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엄일섭(嚴日燮) - 저 높은 곳을 향하여
1. 입교의 동기와 환경
1 눈같이 하얀 종이 위에 한 폭의 그림을 그려가는 화가의 손길이 끝이 나야 그 그림은 세상에 제 모습을 드러내게 되고 만인으로부터 평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인생살이도 이와 같은 것이라서 아직 미완성된 작품을 세상에 내어 놓는듯싶어 두려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2 죽지만 말고 끝까지 따라오면 승리자가 된다고 하신 선생님의 말씀을 생각할 때 동기도 중요하고 과정도 중요하겠지만 어떻게 하면 불변의 마음과 생활로서 생애가 끝나는 순간까지 충성할 수 있느냐를 생각하면서 자랑스럽지 못한 지난 생활일망정 새로운 마음의 결의를 다지는 뜻으로 적어 본다.
3 나는 강원도 두메산골인 평창군 대화면 소재지 지서장 관사에서 아버지 엄봉갑씨와 어머니 김홍년씨(현 기성축복 가정)의 5남 2녀의 장남이며 남자 쌍둥이의 형으로서 1939년 7월 18일(음력 6월 2일) 태어났다.
4 당시 부친은 평창 경찰서 대화지서장이었으며, 그 후 해방될 때까지 공직에 몸을 담고 있었는데 당시가 일제의 지배 시라서 한국인들이 많은 수난을 받을 때였다. 그래서 해방과 더불어 경찰기관에 근무하던 한국인들 모두 쫓겨 도망가던가 수난을 받았던가 했다고 한다.
5 나의 부친은 재직 시 많은 선행을 베풀었으며 한국인들의 억울함을 도와준 덕택으로 죄인들의 도움까지 받아 재직 시 지은 집에서 해방도 맞이했고 6.25도 맞이했지만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고 오늘날까지 살게 되었다.
6 나는 국민학교와 중학교는 평창에서 마쳤으며, 고등학교는 영월공고를 다녔다. 우리 두 형제는 한 방에서 한 책상을 반씩 갈라 쓰며 한 번의 다툼도 없이 고교까지 마치게 됐다.
7 나는 국민학교 5학년 때에 6.25사변을 당하였으며, 전쟁의 와중에 두 번이나 처하게 되었고, 동란 때 피난 대열 속에서 많은 죽음과 아우성과 고난을 체험하게 되면서 인생의 회의와 두려움이 항상 마음을 떠나지 않았다.
8 1957년, 고교 3학년 때 여름 방학을 맞이하여 영월 화력 발전소에서 실습을 마치고 보름 늦게 평창 집에 갔더니 이미 동생은 개척 전도사인 학생에게 인도되어 교인이 되어 있었다.
9 하루는 개척 전도사인 학생이 찾아와 모친과 같이 집 마루에서 원리강의를 들은 것이 처음의 인연이었지만 더 가까워지지는 못했다. 당시 어머니는 감리교 속장까지 하셨기 때문에 퍽 관심이 있는 것 같게 생각도 했다.
10 졸업 후에도 부흥 집회에는 몇 차례 참석도 했지만 고시 준비를 하기 위하여 더 알기를 원치 않았다. 나는 오대산으로, 법홍사로, 또 포교당으로 옮기며 공부를 계속했다.
11 그 후 1960년 초에 협회 제3회 40일 수련을 받고 돌아와 금식 중에 중북 제천으로 전도사 발령을 받고 나간 동생(현 72가정 엄기섭)이 말도 못 하고 먹지도 못하며 움직일 수도 없다는 소식을 듣고 부친과 함께 가서 집으로 데리고 왔으나 점점 악화만 되어 의사마다 병명이 달랐으며, 심지어는 때를 놓쳤다는 절망적인 말도 주어서 집안은 벌집을 쑤셔놓은 듯했다.
12 교인들이 방문하는 것을 부모들은 싫어했다. 나날이 더욱 심해져 갔다. 입에서는 거품만 나와 약조차 투여할 수가 없었고 링겔로 연명해 갔다. 좋다는 것은 다해보았지만 효과가 없어 나는 이웃 할머니를 모시고 점치는 분을 찾아갔다.
13 “집안의 개가 이웃 마을에 가서 몽둥이로 머리를 맞은 격이라서 어려운데 음력 2일을 지내야만 살 수 있다”고 하며 머리를 흔든다. 1주일이나 남았기 때문에 더욱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다. 비방을 적어 주는 대로 밥 3그릇과 입던 옷에다 주문을 써가지고 눈으로 덮인 강변으로 어린 동생을 데리고 나갔다.
14 눈을 쓸고 불을 피우고 주문을 읽으며 그 옷을 태웠고 밥을 흐르는 강물에 풀면서 3번 주문을 읽었다. 내용은 다 기억할 수 없으나 끝은 죽음을 면케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무슨 효과가 있으랴 하는 마음도 있기는 했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 최선을 다하자는 뜻으로 마음을 모아 이 일을 했다.
15 의사들의 발길은 계속됐지만 더 악화만 되어 갔다. 할 수 없이 원주 기독병원으로 입원을 시켰지만 8일 만에 병명도 알지 못하고 퇴원했는데, 환자가 나가야 살 것 같다고 했고 병원에서는 폐병이라고 진단이 됐기 때문이었다. 다시 중국 한의원에 10여 일 다녔지만 더 악화됐고 나중에는 시내 의사를 상오하오 4~5명을 차례로 왕진시켰는데 그중 한 분이 정신병이라고 했다.
16 부모들은 의논 끝에 교회에 미쳐서 병이 났으니 정신병이라고 진단된 개인병원에 맡겼다. 나는 항상 옆에서 지켜왔는데 눈만 감으면 두 손을 흔들어 대며 몸부림을 쳤으므로 손을 잡으면 번쩍 눈을 뜨고 하는 말이 사탄과 싸우는데 손을 잡으면 어떻게 하느냐 오른손만은 절대로 잡지 말라고 했다.
17 이러는 가운데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가정은 혼돈했다. 병세는 점차 회복되어 갔지만 장기간 누워 있었던 탓으로 등 뒤가 헐게 되어 더욱 고생하였다. 두 달 만에 퇴원을 했지만 그 몸이 회복도 되기 전에 60년 제1차 하계 전도에 참석키 위하여 집을 나가 버렸기 때문에 부모들의 원망은 더해 갔다.
18 무엇이 이토록 미치게 만들었을까. 나는 그때부터 이웃에 전도 나온 박승희 씨(36가정)와 전선자 씨(72가정)를 만나 10여 일 동안 말씀과 토론을 했는데 밤마다 꿈속에서 원리를 읽었고 깨어나 확인해 보면 페이지까지도 정확히 맞았다. 참으로 놀라게 되었고 더욱 관심을 가졌다. 낮 시간에 읽노라면 가슴이 뜨거워져 더 읽을 수가 없었다.
19 처음에는 무척 두렵고 무서웠지만 이것이 불을 받는 은혜라고 하여 마음이 놓였다. 이러한 체험을 얻고 1960년 8월 1일 입회원서를 작성하게 된 것이다. 어린 자녀 하나 찾으시기 위하여 형제에게 고난을 주시면서까지 인도해 주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며 감사 기도를 드릴 때 북받쳐 흐르는 눈물을 막을 길이 없었다.
첫댓글 감사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