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경태: 겨울 인생
겨울비 그치자 거센 한파가 몰아쳤다. 칼바람이 매섭게 얼굴을 스치고, 현관 문고리를 잡으니 손이 쩍쩍 달라붙는다. 생각만 해도 온몸이 오싹해진다.
서둘러 방한복을 꺼내 입고, 목도리를 찾는다. 마침 엊그제 아내가 사온 빨간 목도리가 떠오른다. 청바지도 하나 챙겼다. 안감에 기모가 들어 있어 따뜻한 그 옷. 아내가 청바지 전문점에서 29,800원에 샀다며 좋아했던 바지다. 생각해 보니 요즘 청바지를 자주 입는다. 늘 양복만 고집하던 내가 청바지를 즐겨 입으니 아내는 다리미질할 일이 줄었다며 한결 좋아한다.
시간이 흐르는 일이 요즘은 꿈만 같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한 달이 금세 지나가고, 일 년이 훌쩍 가버린다. 마치 거대한 달력이 내 눈앞에서 한 장씩 휙휙 넘겨지는 듯하다.
어릴 적 형제들과 이불 속에서 퀴즈 놀이 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일본에서 가장 빠른 사람은?”
“비사이로 막가!”
우리는 일제히 외치며 깔깔댔다.
“일본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도끼로 이마까!”
그 말이 나오면 우리는 마치 독립운동이라도 한 듯 통쾌해했다.
동생은 한술 더 떠서 “도끼로 이마까보다 더 무서운 사람은?” 하고 묻는다.
“깐이마 도로까?”
우리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일본에서 가장 심한 구두쇠 이름은?” 하면 “도나까와 쓰지마!“라며 한바탕 웃음을 쏟아냈다.
그때 우리가 덮었던 이불은 두툼한 목화솜이불이었다. 요즘은 가볍고 보온성 좋은 오리털 이불을 덮지만, 그 시절엔 다섯 명이 한 이불을 덮고 잤다. 서로 이불을 밀고 당기면서.
퀴즈가 끝날 즈음이면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그만 자거라.”
그러면 우리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킥킥대며 또 한참을 웃었다.
“안 잘래? 몽둥이 들고 간다!”
어머니의 호령이 떨어지면 그제야 우리는 숨을 죽였다. 정말로 몽둥이를 들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 시절, 밤이 되면 천장에서 쥐들이 달리기 시합을 했다. 우리 집은 초가집이었고, 천장은 얇은 나무 합판으로 만들어져 있어 쥐들이 드나들기 쉬웠다. 밤이 되면 녀석들이 천장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뛰어다녔다. 그러면 동생 중 하나가 “냐~옹!” 하고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곤 했다.
지금 돌아보면 꿈결 같은 시간이다. 너무도 소중한 순간들이 너무 빠르게 지나가버렸다.
어릴 적엔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간다고 생각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어른이 되고 보니 시간이 너무 빠르게 지나간다. 하루가 1분처럼 느껴지고, 한 달이 하루 같고, 일 년이 한 달처럼 느껴진다.
20대의 얼굴은 자연이 주는 것이지만, 60대의 얼굴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 했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자기다운 모습이 되어간다. 그리고 행복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는 것도 깨닫게 된다.
겨울의 끝자락에서 문득 인생을 돌아본다. 지나온 시간들이 하나둘 떠오르며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진다.
2025. 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