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고전문학 「거제기녀(巨濟妓女) 가향(可香)」 “어찌 잊으랴”> 해암(海巖) 고영화(高永和)
조선후기 시조(時調) 「거제기녀(巨濟妓女) '가향(可香)'」은 거제기녀(巨濟妓女) '가향(可香)'을 생각하며 지은 평시조이다. 거제기녀 가향(可香)을 진흙탕에서 핀 연꽃에다 비유하며 ”어찌 너를 잊겠느냐“고 하면서, 떠나보내며 가향을 위로하는 정형시이다. 이별에 앞서,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편안하게 공감할 수 있도록 그려내었다.
“더러운 흙에 피어난 깨끗한 꽃은 연꽃 밖에 뉘 있으랴. 거제도에서 네가 태어날 줄은 나는 일찍이 몰랐노라. 지금의 떠나는 정이야 어찌 끝이 있으랴.”며 노래했다.
이 시조에 등장하는 연꽃은 예부터 진흙 속에서 환하게 피어오르는 꽃 중의 군자(花之君子)라고 하였다. 일찍이 송나라 주돈이(周敦頤)의 애련설(愛蓮說)에서 “더러운 진흙에서 나와도 때 묻지 않고(出淤泥而不染), 맑은 물결에 씻겨도 요염하지 않다(濯淸漣而不妖)”라고 하여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시조 「거제기녀(巨濟妓女) 가향(可香)」의 저자는 19세기 중후반 활동한 가객(歌客) 주옹(周翁) 안민영(安玟英 1816~1885)이다. 이 글은 안민영(安玟英)이 시조 180수를 수록하여 1881년에 간행된 시조집 『금옥총부(金玉叢部)』에 수록되어 있다. 또한 그는 가곡 연출자로서, 또는 교수자의 입장에서 기녀와의 염정(艶情)을 노래한 작품을 통해서 그의 풍류 가객으로서의 면모를 보여 준다. 하지만 다소 문맥의 흐름이 매끄럽지 못하고 또한 오니(汚泥), 하추(遐陬) 등의 한자어가 잘못 표기된 것으로 미루어 뛰어난 문장가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안민영은 19세기 중후반에 당대 최고의 전문적인 풍류 문화 연출자이자, 가객이었다.
이 작품은 정황상, 1877년 12월에 대왕대비 칠순을 기리는 대규모의 진연(進宴)이 끝난 후에, 동원되었던 지방의 관기(官妓)를 돌려보내며 읊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전하는 말에, 가향은 가무보다 얼굴이 아주 예뻤다하며, 이 당시 거제 관기(官妓) 가향의 나이는 18세였다고 전한다.
◉ 아시다시피, 시조는 고려후기에서 조선전기에 걸쳐 정제된 우리나라 고유의 정형시이다. 3장 45자 내외로 4음보로 구성(단형시조)되며, 유학자들의 정신과 정서를 표출하기에 적합한 형식이다. 시조의 종류에는 평시조, 연시조, 사설시조 등이 있다. 그리고 종장 제1구를 제외한 어느 구절이나 하나만 길어진 것을 중형시조(中型時調) 또는 엇시조(旕時調)라 부르고, 두 구절 이상이 길어진 것을 장형시조(長型時調) 또는 사설시조(辭說時調)라고 부른다. 시조에는 종장의 첫음절이 항상 3음절이고 다음 두 번째 음보는 5글자 이상의 엄격한 형식이 적용된다.
◉ 저자 안민영은 당대 최고의 풍류 문화 연출자이자, 시조문학의 한 획을 그은 가객이었다. 그는 전국에서 차출된 기녀들을 가르치고 기녀들의 재능을 살려 창곡의 변주를 최대한 실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작품에다 사람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담아냈는데 그 대상이 모두 기녀라는 사실은 흥미로운 일이다. 시조 「거제기녀(巨濟妓女) 가향(可香)」 또한 그러한 차원에서 창작되었다. 이전의 평시조에서 주변적 테마(theme)에 머물러있던 ‘애정’, ‘그리움’, ‘성적 욕구’와 같은 개체적 욕구 혹은 정감들이 대폭 수용되었다는 것은 그의 예술 세계가 갖는 커다란 미덕이다. 기녀가 시조에서 중심인물로, 특히 애정의 대상으로 나타나는 일은 시조문학사에서 희소한 현상이다.
◉ [차출 기녀 가향(可香)과 가객 안민영(安玟英 1816~1885)]
조선의 궁궐에서 대규모의 진연(進宴, 궁중 잔치)이 있게 되면 매번 조선의 전통 종합공연을 개최했다. 이때마다 지방관아에서 가무를 담당할 기녀들을 차출하여 올렸다. 기녀들을 차출하는 일은 지방관아의 몫이었고, 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장악원(掌樂院)의 몫이었다. 그래서 가곡의 연창과 관련해서는 당대 일류가객들과 지방관아에서 선상(選上)한 기녀들이 참여하였다. 그러나 장악원에는 가곡 전문가를 두지 않았으므로 부득이 수준 높은 가객들을 초빙하여 직접 실연을 맡기거나 기녀들에게 가곡을 전수하고 행사를 맡을 연출자가 필요했다. 당시 당대 최고의 가객 안민영은 자신의 예술 세계를 이해 해주는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과 그의 맏아들인 우석상공 이재면의 후원 아래, 당대 최고의 가곡창을 주도적으로 열어나갈 수 있었다. 이에 따라 19세기 중후반 가곡 행사부터, 효율적인 궁중 행사를 위해 연출자로서 안민영이 이 임무를 담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장악원(掌樂院) 대신에 안민영이 지방을 순회하면서 뛰어난 능력의 기녀를 차출하기 시작했다. 고로 거제기녀 가향(可香)을 비롯한 행사에 동원된 기녀들은 대부분 각 지방관아에 소속된 관기(官妓)이었고, 안민영이 이들과 만나는 계기도 관 주도로 이루어졌다. 안민영이 이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던 데에는 그가 당대 최고의 연출 기획자였기 때문인데, 그의 그룹에 소속되면 중앙의 집권층이 벌이는 연회에 나아가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주로 그 기녀가 가무(歌舞), 가금(歌琴), 음률(音律) 따위에 어느 정도의 능력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안민영이 기녀들의 외모보다 재예(才藝)에 주목하였다. 이에 따라 안민영과 기녀들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는 어디까지나 예술 활동이었고, 사사로운 정이 아니었다.
또한 이하응의 후원으로, 안민영이 전국적으로 여러 감영을 순방하면서 기녀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안민영이 거쳐 간 감영(監營)을 『금옥총부』에서 찾아보면, 평양․해주․강릉․완주․전주․남원․담양․순창․함양․진양․거제․통영․대구․밀양․동래 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안민영의 발길이 전라와 경상의 여러 지역을 중심으로 원거리까지 두루 다녔다. 이 당시 전라도를 거쳐 경남의 함양․진양․거제․통영을 거쳐 가다가 거제도에서 거제 기녀 가향(可香)을 뽑은 것으로 판단된다.
● 다음 시조 「거제기녀(巨濟妓女) '가향(可香)'」은 평시조로, 초장 3•5 / 4•4, 중장 3•4 / 4•4, 종장 3•6 / 4•3, 총 47자로 구성되어 있다. 이 시조는 거제기녀(巨濟妓女) '가향(可香)'과의 이별을 아쉬워하며 지은 글이다. 먼 변방 거제도에서 피어난 천연한 연꽃같이 아리따운 가향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이별하지만, 영원히 잊지 않겠다고 읊었다.
*「거제기녀(巨濟妓女) 가향(可香)」* / 안민영(安玟英 1816~1885)
“오니(汚尼)예 천연(天然)한 꼿치 연(蓮)꼿 밧긔 뉘 잇느냐.
하추(遐추)예 네 날 쥴을 나는 일즉 몰낫노라.
지금의 떠나는 정(情)이야 엇지 그지 잇스리.“
[주1] 오니(汚尼) : 한자어 오니(汚泥)의 잘못된 표기.
[주2] 하추(遐陬) :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여기서는 거제도를 일컬음.
◉ [저자 주옹(周翁) 안민영(安玟英 1816~1885) 약력]
안민영은 조선 후기, 스승 박효관과 함께 『가곡원류』를 편찬한 가객이다. 19세기 중후반 활동한 가객으로 신분은 중인(中人)으로 알려져 있다. 서얼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박효관에게서 창을 배웠다. 흥선대원군에게서 구포동인(口圃東人)이라는 호를 받았으며. 1876년 시조의 위상을 결정지은 박효관 안민영의 『가곡원류(歌曲源流)』, 1881년에 간행된 『금옥총부(金玉叢部)』, 1873년 『승평곡』 등을 저술하였다. 시조로는 안민영의 「매화사(梅花詞)」가 알려져 있으며, 삼남(三南) 및 황해도, 강원도 등을 다니며 지은 시조가 전한다. 동배의 가객으로는 홍진원(洪鎭源)이 있다. 간혹 『금옥총부』에 수록된 작품 가운데 기녀를 상찬하거나 그리워하는 시조들에 보이는 낭만적 성향과 심미적 지향을 근대시의 맹아로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