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감상문 읽기> 21그램 김용석(철학자)
일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21그램(21Grams)>은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얽히고설킨 구조로 되어 있지만, 그것을 관통하는 주제는 이 영화에서 여러 번 반복되는 한 문장으로 대변될 수 있다. "삶은 계속된다(Life goes on)." 이말은 때론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But life goes on).",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Life has to go on)." 등으로 가지치기 하기도 한다.
수학교수인 폴은 심장이식 수술을 받아 목숨을 건진다. 새 생명을 얻은 것이다. 아내 메리는, 이식은 했으나 약화된 심장 때문에 성행위에 문제가 있는 폴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갖기 위해 인공 수정을 계획한다. 하지만 폴은 내켜하지 않는다. 폴이 혼신의 힘을 다해 찾는 것은 다른 것이다. 폴은 현재 자신이 갖고 있는 심장의 원래 주인을 알고 싶어하고 그의 소재를 추적한다. 이미 고인이 되었겠지만, 자신에게 새 생명을 주고 간 사람과 그 가족에게 감사하고 싶은 것이다.
폴에게 심장을 기증하게 된 마이클은 두 딸과 함께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람이다. 한편 마이클을 차로 치고 도망친 뺑소니 운전사 잭은 죄책감에 시달려 가족을 버리고 가출한다. 폴은 마침내 미망인이 된 크리스티나의 소재를 알게 되고 그녀에게 접근한다. 그녀에게 자기 안에 마이클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다. 크리스티나는 처음 폴의 이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를 거부하지만, 그의 진솔한 마음을 알고 나서 그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남편의 죽음을 잊지 못하는 크리스티나는 뺑소니 운전사를 찾아서 복수를 하려는 집념에 불탄다. 폴 역시 크리스티나에 동조한다. 마침내 폴은 잭을 찾아내고 그를 죽이려 하지만 차마 그에게 총을 쏘지 못한다. 그러고는 크리스티나에게 그를 죽였다고 거짓말한다. 한편 차라리 죽기를 바랐던 잭은 폴과 크리스티나가 묵고 있는 모텔로 찾아가 자신을 죽여달라고 애원한다.
이 과정에서 폴은 혼란스러움에 자신에게 총을 쏘게 되고 결국 그 상처로 죽고 만다. 그 후 크리스티나는 회개한 잭을 용서하고, 자신이 기적같이 폴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크리스티나는 몸 안에서 새 생명이 움트는 것을 느끼며 새로운 삶의 문턱에 선 자신을 발견한다. 용서받은 잭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다.
폴은 죽었지만 두 생명을 태어나게 했다. 하나는 크리스티나의 배 속에 있는 아기이고, 다른 하나는 죄인의 삶에서 부활한 잭이다. 폴은 다른 사람에게서 생명의 줄기를 이어받아 연명해서는 또 다른 생명들의 연장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그래서 삶은 계속된다.
폴, 마이클, 크리스티나, 잭 그리고 아기(폴과 크리스티나 사이에서 태어날)는 서로 공동 생명의 질긴 끈으로 얽혀 있다. 그들이 그렇게 만나고 맺어지는 것은 우연이라기보다는 신비스런 일이다. 마지막 숨을 쉬면서 폴은 말한다.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삶을 살아야 하고, 또 얼마나 여러 번 죽어야 하나?" 수없이 이어지는 삶과 죽음은 생명의 신비 속에서 '그래도 삶은 계속된다'는 명제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폴이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바로 지속되는 생명 그 자체였다. 사랑의 출발은 생명체에 대한 관심이다. 자신의 생명 연장을 가능하게 한 타자의 생명에 대해 그는 진정한 관심을 보였다. 그리고 홀로 남은 쓸쓸한 생명에 대한 관심이 그로 하여금 크리스티나를 사랑하게 했고, 결국 그의 사랑을 얻게 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복수심을 공유했어도 차마 죄인의 목숨을 거두지 못하는 그는 도한 생명을 얼마나 사랑했는가. 폴의 생명 사랑은 결국 한 생명을 탄생시키고 또 한 생명을 부활시켜 생명 공동체, 그 신비의 세계를 윤회한 것이다.
강유원---] 리처드 클라인, 담배는 숭고하다, 문학세계사
이무기
'당신은 왜 담배를 피우는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약간은 죄책감이 든 표정으로 머뭇거리다가 '그냥'이라면서 물러날 것인가, 또는 머리를 긁적이며 '끊지 못해 피운다'는 궁색한 변명을 슬그머니 내놓을 것인가, 아니면 아예 귀찮다는 듯이 '상관하지 말라, 난 등에 관 짊어지고 다니니까'하면서 되받아 칠 것인가. 담배를 둘러싼 질문과 대답은 끊임없이 되풀이 되지만 곰곰히 따져보면 담배는 몇마디 말로 옭아맬 수 없는, 만만치 않은 물건이다. 당장 우리 머리에 떠오르기는 건강문제다. 담배를 피우려면 보지 않을 수 없는 경고가 담배에 얽힌 건강문제를 우리에게 엄숙하게 깨우쳐 주고 있다. 또한 담배는 경제, 국제 통상문제이기도 하고, 광고업자들에게는 창조적 아이디어로 찬양해야만 할 물건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이미 담배에 달라붙은 서로 어긋나는 두가지 모습을 보게된다. 무시무시한 질병을 일으키는 악마의 연기이면서도, 찬양해야 하고 많이 팔아야 할 귀중한 상품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의 시대정신은 바야흐로 건강이다. 이 시대는 혁명의 적들을 단두대에서 짤라 내듯이 건강의 적들을 처단한다. 눈에 가장 쉽게 뜨이는 건강의 적인 담배는 단두대에 가장 먼저 올라가 목을 내밀고 '건강주의자'들은 담배의 목을 끊어댄다. 담배는, 수많은 이론과 섬뜩한 엑스레이 사진과 분노에 찬 피켓과 해골 포스터로 무장한 거대한 위협에 포위된 채, 김포공항 같은 곳에서는 네모난 상자 속에서만 자신을 실현할 수 있고 승화시킬 수 있을 뿐이다.
그러면 과연 담배는 애초부터 자신의 몸뚱아리에 이러한 악명을 붙이고 태어났는가? 도대체 담배의 과거는 어떠한가? 담배는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는 신을 위한 음식이었다. 아니 어쩌면 신에게 향할 때 복용하는 음식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담배가 사람이 사는 이 세상과 신이 사는 저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담배를 피우고, 그 구름다리를 건너서 신의 나라로 들어갔던 것이다. 담배는 기원전 5000-4000년에 멕시코 남동부에서 최초로 재배하기 시작했던 옥수수나 다른 식용작물보다 훨씬 이전에 재배된 최초의 식물일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오래 전부터 그들은 담배를 "샤머니즘적 마취에서 신에의 공양까지 여러 목적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영국의 유명한 마야 연구가인 톰슨(J. S. Thompson)은 <마야 역사와 종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귀족이나 사제, 또 평민일지라도 담배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항상 신비로운 존재를 대하는 것 같았으며, 인격화되고 신성시된 담배는 인간의 피로나 고통, 그 밖의 잡다한 질병을 극복하는 데 인간의 옆에서 함께 싸워주는 원군으로 여겨졌다. 그러한 데에는 젊은 남자가 젊은 여자를 유혹하기 위해 먼저 불을 붙여주는 식의 인쇄물이나 텔레비젼 광고가 판치는 물질주의적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도저히 공유하거나 인식할 수 없는 그윽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은... 수도원의 저녁 명상시간과 같은 것이다." 이쯤되면 우리는 어리둥절해진다. 담배 피우는 시간이 수도원의 저녁명상 시간과 같다고? 망상이 아니라 명상이라고?
왜 우리는 담배를 빨아대는 걸까? 그것이 우리를 죽음으로 빨려 들어가게 함을 알면서도 우리는 담배를 빨아댄다. 담배를 빨면서 죽음에 빨려 들어가고 있다. 현대는 세속도시다. 따라서 현대인에게 흡연은 더 이상 신성한 순간은 아니다. 그러면 무슨 말로 우리의 흡연을 변명할 것인가? 우리는 새로운 담배 찬양을 이 책 <<담배는 숭고하다>>에서 찾아 보기로 하자. 이 책 앞부분에는 담배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명이 있다: "담배는 상징적인 도구이자 시적인 성질을 지닌 신성한 대상물이며 마법적이고도 유혹적인 속성과 매력을 지닌, 그리고 금기와 위험에 둘러싸여 있고 비합법적인 쾌락의 창고이자 초월적인 것으로 향하는 통로이며, 억압에 대한 자극이다." 이것만 보면 세상에 좋다는건 죄다 담배에 들어있는 셈이다. 그러나 어찌보면 이는 골초의 말장난일 수도 있다. 칸트미학에서 빌려왔다는 '숭고'라는 개념도 그것의 하나일 수 있다. 담배의 어느 구석이 숭고하단 말인가? 담배는 우리에게 이익을 주기는 커녕, 우리의 생명을 깍아먹고, 우리의 생명을 연기로 만든다.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담배를 태운다. 바로 이것 -- 고통을 주면서도 그것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 --이 담배의 숭고함이다.(* 숭고함에 대한 칸트의 설명을 하나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숭고의 감정을 일으켜 주는 것은 형식상 우리의 판단력에 대해서는 반목적적이며, 우리의 현시능력에는 부적합하며... 그것은 그때문에 한층 더 숭고하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칸트, <판단력비판>(박영사), 109쪽)
철학책에서 숭고라는 개념을 들추어내기 보다는 차라리 한 구절의 시가 더 와닿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담배를 통해서 '증발'되기도 하고 '집중'되기도 한다. 문제의 핵심은 바로 그것이다."(보들레르, <벌거벗은 나의 심장> 중에서) 담배는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한다. 담배가 나를 유혹한다. 나는 담배에 끌려간다. 우리는 그 유혹에 굴복해서 담배에게 손을 내밀어 담배연기를 빨아서 폐 속으로 깊숙히 빨아 들인다. 온전하던 한 개비의 담배는 우리의 빨림에 의해서 재로 타들어 가고, 꽁초라는 시체만 남긴다. 그러나 담배는 자신의 몸뚱아리를 태워 시체를 만들면서 동시에 우리의 몸을 시체상태에 가깝게 해준다. 우리가 담배를 빨아대는 것은 담배를 죽이면서도 우리에게 부여된 생명의 시간을 죽이는 것이다. 이러한 빨림 속에는 서로를 죽이는 무서운 존재의 질서가 숨어있다. 담배라는 '있음'이 '빨림'이라는 운동에 의해 '없음'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은 삶의 본질을 담고 있다. 한 개비의 담배에서도 진리의 조각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담배를 끊음으로써 우리는 진리에 이르는 통로 하나를 버리게 되는 것이다. 담배를 끊음으로써 건강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고? 건강은 없으니까. 문명인에겐 건강이란 영원히 불가능한 꿈일 뿐이다. 불가능한 꿈이니까 그렇게도 건강에 목말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