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동네 시인선〉 053. 정수자의 시편들은 때로 하늘을 향해 청청하게 뻗은 금강송의 골법으로 읽히기도 하고, 또 때로는 세상의 그늘들이 내는 울음을 으늑히 껴안는 범종의 울림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1984년 세종숭모제전국시조백일장을 통해 등단한 이래 한국 현대시조의 장에서 새로운 언어적 이정표를 세워온 시인의 길은, 그 자신이 “너무 이른 사람”으로 평가한 ‘나혜석’의 그것처럼 “선각”의 여정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계에 대한 장엄한 사유와 서정을 탁월한 언어적 질감으로 풀어내고 있는 시인은, 그러나 세상의...
더보기 〈시인동네 시인선〉 053. 정수자의 시편들은 때로 하늘을 향해 청청하게 뻗은 금강송의 골법으로 읽히기도 하고, 또 때로는 세상의 그늘들이 내는 울음을 으늑히 껴안는 범종의 울림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1984년 세종숭모제전국시조백일장을 통해 등단한 이래 한국 현대시조의 장에서 새로운 언어적 이정표를 세워온 시인의 길은, 그 자신이 “너무 이른 사람”으로 평가한 ‘나혜석’의 그것처럼 “선각”의 여정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세계에 대한 장엄한 사유와 서정을 탁월한 언어적 질감으로 풀어내고 있는 시인은, 그러나 세상의 흠결조차 “심오한 전언”으로 간파하고 “받드는” 겸허함의 자리로 자신을 낮춤으로써 더욱 유현함으로 깊어지고 있다. 이러한 시인의 심목(心目)이야말로 시의 언어로써 부박한 이 시대를 건너고 붙드는 근원으로서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출판사 서평]
“붉다”, 그 장엄 슬픔의 시들
시적 언어의 탄생
시적 언어와 일상언어의 가장 큰 차이는 리듬에서 나타난다. 시적 언어는 리듬을 품지만 일상언어는 리듬이 없다. 운문이 갖는 리듬은 언어에 주술성을 불어넣고, 청자들의 감정적 흥분을 일으키며, 일상의 언어를 주문(呪文)의 언어로 바꾼다. 고대의 운문 언어들은 구와 후렴의 반복으로 이루어진 신을 찬양하는 노래, 비술, 기도, 저주, 주문에 뿌리를 둔다. 애초부터 시적 언어는 리듬과 반복을 통해 새로운 힘을 갖게 된 주술의 언어, 몽환의 언어, 비밀과 제의의 언어다. 정수자 시인의 언어 감각은 매우 뛰어나다. 구체적인 시를 통해 살펴보면,
꽃 한 송이 피우는 데 가담한 적 없는데
꽃 진다, 찍는 것도 가소로운 간섭 같아
숙이며 지나치려 하니 발 놓을 데 가뭇없네
아픈 쪽에 가담해온 詩자취도 희미할 때
뒤트는 지렁이들 피해 서던 아래쯤엔
말없이 기는 것들이 흙빛 윤을 돋우려니
가벼운 적선만 같아‘좋아요’ 망설이듯
슬픔도 함부로는 호명치 않으리라
테라도 우웅 울려야 꽃숨 얹는 가담이려니
-「소심한 고백」전문
이 시집의 시들은 정통 시조 율격에 충실하다. 정형시 양식이 요구하는 외재적 율격을 잘 지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픈 것들이 내지르는 고통의 신음에 호응하며 보듬고 패자의 고단한 삶을 품어 안는 넉넉함에서 윤리적 감동을 낳는다. 그 시들 중 어느 하나 빠지지 않고 언어 율격의 엄격함 속에서 빼어난 미학적 성취를 이루고 있다. 정수자의 시는 우리 시조 형식을 넘어서서 한국시 전반으로 영역을 넓혀서 보더라도 드높은 성취로 꼽을 만하다. 「소심한 고백」의 첫 연이 보여주는 절창을 보라! 시조의 정형적 율격 안에서 “꽃 한 송이 피우는 데 가담한 적 없”다는 겸손한 고백에 이어, “꽃 진다, 찍는 것도 가소로운 간섭 같”다는 그윽한 자기 돌아봄, 그리고 “숙이며 지나치려 하니 발 놓을 데 가뭇없네” 같은 관조적 깨달음이 잘 어우러진다. 매인 데 없이 자유롭고 초월적 눈은 삶의 안 보이는 본질을 차분하게 관조한다.
허공을 찢으며 우는 기러기떼 발톱이여
멀건 국물에 뜬 노숙의 눈발들이여
한평생 오금이 저릴 저 강변의 아파트여
-「슬픈 편대」 전문
「슬픈 편대」와 같은 시는, 생의 어느 한 찰나를 묘사하는데, 그 서늘한 아름다움에 놀란다. 이 시의 배경은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이다. 기러기떼가 날고, 눈발이 날린다. 그 속에 강변의 아파트가 서 있다. 무심한 듯 포착한 이 찰나의 풍경이 울림을 주는 것은 이 안에 삶의 기미들이 희미하게 드러난 까닭이다. 기러기떼는 철 따라 살 곳을 찾아 이동하지만, 사람은 강변 아파트라는 붙박이 장소에 매인 존재다. 기러기떼, 눈발, 강변의 아파트 등이 무심히 대비되는 풍경을 이룬다. 이 외부 풍경의 물질성 어디에도 마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시는 마음이 머금은 공동(空同)을 확연하게 드러낸다. 그 공동을 드나드는 것은 삶의 허무다. 그러니까 이 외부 풍경은 시인의 마음이 투사된 풍경인 것이다.
시는 방언으로 터져 솟구치는 것
한 권의 시집에는 창작자의 ‘시론’이 될 만한 시편들이 반드시 들어 있는데, 이 시집에서 ‘시론’을 감당하는 시편은 「시라는,」이라는 작품이다. 시에 대한 오랜 숙고가 깃든 작품이다.
시라는, 끗발 없는 면역 없는 긴 감염에
혼자 울다 혼자 떠는 자위의 긴 병통에
세상의 헌 데를 돌다가
바람의 뒤나 밟다가
손을 거듭 씻어도 깊이 물든 보균으로
방언 마구 터지는 부족처럼 솟구치다
그 결에 발등을 또 찧는
부관참시 관을 짜는
제 설움에 높이 우는 무연고의 곡비인 양
조문의 긴 밤이다 위령의 운명인 양
시라는, 부적도 없는
귀신에 깊이 들린
-「시라는,」 전문
시적 영감이 전두엽에 내리꽂히는 번개라면, 시는 번개를 맞아 토해내는 피의 분출이다. 시는 직관이 번득이는 찰나의 예술이다. 그 찰나에는 노릿한 감상주의가 깃들 여지가 없다. 다른 한편으로 시는 숙고의 예술이다. 체험과 긴 기억을 버무리고 오래 숙성한 끝에 얻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체험의 정수(精髓)여야 하고, 상상력의 마술이어야 한다. 시는 고통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는 단 한 줄도 얻을 수 없다. 시는 고통의 축적을 통해 나아가는 일이다. 시인은 발등을 찧고, 부관참시 관을 짜는 일이라고 한다. 과연 시를 쓰는 일은 “면역 없는 긴 감염”이고, “부적도 없는 귀신에 깊이 들린”것이다. 무섭다. 저 초자연적인 힘에 기대지 않고 시는 나올 수가 없다니! 시는 “깊이 물든 보균으로 방언”같이 터지는 것이고, “무연고의 곡비인 양” 우는 울음이다.
울음과 그늘의 시
왜 시가 울음인가? “울다 깬 새벽이면 다른 생에서 왔나 싶게/서름한 그림자가 창 너머에 우련 섰다”거나 “울다 깬 서름한 날이면 고아인 양 서러웠다”(「서름한 날」)를 보면, 살아 있음에 깃든 본원적 설움 때문이다. 초목, 동물, 사람 등등 생명 가진 것들은 다 아프고 서럽다. 시인은 그 처연함을 온몸으로 받아낸 끝에 “나무야/너도 아프니/온 삭신이/풍장이니/……/크게 한번/울고 가렴”(「그래그래」) 하는 것이다.
속눈썹 좀 떨었으면
세상은 내 편이었을까
울음으로 짝을 안는 귀뚜라미 명기(鳴器)거나 울음으로 국경을 넘은 흉노족의
명적 (鳴鏑)이거나 울음으로 젖을 물린 에밀레종 명동(鳴動)이거나 울음으로 산
을 옮기는 둔황의 그 비단 명사(鳴砂)거나 아으 방짜의 방짜 울음 같은 구음(口
音) 같은 맥놀이만 하염없이 아스라이 그리다가
다 늦어 방향을 수습하네
바람의 행간을 수선하네
-「환향」전문
정수자 시인의 시는 그늘, 응달, 패자, 낙화, 폐사지, 붉음, 슬픔의 시다. 시인은 기우는 것, 속수무책으로 하염없는 것, 싸움에 져서 밀려난 것, 절정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이미 무너져내린 것, 감정의 무거운 나락인 것을 편애하고, 기꺼이 그 편에 선다. 시인이“응달집은 그늘도 응당 깊”은 곳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나 보다. “빈손을 쥐었다 풀었다/그늘을 필사”하며 보낸 어린 시절의 체험 때문에 “그늘 장기수”를 자처하고(「그늘 장기수」), “그늘 본적”을 자랑하는지도 모른다(「그늘 시봉」). 그늘은 빛과 어둠의 중간지대다. 그늘의 세계를 물들이는 것은 낮과 밤, 삶과 죽음 사이에 걸쳐져 있는 어슴푸레함, 달리 말하면 밝은 어둠이거나 어둔 밝음이다. 생명을 “활동하는 무(無)”가 그렇듯이 “밝은 어둠”이란 형용모순이다. 그늘이란 살아 있어서 서러운 생명의 그윽한 색조다. 시인의 그늘은 어둡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광휘”(「그나마다행」)로 둘러싸인 그늘이다.
구름이 자리 펴면 잔등부터 시린 것은
산그늘 천수답의 쓸쓸한 상속 같다
굴뚝께 엄니 언니 눈물
훔쳐보다 물려 입은
살림 밑천 언니는 서울 그늘로 시집가서
변두리 비탈집에 달빛 수를 놓다가
간간이 한숨 소리를 가을비에 부쳤는데
천식으로 홀로 붉던 늦가을도 늦은 밤에
이불 괴고 앉으면 뜨락이 식는 소리
바람이 고시랑고시랑 서리가랑잎 볶는 소리
제사 많은 가난한 집 우둑우둑 서릿발 돋운
밤새랑 시래기랑 찬 그늘에 데었건만
살(煞) 맞듯 허름한 밤이면
새 문장이 덜컹댔다
-「그늘의 상속」 전문
시인은 남보다 그늘을 보는 시력이 뛰어나다. 그늘은 청각적인 것의 시각화 속에서 돌연 보는 것이 듣는 것으로 바뀐다. “폐사지 종그늘”(「폐사지 그늘」)이 그러하고, “만가 속 흰소리 그늘”(「흰소리 그늘」)이 그러하다. 「그늘의 상속」에 따르면, 시인의 가계(家系)는 그늘의 혈통을 잇는다. 삶이“잔등부터 시린” 것은 “산그늘 천수답의 쓸쓸한 상속” 탓이다. 특히 어머니에게서 언니로 이어지는 여성의 삶이 더욱 시리고 아프다. 언니는 “산그늘” 아래에서 뼈가 굵어진 다음 “서울 그늘”로 시집을 간다. 그늘은 가계에 드리워진 뿌리치기 힘든 질긴 운명이다. 그랬기에 서릿발 돋는 시린 밤 “밤새랑 시래기랑 찬 그늘에 데”고, “살(煞) 맞듯 허름한 밤”을 맞는 것이다.
아픈 쪽에 가담해온 시
만해 한용운은 꽃은 떨어지는 향기가 아름답고, 해는 지는 빛이 곱다고 했다. 자취를 감춰 사라지는 것들은 애닯고, 애달픈 만큼 아름답다. 시인의 고백에 의하면 그의 시는 “아픈 쪽에 가담해온 시”(「소심한 고백」)다. 애닯고 아픈 것들이 시를 낳는다. 한편으로 시를 “지극한 울음”이라고 했다. 명기(鳴器), 명적(鳴鏑), 명동(鳴動), 명사(鳴砂)들, “방짜의 방짜 울음 같은 구음(口音)”들이 다 울음과 연관되는 어휘들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울음은 슬픔의 표현이다. 그것은 슬픔이라는 감정이 격해진 상태에서 제어할 수 없는 흥분과 불안, 그리고 비통함을 동반하는 흐느낌이다. 그럴 때 울음은 오열이나 통곡이다. 그러나 양식화한 울음이다. 울음이 자연적인 성격을 벗어나 제의와 미학의 형식을 띠는 것이다. 정수자의 시집에는 나혜석, 일본군 위안부, 당고모, 세월호 재난으로 명을 달리한 이들을 위로하는 제의의 시들을 포함해서 애꿎게 눌리고 찢겨 죽은 자들의 해원을 비는 울음의 시들이 다수 있다.
자분자분 새김질로 저녁이 또 길어진다
과부하가 걸린 듯이 지레 붉은 단풍 사이
밀쳐둔 신간들 앞에 생이 자꾸 더부룩하다
새김질은 어쩌면 슬픔을 수선하는 일
뭉텅 삼켰거나 훌쩍 들이켰거나
파지 속 붉은 신음을 씹다 젓다 별도 찾듯
신트림들 되새기며 점점 길게 저물려니
매일 홀로 넘어도 석양 저리 장엄하듯
시라는 지극한 울음을 비장처럼 길렀으니
-「가을 저녁의 말」 전문
이 시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시쓰기가 신체의 반응에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더부룩하다거나, 삼켰다거나, 들이켰다거나, 신음했다거나, 신트림했다거나 하는 것은 다 신체의 반응들이다. 신체적 실감에 덧대인 시는 관념과 추상을 꿰뚫고 나온다. 그것은 시가 몸으로 살아내는 일과 무의식의 끈으로 연결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항상 좋은 시들은 머리에서 나오지 않고 몸을 돌아나온다. 몸이란 무엇인가? 몸은 삶을 지탱하는 것, 욕망의 누각이다. 벌거벗은 몸이란 그 자체로 벌거벗은 삶이다. 몸 없이는 삶도 있을 수 없다. 이 몸은 결국 덧없이 소멸하는 몸이다. 그런 까닭에 시는 육체의 삶에 깃들이는 “장엄한 슬픔”을 머금을 수 있다.
“붉다”, 그 붉은 마음의 시
잘 먹고 잘 사는 자들은 시의 밥, 시의 희망이 필요 없다. 시를 읽는 것은 대개는 가난하고 아픈 자들이다. 그들만이 밥과 희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수자의 시들은 “지금이 어디예요?”라고 묻는 마음의 시들이다. “지금은 여기인데/어디는 늘 다른 데라”(「지금이 어디예요?」), 즉 지금과 여기가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고 어긋나 있는 탓에 우리는 황망해진다. 우리 삶이 대개는 그러하다. 현실이 그러하니 시인의 마음은 항상 편치 못하다. 시인이 좋아하는 표현에 따르자면, 그 마음은 항상 “붉다”. 그것은 “눈시울이 하냥 붉다”(「붉은 저녁」) 할 때의 그 “붉다”이다. “슬픔으로 장엄한”(「장엄한귀」) “붉다”이고, “붉은 꿈”, “붉은 풍문”(「빨치산을 읽는 밤」) 할 때의 “붉다”이며, 선각의 삶을 살다 날개가 꺾여 피 흘리는 이의 “그 눈이 여직 붉다”(「너무 이른 사람」)할 때의“붉다”이다.
시인의 마음은 개인의 영달을 꾀하는 것, 저 혼자 잘 먹고 잘 살자는 욕심에서 멀다. 시인의 마음은 “밥 먹자/같이 먹자고/온몸으로 종을” 치는 마음, “허공 벼랑에 희망을 파종하”는 마음이다(「어느 별지기에게」). 시인의 마음이 붉은 것은 세상이 고르지 않은 까닭이다. 정수자의 시들이 깊고 그윽한데, 그것은 여실지견(如實知見)에 바탕을 두는 마음,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다”라고 할 수 있는 마음으로 만물을 두루 품고 밀고 나간 시들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 구비치는 마음은 맨 처음의 마음, 한 옛적의 으뜸인 마음, 우주 궁극의 마음이다. 그 마음만이 실제와 이치에 맞게 보고 느끼며, 만물 속에 불성(佛性)이 있음을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