萬物而不爲主, 常無欲, 可名於小
(37장)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57장) 我無欲而民自樸
樸 도덕경 비교
(15장) 敦兮其若樸
(19장) 故令有所屬, 見素抱樸, 少私寡欲
(28장) 復歸於樸, 樸散則爲器. 聖人用之, 則爲官長, 故大制不割
(32장) 道常無名, 樸雖小, 天下莫能臣也
(37장) 吾將鎭之以無名之樸,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57장) 我無欲而民自樸
靜 도덕경 비교
(16장) 致虛極 守靜篤 / 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26장) 重爲輕根 靜爲躁君
(37장)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45장) 靜勝熱 淸靜爲天下正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57장) 我無爲而民自化 我好靜而民自正 我無事而民自富 我無欲而民自樸
(61장) 大國者下流 天下之交 牝常以靜勝牡 以靜爲下
常 도덕경 비교
(16장) 各復歸其根, 歸根曰靜, 是謂復命, 復命曰常, 知常曰明, 不知常, 妄作凶, 知常容
(32장) 道常無名, 樸, 雖小
(34장) 功成不名有, 衣養萬物而不爲主, 常無欲, 可名於小
(37장) 道常無爲而無不爲,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46장) 知足之足常足矣
(48장) 無爲而無不爲, 取天下, 常以無事, 及其有事, 不足以取天下
(49장) 聖人無常心(常無心), 以百姓心爲心
(51장) 道之尊, 德之貴, 夫莫之命而常自然
(52장) 見小曰明, 守柔曰强, 用其光, 復歸其明, 無遺身殃, 是爲習常
(55장) 終日號而不嗄, 和之至也, 知和曰常, 知常曰明
이 章에서 가장 인상적인 자구
道常無爲而無不爲, 無名之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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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이명권 http://cafe.daum.net/koreanashram/8IoM/42
도덕경 37장 도상무위(道常無爲)와 거듭난 삶
1. 무위와 하나님의 뜻
<도는 늘 하는 것이 없이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왕이나 제후가 능히 이 도리를 지킨다면 만물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道常無爲而無不爲.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도는 <도덕경 1장> 서두에서 이미 밝혔듯이, 어떤 개념이나 언어로 고정하여 설명 할 수 없다. 도는 이미 인간의 개념적 진술을 넘어서는 ‘본래진면목(本來眞面目)’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언어적 진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임을 지적한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의 일반적 성질을 말하고자 할 때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정도의 유사한 개념들(槪念群)을 들어 비교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리스 사상에서 유래한 로고스나 인도의 리타나 다르마(法), 중국의 이(理)나 천(天)등이 도에 근사한 개념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노자의 도 개념이 지니는 특이성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에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도의 작용이 ‘무위(無爲)’를 근거로 한다면, 도의 현상은 ‘자연(自然)’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니, 무위와 자연은 도의 상이한 표현일 뿐이다. ‘하는 것이 없다(무위)’는 것은 그저 놀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자연) 까닭’을 말하는 것이며, 스스로 말미암는(자유) 것을 뜻한다. 다만 하는 일이 없어 보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도와 하나님은 상통한다. 하는 일이 없어 보이지만 하지 않는 일이 없으니,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나 삼라만상의 변화무상한 우주를 섭리하시는 것과 같다.
무위(無爲)라는 말을 잘 분석해 보면, 행할 위(爲)와 없을 무(無)가 결합된 것으로 단순히 ‘행위가 없는’ 뜻이 되지만 원뜻은 ‘인위적인 작위(作爲)’가 없는 행위를 뜻한다. 불필요한 인위적인 작위가 없다함은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의 법칙 혹은 도리(道理)를 벗어나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무위는 아무런 ‘무리(無理)’가 없는 행위가 된다. 이러한 무위를 근본으로 하는 도는 기실 모든 것을 다 이루지 않음도 없다(無爲而無不爲). 이는 앞의 3장에서 “행하되 무위로써 행하니 다스리지 않음도 없다(爲無爲則無不治).”고 했던 점과도 같다. 왕필도 만물이 도로 말미암아 운행함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물이 그 도로 말미암으니 그 도로써 다스려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萬物無不由爲以治以成之也).”
무위에 반대 되는 개념인 유위(有爲)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제도와 법률 등의 온갖 문명화된 장치들도 사실상 유위의 범주에 속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유위의 그물망에서 벗어난 무위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우리는 그것을 예수의 삶의 방식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6:38-39).” 예수는 또 말한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한복음 7:16-17).” 놀랍게도 예수는 자신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보통 생각하기를 예수의 말은 예수 자신의 교훈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자신의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훈을 말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교훈 속에는 불의(不義)나 사사로운 욕망이 개재 될 수 없고 오직 정의와 진리와 자유가 강물처럼 흐를 뿐이다.
제후나 왕이 만일 이러한 무위의 법도를 지킨다면, 만물이 장차 저절로 자생자화(自生自化)할 것이다. 물론 유가(儒家)적 인의예지(仁義禮智)나 법가(法家)의 법의 정치 보다 한 걸음 더 물러선 자연의 원리를 주장하고 있다. 물러선 것이지만 더 깊이 들어간 것일 수도 있다. 노자가 백성의 교화(敎化)를 반대한 것은 아니지만 인위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무위의 도리로써 자생 자화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 소박함(통나무)으로 욕심을 진정시키라, 천하가 고르게 될 것이다.
< 자생 자화하려다가 욕심이 일어나면, 나는 장차 이름 없는 소박(素樸)함으로 욕심을 진정시킬 것이다. 이름 없는 소박함에는 대저 또한 욕심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욕심이 없이 고요하니 천하가 장차 저절로 안정 될 것이다.>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無名之樸, 夫亦將不欲.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조화를 꿈꾸되 욕심이 발동하는 순간 우리는 그 욕심을 진정시켜야 한다. 욕심을 진정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름 없는 소박한 통나무와 같은 도로써 욕심을 다스려야 한다. 이름 없는 소박한 통나무란 욕심 없이 그저 질박하고 순박한 모습 그대로의 상태를 말한다. 통나무가 도를 상징한다는 점은 이미 앞에서 누차에 걸쳐서 본바와 같다. 욕심이 생겨나지 않으니 고요할 수밖에 없다. 고요하니 천하가 저절로 안정되게 되는 것이다.
예수가 인류의 모범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까닭도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명했기 때문이다. 욕심이 생기면 즉시 소박한 통나무 같이 무욕의 도로써 고요를 되찾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그르친 적이 없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그렇고, 요한도 이를 증언하고 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라.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한 10:37-38).” 여기서 예수가 말한 ‘그 일’은 자신으로 말미암는 일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행하는 일’로써 ‘유위’를 떠난 ‘무위’의 도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본문이 말하는 ‘만물이 장차 저절로 된다(萬物將自化)’는 것이나, ‘천하가 장차 저절로 안정될 것이다(天下將自定)’는 표현은 모두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장하는 노자의 궁극적 이상을 담은 것이다. 한 국가의 정치적 이상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고, 개인의 삶의 차원도 그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틀즈의 노래 ‘렏잇비(Let it be)’나, 존 레논의 ‘이메진(Imagine)’을 연상케 하기도 하고, 김태곤의 노래 ‘송학사’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무위자연의 세계는 실현 할 수 없는 유토피아만은 아니다. 예수의 말처럼, ‘천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혹은 너희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욕(無慾)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욕망의 제거는 모든 종교가 방식을 달리 할 뿐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욕망의 제거 곧 유위를 없앤 무위의 삶이야말로 천국에 이르는 첫 계단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노자 <도덕경> 전편인 37장에 대한 설명을 마쳤다. <도덕경> 전체 81장 가운데 상편에 해당하는 것으로 도의 원리와 모습을 잘 설명한다고 하여 <도경>이라고도 한다. 후편은 따라서 실천적 덕목인 <덕경>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37장 가운데 이미 도의 기본적 설명이 잘 되어있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하는 삶이 곧 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21장에서 이미 밝혔듯이, ‘훌륭한 덕의 모습은 오직 도를 따르는 것이라(孔德之容 惟道是從)’고 했던 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도를 알고 따르는 일, 그것만이 인간으로서 자신의 덕목을 충실히 수행하는 일일진대, 그리스도교인들은 욕심 없이(無爲) 도이신 로고스 하나님의 뜻을 잘 따르는 삶을 살아서 ‘스스로 그러한(自然)’ 자정(自定)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거듭난’ 삶의 원리다. 거듭난 삶(born again) 곧 중생(重生)은 신생(新生)을 의미하지만 신생(神生)이라고도 할 수 있다. 거듭난 삶은 온갖 유위의 인간적 예속을 벗어난 신성(神性)의 삶의 양식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삶을 일러 무위의 삶에 비유 할 수 있다. 이른바 ‘하느님 없이 하느님 앞에’ 살아가는 삶일 것이다. 없는 듯 존재하는 도의 세계만큼이나 없는 듯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감복하며 살아갈 뿐이다. 다시 자정(自定)의 세계로 들어 갈 시간이다. 바람이 불 듯, 물이 흐르듯 사는 삶, 일체무애(一切無碍)의 자유로운 삶을 사는 삶, 곧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다 이와 같을 것이다.
<출처> http://www.kmtimes.net/news/articleView.html?idxno=8122
37장 고요하여 의도하는 바가 없으면 |
道常無爲로되 而無不爲니라。王侯가 若能守(之)면 萬物이 將自化니라。化而欲作이면 吾將鎭之以無名之樸하리라。無名之樸은 亦將不欲이니, 不欲以靜이면 天下가 將自正(定)이라。 진(鎭)/ 진압할 진 정(定)/ 정할 정, 제자리 잡다 도의 실재는 함이 없으되 이로써 아니함도 없다. 임금이 만일 이를 지킬 수 있으면 만물은 저절로 이루게 될 것이다. 그렇게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의도하는 바가 생기게 되면 나는 장차 이름 지어지지 아니한 통나무로써 그것을 다스릴 것이다. 이름 없는 박은 또한 어떤 의도를 갖지 않으니 고요하여 의도하는 바가 없으면 천하가 저절로 바르게 될 것이다. 노자 37장에서 도경(道經)이 끝나고 38장부터는 덕경(德經)이 시작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본래 그런 구별이 있었는지는 모를 일이다. 후대의 해설가들이 필요에 따라 나눈 듯하다. 이런 구별이 일반화 된 데는 나름대로의 의미도 있을 법 하지만 노자의 흐름으로 본다면 구태여 구별할 의무를 느낄 필요는 없다고 본다. 도경(道經)과 덕경(德經)을 굳이 구별하자면 아마도 이런 내용이 될 것이다. 老子는 두 편으로 나눌 수 있는데 한편은 道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쓰여 졌고, 한편은 德이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쓰여 졌다. 전해져 내려오는 판본에 따라서는 道經이 앞으로 오기도 하고 德經이 앞으로 오기도 한다. 老子는 단행본으로 존재한 책으로는 드물게 오래된 책이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최소한 B.C. 300년 이전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중요한 고고학적 발굴 내용을 보면 1. 1973년 11월 - 1974년 초에 호남성 마왕뛔이 한나라시대 고분 3호에서 帛書(비단에 먹으로 쓴 책) 갑․을 본 2종이 발견되었는데 그 고분에 뭍인 연대는 B.C. 168년이다. 현재 전해지는 道德經과 80%가량이 일치한다. 2. 1993년 10월 호남석 곽점촌에서 전국시대 분묘를 발굴했는데 804개의 죽간 중 노자 3편 등이 실려 있었다. 분량은 도덕경 문헌의 2/5 정도가 되었다. 이 죽간들은 후대의 첨삭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추정연대는 하안선이 B.C. 300년 경일 것으로 본다. 3. 오늘날 우리가 보는 노자는 왕필이 주석 한 왕필 본으로 왕필은 A.D. 226-249에 위나라에 살았던 인물이다. 노자 주석은 16세 때 저술했다고 한다. 이때까지는 정본이 없었다고 추정되며 왕필의 손에 의해 전승 본들이 취사선택되고 정비되었으리라 보여 진다. 하지만 도경(道經)이라고 해서 도(道)에 관한 것만 다루고 덕경(德經)이라고 해서 덕(德)에 대한 것만 다룬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가 서로 깊게 연결되어 있으니 구태여 나눌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노자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도를 덕의 몸통[體]으로 보고 덕을 도의 쓰임[用]으로 본다. 체와 용은 한 뿌리를 두고 있으니 억지로 구별하려는 것도 우스운 일이 될 밖에... “도상무위(道常無爲)로되 이무불위(而無不爲)” 라는 첫 구절은 노자의 사상을 가장 잘 요약한 내용이라 볼 수 있다. 도(道)라는 참 실재는 무위(無爲)로써 무불위(無不爲) 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함으로 아니하는 것이 없단다. 아무 일 안하는데 안하는 것은 또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된다. 이를 한마디로 응축하면 위무위(爲無爲)가 된다. ▲ 같은 그림은 아니지만 난 모습이 닮은 무위당 선생의 그림 십 수 년 전에 한동안 집 거실에 무위당(無爲堂) 장일순 선생님의 난(蘭)그림 한점을 걸어두고 흠뻑 취한 적이 있었다. 웃는 난이었는데 그 그림에 다음과 같은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시가 쓰여 있었다. 쇄유쇄석허무외(碎儒碎釋虛無外) 구사구생적막중(驅死驅生寂寞中) 이십년래무일사(二十年來無一事) 운변장환주인공(雲邊長喚主人公)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유교도 깨부수고 석가의 가르침도 깨부숴 허무 밖으로 던져버리고 죽음을 좇는 것도 생을 쫓는 것도 적막 가운데 놓아 버리니 지난 20년을 살아오는 동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단지 구름 가에서 주인공만 크게 외쳐 불렀노라. 웃는 사람 얼굴 모양의 난초 옆에 가만히 내려앉은 서산의 선시(선시)를 바라보며 무위당 선생의 깊은 경지를 흠모할 수밖에 없었던 그 때가 새삼 그리워진다. 어쨌든 서산대사께서는 무위(無爲)로써 산 20년 세월을 절묘하게 그려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선인들의 가르침도 생사도 모두 던져 버리고 무위의 삶을 추구한 서산은 치열하게 자신의 진면목인 주인공을 찾는 위무위(爲無爲)의 길을 걸은 것이다. 그 그림은 본래 주인인 이현주 선생님께 가 있다. 노자 할아버지는 임금이 이런 경지에 도달해 그것을 지키면 만물이 저절로 제 모습을 갖추게 된다고 말한다. 그런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천하를 다스리는 자리에 오르려면 위무위(爲無爲)의 길을 가야만 하는 것이다. 혹 화이욕작(化而欲作), 위무위(爲無爲)로 가려다가 어떤 의도하는 바나 욕심이 생겨나게 된다면 노자 할아버지 처럼 이름 지어지지 아니한 통나무[無名之樸]로써 그것을 다스려야 한다. 무명지박(無名之樸)은 도의 몸체[體]를 의미한다고 보여 진다. 도로써 작위(作爲)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언제나 깨어 있으라는 말도 된다. 자칫 한 눈 팔다간 그간의 수련이 무용지물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작위(作爲)를 다스리는 것도 인위(人爲)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억지로 무위(無爲)를 이루려 한다면 그것 역시 무위(無爲)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금강경(金剛經)에는 이런 경고가 계속 반복되어 나온다. 부처나 보살이 자기가 무엇을 깨달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이미 부처도 보살도 아니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노자 할아버지는 “도를 지니고 고요하여 의도하는 바가 없으면 천하가 저절로 바르게 될 것[不欲以靜 天下將自正]‘이라고 말한다. 천하가 바르게 되는 것이 임금이 잘나서, 설쳐서 되는 것이 아니란다. 임금이 도를 모시고 자기 생각대로가 아닌 도에 순응하여 다스린다면 천하는 저절로 바르게 설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임기를 채우지 못하는 최초의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을 해 또 다시 구설수에 올랐다. 최근의 우리 상황은 총체적인 난맥상이다.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지 모를 정도로 난감한 상황이다.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 우려하는 이들도 있다. 민란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말들을 서슴지 않는다. 민족의 운명을 결정지을 6자회담 예정되어 있지만 우리정부는 전망조차 세우지 못하고 있다. 연일 계속 되는 동산 시장 폭등으로 민심은 폭발직전에 있다. 같은 직장 동료인데도 이제는 서로 건널 수 없는 벽을 쌓고 있다. 강남 강북의 차별은 이제 옛말이 되 버렸다.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는 훨씬 더 벌어져 지방에서 아파트를 팔아도 수도권에 오면 전세 얻기도 어려워졌다. 봉급생활자들이 수도권 지역의 아파트를 장만한다는 것도 한갓 꿈이 되어버렸다. 한미 FTA의 무리한 추진은 우리 민중들의 극심한 저항을 불러 일으켰다. 한미 FTA로 어떤 이들이 이득을 보게 되는지... 경기는 바닥을 치고 있는데 반등할 기세는 보이지 않는다. 철산상업지구에서는 연일 가게가 문들 닫고 있다. 주인이 바뀌어 인테리어를 하고 있는 가게가 십여 군데나 된다. 경기가 안 좋아지면 망하는 가게가 늘어나 인테리어 업자들이 바빠진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긴 맞는가 보다. 투자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이 시급한데도 정부와 정치인들은 정치 놀음에만 빠져있다. “이름 없는 박은 또한 어떤 의도를 갖지 않으니 고요하여 의도하는 바가 없으면 천하가 저절로 바르게 될 것(無名之樸은 亦將不欲이니, 不欲以靜이면 天下가 將自正이라)”이라는 노자 할아버지의 경고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할 때다. |
<출처> http://cafe.daum.net/kuhousing8/6bKn/18?q=%E7%84%A1%E5%90%8D%E4%B9%8B%E6%A8%B8
<노자 할배, 왕필할배...
道經 37장을 전부, 대충 끝내고 보니, 할배들하고 할 이바구가 많은 데...
일체만유의 귀일점은 동일하여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보편 타당성이 결여된 이론에 불가할 뿐일 것이다,
'萬有一通의 진리'라 하지만, 일체만유의 귀일점이 동일하다면,
어찌 진리가 여러 모습이겠는가?
그러니, 어쩌면, 모든 철학적 사유는 방편일 뿐일 것이다.
인류의 영속을 위해서 그것의 결론에 귀일하기는
아마도 부질없는 짓이기도 하겠지만, 불가능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 과정의 영속성이 유지되고, 그것이 인류의 사유의 필요성과
나아가 인류의 영속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류가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신이 되던지,
게으른 돼지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본문중에서)
할배들아, 그렇지 않겠는가? >
[도덕경 37장 ] -도덕경 상권 도경 마지막 장
道常無爲,而無不爲(도상무위이무불위), 도는 언제나 아무것도 함이 없지만, 하지 않는 것이 없다.
侯王若能守之(후왕약능수지),제후나 왕이 이 도리를 능히 지킬 수 있다면
萬物將自化(만물장자화), 천지만물은 스스로 따르게 될 것이다.
化而欲作(화이욕작), 따르는 중에 욕망이 일어나면
吾將鎭之以無名之樸(오장진지이무명지박), 이름없는 통나무와 같은 소박함으로 이를 억누를 것이다
無名之樸(무명지박), 이름없는 통나무와 같은 소박함으로
夫亦將無欲(부역장무욕), 무릇, 욕망을 없애면,
不欲以靜(불욕이정), 고요함으로 욕망이 사그러 들고,
天下將自定(천하장자정). 천하는 스스로 안정을 이룰 것이다.
주) * 將 : 장수 장, 장차 장->장수, 인솔자, 장차(將次),문득, 청컨대, 무릇, 대저
* 鎭 : 진압할 진, 지킬 진-> 누르다, 억누르다, 진압하다, 어루만져 편안하게 하다
* 亦 : 또 역-> 또, 또한,만약, 가령
,~도 역시, 단지, 만 ~뿐. 이미. 모두
* 化 : 될 화, 잘못 와->변함, 되다, 화하다, 교화하다. 가르치다, 감화시키다, 따르다.
* 作 : 지을 작, 만들 자->짓다, 새로 창안하다, 하다, 되다, 변화다, 생겨나다
[도는 언제나 작위적으로 함이 없지만, 함이 없이 함으로써,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제후나 왕이 이 도리 즉 無爲(무위),爲無爲(위무위), 無不爲(무불위)를 지킬 수 있다면, 천지만물이 스스로 이 도리에 따라 변화게 될 것이다. 이 도리에 따라 변화는 중에, 욕망이 일어나면, 이름없는 통나무와 같은 소박함으로 이를 억누를 것이다. 이름없는 통나무와 같은 소박함으로 이를 억눌러, 바르게 할 것(貞)이다. 무릇 족함을 알아, 욕망을 없애면, 고요가 찾아들므로, 족함을 알게 되어, 욕망이 사그러 들고, 천하는 스스로 안정을 이룰 것이다.]
'道란 무엇인가? ' 하지만,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道를 道라 부르면 이미 그 道는 道가 아니다' 도덕경 1장 첫 구절에 나오는 귀절이다
노자가 '道'와 그 작용을 설명하는 데, 도덕경 81장 전편을 소모했다고 과언이 아니다. 도덕경 하편이 아직 남아있기는 하지만, 상편만으로 판단했을 때라도, 다양한 각도에서 다양한 시각으로 인간과 대지와 하늘과 道와 自然과의 관계와 상호 영향, 상호얽킴작용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국은 그 바탕하에서, 인간이 어떻게 처신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를 설명한 것이다.
佛家에 존재하는 수많은 경전들, 그 경전들의 존재 동기나 목적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凡人이 그 수많은 경전을 섭렵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특히, 한정된 경전이라도 그 깊이를 그런대로 파헤친다는 것도 만만찮을 것이다.
道家의 無, 有, 虛의 개념은, 필연적으로 불가의 有, 無, 空의 개념과 맞딱드려 질 수밖에 없다. 有와 無, 空, 虛은 존재와 비존재를 구분짓는 존재론의 출발이고 기본개념이기 때문이다. 滅과, 不滅, 生, 不生의 개념 역시 道家, 佛家의 단골 사유메뉴이다. 滅과, 不滅, 生, 不生의 사유는 존재와 비존재을 넘나들며, 사유영역을 넖혀준다.
'不有之法不卽之無(불유지법부즉지무), 不無之相不卽之有(불무지상부즉지유)'
'불유의 법이 곧 무에 거주하는 것이 아니고, 불무의 현상이 곧 유에 거주하는 것도 아니다(-금강삼매경론 서론에서)'
'不滅故 不可說無(불멸고 불가설무), 不生故不可說有(불생고불가설유), 遠離二邊故(원리이변고), 不可說亦有亦無(불가설역유역무), 不當一中故(부당일중고), 不可說非有非無(불가설비유비무'
'불멸이므로 무라 말할 수 없고, 불생이므로, 유라 말할 수 없다. 유.무의 양변을 떠났으므로,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라고 말할 수 없다. 한 순환의 와중에 해당하는 것도 아니므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없다(-한국불교전서 제1책 p625)'
여기서 말하는 法은 大乘起信論疎에나오는 대승과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다, 즉 일체 만유의 근본 도리라하니, 노자가 말하는 '도'와 유사한 개념이 아니겠는가?
노자 도덕경 전편에 걸쳐 설해지던, 有,無의 개념, 道의 개념이, 불가의 주요경전에서도, 역시 핵심개념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본다. 그러니, 노자, 불가의 철학은 有와 無를 둘싼 사유의 철학, 존재와 비존재를 思惟하는 존재론의 철학인 것이다.
노자와 佛家의 이런 思惟는 오랜 세월 무수한 구도자들이 고도의 수행과 명상을 통하여 정립해온 개념이지만, 하이데거로 대표되는 서양식 존재론적 思惟家들에게 이르러, '無'의 개념이 그동안 단순히 없음, 부정의 소극적 개념에서, [모든 존재자들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는 터전] 과 같은 것으로, 無의 가치와 의미를 새롭게 하게 된다.
[사실을 똑바로 읽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해체하고, 원초적인 눈으로 세상을 다시보려는 그런 사상을 해체주의는 담고 있다. 해체론에서는 無가 중요하다. 무는 모든 존재자들이 존재할 수 있도록 해주는 터전과 같다.... 무를 닮은 사유야 말로,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읽고 이해하여, 세상을 새롭게 보게하는 존재론적 혁명을 자져오는 '思想的 始原'으로 부각되었다. (-김형효의 '원효의 대승철학 서설에서)']
道家, 佛家에서는 '무의 개념' 이 애초부터 그 태동을 같이한 '思想的 始原'이였지만, 아마도, 서양철학에서는 하이데거에 이르러, 무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새로운 존재론적 思惟가 확립되었다는 것이다.
도덕경 도경 37장에서 접해본 무의 개념은 도덕경 첫장부터 나타난다. 도덕경 무의 개념으로부터 시작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佛家의 사상 역시 無의 사상에 기반한다. 하지만, 이 無는 단순한 無가 아니다. 非有인 듯 하지만, 그도 아닌 것이고, 有도 아니면서 非無인 듯하지만 그도 아니다. 그래서 空이라 한다.
空이라하지만, '色不異空, 空不異色이다. 色卽是空, 空卽是色(佛家의 대표경전중의 하나인 반야심경에서)', 色은 물질, 만물인 有이다. 색은 공과 다르지 아니하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아니하니, 색은 곧 공이요, 공은 즉 색이니 有인 것이다
無와 非有, 有와 非無 즉, 有가 아니면 無인가, 하지만, 無도 아닌 것이며, 無가 아니면 有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有가 아닌 것이며. 그것이 空인가 하면, 空은 곧 色이라한다. 이러니, 도가, 불가, 하이데거식 현대철학의 존재론적 思惟 모두, 하나같이 미묘하고, 한량하기 그지없다. 이런 미묘함을 일러 노자는 微明(미명), 襲明(습명)이라 하였고, 장자는 保光(보광), 즉 '감추어도 들어나는 빛'이라 하였다.
하지만, 내생각으로는, 분명하게 思惟하건데, 일체만유의 귀일점은 동일하리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諸이론은 보편 타당성이 결여된 이론에 불가할 뿐이며, 萬有一通의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일체만유의 귀일점이 동일하다면, 즉 만유일통의 진리라면, 어찌 진리가 여러 모습이겠는가? 그러니, 어쩌면, 이 모든 철학적 思惟는 방편일 뿐일 것이다.
일체만유의 귀일점이 존재하느냐 않느냐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일체만유의 귀일점을 향하여 思惟한다하지만, 어찌 그것이 용이하게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니, 이런 老子, 佛家, 존재론의 思惟야 말로, 끝없이, 미묘하고도 한량하기 그지 없는 일이라 아니할 수 있겠는가?.
인류의 영속을 위해서 그것의 결론에 귀일하기는 아마도 부질없는 짓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불가능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그 과정의 영속성이 유지되고, 그것이 인류의 思惟의 필요성과 나아가 인류의 영속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인류가 모든 것을 알게 된다면, 스스로 神이 되던지, 게으른 돼지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본 장은 도덕경 중 이른바 道經(도경)의 마지막 귀절이다.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로 시작하여, 道常無爲而無不爲(도상무위이무불위)를 거쳐 天下將自定(천하장자정)으로 끝을 맺는 셈이다.
道經 全편이, 도란 무엇인가, 인간을 포함한 천지만물이, 道의 원리와 道에 따른 행위 즉 道理란 무엇이고, 道理에 따라 행하는 것은 어떤 것인지, 1장부터-37장까지 37장전편을 대부분 소모했다.
'道란 무엇인가?' 동서고금에서, '道'란 '무위자연'을 지향하는 세상만물의 근원적 원리' 정도로 미루어 짐작하지만, 정작 도덕경에서는 ' 道가 뭐라 말할 수 없다(道常無名)' 고 한다. 그러면서, 말할 수 없는 道의 원리, 도를 체득해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도덕경이니, 아이러니한 것 아닌가?
이것 역시 2장이나, 36장에서 말하는 二重性이고 異重性이면서 同異을 말한다. 有와 無가 대비됨으로서 존재한다는 有無相生의 사유를 되새겨보자. '道가 이렇다' 라고, 명쾌히 정의될 수 있는 것이라면, 몇마디 경구로서 道의 정의가 명쾌해 질 수 있다면, 세상이 그만큼 단순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런 세상에서는 도덕경이 존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道는 천지만물을 지배하는 원리이면서, 세상만물 어디에나 어떤 순간에도 존재한다. 억지로 이름을 붙인다면 '大乘'이라 하는 불가의 대승개념가 유사하다는 것을 이미 밝힌 바 있다. 道, 大乘은 無所不在, 無時不在하는 동시성과 이중성을 가진다. 천지만불을 지배하면서도, 천지미물속에, 티끌 속에 깃들기도 하는 것이 道이고 大乘이기 때문이다.
우주는 한없이 크다. 얼마만큼 큰 것이냐? 천지만물이 천태만상으로 천변만변, 충분히 영속할 수 있을 만큼 큰 것이다. 이런 관점은, 과거에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물리학의 대세는 우주의 무한성을 부정한다. 우주는 유한하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과학기술적 思惟는 우주를 유한하게 봐야할 지모르지만, 철학적 思惟는 우주를 무한하다 전제하던, 과학기술적 思惟처럼 우주를 유한하게 보던. 하등 문제될게 없다. 즉, 우주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무한하지는 않다하드라도, 이 우주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 천지만물이 천태만상으로 천변만변, 충분히, 영속할 수 있을 만큼, 이 우주는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덕경이나 동양의 우주론적 思惟가 우주의 과학기술적 解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해도, 고학기술적 解와 무관하게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도덕경 32장에서 말한다.
'道常無名(도상무명), 樸, 雖小(박, 수소), 天下莫能臣也(천하막능신야)'
'도는 영원히 이름을 붙일 수 없다. 통나무처럼 소박함은,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천하에 이것을 부릴자 없다.'
주) * 雖 : 비록 수-> 비록, 아무리 ~하여도, 그러나
<통행본>
道常無爲而無不爲,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無名之樸, 夫亦將無欲,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백서본>
道恒無爲也.
侯王能守之,而萬物將自化.
化而欲作,將鎭之以無名之樸.
夫亦將知足,知足以靜,萬物將自定.
<초간본>
道恆亡爲也,
侯王能守之, 而萬物將自爲,
爲而欲作, 將貞之以亡名之朴,
夫亦將知足, [知足]以靜, 萬物將自定
주) * 貞 : 곧을 정-> 곧다, 지조가 굳다, 마음이 곧바르다, 충실하고 올바르다.
왕필본 본문, '道常無爲而無不爲', 초간본,백서본에서 '道恒無爲也'으로 되었고, 또 '無名之樸, 夫亦將無欲(부역장무욕), 不欲以靜(불욕이정)...'이 초간본과 백서본에서, 無名之樸'이 없고, '夫亦將知足, 知足以靜'로서 不欲以靜의 '不欲'대신에, '知足'를 쓴 차이를 보인다. 이 때문에, 왕필본과 초간본,백서본사이에 해석상에 다소 차이와 혼선을 겪는다. 초간본의 '恒'은 '常'의 뜻, 또, '亡' 은 '無'의 이체자이다. 똑같은 '없음'이라는 뜻이다.
'道常無爲,而無不爲(도상무위이무불위)'
'도는 언제나 아무것도 함이 없이, 하지 않는 것이 없다"
도덕경에는, 전편에 걸쳐, 無爲, 爲無爲, 無不爲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노자사상을 단적으로 압축한 白眉라 해도 과언이 아닌 단어들이다. 無爲는 '함이 없음'을 의미한다. 자연 그대로, 자연스러움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뜻이다. 인위적인 것을 억지로 개입시키지 않고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그렇게 자연스런 상태로 두는 것이 최상이다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일 게다. 爲無爲는 '함이 없음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천하만물은 자연스런 상태로 스스로 자라고, 스스로 살아간다. 만물이 그렇게 살아가게 기반을 제공하는 것은 자연의 역활이다. 그것이 爲無爲이다. 자연에 자양분을 직접주고 기르지는 않지만, 만물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함이 없다 하지만, 함이 없이 행하므로, 하지않는 것이 없다. 그것이 無不爲의 사상이다.
'侯王若能守之(후왕약능수지), 萬物將自化(만물장자화), 化而欲作(화이욕작), 吾將鎭之以無名之樸, 吾將鎭之以無名之樸(오장진지이무명지박),'
'제후나 왕이 이 도리를 능히 지킬 수 있다면, 천지만물은 스스로 따르게 될 것이다. 다르는 중에 욕망이 일어나면, 이름없는 통나무와 같은 소박함으로 이를 억누를 것이다.'
본 귀절은 도덕경 32장, '侯王若能守之(후왕약능수지), 萬物將自賓(만물장자빈), 제후나 왕이 이것(소박함)을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스스로 따르게 될 것이다'를 연상시킨다.
본 귀절의 뜻도, 유사하게, 제후나 왕이 이 도리 즉 道常無爲,而無不爲(도상무위이무불위)를 지킬 수 있다면, 만물이 스스로 이 도리에 따라 변화될 것이다. 賓(빈)은 '따르다', 化(화)는 '따라서 변화다', '따라서 교화되다'의 뜻이다.통나무와 같이 소박하고 질박함으로, 無爲, 爲無爲, 無不爲를 실천하는 중에, 이를 거슬러고 부질없는 욕망이 싹튼다면, 이름없는 통나무와 같은 소박함으로 이를 억누를 것이다. 통나무처럼 소박함으로 돌아가도록 다스릴 것이다.
도덕경의 많은 귀절에 '樸(박)'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초간본에는 대부분 '樸'대신에, '朴'이라는 단어도 쓰이는 데, 이것은 '樸'의 이체자이다. '朴'과 ''樸'은 글자체가 틀리나 뜻은 같은 뜻으로 쓰인 것이다.
'樸'은 소박하고 질박함 즉 다듬어지지않은 상태를 말한다. 명사로는 통나무의 뜻이다. 그래서, 통나무는 , 통나무와 같이 소박하고 질박함의 대명사로, 도의 원리를 비유화하는 데 자주 사용된다. 어찌 통나무가 道의 깊은 원리를 대변하겠냐마는, 통나무의 그 생성목적이 道의 원리를 알기쉽게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다. 즉, 통나무는 다듬지 않은 자연그대로의 상태, 자연상태로의 분위기가 무위자연을 주장하는 노자의 생각을 비유하는 데 적절하기 때문이다.
'大制不割(대제불할)', '復歸於樸(복귀어박)' 이라 고도 했다. '크게 쓸려면, 나누지 말라', ' 통나무와 같은 소박함으로 돌아가라' 고, 도덕경28장' 에서 말한다.
통나무를 용도에 맞게 재단하는 순간, 內在하고 있던 모든 가능성은 사라지고 오로지 재단목적만의 나무토막으로 남을 뿐이다. 즉 잘려진 나무조각은 쓰임이 잘려진 목적에 한정되기 때문에 이미 소박하고, 질박한 통나무가 아닌 것이다. 이런 개념이 '道'라 이름을 붙이는 순간 이미 道가 아니다' , 그래서 '道常無名(도상무명)' 도는 이름을 붙일 수 없다'. 라는 비유에 사용되기도 한다.
'夫亦將無欲(부역장무욕), 不欲以靜(불욕이정), 天下將自定(천하장자정)'
'무릇, 욕망을 없애면, 고요함으로 욕망이 사그러 들고, 천하는 스스로 안정을 이룰 것이다.'
왕필본에서, '夫亦將無欲(부역장무욕), 不欲以靜(불욕이정)' 즉, ' 무릇, 욕망을 없애면, 고요함으로 욕망이 사그러 들고' 의 뜻이다. 이것이 백서본에서 '夫亦將知足, 知足以靜' 즉, '무릇, 고요함으로 족함을 알아' , 초간본에서는 '夫亦將知足, [知足]以靜' '무릇, 욕망을 없이하면, 고요함으로 [족함으로]' , 이후 모두 문장'萬物將自定'을 잇는 차이를 보인다.
無慾(무욕)은 묙망이 없는 마음가짐 즉, 욕망자체가 생기지 않는 마음가짐이고, 不慾(불욕)은 욕망을 내지 않는 마음가짐을 뜻한다. 그것은 때때로 욕망이 일어나나, 그것을 억제하고 사그라 들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이를 바탕으로 이 부분의 초간본, 백서본을 고려하여 왕필본을 재해석하면,
'무릇, 나라를 다스리는 제후나 왕이, 無爲로서 다스리면, 백성이 스스로 따르게 될 것이다. 굳이 세상을 억지로, 有爲하고 作意的으로 잘 다스려 보겠다는 욕망을 없애고, 無爲로서 다스리면, 백성이 스스로 따르게 되는 것으로 만족하게 되고, 고요함으로써, 그런 욕망이 사그러 들고, 천하는 스스로 안정을 이룰 것이다.
도덕경 왕필본 상권, 도경을 끝내며
도덕경 상권인 도경을 나름대로 해석하고자 하면서, 피상적으로 알아왔던, 도덕경, 남이 나름대로 이해한 결과물에 의존해왔던 도덕경과, 노자에 대한 지식에 대해, 이 작업 역시 내 나름대로의 이해이겠지만, 나로서는, 이전의 느낌과 다르게, 매장마다 언급하였듯이, 많은 새로운 것을 알게 해준다.
사람들이 노자의 사상이 이상주의적이라 비판하기도 하고, 얼핏 보면, 노자의 귀절마다, 상식에 반하는 반어적 귀절들이 많이 등장하기 때문에, 읽는 이들이 노자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곤란을 겪기도 한다. 정치적 목적이나 교세의 확립에 이용하기위한 수단인지, 이런 저런 이유로, 실제로 진시황시대부터, 현대 중국에 이르기까지, 정치권력으로부터 이용되기도 하고, 유가, 불가등의 종교세력으로부터 질시와 공격을 많이 받아온 것은 주지의 역사적 사실이다.
不常賢(불상현), 絶學無憂(절학무우), 天地不仁(천지불인), 즉. '현명함을 숭상하지 말라', '배움을 끊어라',' 천지는 인자하자 못하다'등등의 반어적 귀절들이 거의 매장마다 등장한다. 이에 대한 세세한 나름대로의 이해한 바를 각 장에서 이미 설명한 바가 있다.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서도, 억지로 다스릴려고 하지말고, 無爲로서 다스려라 한다. 이는 속되게 이야기해서 천하를 내버려두라는 뜻이다. 이런 사상을 두고, 古來로, 현실도피, 이상주의 등등의 비판이 있어 온 것이다. 특히, 현실참여와 현실개조를 통해 이상으로 나아가려는 儒家들이 그 비판에 앞장을 서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목표를 이루는 과정이 달성가능한 것이고, 제한적이라면, 즉, 세상이 인간의 생각과 노력대로 용이하게 바뀌어지고, 바뀐 것이 유지되는 정도라면, 세상은 그 만큼 단순할 수 있고, 오랜 역사전 전통이 쌓일 그릇의 세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세상에서는 도덕경이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세상은 인간과 땅과 하늘과 대자연 속의 모든 것과 그 모든 것의 존재와 움직임과 변화를 감당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 모든 것들을 영원토록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커야 하는 것이다. 그런 세상이라면, 대자연, 대우주아니겠는가?. 그러니, 도덕경의 思惟대상은 궁극적으로 이런 대자연, 대우주인 것이다.
그래서, 도덕경은 여러 현실적인 화두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고도한 함의를 통해, 인간과 땅과 하늘과 자연의 상호얽힘속에 인간이 처신해야할 기준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노자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이고, 그것이 '道' 아닌가 한다.
노자 도덕경을 읽으면, 형식과 주제에 거침이 없다. 한계가 없는 것이다. 노자의 사유의 분망함과 자유로움을 느낀다. 그 사유의 깊이도, 마치 현대문명을 통찰하고 그 해법을 말하는 듯. 현대우주론을 보는 듯 하기도 하다, 아닌게 아니라, 현대문명의 수많은 과학자들이 도덕경을 찾는 것이, 현대우주물리학이, 이른바 '만유의 이론'을 추구하듯이, '일체만유을 지배하고, 일체만유가 귀일하는 원리로 알려진 '道'를 思惟하는 老子, 老子의 이런 자유분망한 사유방식으로 부터 창조적 모티브를 얻고자 하는 것 아닌가 생각된다.
무량하기 짝이없는 우주속에서, 애써, 그 우주의 존재원리인 도와 그 작용을 이해한다는 것에서, 우리가 생활에서 직접적인 가치를 크게 못 느낄지도 모르지만, 마치 신앙이, 부족한 인간의 중심을 잡아주듯, 대자연, 대우주속에서, 극히 그 일부일 뿐인 인간이 중심을 잡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덕경은 無爲自然을 말하고, 인간세상의 理想을 말한다고 하지만, 나로서는, 어찌보면, 가장 인간적인 경구로 가득차있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老子는 우리에게 그것을 애써, 가르친 것이 아니라, 자유분망하게 스스로 그 자취의 흔적을 남겼을 뿐이고, 우리가 그 자취를 따라가 보고자 할 뿐인 것이다.
이것으로, 老子別義(上)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2013년 7월3일에 시작한 작업이, 어줍잖게 6개월 반을 넘겼읍니다. 현실적인 한계속에, 개인적으로, 그렇게 만족스런 진행이지 못했습니다. 동서양 존재론 철학의 원류답게 글자하나하나마저, 그리 호락호락 한 것이 아니군요
처음의 의도대로, 훈고학적인 字句해석에 머무르지 말고, 도덕경 귀절을 기반으로 관련되어, 불교,유교, 현대과학의 영역으로 思惟를 넓히고, 연관지어, 통합적이고 종합적 식견을 구축해보고자 하였으나, 아무래도 많이 부족함을 뼈저리게 느낍니다. 다만, 앞으로, 시간이 된다면, 언젠가는 그런 작업을 다시 해보지 싶은 데, 이번의 경험이 좋은 안내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갑오년 생인 본인이 갑오년의 시작, 그러니까 回甲의 시작을, 비록 반똥가리이지만, 하던 일의 마무리로 시작하여 일단, 기분은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습니다.
그동안, 많은 관심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고, 같이 참여의 수고를 기꺼히 하여준 여러 동기들에게 심심한 감사드립니다. 꾸벅!, 꾸벅!, 꾸벅!, 꾸벅!
<출처> http://cafe.daum.net/koreanashram/8IoM/42
도덕경 37장 도상무위(道常無爲)와 거듭난 삶
1. 무위와 하나님의 뜻
<도는 늘 하는 것이 없이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 왕이나 제후가 능히 이 도리를 지킨다면 만물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道常無爲而無不爲.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도는 <도덕경 1장> 서두에서 이미 밝혔듯이, 어떤 개념이나 언어로 고정하여 설명 할 수 없다. 도는 이미 인간의 개념적 진술을 넘어서는 ‘본래진면목(本來眞面目)’의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언어적 진술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임을 지적한바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의 일반적 성질을 말하고자 할 때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정도의 유사한 개념들(槪念群)을 들어 비교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그리스 사상에서 유래한 로고스나 인도의 리타나 다르마(法), 중국의 이(理)나 천(天)등이 도에 근사한 개념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노자의 도 개념이 지니는 특이성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상에 있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도의 작용이 ‘무위(無爲)’를 근거로 한다면, 도의 현상은 ‘자연(自然)’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니, 무위와 자연은 도의 상이한 표현일 뿐이다. ‘하는 것이 없다(무위)’는 것은 그저 놀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 그러한(자연) 까닭’을 말하는 것이며, 스스로 말미암는(자유) 것을 뜻한다. 다만 하는 일이 없어 보일 뿐이다. 그런 점에서 도와 하나님은 상통한다. 하는 일이 없어 보이지만 하지 않는 일이 없으니,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으나 삼라만상의 변화무상한 우주를 섭리하시는 것과 같다.
무위(無爲)라는 말을 잘 분석해 보면, 행할 위(爲)와 없을 무(無)가 결합된 것으로 단순히 ‘행위가 없는’ 뜻이 되지만 원뜻은 ‘인위적인 작위(作爲)’가 없는 행위를 뜻한다. 불필요한 인위적인 작위가 없다함은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의 법칙 혹은 도리(道理)를 벗어나지 않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무위는 아무런 ‘무리(無理)’가 없는 행위가 된다. 이러한 무위를 근본으로 하는 도는 기실 모든 것을 다 이루지 않음도 없다(無爲而無不爲). 이는 앞의 3장에서 “행하되 무위로써 행하니 다스리지 않음도 없다(爲無爲則無不治).”고 했던 점과도 같다. 왕필도 만물이 도로 말미암아 운행함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만물이 그 도로 말미암으니 그 도로써 다스려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다(萬物無不由爲以治以成之也).”
무위에 반대 되는 개념인 유위(有爲)는 어디까지나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일반적으로 제도와 법률 등의 온갖 문명화된 장치들도 사실상 유위의 범주에 속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유위의 그물망에서 벗어난 무위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우리는 그것을 예수의 삶의 방식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6:38-39).” 예수는 또 말한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한복음 7:16-17).” 놀랍게도 예수는 자신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다. 보통 생각하기를 예수의 말은 예수 자신의 교훈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자신의 교훈이 아니라, 하나님의 교훈을 말한다고 한다. 하나님의 교훈 속에는 불의(不義)나 사사로운 욕망이 개재 될 수 없고 오직 정의와 진리와 자유가 강물처럼 흐를 뿐이다.
제후나 왕이 만일 이러한 무위의 법도를 지킨다면, 만물이 장차 저절로 자생자화(自生自化)할 것이다. 물론 유가(儒家)적 인의예지(仁義禮智)나 법가(法家)의 법의 정치 보다 한 걸음 더 물러선 자연의 원리를 주장하고 있다. 물러선 것이지만 더 깊이 들어간 것일 수도 있다. 노자가 백성의 교화(敎化)를 반대한 것은 아니지만 인위적으로 할 것이 아니라, 무위의 도리로써 자생 자화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2. 소박함(통나무)으로 욕심을 진정시키라, 천하가 고르게 될 것이다.
< 자생 자화하려다가 욕심이 일어나면, 나는 장차 이름 없는 소박(素樸)함으로 욕심을 진정시킬 것이다. 이름 없는 소박함에는 대저 또한 욕심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욕심이 없이 고요하니 천하가 장차 저절로 안정 될 것이다.>
化而欲作, 吾將鎭之以無名之樸. 無名之樸, 夫亦將不欲. 不欲以靜, 天下將自定.
조화를 꿈꾸되 욕심이 발동하는 순간 우리는 그 욕심을 진정시켜야 한다. 욕심을 진정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름 없는 소박한 통나무와 같은 도로써 욕심을 다스려야 한다. 이름 없는 소박한 통나무란 욕심 없이 그저 질박하고 순박한 모습 그대로의 상태를 말한다. 통나무가 도를 상징한다는 점은 이미 앞에서 누차에 걸쳐서 본바와 같다. 욕심이 생겨나지 않으니 고요할 수밖에 없다. 고요하니 천하가 저절로 안정되게 되는 것이다.
예수가 인류의 모범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까닭도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명했기 때문이다. 욕심이 생기면 즉시 소박한 통나무 같이 무욕의 도로써 고요를 되찾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그르친 적이 없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가 그렇고, 요한도 이를 증언하고 있다.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라.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요한 10:37-38).” 여기서 예수가 말한 ‘그 일’은 자신으로 말미암는 일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행하는 일’로써 ‘유위’를 떠난 ‘무위’의 도를 행하는 것을 말한다.
본문이 말하는 ‘만물이 장차 저절로 된다(萬物將自化)’는 것이나, ‘천하가 장차 저절로 안정될 것이다(天下將自定)’는 표현은 모두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주장하는 노자의 궁극적 이상을 담은 것이다. 한 국가의 정치적 이상을 표현한 것이라고도 볼 수 있고, 개인의 삶의 차원도 그러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틀즈의 노래 ‘렏잇비(Let it be)’나, 존 레논의 ‘이메진(Imagine)’을 연상케 하기도 하고, 김태곤의 노래 ‘송학사’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무위자연의 세계는 실현 할 수 없는 유토피아만은 아니다. 예수의 말처럼, ‘천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라, 너희 가운데(혹은 너희 마음)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무욕(無慾)을 바탕으로 한다. 이러한 욕망의 제거는 모든 종교가 방식을 달리 할 뿐 한결같이 주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욕망의 제거 곧 유위를 없앤 무위의 삶이야말로 천국에 이르는 첫 계단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노자 <도덕경> 전편인 37장에 대한 설명을 마쳤다. <도덕경> 전체 81장 가운데 상편에 해당하는 것으로 도의 원리와 모습을 잘 설명한다고 하여 <도경>이라고도 한다. 후편은 따라서 실천적 덕목인 <덕경>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37장 가운데 이미 도의 기본적 설명이 잘 되어있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하는 삶이 곧 덕이 될 수 있는 것이다. 21장에서 이미 밝혔듯이, ‘훌륭한 덕의 모습은 오직 도를 따르는 것이라(孔德之容 惟道是從)’고 했던 점에서도 잘 알 수 있다. 도를 알고 따르는 일, 그것만이 인간으로서 자신의 덕목을 충실히 수행하는 일일진대, 그리스도교인들은 욕심 없이(無爲) 도이신 로고스 하나님의 뜻을 잘 따르는 삶을 살아서 ‘스스로 그러한(自然)’ 자정(自定)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 ‘거듭난’ 삶의 원리다. 거듭난 삶(born again) 곧 중생(重生)은 신생(新生)을 의미하지만 신생(神生)이라고도 할 수 있다. 거듭난 삶은 온갖 유위의 인간적 예속을 벗어난 신성(神性)의 삶의 양식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삶을 일러 무위의 삶에 비유 할 수 있다. 이른바 ‘하느님 없이 하느님 앞에’ 살아가는 삶일 것이다. 없는 듯 존재하는 도의 세계만큼이나 없는 듯 계시는 하나님의 섭리에 감복하며 살아갈 뿐이다. 다시 자정(自定)의 세계로 들어 갈 시간이다. 바람이 불 듯, 물이 흐르듯 사는 삶, 일체무애(一切無碍)의 자유로운 삶을 사는 삶, 곧 성령으로 거듭난 자는 다 이와 같을 것이다.
<출처> http://seosan.buddhism.org/
서산대사 : 박산 무이 선사 선경어
공부를 짓되 최초에 생사를 파하려는 마음이 굳세고, 세계와 몸과 마음 이 모두 이 거짓 인연이라, 실다운 주재(主宰)가 없는 줄로 간파(看破)할 지니라. 만약 본래 갖추어진 큰 이치를 밝히지 못하면, 곧 생사심(生死心)을 깨뜨리지 못하고, 생사심을 깨뜨리지 못했을진대 무상살귀(無常殺鬼)가 생각생각 멈추지 않으리니, 도리어 어떻게 물리치겠는가? 이 일념을 가져 문 두드리는 기와 쪽을 삼되, 마치 훨훨 타는 불꽃 가운데 앉아서 나오기를 구하는 것과 같아, 함부로 한 걸음 걸을 수도 없고 한 걸음도 멈출 수도 없으며, 한 생각이라도 딴 생각을 낼 수 없으며 남더러 구원 해 주기 를 바랄 수도 없나니, 이런 때를 당하여서는 자못 사나운 불길도 돌아보지 않으며, 신명을 돌보지 말며, 다른 사람이 구해주기를 바라지 말며, 딴 생각 낼 것도 없으며, 잠시도 멈추지 말며, 앞으로 곧장 나아가되 내달아서 벗어나야만 좋은 수단이니라.
공부를 짓되 귀한 것이 의정(疑情)을 일으키는 데에 있으니, 무엇을 일러 의정이라 하는고? 태어나되 어디서 온 줄을 모를진댄 온 곳을 의심치 않을 수 없고, 죽되 어디로 가는지 모르건댄, 가는 곳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느니라. 생사의 관문을 깨뜨리지 못한 즉, 의정이 몰록 일어나리니, 눈썹 위에 맺어두어 놓을래야 놓을 수 없고, 쫓아도 가지 아니하야 홀연 하루 아침에 의심덩어리를 깨뜨리면, 생사 두 글자가 이 무슨 부질없는 것일까 보냐?
공부해 가는데 제일 두려운 것은 고요한 경계에 탐착하는 것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고적한데 빠져서 느끼지도 알지도 못하게 함이로다. 시끄러운 경계는 대개 사람들이 싫어하고, 고요한 경계는 흔히 사람들이 싫어하지 않는 것이, 진실로 수행하는 사람이 항상 떠드는 장소에 처해 있다가 한 번 고요한 경계를 만나면 엿이나 꿀 먹는 것과 같은지라, 마치 사람이 오랜 피로 끝에 잠자기를 좋아하는 것과 같거니 어찌 스스로 알 수 있으랴.
공부를 짓되 반드시 치우치지 않고 바르게 하고, 굳세고 곧아서 인정을 가까이 하지 말지어다. 진실로 정(情)을 따라 응대하면 공부가 향상하지 못하리라. 다만 공부가 향상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날이 오래고 달이 깊으면 반드시 속된 중의 무리에 휩쓸림이 의심없으리라.
공부를 지어가는 사람은 머리를 들어도 하늘이 보이지 않고 머리를 숙여도 땅이 보이지 않으며, 산을 보아도 산인줄 모르고, 물을 보아도 물인 줄 알지 못하며, 가도 가는 줄 모르고 앉아도 앉은 줄 몰라서 천 사람 만 사람 가운데서도 한 사람도 보지 못하고, 온 몸 안팎이 한 개의 의단(疑團)뿐이니, 의단을 깨뜨리지 못하면 맹세코 마음을 쉬지 말지니라. 이것이 공부에 긴요한 것이 되나니라.
공부 지어 가는데 죽고 살지 못할까 두려워하지 말고, 다만 살고 죽지 못할까 두려워 할지니, 과연 의정으로 더불어 한 곳에 맺어두면, 동(動)하는 경계는 보내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가고, 망령된 마음은 맑히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저절로 맑아지리라. 육근문(六根門)이 저절로 환하게 열려서 손짓하면 곧 오고, 부르면 곧 대답할 것인데 어찌 살지 못할까 걱정하 리오?
공부를 짓되 화두를 들 때에 뚜렷하고 분명히 하되, 마치 고양이가 쥐 잡듯이 할지니, 옛 사람이 말하기를 '이노(○奴)를 베지 못하면 맹세코 쉬지 않으리라.' 하니, 그렇지 않으면 귀신 굴 속에 앉아 흐리멍덩하게 일생을 지내리니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고양이가 쥐 잡을 때 두 눈을 부릅뜨고 네 다리를 딱 버티고, 다만 쥐를 잡아 입에 넣고야 마니, 비록 닭이나 개가 곁에 있더라도 또한 돌아볼 겨를이 없나니, 참선하는 사람도 또한 이와 같아서 오직 분연히 이 이치를 밝힐지니, 비록 팔풍 경계가 앞에 엇갈리더라도 또한 돌아볼 여가가 없나니라. 조금이라도 딴 생각이 있으면 쥐 뿐만 아니라 고양이까지도 달아나 버리리라.
공부를 짓되 옛 사람의 공안에 대하여 헤아려 망령되이 해석을 붙이지 말지니, 비록 낱낱이 알아낸다 할지라도 자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리라. 자못 고인의 한 말씀 한 말씀이 마치 큰 불덩어리 같음을 알지 못하는도다. 가까이 할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거늘, 하물며 그 속에 앉았다 누웠다 하리요? 더구나 그 가운데서 크고 작음을 분별하며 위라 아래라 따진다면, 생명을 잃지 않을 자 거의 없으리라.
공부 지어가는 사람은 문구를 찾아 좇지 말며 말이나 어록을 기억하지 말지니, 아무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공부에 장애가 되어서 진실한 공부가 도리어 망상의 실마리가 되리니, 마음의 자취가 끊어지기를 바란들 어찌 가히 될 수 있으랴.
공부를 지어가되 가장 두려운 것은 비교하여 헤아리는 것이니, 마음을 가져 머뭇거리면 도와 더불어 더욱 멀어지리니, 미륵불이 하생할 때까지 공부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으리라. 만약 의정이 몰록 발한 사람일진댄 마치 철벽이나 은산 속에 들어 앉아서 다만 살길을 찾는 것 같이 할지니, 살길을 찾지 못하면 어찌 편안히 지내 가리오? 다만 이와 같이 지어가서 시절이 오면 저절로 끝장 나리라.
황벽 선사가 이르시되, '진노(塵勞)를 멀리 벗어나는 것이 예사 일이 아니니 승두(繩頭)를 꽉 잡고 한 바탕 지을지어다. 한 차례 추위가 뼈골에 사무치지 않으면 어찌 매화가 코를 찌르는 향기를 얻으리오?' 하니 이 말씀이 가장 친절한지라 만일 이 게송으로 때때로 경책하면 공부가 자연히 향상하리라.
공부를 짓되 가장 요긴한 것은, 이 간절 절(切)자이니 절자가 가장 힘이 있느니라. 간절치 않으면 해태심(懈怠心)이 생기고 해태심이 생기면 방종함에 이르지 아니함이 없으리라. 만약 마음씀이 참으로 간절하면 방일 해태가 무엇을 말미암아 나리요? 마땅히 알라. 절(切)자 한 자는 고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할까 근심할 것이 없으며, 생사를 깨뜨리지 못할까 근심할 것이 없느니라. 간절 절자 한 자는 당장에 선과 악과 무기 (無記 - 선도 악도 아닌 것), 세 가지 성품을 뛰어넘나니, 마음씀이 매우 간절한 즉 선(善)을 생각지 않을 것이요, 마음 씀이 매우 간절한 즉 악을 생각지 않을 것이며, 마음씀이 매우 간절한 즉 무기에도 떨어지지 않나니, 화두가 간절하면 산란심도 없고 화두가 간절하면 혼침(昏沈)도 없나니라. 간절 절자 한 자는 이 가장 친절한 말이니, 마음씀이 간절한즉 틈이 없으며 마(魔)가 침노하지 못하고 마음씀이 간절하야 '있다, 없다' 하는 등 계교하고 헤아림이 나지 아니하면 외도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공부를 짓되 사유하야 시 짓고 게송짓고 문부(文賦)등을 짓는 것을 가장 두려워 할지니, 게송을 지으면 이름하되 시승이요, 문장공부를 한다면 칭하여 문자승이라, 참선과 모두 아무 관계가 없나니라. 무릇 역경계나 순경계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만한 곳을 만나거든 문득 깨닫고 화두를 들어서 경계의 반연을 따라서 끄달리지 말아야 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너무 애쓰지 말라' 하나니 그 말이 사람을 가장 그르치는 것이라, 배우는 자는 살피지 않을 수 없나니라.
공부를 짓되 마음을 가져 깨닫기를 기다리지 말라. 마치 사람이 길을 가매 길에 멈춰 있으면서 집에 이르기를 기다리면 마침내 집에 이르지 못하나니, 다만 모름지기 애써서 깨닫게 할 뿐이오, 깨닫기를 기다릴 것이 아니니라.
공부를 짓되 털끝만치라도 딴생각을 두지 말지니, 가고 멈추고 앉고 누우매 다못 본참화두(本參話頭)만을 들어서 의정을 일으켜 분연히 끝장보기를 요구할 것이니라. 만약 털끝만치라도 딴 생각이 있으면 고인이 말한바 '잡독이 마음에 들어감에 혜명(慧命)을 상한다'하니 배우는 자는 가히 삼가지 않을 수 없나니라. 내가 말한 딴 생각은 비단 세간법만 아니라 마음을 궁구하는 일 외에는 불법 중 온갖 좋은 일이라도 다 딴 생각이라 이름하느니라. 또 어찌 다만 불법 중 일뿐이리오? 심체상(心體上)에 취하거나 버리거나 집착하거나 변화하는 것이 모두 다 딴 생각이니라.
공부를 짓되 지어서 더 마음 쓸 수 없는 곳과 만 길 벼랑이 떨어진 곳과 물이 다하고 산이 다한 곳과 비단 짤 때 날이 다한 곳에 이르면, 마치 늙은 쥐가 쇠뿔 속에 들어간 듯 저절로 끝장 날 것이다.
공부를 짓되 영리심(聆悧心)을 가장 두려워할지니, 영리심은 약기(藥忌)가 되느니라. 터럭만치라도 범하면 비록 참 약이 나타나더라도 능히 구제하지 못하리라. 만약 진정한 참선객일진댄 눈은 소경같고 귀는 귀머거리같으며 생각이 겨우 일어날 때에 마치 은산철벽에 부딪히는 것 같으리니, 이와 같은 즉 공부가 비로소 서로 응하게 되리라.
공부를 짓되 시끄러움을 피하고 고요함을 향하야 눈을 감고 귀신 굴 속에 앉아 살림살이를 하지 말지니, 고인이 말하기를 '악귀가 서식하는 흑산 밑에 앉아 썩은 물에 잠겼다'하니 무슨 일을 이루리오? 다만 경계와 반연 위에서 공부를 지어가야 비로소 이 곳이 힘을 얻는 곳이니라. 한 구절 화두를 몰록 일으켜 눈썹 위에 두고서 다닐 때와 앉을 때와 옷입고 밥 먹을 때와 손님을 맞고 손님을 보내는 속에 다만 이 일구 화두의 낙처(落處)를 밝힐지니, 하루 아침에 세수하다가 콧구멍을 만지듯 원래로 너무 가까웠느니라.
공부를 하되 향상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 말지니, 향상하지 않거든 향상하도록 하면 문득 이 공부니라. 공부가 향상하지 않는다고 문득 물러서는 북을 친다면 비록 백겁천생을 지낸들 그 어찌하리오? 의정이 일어나 놓아 버릴 수 없는 것이 곧 향상하는 길이니 생사 두 글자를 가져 이마 위에 붙여두되 마치 호랑이에게 쫓기는 것같이 할지니, 만약 곧바로 달려 집에 이르지 못하면 반드시 목숨을 잃으리니 어찌 가히 발을 멈추리오?
공부를 짓되, 다만 한 가지 공안에만 마음을 쓸지언정 온갖 공안에 따져 알려고 말지니, 비록 풀이해 알게 된다고 할지라도 마침내 이것이 알음알이요 깨친 것이 아니니라. 법화경에 말씀하시되 '이 법은 생각하고 분별하는 마음으로 능히 알배 아니니라'하시고, 원각경에 말씀하시되 '생각하는 마음으로 여래의 원각 경계를 헤아릴진대 마치 반딧불을 가지고 수미산을 태우려는 것과 같아 마침내 될 수 없는 일이다' 하시고, 동산(洞山)이 말씀하시되'마음과 뜻을 가지고 현묘한 종지를 배우려 할진대 마치 서쪽으로 가려는 사람이 동쪽을 향해 가는 것 같도다'하시니, 무릇 공안을 천착하는 자는 모름지기 가죽밑에 피가 있거든 부끄러운 줄 알아야 옳다.
도(道)는 잠시도 여의지 못할지니,가히 여의면 도(道)가 아니요, 공부는 잠시라도 끊이지 못할지니, 끊이면 공부가 아니니라. 진정 참구하는 사람은 마치 불이 눈썹을 태우는 듯 하며, 또한 머리에 붙은 불끄듯 할지니, 어느 겨를에 딴 일을 위해서 마음을 움직이리오? 옛 어른이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만 사람으로 더불어 싸운다면 마주보고 어찌 눈인들 깜짝임을 용납하리요'하니, 이 말이 공 부지어가는데 가장 요긴한 지라 몰라서는 안 되는니라. 공부를 짓되 아침 저녁으로 감히 스스로 게을리 말지니, 자명(慈明)대사는 밤에 조리면 송곳을 들어 찌르시고 또한 말하시길 '옛 사람은 도를 위하야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으셨거늘, 나는 어떤 사람인고?' 하셨느니라.
공부를 짓되 의근(意根)을 향하야 헤아리고 따지지 말 것이니, 공부로 하여금 한 조각을 이루지 못하게 할 것이며, 의정이 일어날 수 없게 하나니, 사유척도 (思惟尺度) 네 자는 바른 믿음을 막고 바른 행을 막는 것이며, 겸하야 도의 눈을 가리우는 것이니, 공부하는 이는 이것을 마치 원수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공부를 짓되 다른 사람이 설파하여 주기를 구하지 말지니, 만약 설파하여 주더라도 마침내 그것은 남의 것이요, 자기와는 상관이 없나니라. 마치 사람이 장안으로 가는 길을 물으매 다만 그 길만 가리켜 주기를 요구할 지언정 다시 장안의 일은 묻지 말지니, 저 사람이 낱낱이 장안 일을 설명할지라도 종시 그가 본 것이요, 길묻는 사람이 친히 본 것은 아니니라. 만약 힘써 수행하지 않고 남이 구하여 주기를 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공부를 짓되 다만 공안을 염하지 말지니, 염해가고 염해오면 무슨 소용이 있으리오? 염하야 미륵불이 나오실 때까지 이를지라도 또한 소용이 없을 것이니 차라리 아미타불을 염하면 공덕이나 있지 않겠는가? 다만 하여금 염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각기 화두를 거각할지니 '무(無)'자를 한다면 '무(無)'자 상에 나아가 의심을 일으킬 것이요,'백수자(栢樹子)'를 한다면'백수자(栢樹子)'에 나아
가 의심을 일으킬 것이요, '일귀하처(一歸何處)'를 한다면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고?' 하고 의심할지니, 의심이 일어나면 온 시방세계가 있는 줄도 모르며 안팎이 없이 한 몽치가 되어선 하루에 통테가 절로 터지듯 하리니, 선지식을 다시 친견하면 입을 열지 않아도 큰 일을 해 마치리라.
공부를 짓되 잠깐이라도 바른 생각을 잃지 말지니, 만약 참구 하는 한 생각을 잃어 버리면 반드시 이단에 들어가 아득히 돌아오지 못하리라. 어떤 사람이 고요히 앉아 맑고 깨끗한 것만 기뻐해서, 순수하고 맑고 티끌이 끊어진 것으로 불사(佛事)를 삼는다면, 이는 바른 생각을 잃어서 맑은 데에 떨어진 것이라 부르는 것이요, 혹 능히 강설하고 능히 말하고 능히 움직이고 능히 고요할 줄 아는 것을 그릇 앎으로 불사를 삼는다면, 이는 바른 생각을 잃고 식신(識神)을 잘못 안 다 할 것이고, 혹 망령된 마음을 가지고 억지로 눌러 망령된 마음이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으로 불사를 삼으면 이를 불러 바른 생각을 잏은 것이라, 돌로 풀을 눌러 놓은 것과 같은 것이라 또한 파초 잎을 벗겨내는 것과 같은 것이요, 혹 몸이 허공과 같다고 관(觀)하야 생각이 일어나지 않음을 장벽과 같이 하면 이는 바른 생각을 잃은 것이라, 공(空)에 떨어진 외도이며, 넋이 흩어지지 않은 죽은 사람이라 부르는 것이니, 통틀어 말하건대 다 바른 생각을 잃은 때문이니라.
공부를 짓되, 의정이 일어났거든 다시 그 의정을 깨트려야 하나니, 만약 깨트리지 못한 때에는 마땅히 바른 생각을 확실하게 하도 큰 용맹심을 발하야, 간절한 가운데 더 한층 간절을 더해야사 옳다. 경산(經山)스님이 말씀하시되 '대장부가 결단코 이 일대사인연을 궁구하고저 할진대, 첫째로 체면을 차리지 말고 성급히 척추뼈를 똑바로 세워 인정에 따르지 말고, 평소에 자기가 의심해 오던 것을 잡아 이마 위에 붙여놓고 항상 남의 돈 백만 관을 빚진 사람이 빚쟁이에게 추심을 받되 갚을 물건이 없어 남에게 수치와 욕을 입을까 두려워하야, 이보다 더 급한 일이 없으며, 이보다 더 바쁜 일이 없으며, 이보다 더 큰 일이 없는 것같이 하여야사 비로소 공부를 해 나갈 분(分)이 있느니라' 하셨느니라.
TAOISM | The Power of Letting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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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는 언제나 이름이 없으니 후왕이 그것을 잘 지키면 만물이 스스로 교화될 것이다
道恒无名,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첫 구절은 모든 통행본에 "도는 언제나 무위하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되어 있고, 초간문에는 "도는 언제나 무위하다"로 되어 있다. 이미 설명한 것처럼(다음 참조) "도는 무위하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노자』의 매력적인 문장은 적어도 백서 『노자』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2) 통행본의 경우 이 구절은 세 번 나오는데, 통행본 48장에 해당하는 곳의 백서 원문은 갑·을본 모두 지워져서 보이지 않고, 38장에 해당하는 곳은 "억지로 하지 않으며 또 그렇게 하여 무엇을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로 되어 있으며, 여기는 "도는 언제나 이름이 없다"로 되어 있다.
초간문에는 첫 구절이 "도는 언제나 무위하다"로 되어 있는데, 이 뜻이 백서보다 좋다는 견해도 있다(팽호). 하지만 이름이 없다는 것 자체가 이미 무위의 의미를 포함하기 때문에 크게 구별된다고 보기 어렵다.
이미 다른 글(32)에서 이와 유사한 문장이 나왔다. 나머지 해설은 그것을 참고하기 바란다.(다음 참조) 단지 그곳에서는 '교화된다〔化〕'는 말 대신에 '복종한다〔賓〕'는 말을 썼을 뿐이다. 두 말은 의미로 통하는 말이다.
교화되면서도 욕심이 일어나면 나는 이름 없는 통나무로 누를 것이다. 이름 없는 통나무로 누르면 장차 욕심이 없어질 것이니 욕심이 없어져서 고요해지면 천지가 스스로 바르게 된다
化而欲作, 吾將鎭之以无名之樸. 鎭之以无名之樸, 夫將不欲, 不欲以靜, 天地將自正
여기에서 '작(作)'은 일어난다 또는 움직인다는 뜻이다. 이 문장의 해설에는 거의 이설이 없다. 단지 백서의 '욕(欲)'은 원래 '욕(辱)'자이기 때문에 글자 그대로 새겨야 한다는 견해 정도가 있을 뿐이다(허항생). 그렇게 되면 "……장차 욕됨이 없을 것이니 욕됨이 없어져서 고요해지면……"으로 옮길 수 있다.
하지만 「도응훈」을 참고하면 역시 욕심으로 옮겨야 하며, 이 전체 문장이 우민 정책과 관련됨을 알 수 있다. 「도응훈」은 이 문장을 반란에 성공한 뒤 왕조 수성의 계책을 묻는 무왕 질문에 답하는 여상의 생각과 연결하는데, 여상의 복안은 한마디로 우민화이다.
"……왕께서 만약 오랫동안 권력을 잡고 싶으시다면 백성의 입을 막고 그들을 이끌어 쓸데없는 일과 번거로운 가르침에 몰두하도록 하십시오. 저들이 그 소업을 즐거워하고 그 실정을 편안히 여겨 밝게 분변하던 것이 어리숙하게 되거든 이에 군기(軍旗)를 거두고 관을 쓰게 하며, 칼을 풀고 홀(笏)을 가지게 하고, 삼년상을 입게 하여 포악한 사람이 더 이상 많아지지 않도록 하십시오. 소리 높여 겸손과 퇴양을 말하여 백성들이 다투지 않도록 하십시오. 술과 고기로 위안하고, 음악으로 즐겁게 하며, 귀신으로 두렵게 하십시오. 문식을 번거롭게 하고 예를 복잡하게 만들어 사람들의 바탕을 가리고, 후장구상(厚葬久喪)으로 집안이 동나도록 하며, 보화와 좋은 옷으로 재물을 다하도록 하고, 깊이 파고 높이 쌓는 공사를 일으켜 힘을 다하도록 하십시오. 집안이 가난하고 족속이 적으면 반란을 근심하는 자가 적어질 것입니다. 이렇게 풍습을 바꾸면 천하를 간직하고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노자가 말하기를 "교화되면서도 욕심이 일어나면 나는 이름 없는 통나무로 누를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여상의 복안이 흥미로워서 길게 인용했다. 이에 따르면 "이름 없는 통나무로 누른다"는 말은 혹시라도 백성의 욕망이 자라나서 불만이 생길 조짐이 보인다면 무지무욕의 덕을 보임으로써 그런 욕망의 불씨를 잠재운다는 의미다.
욕망의 증진은 현실에 대한 불만을 키우고, 불만이 커지면 반항할 마음도 먹게 되므로 우민화 과정에서 욕망의 억제는 대단히 중요한 장치다. 여기에서 여상은 예의를 복잡하게 하여 백성의 심력을 고갈시키는 동시에 『노자』적 소박성으로 백성을 계몽시킬 것을 제안한다. 이런 이데올로기는 봉건 시대 내내 유효한 것이었으며, 그런 면에서 지금 여상은 대단한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선보이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보기에 이것은 악랄한 지배 장치이지만 그는 아마도 어떤 악의도 의식하지 못한 채 '악랄한 역사'에 영향받아 이런 교묘한 수단을 생각해냈을 것이다.
『사기』는 태공망 여상(강태공)을 이렇게 평가한다.
주나라의 서백(西伯) 창(昌)은 유리를 빠져나와 돌아온 뒤 여상과 함께 음모(陰謀)하여 덕을 닦음으로써 상(은)나라의 정사를 뒤엎으려고 하였다. 그의 일은 병권(兵權)과 기계(奇計)에 장점이 있었다. 그래서 후세에 용병을 말하고 주나라의 음권(陰權)을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태공(여상)을 지목하여 모략에 근본했다고 하였다(「제태공세가」).
주나라의 서백 창은 만고의 성왕 문왕이다.
지금 『노자』의 문장은 얼마든지 다른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아마도 하상공이 기존의 해설을 대변할 것이다. "이름 없는 통나무란 도를 가리킨다. 만물이 그로써 스스로를 화육하는 효과를 보다가 다시 교만함과 거짓을 지으려고 한다면 후왕은 마땅히 몸소 도·덕으로 그것을 눌러야 한다〔鎭〕. 도·덕으로 그것을 억누르면 백성도 욕망을 품지 않을 것이니 그러므로 마땅히 청정함으로 그들을 교도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천하는 스스로 바르고 안정될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하상공의 해설에서도 우민화 정책의 자취는 남아 있다. 이 책이 주장하는 대로 『노자』가 진나라와 관련된 문헌이며 통치의 조언을 담은 제왕학이라고 한다면 이 문장에서도 주요한 시사를 얻을 수 있다.
을본에는 이 문장 뒤에 "도(道). 2,426자"라는 부기가 붙어 있다. 2,426자의 도편을 필사하였다는 말이다. 을본의 경우는 덕편이 3,041자라고 하였으므로 덕편(상편)과 도편(하편)을 합해서 모두 5,467자다.
왕께서 만약 오랫동안 권력을 잡고 싶으시다면
백성의 입을 막고 그들을 이끌어
쓸데없는 일과 번거로운 가르침에
몰두하도록 하십시오
―『회남자』 「도응훈」
[道恒无名, 侯王若能守之, 萬物將自化] (노자(삶의 기술, 늙은이의 노래), 2003. 6. 30., 김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