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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의 산문, 두 갈래의 강물
- 죽음과 사랑의 인식, 자유와 저항의 여정 -
권대근
문학박사, 동리목월문학대학 교수
한국문협 평생교육원 수필창작과 교수
"모든 살아있는 문화는 본질적으로 불온한 것이고, 그 이유로서,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문화의 본질이 꿈을 추구하는 것이고 불가능을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불온성에 대한 비과학적인 억측> 김수영
I. 열며
김수영은 새로운 감수성의 시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밀도 높은 사유와 날카로운 현실 감각을 지닌 ‘불온성’의 산문가다. 그의 산문은 ‘덮개기억’에 의해 쓴 산문보다 ‘아하-경험’에 의해 쓴 산문이 많아 너무나 솔직하다는 특징을 갖는다. 이영준 교수가 엮은 전집 산문편에는 일상과 현실에 대한 글, 창작과 사회의 자유에 대한 글, 시평, 그리고 일기와 편지 및 미완성 형태의 소설과 번역 목록이 담겨 있는데, 분석대상은 전집의 1부, 2부 수필류의 글 59편의 산문과 24편의 시평에 한정됨을 밝힌다. 특히 시인이 한국전쟁 중에 북으로 끌려가고 거기서 탈출한 뒤 포로수용소에 수감된 사정을 설명하는 <내가 겪은 포로 생활>과 <나는 이렇게 석방되었다> 등의 산문은 공백으로 남아 있던 포로수용소 시절에 대한 의문을 풀어 줄 자료다. 전쟁 직후의 초기 산문이 상당량 발굴된 것은 김수영의 의식세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조문찬이 ‘그의 시와 산문 한 줄 한 줄은 읽는 이를 벌떡 일어나게 한다.’고 썼을 정도로 한국문학의 대표적 자유와 저항 시인 김수영은 한국문학의 대표 시인으로 꼽히는 사람 중 한 명으로, ‘모더니스트’적 측면과 ‘민중시학’적 측면에서 많이 언급되는 인물이다. 그러나 김수영 산문의 울림은 ‘모더니즘’과 ‘민중시학’의 측면보다 ‘죽음과 사랑’, ‘자유와 저항’이란 두 물줄기 속에서 잡힌다. 이러한 지향성 위에 서정적 자아가 아닌 역사적 자아로 쓴 그의 산문, 김수영다운 산문을 중심으로 텍스트를 해체하여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서 김수영의 ‘불온성’에 대해 재조명하고, 그의 시대적 분노가 어떤 연유로 분출하였는지를 생각해보는 과정을 거친다면, 김수영 산문의 정체를 쉽게 만나게 될 것이다.
I. 펼치며
1. 김수영의 삶과 문학
1921년 11월 27일 서울 종로구 관철동 158번지, 그러니까 정확히 현재 파고다어학원이 있는 자리에서 태어났다. 1935~1941년 선린상업학교에 재학했다. 성적이 우수했고 특히 주산과 미술에 재질을 보였다. 이후 동경 성북예비학교에 다니며 연극을 공부했다. 1943년 조선 학병 징집을 피해 일본에서 귀국했으며 심영 등과 연극을 했다. 1946년 연극에서 문학으로 전향, 《예술부락》이라는 잡지에 시 「묘정의 노래」를 발표했다. 1946~1948년 연희전문 영문과에 편입했으며 졸업은 하지 않았다. 1949년 김경린 박인환 등과의 친교로 시론과 시를 엮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출간하였고 김병욱, 박인환, 김경희, 임호권 등과 [신시론] 동인 활동을 했다. 1950년 그의 나이 서른에 김현경과 결혼하고, 같은 해 한국 전쟁이 일어난다. 북한군에게 의용군으로 끌려가고, 북한군 대오가 혼란한 틈을 타 이탈해 도망치던 김수영은 다시 북한군에 잡혀 총살 직전까지 가게 된다.
1950년 한국 전쟁 발발. 북한군 후퇴 시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북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을 하다 탈출했으나 서울로 돌아온 김수영은 다시 국군으로부터 반공 포로로 낙인 찍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힌다. 1952년 석방된 김수영은 아내 김현경이 자신의 고교 동창과 살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북한 의용군과 반공 포로로서 거제도 포로수용소 생활을 견딘 김수영에게 운명은 너무도 가혹했던 것이다. 김수영은 그로부터 2년 뒤 김현경과 재결합한다. 1953년 석방 이후 미8군 수송관의 통역관, 선린상업학교 영어 교사, 평화신문사 문화부 차장 등의 일을 하다 1955년 6월 이후 번역과 양계를 하면서 본격적인 전업 작가의 길을 걷는다. 김수영에게는 우리의 근대사가 고스란히 각인되어 있으며, 그는 그 복판에서 사유하고 시를 썼다. 김수영은 자신의 삶을 방치하지 않았다. 역사적 사건을 통과하면서 부단히 자신의 삶을 재구성함과 동시에 현실의 변화를 꾀했다.
1959년, 1948~1959년 사이에 발표했던 시를 모아 첫 시집이자 생전에 발간한 유일한 시집 『달나라의 장난』(춘조사) 을 출간했다. 1960년 4·19 혁명 발발. 이후 현실과 정치를 직시하는 적극적인 태도로 시, 시론, 시평 등을 잡지와 신문 등에 발표하며 왕성한 집필 활동을 보였다. 그는 식민지-해방-한국전쟁-거제도 포로수용소 시절-신식민주의(미국을 중심으로 남한이 재편되는 시기)의 시대-자유당 정권-4․19혁명-민주당 정권-5․16혁명-군사정권이라는 급변하는 한국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뚫고나왔다. 1968년 6월 15일 밤 11시 30분 경 귀갓길에 집 근처에서 인도로 돌진해 온 버스에 치여 머리를 다쳤다.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시대를 온몸으로 갈아내며 피를 뿜듯 시를 뱉어내던 48년의 삶이 끝났다.
2. 죽음과 사랑에 대한 준열한 인식
지식인의 글쓰기 전통과 맥을 환기시켜주는 생생한 산문은 김수영 죽음과 사랑에 대한 인식을 파악할 수 있는 곳이다. 독특한 개성과 거친 배설의 김수영 산문이 보여준 중요한 미덕 중 하나는 죽음의식을 규명하는 데 도움을 준다는 것이다. 삶에 대한 비극적 확산과 극복은 김수영 산문을 관통하는 첫 번째 갈래의 길다란 강물이라 하겠다. 인간사 중에서 가장 절실한 관심사는 사랑과 죽음이다. 대부분의 문학이 추구하는 문학적 주제는 ‘사랑’과 ‘죽음’이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전자는 살아있는 상태에서 삶의 온기를 가늠할 수 있는 확실하고도 유일한 방법이고, 후자는 누구에게나 어떠한 형태든 다가올 수밖에 없는 필수적인 코스다. 탄생과 사랑, 죽음과 소멸은 이렇게 극명한 대조를 이루며 인간사에 공존하는 것이다.
어쨌든 인간의 죽음이란 최대의 난제이며,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한다. 또한 죽음을 이긴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김수영은 무엇 때문에 죽음의 문제에 민감했을까. 현대문학은 죽음의 고찰에서 비롯되었으며 현 세기의 문학 세대를 식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가 바로 죽음의 사실에 반응하는 그 방법 여하에 달려 있다고 한 루이스의 지적을 평자는 이쯤에서 상기해 본다. 지올로우스키는 현대문학의 차원에서 죽음이 현저해진 요인은 바로 사회적인 붕괴의 시대에 있어서 가장 격렬해진다고 보고 있다. 말하자면 전통적인 가치가 붕괴되면서 신념의 갈등과 마주치게 되면 죽음의 의식은 개개의 인간 정신에 불안하게 다가오게 된다는 것이다.
김수영은 죽음을 문학의 끊임없는 탐구 대상으로 삼은 시인 중 하나이다. 김수영은 죽음을 극복하기 원한다면 죽음에 대립할 것이 아니라 죽음을 삶의 일부분으로 끌어들여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대립하는 방식으로서의 보편적인 죽음은 인간의 삶에서 생명을 빼앗아가는 것이며, 삶을 억압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더불어 작가 스스로 죽음을 실천할 때, 죽음은 자신의 죽음이 되며, 삶에 생명력을 부여하게 되는 원동력이 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인식은 그의 글쓰기의 자세와도 밀접하게 관련된다.
죽음과 사랑의 문제는 말할 필요도 없이 만인의 만유의 문제이며, 만인의 궁극의 문제이며, 모든 문학과 시의 드러나 있는 소재인 동시에 숨어있는 소재로 깔려 있는 영원한 문제이며, 따라서 무한히 매력있는 문제이다. ‘사람은 죽을 곳을 알아야 한다’고 하지만 이 말은 시에도 통한다. 어떻게 잘 죽느냐— 이것을 알고 있는 시인을 ‘깨어 있는’ 시인이라고 부르고, 이것을 완수한 작품을 ‘영원히 남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우리들은 항용 말한다.
- <죽음과 사랑의 대극은 시의 본수> 중에서 -
김수영의 언명처럼, 죽음과 사랑은 문학의 2대 주제다. 이 삶이 끝나면 어찌 되는가에 지대한 관심이 있으나 인생에서의 죽음이 특수한 관계성이므로 시원한 답변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 그는 이 지점을 놓치지 않은 것이다. 언젠가는 떠나야 한다는 사실, 그 시간이 눈앞에서 전개된다는 것은 김수영에게 많은 것을 말해 주었을 것이다. 이 글이 1967년 발표된 걸로 보아서, 김수영의 죽음에 대한 인식이 드러난 것은 60년대 중반부터라고 하겠다. <김수영의 연인>이란 글에 의하면, 김수영은 책상 달력에 ‘상왕사심(常往死心)’이라는 좌우명을 써놓았다고 한다. ‘늘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라’는 뜻이 아닌가.
나는 참다 못해서 탄식을 하고 가슴이 아프다는 핑계로 다시 입원을 하여 거제리 병원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다. 내가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임 간호원이 비 오는 날 오후에 브라우닝 대위를 데리고 왔다. 나는 울었다. 그들도 울었다. 남겨 놓고 간 동지들은 모조리 적색 포로들에게 학살을 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아주 병이 들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 <내가 겪은 포로 생활> 중에서 -
김수영은 이곳 포로 생활을 이 글에서, ‘도무지 살 것 같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너무 서러워서 뼈를 어이는 설움이란 이런 것일까’하는 독백을 하며,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한다. 김수영은 한국전쟁 때 의용군으로 붙들려 이태원 육군형무소에서 인천포로수용소, 부산서전병원, 거제리 제14야전병원을 거쳐, 거제포로수용소에서 극심한 고통을 경험했다. 그나마, ‘거제리 제14야전병원은 고향 같은 곳이었다.’고 고백해 놓은 것으로 볼 때, 포로 생활의 고통을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겠다. 탈출에 탈출을 거듭한 끝에 서울까지 왔으나 다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되고 만다. 이 와중에 두 동생은 행방불명됐다. 김수영에게 전쟁을 통한 죽음의 공포는 창작의 원천이 아니었을까.
김수영 산문의 바탕에도 죽음의식이 내재해 있다. 그는 거제리수용소에서 3년이란 세월을 지내다가 수용소 안에서 인민재판이 벌어지는 광경을 목도하고 탈출을 감행하는 것을 보면, 죽음을 감내하면서 더 나은 곳을 향한 의지가 매우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김수영 산문에 나타난 죽음의식은 긍정적인 것이며 이는 김수영 문학에 대한 특질을 더욱 생생하게 해주는 계기가 된다고 하겠다. 또한 그가 경험하고 있는 죽음은 자신 스스로가 이미 체험하고 있거나 경험으로 승화된 세계로 파악된다. 특히 성서를 읽으며 포로 생활의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설움을 달랬던 것으로 볼 때, 그는 죽음을 탈각하는 경지에 들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평소부터 죽음에는 동요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 같이 생각했는데, 건방진 생각이었다. 이석 형이 죽고 그 후 기관지염으로 몸이 성치 않아서 기침을 자주 하고 있으려니까 나도 그를 따라가는 것 같은 생각이 들고 아직도 죽음에 대한 수양이 모자라는구나 하는 절실한 부끄러움 경험을 했다.
- <김이석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
김수영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죽음에 대한 수양이 모자라구나’하는 데서 확연히 드러난다. ‘수양’이라는 어휘 속에서 구체화되는 그의 죽음에 대한 인식, 지인이 죽고 본인이 아파보기 전과 후 기준으로 달라졌다고 볼 수 있는 준거를 이 작품은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고 하겠다. 김수영 스스로도 ‘평소부터 죽음에는 동요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같이 생각했는데‘라고 언급한 바, 그가 얼마나 죽음에 대해 무던했는가를 알 수 있다. 상황의 변화, 즉 ’병‘과 ’사‘는 이때 시인에게 불안한 정서를 불러일으킨다. 그의 ’울음‘은 죽음을 향한 설움의 표상이며 고독과 분노의 정서를 환기하는 중요한 매개가 된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침묵’은, 그에게 심연이 같은 타인의 죽음과도 해후하는 경험을 제공했을 것이다.
낙타산은 나와는 인연이 두터운 곳이다. 낙타산 밑에서 사귄 소녀가 있었다. 나는 그 소녀를 따라서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에 동경으로 갔었다. 내가 동경으로 가서 얼마 아니 되어 그 여자는 서울로 돌아왔고, 내가 오랜 방황을 끝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그는 미국으로 가버렸다. 지금 그 여자는 미국 태평양 연안의 어느 대도심서 결혼생활을 하고 있으며, 영원히 이곳에 돌아오지 않겠다는 편지가 그의 오빠에게로 왔다 한다. 나와 그 여자의 오빠와는 죽마지우다.
- <낙타과음> 중에서 -
최하림의 김수영 평전에 의하면, 김수영이 일본으로 간 것은, ‘유학’ 때문만이 아니라 그가 처음으로 열렬히 사랑했던 고인숙을 따라간 면이 클 것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그렇게 생각한 이는 노모라는 것이다. ‘아들의 마음과 성미를 잘 아는 노모는 경성제대나 연희전문, 보성전문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고 하기보다는 그의 가슴을 뜨겁게 태웠던 그의 사랑이 그를 충동하고 유인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인용문 ‘그 여자의 오빠’는 당시 이화여대 화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김수영은 고광호 교수에게 찾아와 누이를 만나게 해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첫사랑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고인숙에 대한 김수영의 감정은 유별났던 것 같다. 위 산문에도 첫사랑을 생각하는 애틋함이 절제되어 나타나 있다. 특히 ‘이곳에는 돌아오지 않겠다’는 구절 속에는 그녀의 비장한 감정이 농축되어져 나온다.
III. 자유와 저항의 한결같은 여정
김수영은 대표적인 시 <풀> 때문에 참여시인, 저항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김수영에게 그런 면모가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그보다 더 넓은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김수영이 ‘불온성’으로 대결했던 것은 당대의 정치상황 자체만이 아니라 한국이 처했던 사회역사적 상황 전체, 그리고 문화 전체였다고 할 수 있다. <자유란 생명과 더불어>, <창작 자유의 조건>, <자유의 회복>,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인 자유> 등의 산문을 통해 ‘자유’를 외치던 시인의 거친 숨결을 느낄 수도 있다. 거침없이 세상에 향해 침을 뱉어 내던 용기 가득한, 자유인 김수영의 삶의 흔적은 산문에서도 뜨겁다. <제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없는가>에서, 정의와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고 인류의 운명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두는, 이 시대의 지성을 갖춘 사람을 ‘시인다운 시인’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데서 그의 ‘불온성’은 정치적인 것이 아니고 문화의 본질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창작의 자유는 백 퍼센트의 언론 자유가 없이는 도저히 되지 않는다. 창작에 있어서는 1퍼센테이지가 결한 언론자유는 언론자유가 없다는 말과 마찬가지다. 이 정권하에서는 8할의 창작의 자유가 있었지만 장 정권 하에서는 9할의 자유가 있었으니 얼마나 나아졌느냐고 말하고 싶은 국회의원이 있을 성싶다. 아니 국회의원뿐 아니라 필자 자신 역시 그러한 망상과 유혹에 빠지기 쉬운 요즘이다.
- <창작 자유의 조건> 중에서 -
김수영 평전을 쓴 최하림은 “로벨 옷센에게는 콩코르드 광장과 같은 넓이와 부피와 시간의 자유가 있었다. 그런 자유 속에서 놀고 사랑할 수 있었다면, 그랬다면 김수영은 그렇게 술을 마시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싸우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런 광장을 가지지 못한 그의 자유는 그리하여 마침내 마르다 못해 꺾어지고 쓰러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꺾어지고 쓰러짐으로써 그는 땅 깊이 뿌리를 내려 자유의 나무로 자랄 수 있게 되었으며, 그 싱싱한 잎과 공기와 점액질을 우리에게 줄 수 있게 되었다. 그 죽음과 재생은 <풀>과 같은 소리로 우리에게 은밀히 속삭이고 있다.”고 하면서, 김수영의 자유는 인간의 가장 높은 본성과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완전하게 주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는 해석도 덧붙인다.
1960년대 대표적인 저항작가로 평가되고 있는 김수영에게 보이는 가장 두드러지는 의식은 ‘진정한 나’가 되고자 하는 의지였다. 이는 김수영의 삶을 지배하는 원리일 뿐 아니라 문학을 지배하는 힘이다. <무제>에서 그는 끊임없는 자기성찰로 자신과 세계를 바라봤다. 그러나 이 반성적 태도는 이상과 생활의 거리만을 일깨워준다. 침묵하는 지식인을 거칠게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 역시 침묵했다. 그래서 그는 지성인으로서 소극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현실에 괴로워했다. 자기성찰에서 오는 설움은 그럴 듯한 다른 말로 포장하기에 앞서 산문에서도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내가 겪은 포로생활>에서 전쟁 경험으로 인해, ‘생각하면 모두가 무서운 일이요, 꿈결같이 허무하고도 설운일 뿐이었다’고 했고, <낙타과음>에는 ‘설움의 물결이 이 동물의 가슴을 휘감아 돌 때 암흑에 가까운 낙타산의 원경이 황금빛을 띠고 번쩍거리네. 나는 확실히 미치지 않은 미친 사람일세그려.’라는 표현이 있다.
외형적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운 문장으로 쓴 이 산문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시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 몸으로 하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 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들어라 양키들아>, <책형대에 걸린 시> 등의 산문은 우리나라 문학과 시에 대한 흐름을 말해주고 일제 강점기가 남긴 후유증이 깊게 남아 있다는 것과 4.19 혁명을 고비로 부정부패와 관료들, 급속도로 발전한 산업화 속에서 시인들의 무지각과 타성, 약하고 허약한 고질적인 매너리즘을 비판했다. 그는 ‘4,26 후 나의 성품이 사뭇 고약해져 가는 것을 알면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말하면서 시대적 윤리는 시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유를 억압하고 있는 것들을 향해 “살아있는 눈 위에 기침을 하고, 가래를 뱉자”고 표현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 그는 저항의 시인정신을 견고히 했다. 머리에서 미리 걸러내지 말고, 심장이 뛰는 것만 고르지 말며, 그저 온몸이 가리키고 있는 그대로를 솔직하게 즉, 생명이면 생명. 분노면 분노, 냉정이면 냉정. 죽음이면 죽음. 그대로를 글자로 써내려가자고 말한다. 또한, 시가 뱉는 침은 현실사회의 상호연관성이라는 힘이 뚜렷하게 존재해야 함을 주장한다. 따라서 현실도피를 하는 당시의 초현실주의 시인들에게 상당한 반감을 드러낸다. 그리고 한국의 냉전 상황의 현실, 군부독재의 현실을 무시하고 세계문학의 조류에 휩쓸려 엉뚱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데 펜대를 기울이는 지식인들에게도 같은 공격을 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의 뉴 프런티어>에서 일관되게 ‘진정한 시인이란 선천적인 혁명가’라 명명했다.
시인은 평소에 품고 있던 현대시에 대한 소신과 우리 시대에 불만은 일체의 허영과 가식을 걷어내고 선후배, 지인의 시를 적나라하게 해부하고 비판하면서 인간과 사회, 정치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면서 자신의 소시민적 나약함이나 상처를 숨기지 않고 적나라하게 솔직하고 정직하게 털어냈다. 시의 다양성이나 변화, 실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그것은 어디지까지나 환영해야 할 일이라면서 그러한 실험이 동요나 방황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면서 그러기 위해서는 신념이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문인들이 정치와 유기체처럼 얽히고 얽혀도 정치에 나대기보다 또는 독재권력으로부터 탄압받을지라도 자신의 감정을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음은 김수영 시인의 위대성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냉전이 종식되지 않은 시대 상황임에도 그는 당당하게 자유를 요구한다. 김수영의 생존 시기가 단순하게 식민지와 한국전쟁, 그리고 전쟁의 폐허와 4·19혁명이라는 한국 근대사의 흐름과 겹쳐서만도 아니다. 김수영은 문학사가 아니라 근대사와 쟁투했다. 국민의 기본권을 짓밟고 유린한 비민주적이며, 반민주적인 사건들을 보면서 김수영은 안정과 휴식을 취한 자신의 서강생활을 자책하면서 괴로워했다. 자신을 넘어서려는 의지와 절망,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얻었던 환희와 비애가 뒤범벅되었기에 그의 시의 난해성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김수영이 리얼리스트였음은 김수영의 산문에 의해서도 밑받침된다. 김수영의 시는 그의 삶과 산문을 함께 읽어야 훨씬 더 그 의미가 명료해짐을 독자들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유종호의 “우리 시대의 가장 서슴없고 가장 치열한 양심의 극(劇)”이란 표현처럼, 날카롭고 비판적인 작가정신은 그의 전 산문에서 그대로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시인이 타계한 지 44년이 지났으나 지금의 시각에서 읽어도 손색이 없다. <내실에 감금된 애욕의 탄식>은 ‘여성의 욕망과 그 한국적 비극’이란 어깨제목을 달고 있다. 시인은 ‘남자가 여자보다 무엇이 나은 게 있느냐’고 반문하면서도 ‘내 주위에 있는 여자들은 모두가 돈의 귀신’이라고 비꼰다. 직설적이며 타협하거나 비켜 가지 않는 ‘직선의 산문가’다운 표현이다. 수영의 시가 어디서 나왔는지 알려주는 단초가 된다. '세계의 그 어느 사람보다도 비참한 사람'이 됐던 포로수용소 시절을 풀어내는 시인의 필력은 강하디 강하다. 저항 시인으로 알려진 시인의 이면을 보여주는 작품도 꽤 있어 책 읽는 재미가 책의 두께를 잊게 한다.
솔직함은 김수영 산문의 최고 미덕이다. 또한, 면봉이나 낙타산이나 구두와 같은 사물이 작동하는 과정을 관찰하며, 이 사물이 현실과 만났을 때 느껴지는 괴리감을 표현하는 점도 인상적이었다. 그의 관심사는 다양하고 무한하지만 이 세계에 대한 한없는 애정과, 그의 정직함, 성실함은 찬사를 받을 만하다. 인간의 자유를 확장시키려는 격투의 흔적, 위대하기 위해서 세상 누구보다 비참한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이 김수영을 규정하는 양극의 사상이다. 그리고 그 양극의 사상이 작품 속에서 긴장감 있는 균형을 이룬다. 김수영은 거짓말을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거기에서 자신의 비리와 자신에 대한 비판 역시 그대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엄청난 용기와 자기 투신의 결기 또한 볼 수 있다.
또, 김수영은 <자유란 생명과 더불어>에서 ‘이번 3,15 선거 전후에 하는 꼴들이란 하다못해 시를 쓴다는 사람들까지도 권력의 편에 가담하여 명리에 급급하고 있으니 무섭기만 하다.’며 개탄한다. 김수영에게 꼴불견은 비단 저항성이 부족한 시인들이나 일그러진 세태뿐만이 아니 아니다. 그는 사이비교육자들의 횡포와 착취에 대한 당국의 방임에도 정조준을 가했다. 김수영은 침묵하는 지식인들에게 ‘오늘이라도 늦지 않으니, 썩은 자들이여, 함석헌 씨의 잡지의 글이라도 한 번 읽어보고 얼굴이 뜨거워지지 않는가 시험해 보아라.’라고 썼다. 그리고 <로타리 꽃의 노이로제>라는 산문에서, S신문의 창간 기념호에 실린 ‘한 나라의 번영은 부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유에 있다.’란 표어를 기억하고 있다고 적었다. ‘자유’와 ‘저항’의 가치에 대한 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은 이뿐만 아니라 산문의 곳곳에 별처럼 빛난다.
IIII. 닫으며
김수영은 가장 위대한 현대작가다. 김수영(1921-1968)은 시뿐만 아니라 산문에도 능했기 때문이다. 번역가는 그 증거다. 그의 산문은 김수영의 수필, 시사 에세이, 문학론과 시론, 시작노트·편지·일기·시월평 등에다 미완성 소설에 이르기까지 가장 뛰어난 한국 현대시인이 남긴 산문을 망라한다. 김수영은 1960년 성탄절 일기에서 “암만해도 나의 작품과 나의 산문은 퍽 낡은 것같이 밖에 생각이 안 든다” 했으나, 그렇지 않다. 지금도 산문은 불꽃같고, 그의 참여적인 지성은 횃불같다. 무엇보다도 빛나는 것은 솔직함이다. 그의 삶이 그대로 묻어나는 산문은 숨기거나 감추려고 하는 대목이 전혀 없다. 산문을 쓰면서 적용할 수 있는 ‘덮개기억’을 전혀 활용하지 않았다. 김수영의 산문에는 지식인의 실존적 고뇌가 잘 그려져 있지만, 이들 산문을 수필로 보기는 어렵다. 제재를 통해 주제를 겨냥하는 수필시학적 방법을 구사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김수영 자신도 이런 글들을 수필이라고 명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수영 산문이 지니는 최대의 미덕은 ‘불온성’이다. 문학의 위대함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 그것은 단연 문학이 작가의 시선과 유리되지 않고 사회를 그대로 비추고, 우리 삶을 억압하는 기제로부터의 저항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다. 어떤 작품이, 어떤 문학가가 훌륭한가라는 질문에 무엇보다 그 작품이 저항정신을 담고 있는지, 그 문학가가 단독자로서 또는 소수자로서 문학을 주변부 타자의 담론으로 여기고 세상을 비판적 지성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김수영을 두고, 그야말로 불온한 좌파문단의 김수영 띄우기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그 적절성 여부는 제쳐두고, 여기서는 문학일반론으로 작품과 그의 삶을 봤다는 것을 밝혀둔다. 김수영의 글을 읽게 되면, 누구나 그의 시뿐만 아니라 산문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그와 그의 삶에 대해 애정과 존경의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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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동아대) 명예철학박사(대신대학원대)
88년 월간 <동양문학> 등단,
<경북신문>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및 수필 부문 당선
2000 중국연변대 초청 수필특강(중국 연변)
2016 국제PEN한국본부 토론토지부 초청 문학특강(캐나다 토론토)
2016 미주 중앙일보 주최 문학특강(미국 달라스)
2018 해외한국문학학술강연 (영국 런던)
2018 미주 중앙일보 주최 문학특강(미국 달라스)
2019 한국문협 인니지부 초청 특강(인도네시아 자카르타)
2021 미주 LA한국문인협회 초청 문학특강
한국문학세계화위원회 위원장
현) 대신대학원대학교 문학언어치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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