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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48 차례에 걸친 전쟁승인 요청을 거부하던 소련의 스탈린은 완벽한 전쟁준비를 할 것과 전년도에 공산주의 정부를 수립한 마오쩌둥의 군사개입 약속을 전제로 김일성의 50일 적화통일 전쟁계획을 승인한다 - (근거 : 한국과 미국의 기록 소련의 비밀문서 흐루쵸프 전 서기장의 증언)
한때 일부에서는 북한의 주장처럼 한국의 북침설 또는 남침유도설이 나돌았으나 1993년도에 공개된 소련 정부의 기밀문서에 의해 북한의 남침이 정설로 굳어져 더이상 논란이 없다
전쟁준비를 마친 북한 인민군의 전력은 약 20만1천명 탱크 252대 등이고 한국의 국군은 약 10만4천명 탱크 10대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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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 인민군은 38선 전역에 걸쳐 일제히 남침을 시작한다
소련제 신형 탱크를 앞세운 인민군의 위력으로 국군의 방어선은 순식간에 허물어지면서 3일만에 서울을 점령당한다
김일성의 예측과 달리 7월8일 맥아더 장군이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UN군이 투입된다 - 미군 480,000명을 포함한 21개국의 UN군 632,462명 규모이다
7월14일 국군의 작전권은 UN군에게 이양된다
7주만인 8월15일 인민군은 대구 인근까지 내려온다
3개월 후 9월15일 UN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하여 전세를 역전시킨다
미처 북한으로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은 지리산 등에 잔류하여 남부군 또는 빨치산으로 불리며 유격전을 계속한다
9월28일 서울을 수복한다
10월19일 북진을 계속하여 평양을 함락시키고
10월26일 압록강까지 접근한다
11월28일 맥아더 총사령관의 판단과는 달리 중공군이 전투에 직접 가담한다 - 김일성의 사전 요청에 따라 약 120만명의 중공군이 참전한 걸로 추정된다
맥아더 총사령관은 중공군을 막기 위하여 만주 폭격을 건의하나 소련과의 확전을 우려하는 미국 트루먼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12월 장진호 전투를 치르고 흥남에서 철수하면서 UN군은 중국에게 휴전을 제의한다
1951년~~~
1월4일 서울이 다시 함락되고 이를 1.4후퇴라 부른다 3월에 되찾는다
4월11일 휴전을 원하는 미국 트루먼 대통령과 계속 의견충돌을 일으키는 맥아더 장군은 UN군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분단상태에서의 휴전을 공개적으로 반대한다
7월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되고 현재 전선에서 수비만 하는 제한전쟁으로 전환된다
1952년~~~
전력을 보강한 인민군과 중공군은 8월 들어 수도권을 다시 공격하기 시작한다
백마고지 전투가 대표적이다 인민군과 중공군은 9월29일 하루에만 4만8천발의 포격을 퍼부으면서 백마고지를 공격하여 그후 1개월동안 25회 이상 고지의 주인의 바뀐 끝에 - 낮에는 국군 밤에는 인민군이 점령할 정도 - 국군이 최종적으로 점령하고 철마고지까지 진격한다
1953년~~~
3월5일 휴전을 반대하던 스탈린의 사망으로 휴전협상이 빠르게 진행되고 서로 유리한 전선을 확보하기 위하여 치열한 전투가 시작된다
휴전회담 의제중 하나인 전쟁포로 송환은 쉽사리 합의되지 않는 난제이다 빨리 휴전하려는 UN군에 맞서 이승만 대통령은 분단상태에서의 휴전을 반대하면서 단독으로라도 북진통일을 하겠다면서 반공포로의 강제송환을 반대한다
반공포로는 북한출신 인민군 뿐만 아니라 남한 점령지에서 강제 징집된 민간인이거나 인민군에게 생포되어 인민군 복장으로 다시 전투에 투입된 국군포로 출신들로서 북한으로의 강제송환을 거부하는 전쟁포로들이다
6월18일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과의 사전협의 없이 26,930명의 반공포로를 전격적으로 석방한다
7월11일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게 요구하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과 미국의 경제적 군사적 원조 등을 약속 받고 휴전에 동의한다
3년1개월간의 전쟁 끝에 1953년 7월 27일 UN과 북한간의 휴전협정이 체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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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참전국들의 주장과 기록에 의하면
당시 남북한 총인구 약 3000만명 중에서 약 18%인 민간인 포함하여 약 530만명 - 남한 240만명 북한 290만명 ('북한30년사') - 과 UN군 중공군 합하여 또다른 약 100만명이 사망.부상.실종 등 희생 당한 걸로 추정된다
인민위원회의 반동분자 처형 남로당빨갱이 처형 등 민간인 학살이 번갈아 일어난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비극이다
뿐만 아니라 약 20만명의 전쟁미망인 10여만명의 전쟁고아와 함께 결국 약 1천만명의 이산가족을 낳는다
남북한 공업시설의 45%-80% 파괴되고 정부 건물 약 80%와 민간 주택 약 50%가 파괴된다
약 30만명이 납북되거나 월북하고
약 60만명이 월남하여 한국의 도시인구가 증가한다
한국은 좌파가 몰락하고 이승만 정권이 유지되면서 친미반공주의가 확립되고 전후 8년간 약 23억달러의 경제원조를 받는다
전쟁에 패한 북한의 김일성은 패배의 책임을 오히려 남로당과 중도파에게 물어 대규모 숙청하고 주체사상과 적화통일을 주장하며 친중공 일인공산주의체제를 수립한다
미국은 초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다시 확인하고
미소간의 냉전은 심각해진다 - 매카시 선풍 SEATO 구성 베트남전 개입 등
마오쩌둥의 영향력도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1965년 김일성은 중국에게 2차한국전쟁을 준비하고 있으니 파병을 약속해달라고 또다시 요청한다 - 중국 외교부 기밀해제 문서(No.106-01480-07)
1967년 수백명의 무장간첩이 남파되고
1968년1월 31명의 무장공비단이 청와대를 습격하면서 서울에서 시가전을 벌인다 김신조를 생포되고 나머지는 사살된다
박정희 대통령은 안보우선주의를 내세우면서 예비군을 창설하고 고등학생들에게 교련 (학생군사훈련)을 실시한다 이후 김일성에 대한 보복공격을 준비하나 미소간의 데탕트 분위기로 무산된다 예를 들어 실미도 사건이다
11월 울진삼척 지역에 120명의 무장공비가 침투하여 민간인을 사살하고 북한 선전과 함께 노동당 입당을 강요한다 2개월간의 추격전투 끝에 대부분 사살 생포하고 일부는 도주한다
1969년에도 172명의 무장간첩을 사살하거나 생포하고 195명은 도주한다
1969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미국은 아시아 지역에 군사개입을 하지 않는다'는 닉슨독트린을 선언한다
1971년까지 대규모 무장간첩의 남파는 계속된다
1972년 박정희와 김일성은 남북공동성명 - 남북통일의 기본원칙 합의와 핫라인 설치 - 을 발표한다
이후 땅굴 발견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아웅산 폭발사건 남북이산가족상봉 KAL기 폭파사건 등이 계속 발생한다
1991년 UN 남북한 동시가입하면서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한다
1994년 김일성의 사망이후 햇볕정책과 함께 김대중-김정일의 1차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고 2003년 개성공단을 개장하면서 2007년 노무현-김정일의 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
남북한의 화해무드 도중에도 북한의 무력행위 - 1999년 2002년 2차례의 연평해전 2006년 이후 지속적인 핵실험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살 2010년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 - 등으로 여전히 서로 대치중이다
참고 : 두산백과 625전쟁사 Wikipedia 나무위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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