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경록 제20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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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수 지음 |
송성수 번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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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정인(正因)의 불성은 중생과 공동 소유이며, 경에서 “관지(觀智)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바가 아니니라”고 말한 대로라면 도는 언제나 드러나 있을 터인데 어떻게 범부는 미혹되어서 깨치지 못하는가. |
[답] 『지론(智論)』에서 이르기를 “중생의 심성은 마치 날카로운 칼과 같아서, 진흙 베는 데 쓰기만 하면 진흙은 이루어지는 바도 없고 칼은 날마다 손상만 되어 간다”고 했으니, 본체의 체성은 언제나 미묘한데 중생 스스로가 거칠게 할 뿐이다. 잘 이용하기만 하면 이내 본래의 미묘함에 합치한다. |
또 마치 하나의 그릇 속의 물은 언제나 싱거운 맛 그대로인데 만약 감초(甘草)를 넣어 두면 달고 황련(黃蓮)을 담가 두면 쓰게 되는 것처럼 중생의 마음의 물도 그와 같아서 허망한 물들음을 일으키면 범부요 진공(眞空)에 합하면 성인인 것이니, 그 마음의 성품은 일찍이 변했거나 달라진 일이 없다. |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말하기를 “비유하면 깨끗한 해와 달이/따뜻한 거울인양 허공에 있으면/그림자가 모든 물에 나타나지만/물에게 뒤섞이지 않는 것처럼/ 보살의 깨끗한 법의 바퀴도/또한 그러한 줄 알아야 하리니/세간 마음의 물에 나타나되/세간에 뒤섞이게 되지 않느니라”고 함과 같다. |
『화엄소(華嚴疏)』에서 이르기를 “온갖 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바로 미혹할 바[所迷]니, 인연이 생기어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마치 허깨비와 같고 인연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성품이 없다. 둘째는 바로 능히 미혹함[能迷]이니, 두루 헤아림이라 물건이 없기 때문에 마치 허공과 같고 허망한 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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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림이기 때문에 모양이 없다”라고 함과 같다. |
또 깨닫지 않았기 때문에 있음을 모르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감당해 내지 못하면서 무명만을 일으켜 공연히 뒤바뀐 생각을 이룰 뿐이니, 마치 밤에 새끼가 움직이지도 않는데 뱀이라고 의심하며 어두운 방이 본래 비었는데 귀신이 있다고 두려워함과 같다. |
그러므로 알라. 본래는 미혹과 깨침이 없는데 망령되이 오르락내리락함이 있고, 옛날에는 깨침을 미혹했는데도 미혹된 것 같았고 지금에는 미혹함을 깨쳤는데도 깨쳤음이 아니다. 다만 안에서 스스로 막혔음만을 보는 것은 객진(客塵)이 막은 바인데 체성 위에서 멀고 가깝다는 뜻을 나누고 성품 안에서 범부와 성인이라는 헤아림을 세우도다. |
『승사유범천소문경(勝思惟梵天所問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
“범천이 문수사리에서 물었다. |
‘비구가 어떻게 하면 부처에 친근하게 되었다 하겠습니까?’ |
대답하였다. |
‘범천이여, 만약 비구가 모든 법 안에서 법이 가깝거나 멀음이 있다고 보지 않으면, 이러하면 부처에 친근하게 되었다 하느니라.’” |
『대집경(大集經)』에서 이르기를 “조그마한 모양의 한 법의 것도 깨닫지 않아야 여래가 세간에 출현하셨음을 분명히 알 수 있나니, 출현함이 없는 출현이 바로 부처님의 출현이니라”고 했다. |
그러므로 만약 언제나 부처를 본다는 한 법도 보지 않으면 천 리의 바람과 같고, 만약 부처를 보지 않는다는 한 법이라도 보면 호(胡)나라 월(越)나라 처럼 떨어져 있어도 마주보는 것이리라. |
그러므로 알라. 마음을 저버려 경계에 합하면 단박에 진무(塵務)가 일어나고 경계를 저버려 마음에 합하면 법계를 뚜렷이 비춘다. 왜냐 하면 마음은 바로 의지할 바[所依]요, 법은 바로 능히 의지함[能依]이기 때문이다. 능히 의지함은 의지할 바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니, 마치 물은 의지할 바요 파랑은 능히 의지함이므로 물을 여의고 파랑이 없는 것처럼 마음을 여의면 법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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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마음은 바로 능히 냄[能生]이요 법은 바로 낼 바[所生]이니, 마치 나무는 불을 능히 내는지라 나무는 능히 냄이요 불은 낼 바이므로 나무를 여의고 불이 없는 것처럼 마음을 여의면 법이 없다. |
그러므로 알라. 마음에 즉하지 않고 도를 닦는 이는 마치 천 사람이 문에서 밀치므로 한 사람도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고, 만약 마음을 알아서 단박에 든 이는 마치 한 사람이 빗장을 뽑아서 만 사람을 통하게 함과 같다. 종경(宗經)의 요점을 얻는다는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함이로다. |
그러므로 묘한 성품은 이지러짐이 없는데 미혹과 헷갈림이 스스로 얻어지고, 한 법도 움직이지 아니하는데 향함과 저버림이 갑자기 나누어진다. 마치 『수능엄경(首楞嚴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
“부처님께서 부루나(富樓那)에게 말씀하셨다. |
‘또 네가 ㆍ물ㆍ불ㆍ바람의 본 성품이 원융하여 법계에 두루하였다면, 물의 성품과 불의 성품은 서로 업신여겨 깔보지 아니할까>라고 의심하며, 또 공과 대지가 다 법계에 두루하였으면, 서로 용납하지 못하리라>고 물었는데, 부루나야, 마치 허공의 체성은 여러 가지 모양은 아니로되 여러 가지 모양이 나서 설치는 것을 거부하지 않음과 같으니라. |
왜냐 하면 부루나야, 저 큰 허공에 해가 비치면 밝고, 구름이 끼면 어둡고, 바람이 불면 흔들리고, 비가 개면 맑고, 기운이 엉기면 흐리고, 먼지가 쌓이면 흙비가 되고, 물이 맑으면 비치기 때문이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여러 방면의 종류의 모양들이 저것들로 인하여 생기느냐, 허공에 있는 것이냐. |
만약 저것들로 인하여 생긴다면, 부루나야, 해가 비출 때에는 그것은 해의 밝음이라 시방의 세계가 똑같은 햇빛일 터인데, 어찌하여 공중에서 다시 둥근 해를 보게 되느냐. 만약 그것이 허공의 밝음이라면 허공 스스로가 비출 것인데, 어찌하여 밤중에 구름이 끼었을 적에는 빛을 내지 못하느냐. |
그러므로 알라. 이 밝은 것은 해도 아니요 허공도 아니며 허공이거나 해와도 다르지 않느니라. 모양으로 보면 원래 허망이라 따질 수 없나니, 마치 허공 꽃에서 허공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림과 같거늘 어떻게 서로 업신여긴다는 듯하다고 힐난하겠느냐. |
성품으로 보면 원래 진실이거늘 묘한 깨달음의 밝음뿐이니, 묘한 깨달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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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밝은 마음이 우선 물도 불도 아니거늘 어찌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것이라 묻는냐. 참으로 묘한 깨달음의 밝음 역시 그와 같아서, 네가 허공으로 밝히면 허공이 나타나고, 땅ㆍ물ㆍ불ㆍ바람으로 각각 밝히면 저마다 나타나고, 만약 한꺼번에 밝히면 함께 나타나느니라. |
어떤 것이 함께 나타남이냐 하면, 부루나야, 한 물 속에서 해의 그림자가 나타날 적에 두 사람이 같이 물속의 해를 보다가 동쪽ㆍ서쪽으로 제각기 가면 물 속의 해도 두 사람을 각각 따라가되 하나는 동으로 하나는 서로 가서 본래 표준이 없게 되나니, 해가 하나인데 어찌 하여 각각 가느냐> 하거나 마다 가는 해는 둘인데 어찌하여 하나로 나타났더냐>고 따지지 말지니, 완연히 허망하여 의거할 수 없느니라. |
부루나야, 네가 물질[色]과 공(空)으로써 여래장에서 서로 기울이고 서로 빼앗으므로 여래장도 따라서 물질과 공이 되어 법계에 두루하느니라. 그러므로 그 가운데서 바람은 움직이고 허공은 맑고 해는 밝고 구름은 어둡나니, 중생이 미혹해서 깨달음을 등지고 티끌에 합하므로 진로(塵勞)를 내어 세간의 모양이 있느니라. |
나는 미묘하게 밝아서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음으로써 여래장에 합하므로 여래장의 묘한 깨달음의 밝음일 뿐이어서 법계를 두루 비추느니라.” |
그러므로 알라. 묘한 깨달음의 밝은 마음은 맑고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되 업으로 인하여 나타나고 따라서 물질과 공이 되어 법계에 두루하며, 중생은 그 본각을 등지고 망령되이 정진(情塵)을 집착하여 도리어 평등한 한 참된 깨달음 가운데서 나타나는 차별된 경계를 오인하여 밝혀지는 곳에 따라 억지로 시비를 말하는 것이 마치 허공의 체성 안에서 그 차별을 정하는 것과 같나니, 실로 허망한 뒤바뀜이어서 의거할 만한 도리가 없다. 거룩한 지혜와 참된 교리에 매어서 모두가 그 뒤바뀜을 깨뜨리기 위한 것이니, 만약 뒤바뀜이 진실하지 않음을 알면 저절로 논할 만한 법이 없으리라. |
마치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지혜로 온갖 불법에 들어가 중생들을 위해 설명하여 뒤바뀜이 제거되게 한다. 그러나 중생을 여의고서 뒤바뀜이 있지 아니하고 뒤바뀜을 여의고서 중생이 있지 아니하며, 뒤바뀜 안에서 중생이 있지 아니하고 중생 안에서 뒤바뀜이 있지 아니하며, 뒤바뀜이 바로 중생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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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고 중생이 바로 뒤바뀜도 아니며, 뒤바뀜은 안의 법이 아니고 뒤바뀜은 밖의 법이 아니며, 중생은 안의 법이 아니고 중생은 밖의 법이 아닌 줄 알 것이니, 온갖 법은 허망하고 진실하지 아니하여 빨리 생겼다가 빨리 없어지면서 견고함이 없음은 마치 꿈과 같고 그림자와 같고 곡두와 같고 허깨비와 같으며 어리석은 범부를 미혹되게 한다”고 한 것과 같다. |
소(疏)에서 해석하기를 “경의 글에는 네 짝[對]이 있다. 앞의 세 짝은 두 가지가 서로서로 대비되고 뒤의 한 짝은 제 자체에서 밝힌다. |
앞의 세 짝 중의 앞의 두 가지는 분리되지 않음[不離]이요, 뒤의 한 가지는 즉하지 않음[不卽]이니, 곧 중생과 뒤바뀜이 즉함도 갈라짐도 아님을 드러낸다. 중생은 능히 일으킴[能起]의 뒤바뀐 사람이어서 물들음 갈래[染分]의 의타(依他)요, 뒤바뀜은 일으킬 바[所起]의 허망이라 변계소집(遍計所執)이다. |
첫째 짝에서 밝힌 분리되지 아니함이란, 의지함[依]이 진실을 집착함과 같기 때문에 중생을 여의고서 뒤바뀜이 없고 의지하여 집착함이 생김[起]과 같기 때문에 뒤바뀜을 여의고서 중생이 없다. |
둘째 짝에서는 서로 존재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어서 거듭 앞의 이치를 풀이한다. 분리되지 않음이라 함은, 인과가 상대의 인연으로 이루어지면서도 본래부터 체성이 있는 것이 아님을 밝힌다. 두 물건이 서로 존재하되 원인 안에는 결과가 없기 때문에 뒤바뀜 안에는 중생이 없고 만약 반드시 있다면 변계소집이 바로 의타기이어야 하며, 결과 안에는 원인이 없기 때문에 중생 안에는 뒤바뀜이 없고 만약 반드시 있게 해야 한다면 뒤바뀌지 않음이 없는 중생이어야 한다. |
셋째의 짝에서는 즉하지 않음을 밝힌 것이니, 인과와 능소를 무너뜨리지 않은 제 나름으로 분별하는 모양이기 때문이다. |
앞의 세 짝으로 말미암아 중생과 뒤바뀜은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아니하며 즉함도 아니고 갈라짐도 아님을 알게 된다. |
넷째의 짝은 제 자체에서 밝힌다. 뒤바뀐 마음이 경계에 의탁하여 비로소 생기기 때문에 안의 법도 아니다. 만약 이것이 안이라면 경계 없는 데서 경계가 있어야 하며, 뜻[情]으로 말미암아 헤아리기 때문에 밖의 법이 아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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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것이 밖이라면 지혜로운 이도 경계에서 물들지 않을 수 없다. |
이미 안팎이 아니거늘 어찌 중간에 있겠는가. 그렇다면 제 자체가 스스로 비었거늘 무엇을 가지고 다른 것에 대하겠는가, 때문에 즉함과 분리됨으로써 밝힌다. |
중생도 그러하여 쌓임[蘊]에 즉하여 구하여도 없기 때문에 안의 법이 아니고 쌓임을 갈라도 역시 없기 때문에 밖의 법이 아니다. 이미 안팎이 아니므로 중간도 끊어져서 본래 성품이 스스로 공(空)이거늘, 어찌하여 뒤바뀜을 일으킬 수 있겠으며 무엇을 가지고 다른 것에 대하겠는가, 즉함도 달라짐도 아님을 밝힌다. |
이미 이렇게 알면 스스로도 뒤바뀜이 없고 타물을 위하여 이 뒤바뀜을 해설하면 저절로 제거되거니와, 원인은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 견고하지 않음을 요달하지 못한 연유로 망령되이 제 나름으로 분별하게 되나니, 때문에 ‘어리석은 범부를 미혹되게 한다’고 한다. 사실은 어리석은 범부 스스로가 속고 있는 것이니, 마치 원숭이가 달을 붙잡는 것이요 달이 원숭이를 붙잡음이 아닌 것과 같다”라고 했다. |
또 『중관론(中觀論)』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뒤바뀜이 있어도 뒤바뀜을 내지 않고/뒤바뀜이 없어도 뒤바뀜을 아니 내며/뒤바뀐 이라도 뒤바뀜을 내지 않고/뒤바뀌지 않은 이도 뒤바뀌지 않네./ 만약 뒤바뀌게 되는 때라도/역시 뒤바뀜을 내지 않나니/너는 스스로 자세히 살펴보라/그 뉘가 뒤바뀜을 내는 것인가”라고 했다. |
이미 뒤바뀌었다면 다시는 뒤바뀜을 내지 아니하고, 이미 뒤바뀌었기 때문에 뒤바뀌지 않은 이 또한 뒤바뀌지도 않고 뒤바뀜조차 없다. 때문에 뒤바뀌었을 때에 또한 뒤바뀜도 없다는 두 가지 허물이 있으므로 너는 이제 교만한 마음을 없애고 “누가 뒤바뀌게 된 이인가’라고 잘 관찰하라는 것이다. |
다음에 모든 뒤바뀜이 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런 이치가 있겠으며, 뒤바뀜이 없는데 짐짓 어찌하여 뒤바뀐 이가 있겠는가. |
뒤바뀜의 갖가지 인연이 부서지기 때문에 내지 않음에 있게 되거니와 그가 내지 않음을 탐탁하면 내지 않는다는 이것도 뒤바뀜의 진실한 모양이니, 그러므로 게송에서 말하기를 “어찌하여 내지 않음을 뒤바뀜이라 하는가’라고 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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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
내지 무루의 법도 오히려 내지 않은 모양이라 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뒤바뀜의 이것이 내지 않는 모양이겠는가. 뒤바뀜이 없는데 어찌하여 뒤바뀐 이가 있느냐 하면, 뒤바뀐 이로 인하여 뒤바뀜이 있기 때문이다. |
[문] 어떻게 온갖 뒤바뀜이 허망을 이루지 아니하는가. |
[답] 다만 뜻이 집착한 바로 인하여 마침내 허망이 이어질 뿐이나 본래 공[本空]을 집착하는 것이므로 허망은 곧 허망이 아니다. |
『기신초(起信鈔)』에서 이르기를 “집착한 바가 본래 공함과 진심의 움직이지 않음[眞心不動]은 서로 번갈아 가며 성립한다”라고 했다. |
집착한 바가 본래 공하게만 되면 그 까닭에 진심은 움직이지 아니한다. 진심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집착한 바가 본래 공하게 될 뿐이다. 만 가지 형상이 본래가 공한데 밝은 거울이 동요하지 않음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어찌하여 진실과 허망이 서로 번갈아 가며 성립되느냐 하면 진실을 미혹해서 허망을 일으키고 허망은 진실을 깨치면 곧 진실이요 진심은 허망으로부터 드러나기 때문이다. |
[문] 어떻게 하면 뒤바뀜을 여읠 수 있고 스스로 속지 않으며 허물이 없겠는가. |
[답] 『대집경(大集經)』에서 이르기를 “제오대(第五大)와 같고 제칠정(第七情)과 같으며, 19계(界)가 나옴도 없고 들어감도 없으며 남도 없고 없어짐도 없으며 조작도 없고 마음ㆍ뜻ㆍ의식조차 없음을 허물이 없다고 함과 같다”고 함과 같다. |
[문] 만약 심성(心性)이 본래 깨끗하다면, 어떻게 객진이 물든다고 말하는가. |
[답] 마음은 본래 청정하고 자취 또한 청정하며 체성도 청정하고 작용도 청정하다. 한 마음을 여의고서 따로 청정이 있지 아니하므로, 허망한 객진이 물들일 수도 없고 참된 법이라 깨끗이 할 수도 없다. 왜냐 하면 마음을 여의면 다른 법이 없거늘 어찌 물들음과 능히 물들임이 있겠으며, 또한 마음을 여의면 참된 법이 없거늘 어찌 깨끗함과 능히 깨끗이 함이 있겠는가. 칼은 자신을 베지 못하고 손가락은 제 몸을 대지 못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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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엄론(大莊嚴論)』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이미 심성이 청정하면서도/객진에 더럽힘을 설명하느니라”고 했다. |
마음의 진여를 여의고서 따로 심성의 깨끗함이 있지 아니하고, 마음의 진여를 여의고서 따로 다른 마음이 있지 아니한 것이니, 다른 모양에 의거하여 제 성품이 청정하다 함을 설명한다. |
이 가운데서 마음의 진여를 말하여 마음이라 이름하며 곧 이 마음을 말하여 제 성품의 청정이라 하는 줄 알아야 하리니, 이 마음이 바로 아마라식(阿摩羅識)이다. |
또 일체 중생으로서 아직 견성하지 못한 이는 비록 객진에 의해 숨겨지고 5음에 가려져서 멋대로 생사를 겪으며 왔다 갔다 한다 하더라도 그 성품은 어두워지지 않았으므로, 혹 착한 벗의 깨우침을 만나게 되면 끝내는 저절로 환히 밝아진다. |
이것이 세간을 벗어나는 항상 머무름의 마음의 보배거늘, 어찌 세간의 무상함이 부수는 생멸의 법으로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 |
마치 가난한 여인의 방 안에 금의 광을 아직 파내지는 못했으나 옮겨지지는 않았음과 같고, 마치 역사(力士)의 이마 위의 보주가 싸우다가 묻혀졌으나 언제나 남아 있음과 같으며, 마치 설산(雪山)의 대통 속에 약이 잠시 흘러나왔으나 항상 존재해 있음과 같고, 마치 대지(大地)의 밑에 있는 금강을 뚫고 깎고 하였으나 부서지지 아니한 것과 같다. |
그러므로 『대열반경(大涅槃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가섭(迦葉)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
‘세존이시여, 저는 오늘에야 비로소 바른 소견을 얻었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이로부터 그 전에는 저희들 모두가 소견이 삿된 사람이라 하겠나이다. 세존이시여, 25유(有)에 나[我]가 있사옵니다. 그렇지 않나이까.’ |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
‘선남자야, 나란 바로 여래장의 뜻이나, 온갖 중생들은 모두가 불성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이 나라는 뜻이니라. 이와 같은 나의 뜻은 본래부터 오면서 언제나 한량없는 번뇌에 가려졌나니, 이 때문에 중생들은 얻어 볼 수 없느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