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漢詩)
작매부(斫梅賦)
(매화나무를 잘라내는 노래)
세지향지군자世之馨香之君子
시무사호지하법時務蛇虎之苛法
참이도어복웅慘已到於伏雌
정우혹어동고政又酷於童羖
민포일우반民飽一盂飯
관참연이제노官饞涎而齎怒
민난일구의民暖一裘衣
사양비이각육吏攘臂耳剝肉
사여향엄표지혼使余香掩野殍之魂
화점유민지골花點流民之骨
상심지차영론초췌傷心知此 寧論憔悴
내하전부무지견욕부근奈何田夫無知見辱斧斤
풍산월고수초단혼風酸月苦誰招斷魂
황금번사사기도黃金子蘩吏肆其饕
증과배징동조편타增顆倍徵動遭鞭埵
처원주호아제야수妻怨晝護兒啼夜守
자개매숭시위우물玆皆梅祟是爲尤物
남산유저분산유력南山有樗北山有櫟
관불지관사불지학官不之管吏不之虐
메반불여기사전벌梅反不如豈辭剪伐
<어무적(魚無迹) >
세상에 향기 내는 좋은 지도자 없고
지금 뱀과 호랑이 같은 잔인한 법에만 힘쓴다.
참혹함은 이미 숨어 사는 꿩에게 이르고
정치는 뿔 없는 양들에게 더욱 참혹하다.
백성이 한 사발 밥에 배부르면
관리는 군침을 흘리며 분노를 일으킨다.
백성이 한 번 솜옷으로 따뜻하면
아전은 팔을 걷어붙이고 살을 벗긴다.
나의 향기는 들판에 굶어 죽은 영혼을 덮고
꽃잎은 떠도는 백성의 백골에 뿌려진다.
상심함이 이 지경인데 어찌 초췌함을 논하겠는가.
어찌 하리오, 농부들이 도끼날에 치욕을 당함을 알지 못함을
바람도 매섭고 달빛도 괴로우니 누가 단장의 영혼을 불러주나.
황금 같은 열매는 아전의 창고에 흘러 넘친다.
낱알의 수(數) 늘이고 배로 징수하니
문득 반항하면 채찍으로 얻어맞는다.
아내는 원망하여 낮에 울부짖고
아이들은 울며 밤을 지새 운다.
이는 모두 매실 때문이니
매실이 더욱 좋은 물건이 되었다.
남산에 가죽나무가 있고
북산에 상수리나무가 있도다.
벼슬아치는 그것을 상관하지 않고
아전도 그것은 요구하지도 않는다.
매화는 도리어 없는 것만도 못하니
어찌 잘라버림을 거부하리오.
작매부(斫梅賦)는 관노(官奴) 어무적(魚無迹)의 고발성(告發性) 부(賦)다. 부(賦)는 운문(韻文)과 산문(散文)의 요소(要素)를 결합(結合)한 한문(漢文) 문체(文體)의 하나다. 한대(漢代) 부(賦)를 한부(漢賦)라 한다. 한부(漢賦)는 초사(楚辭)에서 유래한 반문 반시(半文半詩)의 새로운 문학양식(文學樣式)이다. 한대(漢代)에 부(賦)는 원래가 시경(詩經) 육의(六義)의 하나다. 직접적(直接的)인 서술(敍述)의 수법을 말한다. 이러한 직접적인 서술 수법을 사용하는 문학 장르를 부(賦)라 함으로서 문학(文學)의 한 장르 체재(體裁)가 되었다. 가장 오래된 부(賦)는 순자(荀子) 부(賦)편이다. 예(禮), 지(智) 운(雲) 잠(蠶), 잠(箴) 5가지에 대해서 암시(暗示)와 상징(象徵) 등의 수법을 이용하여 서술한 부(賦)다. 한 대(漢代)에 직접적(直接的)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굴원(屈原)이다. 굴원(屈原)은 초혼(招魂)에서 장황하고 과장된 묘사와 대화 형식을 후세(後世)의 부가(賦家)들이 모방(模倣)을 했다. 오늘 매작부(斫梅賦)는 어무적(魚無迹)의 부(賦)다. 부(賦)의 내용으로 보면 벼슬아치들이 매화나무에 세금을 가혹하게 물리는 것에 대한 저항부(抵抗賦)다. 어무적( 魚無迹)은 조선 연산군 때 노비 시인(詩人)으로 알려졌다. 허균의 국조시산(國朝詩刪)에 관노(官奴)로 면천(免賤) 했다고 되어있다, 그의 아버지 효량(孝良)은 사직(司直)을 지내는 등 당당한 사대부였으나, 어머니가 천비(賤婢)라 어무적은 처음에는 관노였다가 나중에 면천(免賤)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름자도 기록에 따라 무적(無赤) 혹은 무적(無跡)으로 다르게 나타나는데, 천민의 이름을 한자로 표기했기 때문이라 보인다. 어렸을 때부터 시 짓는 재주가 뛰어났다는 이야기가 시화(詩話)에 전한다. 반상(班常) 신분제도(身分制度)에 얽매어 과거에도 응시하지 못하고 율려습독관(律呂習讀官)이라는 말직에 다닌 적이 있다고 전한다. 연산군(燕山君) 7년에 김해에서 상소(上疏)를 올려서 유교적(儒敎的)인 이상(理想) 정치(政治)를 실행(實行)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무시되고 실행되지 못했다. 그 글은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연산군 7년 신유(辛酉) 7월 을해조(乙亥條)에 실려 있다. 김해 군수가 매화나무까지 무리한 세금을 징수하자 백성들이 도끼로 매화나무를 잘라내는 것을 보고 작매부(斫梅賦)를 지어 가혹(苛酷)한 정치를 고발(告發)한 것이다. 그로 인하여 어무적(魚無迹)은 김해 군수의 노여움 미움을 사서 도망(逃亡)하여 유랑생활(流浪生活)을 하다가 객사(客死)했다고 전 한다. 작매부(斫梅賦)는 속동문선(續東文選)과 허균이 편찬한 국조시산(國朝詩刪)에 유랑하는 백성의 어려움을 대변한 유민탄(流民嘆)과 신력탄(新曆嘆)과 같은 유명한 작품이 실려 있다고 전한다.
유민탄(流民嘆) 시를 보자, '백성들의 어려움이여, 백성들의 어려움이여, 흉년 들어 너희가 먹을 것이 없을 때, 나는 너희를 구제할 마음은 있어도 너희를 구제할 힘이 없구나, 백성들의 괴로움이여, 백성들의 괴로움이여, 날이 추워도 너희가 이불이 없을 때 저들은 너희를 구제할 힘은 있어도 너희를 구제할 마음이 없구나. 원컨대, 소인의 마음을 돌려서, 잠시 군자의 걱정을 하고 잠시 군자의 귀를 빌려 백성들의 말을 들어보아라, 백성들이 말을 해도 임금은 모르니, 지금의 백성들이 모두 살 곳을 잃었구나, 대궐에선 비록 백성들을 근심하는 조서를 내리더라도, 고을에선 전해 보는 헛된 종이 한 장에 불과하구나, 백성들의 고통을 물으려고 서울 관리를 특파하여, 역마로 하루에 삼백리를 달려도, 백성이야 문턱에 나설 힘조차 없으니, 어느 겨를에 마음속 일을 진정하겠는가, 한 고을에 한 경관이 온다 해도, 경관은 귀가 없고 백성은 입이 없네, 급회양(汲淮陽)을 다시 불러 기용함이 좋으리니, 죽지 않고 외로이 남은 백성 구할 수 있으리,(蒼生難 蒼生難 年貧爾無食 我有濟爾心 而無濟爾力 蒼生苦 蒼生苦 天寒爾無衾 彼有濟爾力 而無濟爾心 願回小人腹 暫爲君子慮 暫借君子耳 試聽小民語 小民有語君不知 今歲蒼生皆失所 北關雖下憂民詔 州縣傳看一虛紙 特遣京官問民瘼 馹騎日馳三百里 吾民無力出門限 何暇面陳心內事 從使一郡一京官 京官無耳民無口 不如喚起汲淮陽 未死孑遺猶可求) 유민탄(流民嘆)은 백성들의 탄식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어무적은 연산군(燕山君) 7년에 김해에서 백성들이 겪고 있는 생활고(生活苦)를 신유상소(辛酉上疏)로 낱낱이 밝혀 올렸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선조임금은 지방 수령들의 폐습(弊習)과 악행(惡行)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관노(官奴) 출신이지만 부패한 관리들의 폭정(暴政)에 백성을 대신하여 고발(告發)한 정신(精神)은 오늘에 사는 현대인들도 배워야 할 점이라고 본다. 정치가 썩고 민생이 파탄지경인데도 정치인들은 민생은 뒷전이고 권력 투쟁만 일삼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 관료들은 특권의식에 젖어 있다. 민생을 모르니 말이다. 어무적이 급회양(汲淮陽)을 다시 불러 기용함이 좋으리니, 한탄한 말은 급회양(汲淮陽)은 한(漢)나라의 급암(汲黯)을 말 한것이다. 그는 무제(武帝) 때 동해태수(東海太守)로 맑은 정사(政事)를 하였고, 회양태수(淮陽太守)로 죽을 때 까지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급암(汲黯)은 성품(性品)이 강직(强直)해서 황제(皇帝)의 면전(面前)에서도 바른말을 서슴없이 직언(直言)을 해서 그를 급직(直汲)이라고 일컬었다고 한서(漢書) 64권에 전한다. 인간이 만든 신분제 반상(班常)의 올가미에 상(常)은 억울하게 한평생 덫이 되어 살아야만 했다. 요즘 세상은 돈이 양반이다. 부익부(富益富) 빈익빈(貧益貧)이니, 세상은 달라졌어도 덫 굴레는 여전하다. 오늘은 관노출신(官奴出身) 어무적(魚無迹)의 작매부(斫梅賦)와 유민탄(流民嘆) 시(詩)를 반추(反芻)해 보았다. 여여법당 화옹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