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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위선을 거꾸로 떠는 하나님 나라>의 줄거리: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리라" 하실 만큼 역겨우셔서, 대 홍수로 모든 사람을 이 지구 위에서 씻어내 버리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에 대해서 먹어도 마셔도 역겨워하시고 시집가고 장가들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는 모든 일상을 역겨워하신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먹고 마심조차 하나님이 예뻐하실까요? 위선을 거꾸로 떨면 됩니다.
위선을 거꾸로 떠는 하나님 나라
(누가복음 17장 25절~37절)
25.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
26.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27.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28.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29.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30.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31.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32. 롯의 처를 기억하라
33.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위선을 거꾸로 떠는 하나님 나라>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위선을 거꾸로 떠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사는 사람, 여전히 세상 나라 속에 묶여 사는 사람의 차이를 말하자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여 사는 사람은 위선을 거꾸로 떠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위선을 떠는 사람인 것처럼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는 삶을 살게 됩니다. 위선(僞善)이란 의도적으로 보이는 부분을 꾸미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이는 부분을 꾸미지 않을지라도 세상 사람들이 볼 때에는 의도적으로 겉모습을 꾸미는 것처럼 보이는 삶이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나와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고 질문을 하게 되면서 시작된 대화가 계속 이어지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한다는 주제를 이어 가시는 중에 하나님의 나라와 위선을 떤다는 말이 연결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을 제목과 연관시켜 본다면 바리새인과 반대 상황을 연상하면 이해하기가 쉽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 바리새인들은 반면교사로써 우리에게 큰 도움을 줍니다. 도움의 크기만 놓고 보자면 베드로를 비롯한 열두 제자들보다도 바리새인들이 주는 도움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문제를 한 마디로 종합해보자면 위선입니다. 성경에서는 외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5장 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시며 바리새인들에 대해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은 겉으로는 누구보다 하나님을 좋아하고 공경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하나님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마음으로 좋아하는 것은 돈이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14절에서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고 명시된 바와 같습니다. 그만치 바리새인들은 마음으로는 돈을 좋아하면서도 겉으로는 하나님께 열심인 자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율법을 날마다 묵상하고 연구했으며 행위로도 실천하였습니다. 율법뿐만이 아니라 모든 종교 행사나 절기를 지킴에 있어서도 솔선수범하였고 구제나 십일조를 함에 있어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게 성실한 자들이었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의 이름과 연관된 일에 있어서는 이토록 적극적이고 모범적일 수 있었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는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위선이 거꾸로 나타날 것이라 말씀하고 계십니다. 바리새인들의 위선이 거꾸로 된 상황이란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좋아하지만 겉으로는 세상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일하며 사는 모습을 보면 세상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것 같은데 실은 마음에서는 하나님만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들의 거꾸로 위선떨기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적극적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마음속을 들여다보면 세상을 전혀 좋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바깥으로 나가야만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을 좋아하는 상태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면 누구보다도 세상을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사는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 마음에는 세상이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좋아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러한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하늘 아버지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는지, 단순히 창조주의 섭리가 임하는 세상 나라의 현장인지 구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추상적 문제가 아니며 선택 사항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면 마땅히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창조주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셔서 삶을 주관해 가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나의 의식과 몸을 장갑 삼으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상황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임함에 대해 본문 20~21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시간 말씀을 떠올려봅니다. 우주보다 더 크신 창조주 하나님을 지구는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삶의 현장에 들어오셔서 나의 희망대로 역사하시며 상황과 조건을 바꾸어 가실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삶의 영역인 지구는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을 모셔 들이기에는 너무나도 작고 좁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삶에 대한 변화와 개선의 희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함을 기대한다는 것은 아무런 결실이 없는 헛된 바람입니다. 그것은 솥뚜껑을 솥 속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바라는 대로 삶의 현장에 들어오실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음에 세상을 담고서 환경과 조건의 변화와 상황의 개선을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고 임재하시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이러한 상태에서는 아무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지라도 인격적 관계는 성립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삶의 현장에 내려오셔서 내가 원하는 대로 삶의 조건이나 상황을 바꾸어 주시는 일은 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의 마음이 다시 태어나야만 합니다. 세상을 담고 있는 마음이 텅 빈 상태로 다시 태어나서 하나님을 모실 수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삶의 영역 전체보다 더 크기 때문입니다. 저를 예로 들자면 저의 마음은 제가 살고 있는 강릉보다 크고, 대한민국보다 크고, 지구보다도 크고 우주보다도 큽니다. 이처럼 이상하고 신비한 일을 깨닫지 못하면 그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에서 삶의 영역보다 더 큰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람은 마음과 의식과 몸의 유기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는 현상에 의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삶이란 곧 뻗어가는 관계의 영역입니다. 따라서 마음 또한 삶의 영역 안에 있는 것이라 여겨집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의 크기는 삶의 영역보다 크고 지구보다 우주보다 크다는 것이 팩트입니다.
이 팩트를 모르면 삶의 영역에서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대상과 일들에 마음을 쏟게 됩니다.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모셔 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진 마음을 오감으로 포착하는 지극히 작은 일들에 쏟아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어마어마한 손해가 발생하게 됩니다. 마치 큰 가마솥에 곰탕을 끓이고 있는데 잉크를 몇 방울 떨어뜨리는 것과 같습니다. 고작 몇 방울의 잉크지만 그 곰탕은 이제 먹을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이처럼 세상을 담은 마음은 하나님께서 도저히 보고 계실 수가 없는 역겨움이 발생하는 상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상태를 노아의 홍수와 소돔의 멸망을 예로 들어 말씀하고 계십니다.
정리해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주제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개입하셔서 주권적인 뜻에 따라 이끌어 가시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 세상 안에는 들어오실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수용하기에는 너무나 작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의 마음은 우주보다도 더 커서 하나님을 온전히 모실 수 있습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른 채로 마음에 세상을 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에 역겨운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셨습니다. 창세기 6장 7절에서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역겹고 더러워서 도저히 그대로 놔둘 수가 없어서 쓸어버리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를 언급하시며 역겨움의 이유에 대해 말씀하시는데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당혹스럽습니다. 27절을 보면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이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요? 이것이 하나님께 그렇게 역겨운 일일까요? 하나님께서 먹고 마시게 하셨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것도 하나님의 섭리대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행위가 아니라 마음입니다.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크기의 마음에 세상을 담은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마음을 쏟는 모습이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시는 모습입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조카였던 롯과 소돔의 멸망도 언급하십니다. 28절을 보면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도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는 인간의 기본적인 활동들이 열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역겨워하시는 대표적 두 사건이 노아의 홍수 때와 소돔의 멸망인데 그 원인이 바로 이와 같은 인간의 기본적인 활동이라는 것이 놀랍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굉장히 의도적으로 이러한 표현을 하고 계십니다. 우리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어기는 자들을 역겨워하실 것 같습니다. 부모를 거역하고 살인하고 간음하고 도둑질하고 거짓말하고 이웃의 것을 탐내고 마약과 도박에 빠지고 주색으로 방탕해야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먹고 마시고 결혼하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한 모든 인류의 일상사입니다. 너무나 일상적이고 필연적이며 필수적인 활동이라 이것을 하지 않고는 인간은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러한 일들을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시는 이유로 지목하시며 마음에 세상을 품은 상태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주님이 말씀하고 계신 역겨움의 이유를 생각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멸망의 예를 드시기에 앞서 25절에서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어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하시며 그리스도 연쇄 사건을 예고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 연쇄 사건과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심이 드러난 대표적 사건인 노아의 홍수와 소돔의 멸망을 연관시키십니다. 그리고 그 역겨움의 원인으로 먹고 마심을 비롯한 일상적 삶의 모습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이는 곧 마음에 세상을 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되 그 일이 마음에 붙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고, 시집가고 장가들되 그 일이 마음에 붙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애초에 마음이 왜 존재하는가를 생각할 때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배우자에게 쓰라고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먹고 마시는 일에 쓰라고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마음은 이 세상의 어떤 공간에도 들어오실 수 없이 크신 하나님을 모셔 들이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이 목적 하나를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타락하여 이 목적을 위해 마음을 쓰지 않고 먹고 마시는 일에 마음을 쓰게 되었습니다. 시집가고 장가드는 일에 마음을 쓰게 되었습니다. 물건을 사고파는 일에 마음을 쓰게 되었습니다. 심는 일에 마음을 쓰게 되었고, 집 짓는 일에 마음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바로 하나님께서 역겹게 여기십니다.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바리새인들은 청결한 자들이었습니다. 악취가 날 리가 없고 역겹게 여겨질 요소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뻐하시기에 합당한 자들로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의 연쇄 사건은 별세 즉 엑소도스(ἔξοδος)로써 세상을 탈출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마음에서 하나님을 갖기를 원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가지기 위해 세상을 탈출하기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그리스도 연쇄 사건의 예표로써 세상을 탈출하기 위한 기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번제는 곧 마음에 세상을 담은 내가 죽었음을 인정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성전에서 번제를 드리면서도 마음이 세상을 탈출하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이 남들보다 특별히 더 악한 행동을 했던 것은 아닙니다. 남들처럼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시집가고 장가들고 심고 집 짓는 일들을 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23장 27절에서 이들을 향하여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비판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점은 마음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으로부터 이루어지는 세상일에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마음을 이 세상 안에 가두어 두지 않습니다. 마음을 본연의 용도대로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일에 사용합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용도를 모른 채 티끌 같은 세상일에 마음을 다 빼앗기고 있습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한 번 더 상기해봅니다. 말씀을 들으시는 성도님이 어느 날 마음에 드는 티를 발견하여 살까말까 며칠을 고민하셨다고 합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티 한 장을 사느냐 마느냐에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을 빼앗길 수 있는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드는 문제는 일상적인 일들입니다. 이러한 일상들에 우주보다 더 큰 마음을 쏟아붓는 것이야말로 노아의 홍수와 소돔의 멸망에 비견될 만한 역겨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이 세상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는 것은 이처럼 중요한 문제입니다.
앞서 열 명의 나병환자가 치유 받은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때에 사마리아 사람만이 치유 받은 것을 제사장에게 보인 후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께 되돌아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나의 의식은 연극이 공연되는 극장이라고 생각해보시기를 바랍니다. 무대 외에는 깜깜한데 조명이 배우를 비춥니다. 이와 같이 나의 의식은 세상 모든 일에 대해 죽어서 깜깜해질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화로운 조명이 비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상태에서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들고 사고팔고 심고 집도 지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일상적 삶에서는 내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에 하나님의 마음이 개입됩니다. 시집가고 장가드는데 하나님의 뜻이 개입됩니다. 물건을 사고파는 일에, 심고, 집 짓는 일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져 갑니다. 그러한 중에도 내가 하는 일이란 의식 안에 하나님의 영광만을 유지하는 것뿐입니다. 마음은 의식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의식에서 일등으로 붙잡으면 마음에서도 하나님을 일등으로 빨아들이고 흡수하고 추구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소원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삶에 위선을 거꾸로 떠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바리새인들은 의식 안에서 돈이 영광을 받고 있었습니다. 돈이 영광을 받는 중에 하나님과 관련된 모든 일에 적극적으로 솔선수범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사람에게서는 이와는 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의식 안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중에 세상일에 누구보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행동을 해나갑니다.
사람들이 볼 때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좋아하고 공경하는 자들이라 착각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삶을 살아가는 자들에 대해서는 세상을 긍정적으로 살고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살아가는 것처럼 오해하게 될 것입니다. 누구보다 맛있게 먹고 즐겁게 마십니다. 그러나 그 감사와 기쁨은 먹고 마시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의식의 무대에서 영화로운 조명을 받으시고 계신 상태에서 나타나는 기쁨과 만족이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기 전에 이미 기쁘고 만족한 것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시집가고 장가들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배우자가 얼마나 훌륭하면 저렇게 웃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사람들은 시집가기 전에 장가들기 전에 이미 행복합니다. 배우자와 마주하기 전에 이미 기쁩니다. 이미 기쁨에 겨운 상태에서 배우자를 대하니 즐거움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겉과 속이 달랐던 바리새인과 정 반대입니다. 속에서는 전혀 배우자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좋아할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좋아한 결과로 겉으로는 배우자를 좋아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본 14장 26절에서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마음에서 세상을 좋아하지 않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고 그 결과 오히려 누구보다도 관계가 좋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때로는 일방적인 좋아함으로 보일지도 모릅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가 못되고 부족하여도 사랑합니다. 밖에서 볼 때는 돌아도 단단히 돈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 안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중이기에 배우자의 못되고 부족함을 상관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의 아닌 위선입니다.
배우자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 같을지라도 실제로는 하나님만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만 영화로운 조명을 받으시고 의식이 하나님을 위한 무대가 될 때에 우리의 마음 공백은 하나님을 모셔 들이게 됩니다. 이때 세상을 좋아하는 사람들보다 세상을 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활기차고 지치지 않고 열정적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 앞에서 본의 아니게 위선을 떨게 되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지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저렇게 적극적이고 긍정적으로 세상을 사는 이유를 세상을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실제로 좋아하는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마음이 세상을 탈출해서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만을 좋아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사람은 본의 아니게 위선을 떠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만을 의식하며 살아가기는 바리새인을 거꾸로 생각해보면 됩니다. 바리새인은 마음에서 돈을 일등으로 붙잡은 자들이었고 돈에게 영광을 돌리는 자들이었습니다. 돈을 벌고자 하나님을 위해 가장 열심인 모습을 보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와는 반대의 삶을 살아가면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상태에서 그 누구보다도 세상을 지치지 않고 항상 기뻐하고 감사하는 가운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고 마음이 이 세상에 갇힌다면 노아의 홍수와 소돔의 멸망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가장 역겹게 여기실 것입니다. 우리는 바리새인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서 본의 아니게 위선을 거꾸로 떠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내 마음이 세상을 탈출함에 있는 힘을 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버지만이 영광 받으시고 아버지가 일등 되시며 아버지로 인해 기쁨을 갖게 해주심으로써 사람들이 위선을 떤다고 여길 정도로 세상을 열정적이고 지치지 않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