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은 바다를 낀 항구다. 지금은 고속도로 등 육로의 발달과 자동차가 늘어 바다를 통해 외지로 나가는 게 드물지만 예전에는 마산 앞 바다를 통해 배를 타고 인근의 통영이나 거제, 부산, 진해, 그리고 좀 멀리는 여수, 목포 등을 오갔다. 그 배들이 오가며 머무는 선착장이 뱃머리인데, 옛 마산의 뱃머리는 남성동 선창가에 있었다. 지금은 그곳이 매립돼 정확한 위치를 가늠하기가 쉽지는 않은데, 마산에 오래 사신 분들은 대략적으로 현재의 남성동 농협지점 부근이 그곳이라고 짚는다.
많은 배들이 남성동 뱃머리를 기점으로 오가던 1960년대가 마산으로서는 아름다운 바다를 가진 정감 나는 항구도시가 아니었나 싶다. 그 무렵 천신호라든가 동일호, 명성호, 갑성호 등 큰 여객선들이 들어올 때는 노래 소리가 선창가일대에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이를테면 배가 들어온다는 신호였는데, 그게 참 구성지고 한갓 졌을 뿐더러 마산시내 어디서든 선창에 배가 들어온다는 사실을 그 노래 소리로 알 수 있었다. 노래는 바다와 항구를 주제로 한 유행가들, 그 가운데 고운봉의 '선창'을 제일 많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울려고 내가 왔던 가/웃으려고 왔던 가/비린내 나는 부둣가에/이슬 맺은 백일홍..."
마산사람들로서는 당시 마산 연안을 오가던 배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떠오르는 게 천신호(天神號)일 것이다. 여러 여객선들 가운데 가장 컸고 뱃고동소리도 우람했지만, 마산과 갖는 연조가 오래돼 마산에서 좀 오래 산 사람이라면 누구나 남성동 뱃머리, 그리고 배하면 천신호를 연상할 정도로 뭔가 친숙감 같은 게 있었다.
한 여름이면 뱃머리 부근의 바다에도 많이들 뛰어들어 헤엄을 즐겼다. 배들이 오가며 일으키는 물살에 몸을 맡기는 것도 헤엄의 한 즐거움이었는데, 천신호가 오갈 때는 긴장감 속에서 물살에 몸을 맡겼다. 배가 커 물살도 컸기 때문이다. 이런 경험을 어린 시절에 가졌다면 누구든 천신호는 그만큼 크고 우람한 배로 느꼈을 것이라는 얘기다.
1960년대 통영항을 드나드는 천신호와 명성호
‘천신(天神)’이라는 배가 마산에 처음 등장한 것은 일제강점 초기인 1912년이니 100년이 훨씬 더 된 시기다. 목발 김형윤 선생의 '마산야화'에 따르면 1912년 일본인들은 마산과 진해 현동을 오가는 여객선으로 목조범선 대신 '빨락선'이라는 발동선을 취항시키는데, 그 배들 속에 제1, 제2, 제3 천신환(天神丸)이 들어있어 이게 마산에 취항한 천신호의 효시로 보인다.
이 무렵 일본인들이 판치는 마산연안 해운업에 김석문(金錫汶)이라는 조선 사람이 등장한다. 남해 출신으로 마산공립보통소학교(현 성호초등학교) 7회 졸업생인 김석문은 마산-통영 간 여객선 노선허가를 얻어 배를 띄우는데, 일본인업자들의 횡포와 오만한 태도에 분이 끓고 있던 마산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으며 사업이 승승장구한다.
그렇게 돈을 번 김석문은 일본 조선소에 의뢰해 제작한, 당시로서는 최신의 호화여객선 '태운환(太運丸)'을 취항시켜 일본인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하지만 '태운환'은 비운의 여객선이었다. 마산 근해에서 발생한 지금까지의 해난 사고 가운데 가장 큰 사고로 많은 사람을 죽게 한 배가 '태운환'이었기 때문이다. 400 여명의 승선객 가운데 절반인 200 여명이 익사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일제강점기 시절 천신호의 대형 해상사고 얘기도 전한다. 1928년 4월12일 창원-진해 간 철도 개통을 축하해 경남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마침 진해벚꽃놀이와 관련해 일본당국에서 진해까지 무료시승을 베푸는데, 이에 따라 마산에서 진해로 배를 타려는 사람들이 마산에서 제3 천신호를 탔다가 큰 변을 당한다. 사고원인은 정원을 세배나 초과해 중량을 이기지 못하고 배가 진해 통제부부두에 정박하려다 기울어지면서 승객들이 익사한 사건이다. 익사자는 모두 부녀자였다고 한다.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마산에서 건조된 천신호가 운항한다. 제2 천신호로 명명돼 일제 때 만들어진 제1 천신호와 함께 그 해 12월 마산과 거제 장승포 간을 운행하는데, 제1 천신호는 얼마 되지 않아 배가 낡아 해체 된다. 당시 마산항무청에 등록된 배의 소유주는 거제도 사람인 김용운. 신판천과 마산사람인 김봉수 3인의 공동경영체제로 1962년까지 운영되다 1963년부터는 각자 독립해 운영했다고 한다. 마산-거제를 오가는 천신호와 함께 마산-부산 간 여객선도 해방 후 취항하는데 배의 이름은 천세호로, 소유주는 최재덕인 것으로 나와 있다. 뒤이어 마산-통영 간을 오가는 제5 신천호와 대창호가 나온다.
이들 천신호를 포함한 마산연안의 여객선들은 6.25전쟁과 함께 위축기에 접어든다. 전쟁으로 인해 모든 선박이 징집되고 운항이 통제됐기 때문이다. 다시 활기를 되찾은 것은 1953년 휴전 후다. 마산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3인의 천신호가 마산-거제에 이어 마산-여수 간을 운항하기 시작한다.
1960년대 마산 뱃머리의 또 하나의 명물 여객선이었던 동일호가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다. 부산과 거제 욕지 간을 오가던 제3 동일호가 마산 항에 정기적으로 기항하면서 부터다. 이와 함께 마산인근 해안부락 주민들을 위해 마산-시락(의창군)간 명성호, 그리고 마산-귀곡(구실) 간 웅남호가 운항을 시작한 것도 이 때쯤이다.
이 당시가 마산을 중심으로 한 여객선의 전성기였던 것으로 전해진다. 육로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마산과 거제. 통영. 부산. 여수를 잇는 해상교통을 그야말로 황금기였다는 얘기다. 공산품과 수산물, 호남곡창지대의 쌀 등이 모두 배를 통해 운송됐고, 이 지역의 사람들은 대부분 배를 타고 다녔다. 한산도를 포함한 한려수도 등으로 수학여행을 가는 중. 고등학생들도 모두 배를 탔다. 당시 이들 연안 여객선 당 수송했던 여객 수는 연 평균 3, 4만명이었다는 통계가 있다.
‘충무김밥’이 나온 것도 이 무렵이다. 오래 배를 타고가면서 바닷길과 허기에 지친 상태에서 입맛을 살려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게 김밥만한 게 없었을 뿐더러 내용물이 맛있고 단순했기 때문이다. 기항하는 배를 상대로 김밥을 파는 장사꾼들은 30여분 남짓한 시간 내에 팔아야 했기에 김밥광주리를 머리에 인 김밥장수들은 객선 안을 이리저리 다니느라 분주했다. 그 김밥이 언제부터 ‘충무김밥’이라 이름 붙여진지는 모르겠으나, 당시엔 어디서든 기항하는 곳에서는 김밥장수들이 김밥을 팔았다.
명성호가 접안하고 있는 모습
천신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객화물선 마산만을 중심으로 있었던 배는 아니었던 것 같다. 1950년대 말쯤 마산-노량-삼천포-여수를 거쳐 통영을 오가던 제7 천신호는 통영의 복운상선공사에서 운영되던 여객선이었다. 1954년 6월 전남 완도군 금얼면 앞바다에서 정부소유 소금 1600가마니를 싣고 가다 암초에 충돌한 배도 천신호였는데, 목포삼성상선 소속이었던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
천신호는 배도 컸지만 그 배를 모는 선장의 영향력도 셌다. 한마디로 카리스마가 있었다는 얘기고 승객들도 이를 당연히 했다. 승객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지만, 그만큼 선장에게 주어지는 재량도 컸고 이에 대한 승객들의 외경심도 따랐다는 얘기다. 지금처럼 장비라든가 예보시스템 등이 잘 구비되지 않았던 시절, 배의 운항은 선장의 경험에 의지하는 의존도가 높았던 때문이기도 하다.
당시 배를 타고 다니면서 물건을 파는 보따리장사들이 많았다. 이들이 취급하는 물품 중에는 밀수품도 있었다. 이를 단속하고 제재하는 것도 선장의 몫이었다고 전해지는데, 이게 좀 지나쳐 엉뚱한 일을 저지르는 선장도 있었다고 하는데, 예컨대 선장이 밀수에 개입하는 경우가 그것이다. 1958년 12월5일자 동아일보는 천신호 선장 전 아무개가 일본으로부터 주사바늘을 밀수하다 입건돼 관세법 위반으로 “벌금 350만환과 이를 못 낼 시 하루 500환 씩 노역장 유치” 처해진 사건을 보도하고 있다.
좋은 일을 한 선장의 얘기도 있다. 마산출신으로 천신호와 영진호, 웅남도, 경복호 등 마산연안의 주요여객선 선장을 두루 거친 김정호(작고)는 1970년대 초 유류파동 때 여수에서 싼 연탄을 천신호 배에 가득 싣고 마산에 들여와 집이 있던 교방동 주민들에게 싼 값에 제공해 주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고 한다.
웅남호도 마산사람들의 기억 속에 많이 남아있는 배다. 1960년대 더운 한 여름, 남성동 뱃머리에서 구실해수욕장으로 출발하기 전 사람들이 너무 타 배가 좌우로 기우뚱거리다 몇몇이 물에 빠지는 소동 속에서도 유유히 뱃고동을 울리며 여름바다를 헤쳐 나가던 그 때의 웅남호가 생각난다.
마산 뱃머리에서 봉암을 거쳐 적기(적현), 구실(귀곡)-용호-석교를 오가던 웅남호는 마산 추산동과 구실에서 고아원을 하던 신철이 선주였다. 두 척이 교차하며 운항했던 웅남호는 당시만 해도 상당히 큰 목선이었으나, 배의 형태가 포도 등을 주로 싣고 다닐 목적으로 만들어져서 일반 배와는 사뭇 달랐다.
대개 노 젓는 배들이 선두가 ㅅ자(字) 형태를 취하고 있는 유선형인 반면 웅남호는 선두는 약간 뾰족하지만 짐 등을 실어야 했기 때문에 그 다음 칸부터는 넓었다. 2층으로 되어 있었으며, 제일 앞은 짐칸, 다음 칸은 여자들이 타는 칸(양옆으로 출입문이 있었다) 다음은 엔진실, 마지막 칸은 남자들이 타는 칸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특히 제일 끝 선미 부분에는 당시 껄렁한 학생들이 주로 차지하는 자리였다.
갑성호가 들어오고 있는 모습
천신호고 웅남호고 이제 마산에는 이 배들이 사라진지 오래다. 천신호는 1982년경까지 운행되다 사라졌으며, 웅남호는 그 전인 1978년 무렵 사라진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 마산에는 연안을 오가는 여객선이 한 척도 없다고 한다. 확인 차 마산지방해운항만청에 “정말 한 척도 없느냐”고 물어보았더니 서로들 자기 직무가 아니라며 전화를 돌려가며 바꿔주는데, 긴가민가 하는 애매한 답만 돌아왔다.
홈페이지에 통영해안터미널만 소개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 척도 없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창원에 무슨 크루즈터미널이 있다고 나와 있어 물었더니, 그것은 여객선이 아니고 마산 앞바다를 도는 유람선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