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여러 가지 불사(佛事)
阿難이 白佛言하되 未曾有也로다 世尊이시여 如此香飯도 能作佛事닛까 佛言如是如是니라
阿難아 或有佛土는 以佛光明으로 而作佛事하며 有以諸菩薩로 而作佛事하며 有以佛所化人으로
而作佛事하며 有以菩提樹로 而作佛事하며 有以佛衣服臥具로 而作佛事하며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미증유입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향기 밥으로도 능히 불사를 짓습니까?”
부처님이 말씀하였다. “그렇다. 그렇다. 아난아,
혹 어떤 불토에는 부처님의 광명으로 불사를 지으며
또 어떤 국토는 여러 보살로 불사를 지으며
어떤 국토는 부처님이 변화한 사람으로 불사를 지으며
어떤 국토는 보리수로 불사를 지으며
어떤 국토는 부처님의 의복과 와구(臥具)로서 불사를 짓느니라.”
강설 ; 불사란 중생 교화(衆生敎化)다. 중향국(衆香國)에서는
향으로 불사를 짓고 있는 모습을 먼저 보였다
이어서 중생을 교화하는 갖가지 불사의 예를 들었다.
어떤 국토는 부처님의 광명으로 불사를 짓는다.
광명이란 깨달음의 지혜를 상징한다.
세상에는 빛이 있어야 사물을 분별하고 길을 갈 수 있듯이
인생을 살아가는데도 지혜가 있어야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별한다.
지혜가 없는 어리석은 중생은 명예나 금전에 눈이 어두워지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들지만, 목적한 바를 성취하기란 어렵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광명을 발하는 불을 가장 좋아한다
. 법당에 인등(引燈)을 밝히는 일이 그렇고 부처님 오신 날 등불을 밝히는 일이 그렇다.
모두가 지혜를 상징한다. 혹은 보살이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만으로 불사가 되기도 한다.
어떤 가르침보다도 훌륭한 사람에게서 감동을 받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有以飯食으로 而作佛事하며 有以園林臺觀으로 而作佛事하며 有以三十二相과
八十隨形好로 而作佛事하며 有以佛身으로 而作佛事하며 有以虛空으로 而作佛事어든
衆生이 應以此緣으로 得入律行하며 有以夢幻影響鏡中像과 水中月熱時燄인 如是等喩로 而作佛事하며
어떤 국토는 음식으로 불사를 지으며
어떤 국토는 동산, 숲, 누각으로 불사를 지으며
어떤 국토는 32상과 80수형호로서 불사를 지으며
어떤 국토는 부처의 몸으로서 불사를 지으며
어떤 국토는 허공으로 불사를 짓는데 중생이
꼭 이러한 인연이라야 계율의 행에 들어가며
어떤 국토는 꿈과 환영과 메아리와
거울 속의 영상과 물속의 달과 아지랑이로 불사를 짓느니라.
강설 ; 중생을 교화하는 불사에는 여러 가지 방편이 있을 수 있다.
경전에서 소개한 대로 음식이라든가 동산이나 숲이나
32상 80종호와 같은 것으로 중생을 교화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에게는 비유를 알맞게 들어 설명함으로써
쉽게 교화를 받는 수도 있다.
그러므로 한두 가지의 내용이나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한다고 고집해서는 옳지 않다.
반드시 참선이어야 한다거나
염불이어야 한다거나
간경이어야 한다거나
주문이어야 한다거나
절이라야 한다거나 하는 주장은 다만,
주장하는 사람의 편견일 뿐이다.
有以音聲․語言文字로 而作佛事하며 或有淸淨佛土는 寂寞無言하야 無說無示하며
無識無作無爲로 而作佛事하나니 如是하야 阿難아 諸佛의 威儀進止와 諸所施爲가 無非佛事니라
어떤 국토는 음성과 언어와 문자로서 불사를 지으며
혹 어떤 청정국토는 적막하고 말이 없으며 설법도 없고
보임도 없으며 앎도 없고 지음도 없고 작위(作爲)도
없는 것으로 불사를 짓느니라.
이처럼 아난아 모든 부처님은 위의(威儀)의 나아가고
머무는 온갖 시위하는 바가 불사가 아닌 것이 없느니라.
강설 ; 또는 말을 하는 것으로 불사를 지을 수도 있고 반대로 침묵으로서도 불사를 지을 수도 있다.
설명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고 앎도 없고작위(作爲)도 없고 조작이 없는 것으로도 불사를 지을 수 있다.
제불위의진지 제소시위 무비불사(諸佛威儀進止 諸所施爲 無非佛事)라는 말은
역시 유마경의 명언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깨달은 사람은 무슨 짓을 하든
그 모두가 중생을 교화하는 훌륭한 불사가 된다는 뜻이다.
반대로 깨닫지 못한 사람은 비록 정법(正法)을 설하더라도 그것은 불사가 되지 못한다.
阿難有此四魔나 八萬四千諸煩惱門하되 而諸衆生은 爲之疲勞어든 諸佛은 卽以此法으로
而作佛事하나니 是名이 入一切諸佛法門이라 菩薩이 入此門者는 若見一切淨好佛土하되
不以爲喜하고 不貪不高하며 若見一切不淨佛土하되 不以爲憂하야 不碍不沒하고 但於諸佛에
生淸淨心하야 歡喜恭敬하며 未曾有也라하나니 諸佛如來의 功德이 平等이언마는 爲敎化衆生故로
而現佛土不同이니라
아난아, 어떤 국토는 네 가지 마군이나
8만 4천 온갖 번뇌를 모든 중생은 피로하게 여기지만,
모든 부처님은 곧 이 법으로써 불사를 짓는다.
이것이 이름이 일체 제불(諸佛)의 법문에 들어가는 것이라 한다.
보살이 이 법문에 들어간 사람은 만약 일체 청정하고 아름다운
불토를 보더라도 기뻐하지 아니하고 탐내지도 아니하고 높이 여기지도 아니한다.
만약 청정하지 못한 불토를 보더라도 근심하지 아니하고 꺼리지 아니하고 숨지도 아니한다.
다만, 모든 부처님께 청정한 마음으로 환희하고 공경하며 미증유(未曾有)라고 여긴다.
모든 부처님 여래의 공덕이 평등하지만,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불토가 같지 아니함을 나타내느니라.
강설 ; 사마(四魔), 즉 네 가지 마군(魔軍)이란
번뇌마(煩惱魔),
오온마(五蘊魔),
천마(天魔),
사마(死魔)다.
일반적으로 불교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이 마군을 가장 싫어한다.
그래서 참선을 하거나 경(經)을 읽어나 집을 짓거나 행사를 하거나
모든 일에 번뇌나 마군은 장애물로 여겨서 없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런데 유마경에서는 이 네 가지 마군뿐만 아니라 8만 4천 번뇌까지
불사를 짓는 소재가 된다고 하였다.
마찬가지로 8만 4천 번뇌는 실로 번뇌가 아니라 진여 불성(眞如佛性)의 미묘한 작용이다.
阿難아 汝見諸佛國土하되 地有若干이언정 而虛空은 無若干也니 如是하야
見諸佛色身이 有若干耳언정 其無碍慧는 無若干也니라
아난아, 그대가 모든 부처님의 국토를 보는데 땅은 얼마쯤 되지만,
허공은 얼마쯤이 없다
이처럼 모든 부처님의 색신(色身)을 보는 데는 얼마쯤이 있지만,
걸림이 없는 지혜는 얼마쯤이 없다.
강설 ; 중생을 교화하는 데는 먼저 지혜가 있어야 한다.
부처님은 깨달음의 지혜로 중생을 교화하는데 그 지혜는 어느 정도가 된다는 양(量)이 없다.
마치 땅덩이는 그 양이 있지만,
저 허공은 양이 없듯이 끝이 없고 다함도 없다. 그러므로 불사를 짓는 데도 일정한 법칙이 없다.
부처님에게는 무엇이나 다 중생을 교화하는 불사의 방편이 된다. 또한,
저 허공은 하나지만 천만 가지 사물들을 다 감싸듯이 부처님의 지혜도 하나지만
천만 가지 교화 방편이 다 갈무리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