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자요산 지자요수(仁者樂山 智者樂水)라 했다. 헌데 기자는 인자 근처에도 가지 못하지만 원래부터 산을 좋아했다. 고향집이 두메 산골이었던지라 어릴 때부터 산 오르내리기를 많이 했다. 이 버릇은 20여 년 전 상경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주말이면 산을 찾기 위해 서울대입구에 하숙방을 얻었을 정도다. 직장에 나가지 않는 날은 자주 인근 관악산에 올랐다. 주인 할머니는 산에 갔다 올 때면 항상 따로 아침밥을 챙겨주셨다.
요즘도 날 좋은 주말만 되면 어느 산을 가볼까 하고 거실에 큼직한 지형도를 펼쳐 놓고 아이와 함께 의논하곤 한다. 지도상으로만 이산저산 몇 번 오르내리기를 거듭하고는 못간 경우도 더러 있다.
얼마 전에는 서초 올레길을 찾아 나섰다. 멋진 누에다리가 있다기에 더욱 마음이 끌렸다. 2호선 방배역에서 내려 혹시나 역내 안내가 되어 있나 유심히 살펴보았으나 찾을 수 없었다. 막무가내로 지하철 역무원실을 찾아갔다. 서리풀공원, 몽마르뜨공원, 서리골공원 등을 동원하며 가는 길을 물었더니 직원들도 정확히 잘 몰랐다. 다행히 한 분이 컴퓨터로 지리를 검색하더니 가는 방향을 친절하게 일러 주었다.
4번 출구에서 서울고등학교 쪽으로 올라가 효령대군의 신위를 모신 청권사 쪽으로 오르는 것이 정코스였으나, 함께 간 딸아이 때문에 코스를 조금 변경해야 했다. 평소 외국인 접하기를 좋아하는 아이는 프랑스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서래마을 쪽으로 가자고 했다. 역사를 나와 길을 물어 10분 정도 걸으니 서래마을 못 미쳐 방일초등학교가 나왔다. 학교 앞에서 마침 같은 코스의 산행을 하신다는 방배동 거주 할머니를 만났다. 어르신의 안내대로 학교 바로 뒷길을 오르니 그곳이 바로 서초올레길 코스였다.
길 아래로 펼쳐진 집들이 서래마을이라고 하자 딸아이는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다보았다. 그 때 마침 프랑스인 몇 분이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들을 데리고 나와 올레길 산행을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모습을 한참 지켜보던 딸아이는 가까이 다가가 외국인 아이들을 어루만지고는 좋아 어쩔 줄 모르며 소원을 풀었다는 듯이 기분이 좋아졌다.
길을 안내해주고 한동안 함께 걸었던 할머니는 서초 올레길 절반 코스를 매일 30여 분씩 산행한다시며 건강에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했다. 산행을 한 지 채 10여 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스쳐 지나간 사람만도 수십 명이나 되었다. 젊은 남녀에서부터 노인, 어린이를 포함한 가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민들이 산행을 즐겼다.
산책로는 울창한 참나무와 상수리나무 사이의 폭 1미터 남짓한 좁은 흙길이었지만 흙냄새와 숲속 여기저기서 우짖는 새소리, 발아래 깔린 바삭바삭 낙엽 밟는 소리에 힘들이지 않고 시간 가는 줄 모르며 산행을 만끽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주민들이 건네는 인삿말에 추운 몸은 녹아내리고 폭 좁은 산책로도 더없이 풍요롭게만 느껴졌다.
길 옆 군데군데 시를 적어 세워둔 안내판 덕에 빠듯한 산행 시간에도 잠깐씩 시를 감상할 여유로움을 가질 수 있는 것도 좋았다. 상수리나무와 참나무 등의 고사목을 재활용해 차곡차곡 쌓아 마련한 소동물 서식지에서는 다람쥐가 들락거리며 사람들에게 반갑게 인사하는 듯했다. 도중에 딸아이는 길 옆 나무에게 다가가더니 고사리 같은 손가락으로 나무 껍질을 살금살금 긁으며 "나무야, 간지럽지 않니?"라고 물으며 깔깔댔다.
서초올레길은 일종의 3종 세트다. 방배역 쪽 서리풀공원과 반포 쪽 서리골공원, 그리고 그 사이 몽마르뜨공원을 한 산책로로 이어놓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19일 몽마르뜨와 서리골을 이어주는 환상적 누에다리가 개통되고, 서리풀과 몽마르뜨 사이에는 보행육교, 일명 서리풀다리가 개통되면서 시민 서비스의 질이 배가되었다.
관악구에 거주하는 문현태(50) 씨는 "집 근처 높은 관악산을 오르다 동네길 같은 서초올레길을 산책하니 또 다른 느낌이 든다. 산책로 주변엔 볼거리들이 많아 아이들이 지겨워하지 않는다. 끊어져 있던 공원들을 하나로 이어놓으니 도심 속 멋진 산책 코스가 탄생했다. 친구들에게도 많이 소개해 가족끼리 올 수 있도록 권하고 싶은 곳"이라며 서초올레길을 찾은 것이 자신은 물론 온 가족에게 행운이라고 했다.
서초올레길의 전체 코스 길이는 3㎞ 남짓. 하지만 가파르지 않아 쉬지 않고 걸으면 1시간 정도면 주파할 수 있다. 경사가 심하지 않고 평평한 길도 많아 부모 따라 산책을 나선 어린이들의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조금 가파른 곳은 미끄러지지 않게 계단목으로 정리해 놓았고, 양쪽 안전 기둥은 밧줄로 이어서 오르내릴 때 편하게 잡고 다닐 수 있도록 해놓았다. 그런가하면 맨발로 다닐 수 있는 향토길도 잘 조성되어 있다.
특히 국내외를 막론하고 유일무이한 누에다리는 새로운 볼거리다. 자동차가 쌩쌩 달리는 8차선 반포로 아파트 8층 높이의 상공에 설치된 폭 3.5m, 길이 80m의 위용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게다가 살아 꿈틀거리는 누에의 생동감 넘치는 트러스 구조는 산책 나온 모든 시민들의 발걸음을 잠시 멈추게 할 정도.
몽마르뜨공원 쪽 누에다리 입구에는 고치 위에 앉은 누에 두 마리가 둥글게 몸을 구부려 입을 맞추는 모습의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는데 사진 촬영 장소로 많이 이용된다. 누에는 부와 다산을 상징하며, 두 마리의 맞닿은 입 부분을 혼자 쓰다듬으면 부자가 되고, 연인과 함께 만지면 사랑이 이루어지고, 부부가 나란히 만지면 자손이 번성한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산책 도중 외국인들도 자주 만나게 된다. 산책로 곳곳에 이정표가 잘 설치되어 있었지만 하산 도중 안전한 길로 가기 위해 산행하는 분께 “가까운 지하철역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합니까?”라고 길을 물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외국인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외국인은 우리말로 방배역과 서초역, 고속버스터미널역으로 가는 모든 방향의 길을 잘 안내해 주어 아이와 함께 감탄했다.
2호선 방배역 4번 출구를 나와 청권사 쪽에서 출발해 서리풀공원→ 서리풀다리→ 몽마르뜨공원→ 누에다리→ 서리골공원으로 하산하면 바로 고속버스터미널역(3, 7, 9호선)으로 이어진다. 취향에 따라 고속버스터미널역에서 반대 방향으로 산책해도 마찬가지겠지만, 전 코스를 산책할 경우라면 출발점을 방배 쪽으로 할 것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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