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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어머니 3장 '어린양 혼인잔치'는 세계를 구원하는 등불 2. 하나님이 곧 나를 찾아 오시리라 1 조원모 외할머니는 내가 말을 알아듣기 시작할 무렵부터 변함없이 한가지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너의 아버지이시다." 심지어는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엄마는 유모와 같다, 너를 하나님의 딸로 키울 뿐이다." 2 나는 태어나기 전부터 복중신앙이었던 터라 그 말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며 성장했습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을 들으면 마음이 포근하고 한없이 넓어졌습니다. 3 어머니는 나를 키우면서 세속적인 삶에 물들지 않고 하늘의 뜻을 실현시키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뼈가 녹아나는 것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일편단심 하나님 앞에 절대복종하고 절대순종하는 길을 걸었습니다. 딸이 세상의 유혹을 접하지 않고 순수하게 자라도록 철저히 보호했습니다. 그 정성에 부응하듯 나는 고고한 학처럼 성장해 갔습니다. 4 사춘기가 시작되는 중학생 시기에도 조용히 독서를 하고 공부에만 마음을 쏟았습니다. 나는 종로 사직동에 있는 성정여자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인왕산 남쪽 기슭 햇빛 고른 사직동에 자리한 아담한 학교였습니다. 5 성정여중은 1950년 5월에 개교했지만 불과 한달 만에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휴교를 해야 했습니다. 개교하자마자 민족의 수난을 함께 겪은 것입니다. 전란 후 다시 문을 열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여성 인재를 길러 내야 한다는 사명으로 많은 여성을 교육했습니다. 1981년 은평구로 이전한 뒤 1984년에 '선정여자중학교'로 이름을 바꿨고, 현재는 선정중학교가 되었습니다. 나는 이 학교를 1987년에 인수해 통일그룹 내 선학학원의 한 가족이 되도록 했습니다. 늘 깊은 관심을 갖고 많은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6 나는 중학교에 다닐 때도 말수가 적고 아주 침착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해 성적은 늘 상위권에 들었습니다. 예쁘고 조신한 용모에 얌전하고 정숙해서 항상 선생님들의 사랑과 관심을 받았습니다. 7 나의 학교생활은 별다른 굴곡 없이 오히려 평탄했습니다. 몸이 심하게 아파 1학년 때 한두 번 결석을 한 정도였습니다. 그러고는 2~3학년 연이어 학급 최고 성적으로 우등상을 받았습니다. 밖에서 하는 활동이나 운동보다는 조용한 분위기에서 책을 읽고 음악을 즐겼습니다. 또 하나의 취미는 그림 그리기였습니다. 초등학교에 이어 중학교 때도 미술에 취미와 소질이 있었지만 그림만 그리는 화가가 될 생각은 없었습니다. 8 중학교 3년 내내 학급대의원을 지냈고, 3학년 때는 운영위원장으로 학생 자치활동에 앞장서면서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리더십을 한껏 발휘했습니다. 하루는 전교생이 모인 자리에서 단상에 올라 학생회에서 결정된 사항을 발표했습니다. 차분하면서도 당당한 나의 태도를 보고 선생님들은 입을 모아 칭찬했습니다. "학자가 정말 대단하구나!" "조용하고 얌전할 줄로만 알았는데, 통솔력이 뛰어나네!" 선생님들은 미처 몰랐던 나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따뜻한 관심을 기울여 주었습니다. 9 사춘기가 찾아왔을 때도 삶에 관해 고민하거나 방황하지 않았습니다. 항상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하늘을 모시고 사는 신앙을 심어 주신 덕분이었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엄격하게 신앙생활을 이끌었습니다. 그때는 너무 힘들다거나 고달프다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몇 년이 흐른 후 그것이 언젠가 하늘의 독생녀로서 하늘의 독생자를 만나기 위한 준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0 그런 외적인 신앙 환경과 함께 내적으로는 나 스스로 흔들리지 않는 신앙의 굳건한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나는 많은 독서를 했습니다. ≪성자성녀전(聖者聖女傳)≫을 즐겨 읽었고, 문학작품도 많이 읽었습니다. 특히 펄 벅의 ≪대지≫를 좋아했습니다. 이 작품의 등장인물은 자연과 운명에 맞서 삶을 개척해 나가지만, 인간은 결국 대지로 대변되는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자연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품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내가 고향을 사랑하는 노래를 많이 듣고 고향에 관한 소설을 많이 읽게 된 것도 결국에는 하나님과 함께하고 싶은 간절한 뜻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1 어릴 때부터 나는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알았기에, 내가 읽는 모든 작품은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연결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세속의 거친 환경으로부터 나 자신을 완전히 격리하고 마치 수녀처럼 정결하게 생활했습니다. 나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늘이 인도하는 삶만을 살았습니다. 특히 이 시기에 성경을 많이 읽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역사와 인간의 타락 역사, 그리고 중심인물들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읽으며 수많은 밤을 눈물로 지새웠습니다. 12 하나님은 인간을 당신의 자녀로 사랑하시기 위해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인간으로 인해 고통받고 슬퍼하면서도 다시 당신의 자녀로 품으시며 하나님의 한많은 역사를 읽으며, 가슴이 아파 잠을 이루지 못한 것이 하루이틀이 아니었습니다. 13 그러면서 나는 자연스레 문 총재가 내게 말했던 '희생'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희생할 것인가?' 이 물음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 가고 있었습니다. 14 내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에는 전쟁이 끝난 뒤라서 거리마다 부상자가 넘쳐났습니다. 전쟁고아를 비롯해 수많은 아이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병에 걸려도 제때 치료받는 사람은 드물었습니다. 나는 그들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고 밝은 세상으로 인도하기 위해 중학교를 졸업한 1959년 봄에 성요셉 간호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5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는 삶은 희생과 봉사를 전제하지 않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혹독하게 신앙을 키워 오면서 가슴속에 간직한 꿈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역사를 점철해 나오신 하나님을 해원해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역사의 쇠사슬에서 자유롭게 해드리는 것이었습니다. 16 하나님은 결코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자리에서는 만날 수 없습니다. 자신보다 어렵고 힘든 사람을 위해 묵묵히 일하는 자리에 찾아오십니다. 내가 더욱 낮은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과 한을 되새길 때 그 하나님이 곧 나를 찾아오시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
平和の母 第三章 「小羊の婚宴」は世界を救う灯火 2. 神様がもうすぐ私を訪ねてくださるだろう 祖母の趙元模は、私が言葉を理解し始める頃から、一つの事実を変わることなく教えてくれました。 「神様が、お前の父親である」 さらに、このようなことも言いました。 「お前のお母さんは、乳母と同じた。お前を神様の娘として育てているだけだ」 私は、母のおなかの中にいる時から信仰によって育まれていたので、その言葉を何の抵抗もなく受け入れ、成長しました。「神様」という言葉を聞くと穏やかな気持ちになり、心が限りなく豊かになるようでした。 母は私を育てるに当たって、世俗的な生活に染まらず、天のみ旨を実現させる人物にするために、どんな苦労も意に介しませんでした。骨が溶けるような苦労もいとうことなく、一片丹心、神様に対して絶対服従、絶対従順の道を歩みました。娘が世の中の誘感に触れることなく純粋に育つよう、微底的に保護したのです。 その精誠に応えるように、私は孤高の鶴のごとく、成長していきました。 私はソウルの鐘路区社稷洞にある、聖貞(聖正)女子中学校に入学しました。仁王山の南の麓、日当たりの良い所にある小さなその学校は、一九五〇年五月に開校したものの(開校当時の名称は「漢陽女子商業中学校」)、わずか一ヵ月後、韓国動乱の勃発によって休校を余儀なくされるということがありました。 開校するや否や、民族の受難を共に経験することになったのです。 戦乱後に再び開校したこの学校は、国を強く豊かにするためには女性の人材を育てるべきというミッションを果たして、多くの女性を教育しました。一九八一年に恩平区へ移転した後、一九八四年には「善正女子中学校」に名称を変更し、現在は「善正中学校」となっています。 私はこの学校を一九八七年に引き継いで、統一グループの鮮鶴学園の一校とし、常に深い関心を持って多くの支援を行っています。 私は中学時代も静かで口数の少ない生徒でした。熱心に勉強し、成績は常に上位圏に入っていました。愛らしいと言われた容貌に、慎ましく、素直な性格だったためか、いつも先生たちからかわいがられていました。 私の学校生活は、これといった曲折もなく、むしろ平坦と言えるものでした。一年生の時、体調をひどく崩して数日欠席したことはありますが、二、三年生の時は続けてクラスで最高の成績を取り、優等賞をもらいました。外でする活動や運動よりは、静かな雰囲気の中で本を読み、音楽を楽しむ生徒でした。 もう一つ、絵を描くのも趣味でした。小学校に続き、中学校でも美術の素質があると言われましたが、絵だけを描くような画家になる考えはありませんでした。 また、三年連続で学級委員を務め、三年生の時には運営委員長として生徒会活動の先頭に立ち、自分の中に眠っていたリーダーシップを存分に発揮しました。 ある日、全校生徒が集まる場で壇上に上がり、生徒会で決定した事項を発表することがありました。落ち着き払い、堂々としている私の態度を見て、教師たちは口をそろえて褒めてくれました。 「鶴子は本当にすごいな!」 「静かでおとなしいとばかり思っていたが、リーダーシップも優れている」 教師たちは、それまで知らなかった私の新たな一面を発見し、温かい関心を傾けてくれました。 思春期に入ってからも、人生について悩んだり、迷ったりす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祖母と母が、いつも天に侍って暮らす信仰を育んでくれたおかげでした。特に母は、信仰生活について厳しく教えてくれました。当時、つらいと思ったことがなか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が、数年経って、それがいつか天の独り娘として、天の独り子に出会うための準備だったことが分かりました。 また、外的にはそのような信仰的環境で過ごすとともに、内的には自分自身で、揺れることのない信仰の太い根を張っていました。 この時期の私は多くの本を読みました。『聖者聖女伝』を好んで読み、文学作品にもたくさん触れました。特に好きだったのが、パール・バックの「大地」です。作中の登場人物は運命に立ち向かい、人生を開拓していきますが、結局人間は、「大地」に代弁される自然の懐に帰っ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存在であることを、その作品を通して悟ることができました。 同じように、神様の懐から決して抜け出すことができないのが、人間なのです。私が故郷を愛する歌を聴いたり、故郷に関する小説を読んだりすることが多かったのも、突き詰めれば、神様と共にいたいという切実な思いがあったからです。 幼い頃から、私は神様が自分の父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たので、読んだ作品はみな、自然に神様とつなげて考えることができました。世俗の荒々しい環境から自分自身を完全に隔離して、まるで修道女のように清い生活を送り、自分自身の意思ではなく、天に導かれるままに生きたのです。 特にこの時期、聖書をよく読みました。 神様の創造や人間の堕落、そして中心人物を通して進められてきた神様の救いの歴史を読みながら、涙と共に多くの夜を明かしました。 神様は御自分の子女として愛するために人間を創造されました。しかし、かえってその人間を通して、苦しみと悲しみを味わわれたのです。それにもかかわらず、再び御自分の子女として人間を抱こうとされる神様の恨多き歴史を読みながら、胸が痛み、眠れなかったことが数知れずありました。 その中で私は、文総裁が私に語られた「犠牲」について、自然により深く考えるようになりました。 「私は神様のために何を犠牲にするのか」 この問いかけが、私の人生を根底から変えていきました。 私が高校に進学する頃は、まだ戦争の爪痕があちこちに残っており、通りには負傷者があふれていました。戦争孤児をはじめ、多くの子供たちが飢えと病により、ひどい苦しみを味わいました。 病気にかかっても、すぐに治療を受けられる人はあまりいませんでした。私は彼らの傷と苦痛を癒やし、彼らを明るい世界に導くために、中学を卒業した一九五九年の春、聖ヨセフ看護学校に入学しました。 自分のためではなく、他のために生きる人生というのは、犠牲と奉仕を前提にしない限り考えることすらできません。私は幼い頃から徹底して信仰を育んできましたが、その中で、胸に秘めた夢がありました。それは、人類を救うために歴史を導いてこられた神様の恨を解いてさしあげること、歴史の箍を解いて自由にしてさしあげることでした。 人の上に君臨して安穏とする場では、決して神様に出会うことができません。自分よりも苦しんでいる人のために、黙々と働く場に訪ねてこられるのです。より低い立場に立って、神様のみ意と恨に思いをはせるとき、その神様が訪ねてきてくださることを、私は既に分かっていました。 |
MOTHER of PEACE CHAPTER 3. THE MARRIAGE SUPPER OF THE LAMB 2. God is my Father From the time I could understand words, my maternal grandmother, Jo Won-mo, consistently taught me one thing: 'God is your Father.” She went so far as to say, “Your mother is like your nanny who is raising you as God's daughter.” Since I had been surrounded by an atmosphere of faith even while in my mother's womb, I accepted this without a second thought. When I heard the word “God,' my heart would open unreservedly and fill with warmth. My mother did not mind investing herself completely for the purpose of raising me to reject secular life and follow God's way. She lived with single-minded devotion in absolute unity with and obedience to God. After joining the Unification Church, our family moved to Seoul, where she worked even harder to protect me from the world's temptations. As a result of her dedication, God allowed me to see myself as a noble crane. Even as an adolescent in middle school, I poured my heart into quiet reading and study. I attended the Seongjung Girls Middle School, located in Sajik-dong of Seoul's Jongno district. Situated at the southern foot of Mount Inwang, it was a small school that seemed always bathed in sunlight. From the moment of its founding, that school shared in the suffering of the Korean people. It was established in May 1950, but had to close less than a month later due to the Korean War. After the war, its doors reopened and, true to its mission, the school prepared many girls to become talented women who would help build a prosperous country. In 1981, the school moved to the Eunpyeong district of Seoul, and in 1984, the spelling of its name was changed to Sunjung Girls' Middle School. Our Tongil Group acquired this school in 1987 and brought it into the Sunhak Academy family. I have continued to give it support and attention. In middle school I spoke little and developed a calm personality. I studied hard and always ranked at the top of my class. I was pretty and modest and, as I was also quiet and well-behaved, I received love and attention from my teachers. My school life was uneventful; I only remember that I missed a day or two of school in the first year when I became quite sick. In my second and third years, I received an award for earning the highest grades in my class. I preferred to read in a quiet spot and listen to music rather than engage in social life or sports. My hobby was drawing. I enjoyed art and had some talent, but 'set aside the possibility of becoming a professional artist. For all three years of middle school I was the class representative on the student council, and in the third year I was the head of the student steering committee. I led many student activities, and this awakened my leadership abilities. One day when the entire school was gathered, I went to the podium and announced the decisions of the student council. The teachers complimented me on my poise and confident attitude. After witnessing this side of me, which they had not seen before, the teachers commented, “Hak Ja seems gifted ...I thought she was just quiet and docile, but actually she shows good leadership skills.” During adolescence, I didn't worry about my life or losing my way. I credit this to my grandmother and mother instilling in me a deep faith in God and the habit of living in attendance to Him. My mother, in particular, strictly guided my life of faith. Yes, there were times when I thought it difficult and wearisome, but I am grateful now, for it prepared me to blossom as the only begotten Daughter of God who one day would meet the only begotten Son of God. Within that atmosphere, I grew roots of unshakable faith. I read a lot. I enjoyed reading tales of the saints, and particularly The Good Earth, by Pearl S. Buck. The characters in that book struggle against nature and fate. The story helped me realize that ultimately we must return to nature's embrace, represented in this book by the earth. It is human nature to cling to God's embrace. I earnestly wish to be together with God, and for that reason I devoured songs and novels about the love of one's hometown. I knew from a young age that God was my Father, and naturally connected everything I read to God. I cut off entirely from the harsh secular world and lived a chaste life as if I were a nun. I was aware that a higher power was guiding me, that my path had been prepared in Heaven. I also read the Bible. I cried myself to sleep many nights after reading about God's history of creation, the tragic Fall, and God's work of salvation carried out through historical figures who took responsibility at the behest of Heaven. I learned how they sacrificed themselves, and realized that God created us so He could love us as His children. After reading God's bitter history and His desire to embrace us, even though we give Him only pain and sadness, it was not just once or twice that I lay awake, unable to sleep, my heart aching for Him. I naturally continued to ponder ever more deeply what Father Moon had said to me about sacrifice. The question, 'What can I sacrifice for God?” was shaping my life. Without sacrifice and service, one cannot even begin to think one is living for the sake of others rather than for oneself. As I strictly cultivated my faith from a young age, I cherished a dream deep within my heart. That dream was to liberate my Heavenly Father who, throughout history, gave Himself for the salvation of humanity. I wished to free Him from the chains of our fallen history. We cannot meet God from a position of reigning over others. He finds us when we are silently working for the sake of those in greater difficulty than ourselves. I came to know that when we think about God's will from the lower position, God's bitterness washes away and He will come to us. During the postwar years, the streets were full of the wounded. Numerous children, including war orphans, were suffering from hunger and disease. Few people were able to get timely treatment when they became sick. I wanted to heal people's injuries, relieve their pain, and guide them to a brighter world. As it was time for me to enter high school, in the spring of 1959 I entered St. Joseph's Nursing School. |
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