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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2019. 10. 15. 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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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많이 나오지만 세상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단어들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경건’입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경건’이 무엇인지 잘 모르거나 ‘경건’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경건’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명사 ‘eusebeia’는 ‘잘’(영어의 ‘well’)을 뜻하는 ‘eu’와 ‘공경하다’를 의미하는 ‘sebomai’가 합쳐진 단어로서 영어에서는 ‘godliness’로 번역됩니다. ‘공경심과 경외심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그분의 뜻에 합당하게 행함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해 드리고자 하는 태도 그리고 그런 태도에서 나오는 행동 양식’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말세에 험악한 때가 올 텐데 그때에는 사람들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할 것이라고 했습니다(딤후 3:1, 5; 1절에서 “고통하는”이라고 번역된 헬라어 형용사 ‘chalepos’의 더 적합한 번역은 ‘험악한’입니다). 물론 이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이들에게 “경건의 모양”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들을 묘사하는 4절 말씀에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바울이 세상의 불신자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었다면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이 있다는 것은 경건한 삶을 사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인다는 것입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에서 “있으나”로 번역된 헬라어 동사 ‘echo’의 시제는 동작이 계속됨을 뜻하는 현재 시제입니다. 이는 경건의 모양을 유지하는 것이 생활 방식이 됐음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내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어져 있고 사람에게서 배운 관습대로 나를 두려워할 뿐”(사 29:13, 우리말성경)이라고 하셨는데, 경건의 모양은 있는 사람들은 그와 같이 입으로 하나님께 다가가고 입술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데에 능숙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눈보다 사람들의 눈을 더 의식하고 하나님의 인정과 칭찬보다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더 추구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내면을 살피는 데에는 관심 없고 사람들의 눈에 비칠 자신들의 외양과 외적 활동에만 신경을 씁니다.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5절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에서 “부인하니’라고 번역된 헬라어 동사 ‘arneomai’는 ‘거부하다’(영어의 ‘reject’ 또는 ‘repudiate’)라는 의미도 갖고 있는데 여기서는 ‘거부하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고 봅니다. New Living Translation, Good News Translation, Net Bible 등 몇몇 영어 성경은 위 헬라어 동사를 그런 의미로 해석하여 ‘reject’ 또는 ‘repudiate’로 번역했습니다.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라는 말씀은 경건에는 능력이 있음을 말해 줍니다. 경건의 능력은 신자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성도로 변화시키는 능력입니다. 그런 능력이 경건에 내재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경건에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은 경건에 이르도록 신자를 인도하시고 도우시는 분이 성령이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경건의 능력의 원천은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는 것은 그러한 경건의 능력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을 거부한다는 뜻입니다. Good Word Translation 영어 성경은 디모데후서 3장 5절 전반부 말씀(“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They will appear to have a godly life, but they will not let its power change them.” 즉, 그들이 경건한 삶을 사는 것처럼 보일 것이나 그들은 경건의 능력이 자신들을 변화시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경건하게 보이는 것만을 원하지 경건의 능력이 자신들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은 거부할 것이라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2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4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딤후 3:2-4).
위 말씀은 5절의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바로 전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거부하는 자칭 신자들이 실상 어떤 사람들인지를 말해 줍니다. 열거된 18가지 악 중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자기 사랑입니다. 이는 자기 사랑이 나머지 악의 근원임을 말합니다. 이 사람들이 사랑하는 대상으로 언급된 세 가지는 “자기”(2절)와 “돈”(2절)과 “쾌락”(4절)입니다. 이 세 가지를 사랑하는, 교만한(2절) 사람들은 남들에게 경건하게 보이기는 원해도 근본적인 내면의 변화는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자기와 돈과 쾌락을 포기할 의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경건의 능력을 거부합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거부하는 사람들은 “경건을 이익의 수단으로 여기는 사람들”(딤전 6:5, 우리말성경)입니다. 그들은 또한 예수님 공생애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위선적인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 중 일부를 보겠습니다. “너희에게 화가 있을 것이다.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위선자들아! 너희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잘 닦으면서 그 안은 욕심과 방탕으로 가득 차 있구나. 눈먼 바리새파 사람들아! 먼저 잔 속을 깨끗이 닦으라. 그래야 겉도 깨끗해질 것이다”(마 23:25-26, 우리말성경); “너희는 하얗게 칠한 무덤과 같다. 겉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속은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의롭게 보이지만 그 속에는 위선과 불법이 가득 차 있다”(마 23:27-28, 우리말성경); “이 뱀들아! 이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마 23:33, 우리말성경).
바울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라고 한 후 바로 이어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5절)라고 디모데에게 명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멀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현대 교회 안에 많은데 그런 사람들을 멀리하는 교역자나 직분자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바울은 “경건은 모든 일에 유익하며 이 세상과 앞으로 올 세상의 생명을 약속한다”(딤전 4:8, 우리말성경)고 했습니다. 경건 없이는 이 세상에서나 앞으로 올 세상에서 생명을 누릴 수 없습니다. 어떻게 경건에 이를 수 있을까요?
유다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들은 여러분에게 말하기를 ‘마지막 때 자기들의 경건하지 못한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들이며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며 성령이 없는 사람들입니다”(18-19, 우리말성경).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거부하는 사람들은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며 성령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선 거듭나서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거듭나서 성령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신성한 능력을 따라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벧후 1:3, 우리말성경)십니다.
위와 같이 말한 베드로는 같은 장 5절, 6절 및 7절에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십시오”(우리말성경). 우리가 거듭나서 성령을 받을 때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지만 “경건”은 우리가 살면서 “더욱 힘써” 공급해야 할 덕목 중의 하나입니다. 바울도 디모데에게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딤전 6:9, 우리말성경) 것과 “돈을 사랑하는 것”(딤전 6:10, 우리말성경)을 멀리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딤전 6:11, 우리말성경)라고 했습니다. 앞서 봤듯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거부하는 사람들은 돈을 사랑합니다. 돈을 사랑하면서는 경건에 이를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마 6:24, 우리말성경)는 것과 같습니다. 경건이 “큰 유익”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 만족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딤전 6:6, 우리말성경).
경건은 단련을 요구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오직 경건에 이르도록 너 자신을 단련하”(딤전 4:7, 우리말성경)라고 했습니다. 경건에 이르도록 우리 자신을 단련하기 위해서는 먼저 “저속하고 헛되게 꾸며 낸 이야기를 버”려야 합니다(딤전 4:7, 우리말성경). 또한 “속된 잡담을 피”해야 합니다(딤후 2:16, 우리말성경). 왜냐하면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경건함에서 점점 더 멀어지”기 때문입니다(딤후 2:16, 우리말성경).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교훈하심으로 경건하지 않은 것과 세상의 정욕을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 가운데 이 세상에서 살며 복된 소망과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날 것을 기다리며 살도록 하셨다”(딛 2:11-13, 우리말성경)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경건하지 않은 것과 세상의 정욕을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 가운데 이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교훈하”십니다.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아야 합니다(고후 6:1).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경고하고 권면했습니다. “약속하신 주께서는 어떤 사람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더딘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해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올 것입니다. 그때 하늘은 큰 소리를 내며 떠나가고 그 구성 물질들은 불에 타 해체되며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드러날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해체될 것이니 여러분은 어떤 사람이 돼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며 간절히 사모하십시오. 그날에 하늘이 불에 타 해체되고 그 구성 물질들이 불에 녹아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지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들이여, 여러분은 이 일들을 고대하고 있으니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주 앞에서 평강 가운데 드러나기를 힘쓰십시오” (벧후 3:9-14, 우리말성경).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한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두 핍박을 당할 것”입니다(딤후 3:12, 우리말성경). 그러나 “우리가 잠시 당하는 가벼운 고난은 그것 모두를 능가하고도 남을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이뤄 줄 것입니다”(고후 4:17, 우리말성경).
[출처]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작성자 제자의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