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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빈치,천사와 악마를 품었던 천재
예술가들은 권세 있고 부유한 궁정의 지원을 받아 일을 했다. 다빈치 역시 마찬가지로 후원자들을 찾아 여러 곳을 다녀야 했다. 궁정의 지원을 받는다는 것은 단지 월급을 받는다는 게 아니라 사회적으로 인정받아 수준 높은 창작의 기회를 얻는 것을 뜻한다. 피렌체에서 이미 국제적 명성을 얻은 다빈치를 초빙한 곳은 이웃 밀라노였다.
당시 밀라노는 강력한 스포르차 가문의 지배하에 있었다. 당시 지배자는 루도비코 일 모로(Ludovico il Moro) 공작이었는데, 이때 ‘모로’란 무어인이라는 뜻으로 그의 피부색이 까맣기 때문에 붙은 별칭이다. 사실 밀라노 공작들은 군인 출신으로 그야말로 자기 힘으로 권력의 최정상까지 올라가서 도시국가를 지배하게 된 인물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과 자기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는 예술 업적에 목마른 상태여서 훌륭한 예술가들을 기꺼이 후원할 태세가 되어 있었다. <최후의 만찬>을 주문한 사람이 바로 ‘모로’였다. 그렇지만 이왕이면 그림을 잘 그릴 뿐 아니라 다방면에 재능이 풍부하여 쓰임새 많은 인물이라면 더더욱 환영할 일이었다. 다빈치야말로 이런 유형의 인사로 적격이었으리라.
1482년경 다빈치는 루도비코 일 모로에게 자신의 재능을 밝힌 이력서를 보냈다. 내가 이러이러한 일들을 잘하니 이 몸을 써보심이 어떠하신지요 하는 내용의 문서다. 천재 화가가 보낸 이력서니 주로 빛나는 예술적 능력을 자랑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놀랍게도 그렇지 않다. 그는 잘할 수 있는 일 열 가지를 제시했는데, 그중 아홉 가지가 성벽 파괴, 운반용 대포, 장갑차, 박격포, 투석기, 폭약, 전투용 사다리 제작 등 군사 기술이었다. 당시 인재에 대한 수요는 이런 식이었다. 즉 군사 기술자가 가장 우대받았다.
다빈치의 이력서에서 예술 이야기는 마지막 열 번째 항에 가서야 나온다.
“평화 시에는 공공건물이나 개인 건물의 설계와 건축, 물 관리를 할 수 있습니다. 또 대리석, 청동, 점토를 사용해서 조각상을 제작할 수 있고, 그림이라면 누구 못지않게 잘 그릴 수 있습니다.”
<모나리자>를 그린 이 화가는 제일 마지막에 가서야 ‘제가 그림도 조금 그립니다’ 하고 덧붙인 것이다. 거기에 조각상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괜한 이야기가 아니다. 후원자가 바라는 게 뭔지 잘 파악하고 그것을 해드리겠다고 해야 일자리를 잡는 데 유리하다. 스포르차가는 군사적 위용을 자랑하고 싶어 할 테니 장대한 동상을 만들어주면 좋아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당신의 부친과 당신 가문인 스포르차가에 영원한 명예로 남을 청동 기마상을 제작하겠다”는 편지를 따로 보냈다.
이렇게 해서 밀라노로 간 다빈치는 실제로 거대한 청동 기마상을 만드느라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였다. 게다가 약속대로 성채, 건축, 수리사업, 수문 등의 계획안도 만들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실 그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고 특히 수금(오늘날 바이올린의 조상에 해당하는 악기) 연주가 수준급이어서 1482년 밀라노 궁정에 처음 모습을 보일 때는 음악인으로 소개되었다. 그는 악기 개량도 하고 작곡도 했다. 다만 작곡 작품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암굴의 성모>. 루브르에 원본이 있고, 약간 다른 모사품이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다빈치야말로 만능인(homo universalis)의 전형이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회화 작품들은 이런 다양한 일들을 하면서 동시에 이루어낸 성과다. 밀라노 시기에 <암굴의 성모>를 그렸고, 무엇보다 1495년부터 <최후의 만찬>을 그렸다.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체 성당에 들어가 이 그림을 처음 본 순간의 그 소름 끼치는 감동은 잊을 수 없다. 사실 우리는 대개 이 그림을 책에 실린 조그마한 삽화로만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가로 8.8미터, 세로 4.6미터의 거대한 벽화를 보는 순간 오리지널이 가진 힘이 쓰나미처럼 밀려온다.
그러나 아무리 만능인이라 하더라도 화학 분야에서는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아 안료를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그는 새로운 안료를 실험했는데, 이것은 천천히 작업할 수 있고 여러 번 덧칠도 가능한 장점이 있었지만 대신 탈색이 심하게 일어나서 지금은 남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크게 훼손된 상태다. 심오한 통찰의 조각들 : 다빈치의 노트
우리에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암만해도 화가로 각인될 수밖에 없다. 그가 남긴 회화 작품들이 워낙 압도적으로 훌륭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실상 그의 내면세계는 ‘단순히 화가’라고 하기에는 훨씬 크고 심오하다. 그에게 예술과 과학, 철학과 기술은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다빈치의 내면세계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는 그의 노트가 있다. 그는 늘 노트를 들고 다니다가 중요한 정보들이 보일 때 바로 적어두었다. 심오한 통찰의 조각들도 여기에 다 모아놓았다. 이 내용 중 일부는 완성된 작품으로 발전했을 수 있으나, 대부분은 미완성 상태 그대로 남아 있다. 그러니까 노트는 미완성 작품을 위한 임시 텍스트 모음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인문주의자들은 ‘미완성’을 창조적 천재성의 특징으로 파악했다(게으름의 상징이 아니라는 데에 주의!). 언제 어떤 영감이 튀어나올지 모른다. 각 분야들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들이 솟아나오니 그런 것들을 일단 붙잡아두어야 한다. 실제 그의 노트를 보면 건축, 공학, 물리, 광학, 지질학(특히 물에 대한 것), 해부, 회화 등 실로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다.
또 한 가지 이 천재의 작업이 가진 특징은 변화무쌍하고 불규칙하다는 데 있다. 그림을 그릴 때도 한 이틀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미친 듯 일하고는, 그 후 며칠 동안은 손을 놓고 명상을 하다가 다른 작업에 손을 대는 식이다. 천재는 꼭 의무에 얽매일 필요가 없으니 창의적 게으름을 누리며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한없이 느리게 일하는 것이다. 이런 건 천재 분에게는 좋은 일이지만 주문하고 기다리는 파트론 입장에서는 애가 타고 진이 빠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끔 이런 문제로 송사를 겪기도 했다.
그는 종이를 자르고 실로 묶어 직접 노트를 만들었다. 노트의 크기는 다양하다.
16절지(sedicèsimo) 9~10×6~7cm
8절지(octavo) 14×10cm
4절지(quatro) 20~23×14~16cm
대형 29~31×22cm
그는 피렌체의 공방 시절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 노트를 작성해 갔다. 글과 그림 둘 다 사용했는데, 글은 길지 않은 짧은 메모가 많고, 때로 여백에 작은 그림을 그려 보충했다.
특이한 것은 그의 글씨체다. 거울에 비친 것처럼 뒤집어 쓴 글씨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썼다. 이런 방식은 그가 창안한 것도 아니고 또 굳이 내용을 숨기려는 의도도 아니다. 누구든 거울에 비춰보면 제대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 단순한 습관일 가능성이 크다(왼손잡이가 독학으로 글씨쓰기를 배우는 경우 이렇게 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다만 제대로 문서를 써야 할 때는 반듯하게 글씨를 잘 썼다.
그의 노트는 현재 29종에 1만3,000쪽 정도가 남아 있는데, 이는 실제 그가 쓴 것의 절반 정도에 해당하는 양이다. 죽을 때 제자 프란체스코 멜치에게 노트를 모두 넘겨서 관리하도록 했지만 결국 유럽 전역으로 팔려나가거나 약탈당해 일부만 밀라노에 남아 있다. 1796년 나폴레옹이 파리로 가져간 양만 해도 상당히 많다. 그러니 세계 각지에 흩어진 원고 중 일부가 어디에선가 다시 발견될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 팔의 해부학 연구를 기록한 노트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있다. 1967년 2월, 스페인 문학 전문가 피커스(Jules Piccus) 박사가 마드리드 국립도서관에서 중세 발라드 원고를 찾고 있었다. 그런데 사서가 실수로 그가 신청한 자료 대신 다른 자료를 갖다 주었다. 모로코 가죽으로 장정된 두 권의 노트북을 살펴보던 피커스는 이것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노트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마드리드 코덱스(madrid codex)라 불리는 이 자료는 가장 극적으로 되찾은 사례에 속한다.
이 자료에서 특히 흥미로운 내용 중 하나는 다빈치가 소장했던 도서의 목록이다. 우리는 이런 기록을 통해 그가 아리스토텔레스, 플리니우스, 알베르티, 오비디우스, 단테 등의 책을 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다방면의 천재이자 만능 엔터테이너
그는 자신을 ‘문맹(homo sanza littere)’이라 불렀는데, 이는 라틴어를 읽지 못한다는 의미다. 어린 시절에 학교에 다니지 않고 바로 공방에 들어갔으니 라틴어를 배울 기회가 없었다. 그렇다고 그가 이 점에 대해 자괴감을 가진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자연’에서 직접 배운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라틴어 대신 속어인 이탈리아어를 사용한 결과, 기존의 권위에 얽매이지 않고 타고난 천재성을 자연스럽게 발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그림을 보면 자연을 아주 세밀하게 관찰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그 역시 뒤늦게 40세에 라틴어 공부를 시작했다. 노트 중에는 라틴어 단어 공부를 한 흔적도 찾을 수 있다.
다빈치의 노트를 보면 그가 얼마나 깊고도 창의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수많은 우화, 익살, 명구, 해학, 수수께끼 등이 적혀 있다. 또 하늘은 왜 파랄까, 새는 어떻게 날까, 지평선에 지는 해는 왜 커 보일까 등 어린아이 같은 질문들을 계속 던지고 있다. 이런 천진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실로 중요한 능력이다. 이런 내용들은 그가 행하던 작업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인다. 그는 당장의 작업, 눈앞의 사실 외에 다른 측면들을 깊이 탐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많은 발명품들은 실제 사용 가능한 것들이 있지만, 연극 무대장치였을 가능성도 크다.
그러나 당대의 군주들이 그의 내면의 심오한 천재성을 알아본 건 아니다. 그들이 원한 건 대개 연극적인 엔터테인먼트였다. 악기의 현을 동시에 여러 개 연주하는 기계, 연극 무대장치, 화려한 의상, 특히 특수효과를 내는 신기한 발명품으로 즐거움을 선사하면 가장 좋아했다.
이런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한 때는 1490년 1월 13일 이사벨라 데스테와 잔 갈레아초의 결혼식이다. 그는 궁정 축제의 총감독으로 엄청난 창의성을 동원하여 온갖 특수효과들을 다 보여주었다. 당시 참석한 인사가 ‘지상낙원(il paradiso)’이라 부를 정도였다. 당시 사람들이 원한 건 이런 종류였다.
오늘날 다빈치의 발명품 중 많은 것들은 실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단지 무대장치였다는 사실도 많이 밝혀졌다. 예컨대 그가 창안한 자동차 설계를 연구해본 결과 실제 그런 장치로는 길거리에 나서서 움직일 수는 없고, 단지 연극 무대에서 몇 미터 움직이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는 분명 다방면의 천재였지만 당시 직업상의 수요에 따라 행한 것들도 많다.
‘수학의 천국’으로 들어가는 열쇠
1490년대 후반부터는 그의 내면세계나 실제 세계 모두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다. 특히 1496년이 중요한 해이다. 이때 수학자 루카 파치올리(Luca Pacioli)를 만나서 ‘수학의 천국’의 열쇠를 얻었던 것이다. 경험과 기하가 만났다. 다빈치는 비율과 숫자에 열정적으로 매달렸다.
1496년 밀라노에서 만날 때 두 사람은 이미 유명 인사였다. 다빈치는 수학에 관심은 있으나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몰라 공부를 못 하던 차에 그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 듯하다. 루카는 신이 이 세상에 수학적 논리를 심었을 것으로 믿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황금비율을 연구하거나 피타고라스의 수비학(數秘學) 내용을 재검토했으며, 이와 비슷한 것으로 신플라톤주의 철학을 공부했다(피치노와 피코 델라 미란돌라 같은 학자들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다빈치는 그렇게까지 경도되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다만 세계의 이성과 미에 신의 표시가 들어 있다고 믿는 정도였다.
그는 잎과 가지의 비율 같은 것을 관찰하며 수학적 논리에 감탄했다. 더 나아가서 ‘모든 것이 수학’이라는 생각에 빠졌다. ‘비트루비우스’의 사례에서 보듯 인체나 동물의 몸의 비율 같은 것을 살펴보았다. 더 나아가서 회오리 같은 복잡한 현상도 이면에 수학적 논리가 작용한다고 보았다. ◀비트루비우스(Vitruvian man). 완벽한 인체 비례에 대한 연구
회오리치는 건 그의 내면만이 아니었다. 세상이 요동치고 있었다. 1498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침공해 와서 이탈리아 상황이 급변했다. 다빈치의 후원자였던 스포르차가의 루도비코 일 모로가 밀라노에서 축출되었다. 후일 일 모로는 재기를 노렸지만 결국 프랑스군에 체포되어 프랑스로 끌려가서 감금 상태로 8년을 살다가 반미치광이로 생을 마쳤다.
프랑스군이 밀라노를 점령했을 당시 다빈치가 스포르차가를 위해 준비해 오던 기마상의 찰흙 조각이 파괴되었다. 청동상을 만들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찰흙 모형을 만들었는데 예술적 취향 같은 건 한 점도 없는 군인들이 볼 때 커다란 진흙 말은 사격이나 활쏘기 연습용 표적으로 딱 제격이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대작의 꿈은 가스코뉴 궁수들의 활쏘기 시합으로 무너졌다. 만일 원래 계획대로 실현되었다면 우리는 밀라노 광장에서 엄청난 기마상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후일 이 일과 관련해서 미켈란젤로와 얽힌 일화가 있다. 미켈란젤로는 말과 행동이 거칠었다. 자기보다 훨씬 나이 많은 선배인 다빈치를 노골적으로 공격하여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곤 했는데, 어느 날인가는 밀라노에서 기마상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바보 같은 밀라노인들이 당신 말을 진짜 믿었나요?” 하는 모욕적인 말을 날렸다. 혈기 왕성하고 성질 급한 미켈란젤로가 그런 말을 할 때면 점잖고 소박한 다빈치는 그냥 참고 넘어갔다.
시대의 충실한 자식
격변의 시대에 그의 삶의 속도도 빨라졌다. 밀라노에서 후원자를 잃은 그는 그림과 노트를 가지고 각 도시들을 돌아다니며 다시 자신을 세일즈해야 했다. 1500년에 베네치아에 가서 성채를 만들어준다고 제안했으나 실패했다. 피렌체를 거쳐서 만토바의 곤자가 가문과 접촉했다가 1501년에는 로마로 갔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시대의 인물들과 만나게 된다. 마키아벨리와 체사레 보르자(Cesare Borgia)가 그들이다. 체사레 보르자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이며, 마키아벨리가 칭송해 마지않던 탁월한 정치가·군인이다. 여기에서 잠깐! 교황의 아들이라니? 그렇다. 이 시대는 혼란과 혼돈의 시대다.
알렉산데르 6세는 방탕한 르네상스 교황으로 손꼽히는 인물로, 여러 정부에게서 많은 아이를 낳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 아이들 가운데 루크레치아는 역사상 최고 수준의 요부로 알려졌고(빅토르 위고가 지나치게 각색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오빠 체사레 보르자는 살인과 폭행 등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희대의 악당이었다.
체사레는 군사를 동원하여 우르비노를 점령했는데, 위협을 느낀 피렌체는 외교 사절을 보내 그와 타협을 시도했다. 이때 파견된 인물 중 한 명이 마키아벨리였다. 그는 체사레를 직접 만난 후 그를 지략과 과단성을 갖춘 탁월한 인물로 판단한 듯하다. ▶체사레 보르자
이즈음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마키아벨리가 다빈치를 체사레에게 소개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빈치는 이 악당을 따라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군사 문제에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 시대의 파괴와 폭력을 직접 경험한 것이다.
1502년 마키아벨리가 평화협정 체결을 위해 다시 출장을 왔을 때는 이몰라(Imola)라는 곳에서 다빈치, 마키아벨리, 체사레 등 세계사적 인물 세 명이 함께 회동한 적도 있다. 이런 걸 보면 다빈치는 세상일과 무관하게 산 천재가 아니라 시대의 충실한 자식이었다는 점을 새삼 알 수 있다.
그러나 체사레는 곧 운이 다하여 이탈리아 내에서 군사적 실패를 겪은 후 스페인으로 가서 용병으로 전투를 벌이다가 약 3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곧이어 마키아벨리도 몰락했다. 이제 다빈치로서는 도와줄 인물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의 생애는 이탈리아 내 소국들 수준에서 이어졌다. 이제 그는 이탈리아를 벗어나 더 큰 무대로 나아가려 한 것 같다. 놀랍게도 그는 오스만튀르크로 갈 생각까지 한 것 같다. 1952년 이스탄불의 톱카피(Topkapi) 기록보관소에서 희한한 문서가 발견되었다. ‘리오나르도(Lionardo)’라는 이탈리아인이 오스만제국의 술탄 바예지드 2세에게 보낸 서신으로, 1503년 7월에 작성한 원본 편지는 사라졌지만, 터키어로 번역된 문서는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 내용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짓겠다는 것이다. ‘스탐불(Stamboul)과 갈라타(Galata)를 연결하는 다리를 건설하되 아주 높게 만들어 선박이 돛을 편 채로도 다리 밑으로 지나갈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계획이다. 만일 이것이 실현되었다면 약 370미터 길이로,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교량이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