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
(不入虎穴, 焉得虎子)
반고(班固)는 사학자인 아버지 반표(班彪)의 뜻을 이어받아 아버지가 쓴 《후전(後傳)》 60여 편과
집안에 있는 전적, 그리고, 황실 자료실의 자료들을 바탕으로 하여
장장 25여 년에 걸쳐 무려 80만 자에 달하는 《한서(漢書)》를 편찬하였다.
그런데, 반표에게는 장남 반고와 더불어서 반초(班超:32년-102년)라는 또 하나의 특출한 아들이 있었다.
반초의 자는 중승(仲升)이고, 부풍(扶风) 평릉(平陵)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의 아버지 반표(班彪)가 부풍 안릉(安陵) 사람이고,
그의 형 반고도 부풍 안릉 사람임을 감안할 때 반초 또한 안릉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맞을 것 같다.
반고와 반초는 둘 다 서기 32년생이라는 점에서 둘을 쌍둥이로 보는 설도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아니다.
서기 62년, 반고가 《한서》를 집필하다가 누군가가로부터
"사적으로 나라의 역사를 편찬한다(私修国史)”는 죄목으로 고소를 당하였다가 동생 반초(班超)가
한명제(漢明帝)에게 상소를 올려 억울함을 호소함으로써 반고는 풀려나고 오히려 중용되어
황가교서랑(皇家校书郎)이 되어 황실의 도서와 문서를 관장하였다.
이 때 동생 반초도 어머니를 모시고 낙양으로 이사를 하였다.
반초는 집안이 가난하여 관부에서 문서를 써주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궁핍한 생활이 답답했던 반초는 관상가를 찾아가서 관상을 보았는데,
관상가는 “너의 선대는 비록 평민이지만 너는 훗날 반드시 만리 밖에서 후로 봉해질 것이다
.(你的先辈虽是平民百姓, 但你日后定当在万里之外封侯.)"라고 하였다.
반초가 이유를 묻자 관상장이는 "너는 이마가 제비 같고 목은 호랑이 같아서 비상하여 고기를 먹는구나.
이것은 만리봉후의 용모다.(你额头如燕, 颈脖如虎, 飞翔食肉, 这是万里封侯的相貌啊!)"라고 말했다.
만리봉후(万里封侯)는 만리 밖 변방에서 공을 세워 후로 봉해지는 것을 말하는데,
오늘날은 포부가 원대하고 기개가 비범한 것을 나타낸다.
이후 한명제가 황가교서랑(皇家校书郎)으로 일하고 있는 반고에게 "너의 동생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라고 물었다.
한명제는 반고가 "사수국사(私修国史)”의 죄목으로 고소를 당했을 때에
형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렸던 반초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반고가 "관부에서 문서를 써서 번 돈으로 노모를 봉양하고 있습니다.(为官写书, 受直以养老母)"라고 하였다.
이에 한명제는 반초를 난태령사(兰台令史)로 임명하여 상소와 문서를 관장하게 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자 않아 반초는 뭔가 잘못한 것이 있어 과오를 해임되어 다시 관부에서 문서를 적는 일을 하게 되었다.
반초가 관부에서 문서를 적는 일을 하고 있을 때에 책상에 엎드려 붓을 놀리다가는 가끔 붓을 내던지고서
"나는 대장부로서 뛰어난 계략과 재능은 없지만 나라 밖에서 공을 세워 후(侯)의 작위에 오른
부개자(傅介子)와 장건(张骞)을 본받아야 하는데, 어찌하여 지금 이렇게 허구한날 필묵으로 삶을 영위하고 있는가?
(我身为大丈夫, 尽管没有什么突出的计谋才略, 总应该学学在国外建功立业的傅介子和张骞来封侯晋爵,
怎么能够老是干这笔墨营生呢?)"라고 한탄하였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를 비웃었지만,
반초는 "범부 속인들이 어찌 지사인인(志士仁人)의 포부를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서기 73년 북쪽의 흉노가 서역을 빈번하게 침범하자 한명제는 봉차도위(奉车都尉) 두고(窦固)로 하여금 출정하게 하였다.
어려서부터 꿈이 컸고 문서 따위를 써내려가는 문관업무가 내키지 않았던 반초는 기화가 왔다고 생각하면서 곧바로 한명제에게 상소를 올려 "두고 장군을 수행하여 변경에서 공을 세우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미 용기기 대단하고 언변이 뛰어난 반초를 알고 있던 한명제는 반초가 그와 같은 포부를 갖고 있는 것을 알고서는
크게 기뻐하여 즉시 두구를 수행하여 흉노 정벌에 나서도록 하였다.
그렇게 하여 41세의 반초는 마침내 붓을 던지고 종군하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철혈(鐵血)과 같은
군인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를 “투필종융(投笔从戎)”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이후 문관이 무관으로 전직하는 것을 의미하게 되었다.
처음에 반초가 두고의 부대에서 맡은 직은 대리사마(代理司马)였다.
두고의 대군이 이오(伊吾)를 공격할 때, 용맹한 반초는 포류해(蒲類海)에서 북흉노의 부대와 교전하여
무수한 적의 목을 베면서 대승을 거두었다.
반초는 이 전투에서 유명해졌고, 두고 장군은 그의 능력을 인정하여 서역으로 출사(出使)시켰다.
반초를 보낸 목적은 서역의 여러 한나라 속국들과 소통하여 북흉노의 통제에서 벗어나
다시 한나라로 귀속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 임무는 사실 매우 어렵고도 막중했다.
원래 한나라에 귀속되어 있던 서역의 각국들은 한나라와 북흉노 양대 세력을 두고서
세력의 풍항계에 따라 왔다갔다 하면서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용맹스런 북흉노는 서역 곳곳에 군대를 배치하고 있으면서 수시로 서역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다
. 반초가 이번 사행에서 조금이라도 실수를 하면 이역만리에서 쥐도 새도 모르게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이와 같이 위험한 사행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반초는 조금도 주눅들지 않고서
오히려 극도로 어려운 임무를 유쾌하게 받아들였다.
반초는 두고 장군의 뜻에 따라 종사(从事) 곽순(郭恂)을 차석으로 삼은 후에 두고의 군사들 중에서 36명의 부하를 엄선하여
그들과 함께 서역으로 출사하였다. 즉 곽순(郭恂)은 반초의 뜻과 관계없이 두고 장군이 추천한 것이고,
나머지 36명의 부하들은 반초 스스로 선발하였던 것이다.
반초가 도착한 첫 번째 목적지는 지금의 신장 서남지역인 선선국(鄯善国))이었다.
반초 일행을 맞이한 선선왕은 처음에는 반초 일행을 따뜻하게 맞아주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태도가 달라지고 냉담해졌다
. 이에 반초는 북흉노에서도 사자가 왔기 때문에 선선왕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고 짐작하고서는
느닷없이 자신들을 접대하는 시종에게 "북흉노의 사자가 온 지 여러 날이 되었는데,
그들은 지금 어디에 머무르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반초가 넘겨짚고서 급작스럽게 질문을 하자 시종은 당황하여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초는 비밀이 누설되지 않도록 시종을 감금하였다.
그런 다음 술자리를 갖는다는 명분으로 36명의 부하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하였다.
이 때 겁이 많은 종사 곽순(郭恂)은 부르지 않았다.
술기운이 어느 정도 오르자 반초는 북흉노의 사자가 이곳에 와 있어서
선선왕이 자신들을 홀대하고 있는 사실을 알리면서 가만히 있으면 자신들이 위태로워진다고 하였다.
36명의 부하들이 반초의 뜻에 따르겠다고 하자 반초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를 얻을 수 없다.
지금 유일한 방법은 밤을 틈타 북흉노 사절들을 공격하는 것뿐이다.
그들은 우리가 얼마나 되는지 몰라서 분명히 매우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기회를 타서 그들을 없앨 수 있다.
그들을 없애기만 하면 선선왕은 간담이 서늘해질 것이고,
우리는 큰 공을 세우게 될 것이다.
(不入虎穴, 焉得虎子. 现在的办法, 只有乘夜用火进攻北匈奴使者了, 他们不知道我们究竟有多少人
, 一定会感到很害怕, 我们正好可以趁机消灭他们. 只要消灭了他们, 鄯善王就会吓破肝胆, 我们大功就告成了.)”
라고 하였다.
반초의 이 말에서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
(不入虎穴, 焉得虎子)”는 말이 생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