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
다리의 역사는 매우 장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사람들은 하천이나 계곡 위에 바람에 쓰러진 나무 또는 굵은 덩굴 등을 다리로 이용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격강천리(隔江千里)라는 말처럼 다리 없이는 강언덕과 언덕 사이가 천리나 되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이러한 불편을 다리가 해결해 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이제 다리는 우리의 생활에서 필요한 곳이면 어디나 놓여지기 때문에 그 종류 또한 다종다양하다. 하천이나 해협, 호수 등 물 위를 이어주는 것에서부터 도시 한복판의 대로(大路) 위나 건물과 건물 사이, 도로와 교차되는 철로 위에도 육교가 놓여져서 우리의 생활이 더욱 편리해지고 있다.
구조도 일반적인 고정식 외에 옛날 영도다리와 같은 도개식(跳開式), 압록강대교와 같은 개폐식(開閉式) 등 이색적인 다리가 있는 것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다리는 또한 예술작품의 대상이나 되는 듯 곳곳에서 장엄하고 우아한 모습들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유형(有形)의 다리와는 달리 다리 본래의 구실과 관련해서 중개(仲介). 매개(媒介)라는 뜻으로도 사용되어 사람과 사람, 나라와 나라 사이를 편리하게 이어주는 추상적인 뜻으로 쓰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다.
이두식표기법(吏頭式表記法)으로는 다리는 '다리(多利)' 하고 통한다고나 할까?
지난 달 28일은 공주(公州)에서 거군적(擧郡的)인 행사가 벌어진 날이었다. 공주대교 가설기공식(公州大橋架設起工式)이 그것이다.
이 고장 주민들의 오랜 숙원이 달성된 셈이다. 이제 1985년 5월의 준공일만 기다리면 될 것 같다.
공주대교의 필요성은 그날 식전에서도 설명이 있던 터였지만이 고장을 지나는 폭주하는 교통량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기왕의 금강대교(錦江大橋)만으로는 벅차다는 것이다. 현재의 금강대교는 1932년 도청을 대전(大田)으로 이전하면서 이 지방민을 쓰다듬기 위한 이른바 위무(慰撫)의 선물이었다고 하는데, 이제는 교폭도 좁고 노쇠현상(?)이 와서 문제가 있는 다리가 되었다고 한다. 이번에 착공한 공주대교는 현재의 위치로 확정되기까지 여론이 분분했던 것 같다. 한강대교와 같이 금강대교도 나란히 쌍둥이다리를 원하는 의견도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지만 외곽교량(外廓橋梁)으로서의 구실을 더 중요시한 듯하다.
쌍둥이 아우는 아니지만 금강대교는 앞으로 두 해만 지나면 현대적인 맵시를 갖추고 태어날 52년 손아래의 어엿한 동생을 하나 거느리게 되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1차 공사에서는 폭 20mm 중 11m만 완성한다니 우선은 반쪽짜리 다리가 될 것이 서운하다.
다리에 얽힌 속담 가운데 우리의 입에 가장 많이 올라 있는 것중의 하나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제 이 고약한 속담은 우리 사회에서 하루 빨리 자취를 감추었으면 좋을 것 같다. '화합(和合)의 시대(時代)'에 걸맞게 앞으로는 '다정한 사람은 큰 다리 위에서 만난다'로 바꾸면 어떨까?
공주대교도 앞으로 다정하고 낭만적인 명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사람과 수레의 통행이 연락부절 빈번할 것은 말할것도 없고.
(大田日報 '한밭춘추', 1983. 6)
첫댓글 다리에 얽힌 속담 가운데 우리의 입에 가장 많이 올라 있는 것중의 하나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제 이 고약한 속담은 우리 사회에서 하루 빨리 자취를 감추었으면 좋을 것 같다. '화합(和合)의 시대(時代)'에 걸맞게 앞으로는 '다정한 사람은 큰 다리 위에서 만난다'로 바꾸면 어떨까?... 본문 부분 발췌
한밭춘추 1983년 6월이란 숫자에 마음이 아려옵니다
그다리 위로 수많은 다정한 이들이 오고갔겠지요, 사람도 수많은 물류를 운송하는 차량들도.......
한밭... 대전의 명칭이 참 따뜻한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조성순 선생님의 수고로움에 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