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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36]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정작 문제가 터진 건 손님들이 돌아가고 난 후였다. 아들은 민 노인을 하얗게 질린 얼굴로 다잡았다. 아버지는 왜 제 체면을 판판이 우그러뜨리냐는 게 항변의 줄거리였다. 그 녀석들은 아버지의 북소리를 꼭 듣고 싶어서 청한 것이 아니라, 그 북을 통해 자기의 면목이나 위치를 빈정대기 위해서 그러는 것임을 왜 모르냐고, 민 노인의 괜찮은 기분을 구석으로 떼밀어 조각을 내었다. ㉠아들 옆에서 입을 꼭 다물고 있는 며느리는, 차라리 더 많은 힐난을 내쏘고 있음을 민 노인은 모르지 않았다. 아들 내외는 요컨대 아버지가 그냥 보통 노인네로 머물러 있기를 바랐다.
아버지의 북이 상징하는 아버지의 허랑방탕한 한평생이, 일단은 세련된 입신(立身)으로 평가되는 아들의 내력에 중요한 흠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도 그랬다. ㉡하라는 공부는 작파하고, 북을 메고 떠돌아다니며 아내와 자식을 모른 체한 민익태, 한때는 아편쟁이로 세상을 구른 민익태, 그러면서도 북을 놓지 않은 그와 아들의 단절은, 따라서 오래 지속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시아버지의 그런 생애와 전적으로 무관한 며느리가, 떼어 버릴 수도 없는 인연으로 맺어지고 있을지언정, 자기를 올곧게만은 대할 수 없는 형편임을 민 노인은 이해하고 있었다. 심지어 다 늦게 아들네 집을 찾아온 영감을 대하던 마누라의 눈에도, 당장은 증오가 앞섰으니까 더 할 말이 없다. ㉢그래도 할망구가 살아 있던 시절은, 미움과 연민을 골고루 섞어 가면서도 어지간히 바람막이 구실을 해 주어 견디기가 쉬웠는데, 외톨이로 남으면서 운신하기가 수월찮았다. 그러나 아들이 결정적으로 자기의 날씬한 생활 속에서 아버지를 격리시키고자 하는 까닭은, 부담의 차원보다는 아버지를 접함으로써 새삼스럽게 확인하게 되는, 자신의 고통과 낭떠러지의 세월을 떠올리기 때문이 아닌가 하였다.
(중략)
“너는 할아버지와 나와의 관계에 대해, 특히 내가 취하고 있는 입장에 대단히 불만이지?”
“그럴 것도 없습니다. 아버지의 할아버지에 대한 처지를 이해하면서도, 그 논리를 그대로 저와 연결시키고 싶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기특하구나. 그러니까 너만이라도 할아버지에게 화해의 제스처를 보이겠다는 거냐 뭐냐. 지금까지의 네 행동을 보면 그런 추측을 가능케 하더라만.”
“그것도 맞지 않는 말이에요. 도대체 할아버지와 저와는 갈등이 있었어야 말이죠. 처음부터 갈등이 없었는데 화해의 제스처를 보이고 말고가 어디 있습니까. 할아버지와의 갈등이 있었다면, 그건 아버지의 몫이지 저와는 상관이 없는 겁니다. 오히려 전 세대끼리의 갈등이 다음 세대에서 쾌적한 만남으로 이어진다면, 그건 환영할 만한 일이고, 그게 또 역사의 의미 아니겠습니까?”
“뭐야, 이놈의 자식, 네가 나를 훈계하는 거얏!”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버지의 손바닥이 성규의 볼때기를 후려쳤다. 옆에 있던 어머니의 쇳소리가 그의 뺨에 달라붙었다.
㉤“또박또박 말대답하는 것 좀 봐.”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에요. 그렇다고 아버지의 생각 속으로만 저를 챙겨 넣으려고 하지 마세요.”
성규는 얻어맞은 자리를 어루만지지도 않고, 되레 풀죽은 목소리가 되었다.
“네가 알긴 뭘 알아. 네가 내 속을 어떻게 알아.”
“그런 말씀은 이제 그만 좀 하셨으면 해요. 안팎에서 듣는 그 말에 물릴 지경이거든요. ‘너는 아직 모른다. 너도 내 나이가 되어 봐라…….’ 고깝게 듣지 마세요. 그때 가서 그 뜻을 알지언정, 지금부터 제 사고와 행동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 뜻에서 제가 할아버지를 우리 모임에 초청한 사실을 후회하지 않을뿐더러,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를 심리적으로 격리시키려 하고, 또 한편으로는 이해하려는 모순을 저도 이해합니다. 노상 이기적인 현실에의 집착이 그걸 누르는 데 대한, 어쩔 수 없는 생활인의 감각까지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고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지만, 제 나이는 또 할아버지의 생애를 이해합니다. 북으로 상징되는 할아버지의 삶을 놓고, 아버지와 제가 감정적으로 갈라서는 걸 비극의 차원에서 파악할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할아버지가 자신의 광대 기질에 철저하여 가족을 버린 건 비난받아야 할 일이나, 예술의 이름으로는 용서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나름대로의 예술을 완성했니?”
아버지의 입가에 냉소가 머물렀다.
“그건 인식하기 나름입니다. 다만 할아버지에게서 북을 뺏는 건, 할아버지의 한(恨)을 배가시키고, 생의 마지막 의지를 짓밟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만은 갖고 있습니다.”
- 최일남, 「흐르는 북」-
34. ㉠~㉤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① ㉠ : 특정 인물의 시선을 통해 다른 인물의 심리를 해석하여 보여 준다.
② ㉡ : 인물의 행적을 요약적으로 제시하여 다른 인물과의 갈등을 짐작하게 한다.
③ ㉢ : 현재의 상황을 과거의 상황과 대비하여 인물의 처지를 강조한다.
④ ㉣ : 인물의 반어적인 발화를 제시하여 다른 인물의 의견에 대한 부정적 태도를 드러낸다.
⑤ ㉤ : 새로운 인물의 발화를 제시하여 갈등이 발생한 근본적 원인을 보여 준다.
35. 윗글의 구절에 대한 이해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세련된 입신’은 ‘성규’의 아버지가 방황하는 삶을 그만두고 세속적인 삶을 지향하기를 바라는 ‘민 노인’의 소망을 드러내고 있다.
② ‘날씬한 생활’은 새로운 세대인 ‘성규’가 지향하는 삶에 대한 ‘아버지’의 비판적 시선을 보여 주고 있다.
③ ‘역사의 의미’는 ‘민 노인’의 자유로운 삶이 자신에게로 이어지는 것에 대한 ‘성규’의 두려움을 반영하고 있다.
④ ‘생활인의 감각’은 현실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성규’의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⑤ ‘비극의 차원’은 ‘민 노인’과 ‘아버지’가 감정적으로 갈라선 상황에 대한 ‘성규’의 판단을 드러내고 있다.
36. 다음 <학습 활동 과제>를 해결한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3점]
① ‘성규’의 아버지가 ‘민 노인’과 소통할 수 없는 것은 예술에 대한 가치관을 ‘민 노인’과 공유하지 못한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겠군.
② ‘성규’가 자신의 아버지와 소통할 수 없는 것은 ‘민 노인’의 예술가로서의 삶에 대한 두 사람의 가치관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겠군.
③ ‘민 노인’이 자신의 아들에게서 예술가로서의 삶을 이해받지 못하고 격리된 것은 아버지로서 존재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겠군.
④ ‘성규’가 ‘민 노인’에게서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으려 한 것은 자신의 아버지와 ‘민 노인’ 간의 화해를 이끌어 내려는 노력으로 해석할 수 있겠군.
⑤ ‘성규’의 아버지가 ‘민 노인’이 평범한 노인으로 살기를 바라는 것은 사회적 관계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데 ‘민 노인’의 예술가로서의 삶이 방해가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겠군.
34. ⑤ 35. ④ 36. ④
[34~36] 현대소설 - 최일남, ‘흐르는 북’
지문해설 이 작품은 1980년대 우리 사회의 현실적 단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서울에 기반을 둔 한 중산층 가족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흐르는 북’은 이기적 삶의 세태를 배경으로 하면서 속물적 삶과 본원적 삶과의 갈등을 예리하게 그려 내고 있다. 또한 할아버지(민익태), 아버지(민대찬), 손자(민성규)로 이어지는 세대 간의 갈등과 화합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작품의 중심 소재인 북은 ‘민 노인’의 삶의 궤적을 보여 주며, 실리적인 가치보다는 정신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예술 정신과 전통 세계의 가치관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삶을 살아간 아버지 때문에 불우한 유년 시절을 겪은 민대찬은 아버지를 무책임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은 세속적인 가치를 열렬히 추구한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 ‘성규’에게도 이러한 삶의 태도를 강요한다. 그러나 ‘성규’는 새로운 세대의 입장에서 할아버지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더 나아가 아버지에게도 할아버지의 삶의 방식을 이해해 줄 것을 요청한다. 이러한 ‘성규’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세대 간의 갈등을 극복하고 서로 화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살펴볼 수 있게 된다. 결국 이 작품은 당대 사회에서 인간이 잃어 가고 있는 것은 무엇이며, 현대인의 삶의 가치가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가에 대한 소설적 성찰이라고 볼 수 있다.
[주제] 삶에 대한 인식 차이로 인한 세대 간의 갈등과 화합 모색
34. 서술상 특징 파악 정답 ⑤
정답해설 : ㉤은 ‘성규’의 어머니의 발화인데, ‘성규’가 자신의 아버지와 갈등을 빚고 있는 장면에 삽입되어 있다. ‘성규’의 어머니는 ‘성규’가 아버지의 말에 수긍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견을 지속적으로 제시하자, 이를 ‘또박또박 말대답’하는 것으로 보고 자신의 아들에게 핀잔을 준 것이다. 따라서 이는 둘 사이의 갈등이 발생한 근본적 원인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갈등의 근본적 원인은 ‘민 노인’의 삶에 대한 ‘성규’와 아버지의 가치관 차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
[오답피하기] ① ㉠은 ‘아들’, ‘며느리’, ‘민 노인은 모르지 않았다.’ 등으로 서술되어 있는데, 이로 보아 이 구절은 ‘민 노인’의 시선을 통한 장면 제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모습이 ‘더 많은 힐난을 내쏘고 있음’이라고 해석하여 며느리(‘성규’의 어머니)의 심리를 보여 주고 있다. ② ㉡은 ‘허랑방탕한 한평생’이라고 집약된 ‘민 노인’의 행적을 요약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장면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아내와 자식을 모른 체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으므로 ‘성규’의 아버지가 ‘민 노인’과 갈등하는 것에 대한 하나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③ ㉢을 살펴보면, ‘민 노인’의 아내가 살아 있던 과거의 시절에는 그래도 아내가 ‘어지간히 바람막이 구실’을 해 주기도 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아내 없이 ‘외톨이’로 남게 된 현재의 상황은 ‘운신하기가 수월찮았다.’로 제시되어 있다. 이로 보아 아들과의 ‘단절’로 상징되는 ‘민 노인’의 현재 처지가 부각되고 있는 서술로 볼 수 있다. ④ ㉣의 앞 발화는 ‘성규’의 말인데,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관계를 이해하지만 그것이 ‘저와 연결’될 필요는 없다고 말하고 있다. 즉 ‘성규’ 자신의 말은 둘 모두를 이해한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성규’의 아버지는 이를 비꼬기 위해 ‘기특하’다고 반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35. 구절의 의미 파악 정답 ④
정답해설 : ‘성규’의 아버지가 현실에 집착하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은 ‘생활인의 감각’ 바로 앞부분에 제시된 ‘노상 이기적인 현실에의 집착’이라고 서술된 내용이다. 이 부분의 발화는 ‘성규’가 자신의 아버지를 이해하는 방식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에 ‘생활인의 감각’이라는 구절은 아버지를 바라보는 ‘성규’의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답피하기] ① ‘세련된 입신’은 ‘민 노인’의 소망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방황하는 삶을 그만두고 세속적인 삶을 지향하기를 바라는 것은 ‘민 노인’이 아니라 ‘성규’의 아버지이다. 이 구절은 ‘일단은 세련된 입신으로 평가되는 아들의 내력’이라고 서술되어 있기 때문에 ‘민 노인’의 소망이 아니라 아들, 즉 ‘성규’의 아버지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평가로 볼 수 있다. ② ‘날씬한 생활’은 ‘민 노인’이 자신의 아들의 삶을 서술한 것이기 때문에 ‘성규’가 지향하는 삶과 연관성이 없고, ‘성규’의 아버지의 비판적 시선과도 무관한 구절이다. ③ ‘역사의 의미’란 ‘전 세대끼리의 갈등’을 ‘다음 세대’가 화합하는 것과 연관된 것으로 이는 ‘쾌적한 만남’으로 상징된다. 따라서 ‘성규’의 두려움과는 관련이 없다. ⑤ ‘비극의 차원’은 ‘할아버지의 삶을 놓고, 아버지와 제가 감정적으로 갈라서는’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이지 ‘민 노인’과 아버지가 감정적으로 갈라선 상황에 대한 진술이 아니다.
36. 인물의 성격, 태도 파악 정답 ④
정답해설 : 이 글에서 ‘성규’가 ‘민 노인’에게서 예술적 재능을 인정받으려 한 부분은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④의 진술은 일단 성립하기 어렵다. 또한 ‘성규’가 아버지와 ‘민 노인’ 간의 화해를 이끌어 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장면 역시 찾기 어렵다. 다만 아버지와 달리 ‘성규’ 자신은 민 노인과 불화할 까닭이 없음을 아버지에게 설명하고 있는 장면이 제시되어 있다.
[오답피하기] ① ‘성규’의 아버지와 ‘민 노인’의 갈등은 ‘민 노인’의 예술 지향적인 삶을 ‘성규’의 아버지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예술에 대한 가치관을 두 사람이 공유하지 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② ‘성규’가 자신의 아버지와 소통하기 어려운 까닭은 할아버지의 삶에 대한 판단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규’ 와 ‘성규’의 아버지는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민 노인’의 예술가로서의 삶을 바라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③ 중략된 부분의 바로 앞부분을 보면, ‘민 노인’은 아들에게 ‘자신의 고통과 낭떠러지의 세월’을 떠올리게 한다.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하지못한 채 자신의 삶만 추구했기 때문에 ‘민 노인’은 아들에게서 예술가로서의 삶을 이해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⑤ 이 글의 앞부분을 보면 ‘성규’의 아버지는 ‘민 노인’이 ‘그냥 보통 노인네로 머물러 있기’를 바라고 있다. 그 이유는 ‘민 노인’의 예술가로서 의 삶이 ‘제 체면을 판판이 우그러뜨리’는 것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첫댓글 소중한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