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거사와 나눈 대화이다. 거사가 물었다.
"불교의 근본사상이 무아(無我)인데, 그럼 영혼의 존재를 불교에서는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까?"
다음은 나의 답변이다.
내가 대답 대신 경전에 담겨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명하고자 합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한 브라흐만의 존재를 불교에서는 인정할 수 없듯이, 육체의 주인이라는 영혼의 존재인 아트만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 모이고 머물며 흩어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연기법칙(緣起法則)이라 합니다. 정신작용도 복합적이고 종합적인 상호 연관관계의 존재론적 반응일 뿐, 하나하나의 기능이 소멸되거나 기능이 멈추게 되면 정신작용도 정지됨을 무아라고 합니다. 아트만을 인정하면 브라흐만도 인정해야 될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사라지면 이것도 사라진다.'고 연기법칙을 설하고 있습니다. 하여, 세상에는 물질이든 비물질이든 변하지 않는 게 없는데 무엇이 변하지 않고 존재해 윤회를 거듭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수행자는 '기실론'의 진여(眞如)에 집착해 희망의 불씨를 살리려는 어설픈 몸짓도 보게 되는데,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무아임을 사무치게 깨달을 일입니다. 불교는 전생과 내생을 위한 종교가 아닙니다. 바로 현생, 오늘의 종교입니다. 부처의 가르침은 오늘의 정토에서 오늘의 주인공이 되어 행복과 평화 자유를 누리는 가르침을 펴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는 형이상학 쪽보다 형이하학 쪽에 방점을 두는 오늘의 종교임을 잊지 말 일입니다.
'백론(百論)'에 있는 게송을 옮깁니다.
과거에 내가 있었다는 것은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
전생에 있었던 내가
금생에 내가 될 수 없도다.
무아를 사무치게 깨닫는다면
지리산의 내원사에서 도반 모임이 있었다. 이날 도반스님들과 나눈 대화이다. 다음은 한 도반스님의 무아에 대한 물음에 내가 답한 내용이다.
불교의 근본사상이 중도사상과 연기법칙인데 일생을 오롯이 참선 수행해온 어느 원로 스님은 연기법칙과 무아를 둘로 보며 무아는 인정하면서도 진여는 영원불멸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지극히 우려할 만한 견해로서 연기법칙과 무아사상은 결코 둘이 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또한 그 어떤 존재도 영원한 것은 없으며 '생주이멸'과 '성주괴공'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무아는 인정하면서 진여에 집착하는 모습은, 아트만은 인정하면서 브라흐만은 부정하는 경우와 다를 바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영원히 변치 않는 그 무엇도 있을 수 없으며 무아는 연기법칙과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또한 진여란 궁극적 진리의 다른 표현일 뿐 어떠한 존재론적 주체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세제불교(世諦佛敎)에서는 육도윤회와 전생, 내생을 펼쳐 보일 수 있으나, 진제불교(眞諦佛敎)에서는 당생윤회의 처처정토인 것입니다.
한국불교는 스님들이 가장 먼저 개혁적으로 변화하고 수행인답게 검소한 모습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화엄경'에서 밝히고 있듯 신앙은 사닥다리 오르듯 하여 날로 시야가 트이고 마음이 열려야 할 터인데, '동체삼보'와 '별상삼보'보다 '주지삼보'에만 머물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또한 일생을 수행해온 도반스님들이 무아에 대해 아직도 생각의 윤회에 머물고 있음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연기법칙과 무아는 결코 둘이 아닌 하나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물질이나 비물질이나 어느 것 하나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변하는 현상계에서 자유로워 영원불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창조주인 브라흐만을 철저하게 인정할 수 없듯 나의 육체를 주재한다는 아트만이나 영혼 따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무아를 사무치게 깨닫는다면 소유욕과 집착심에서 벗어나, '날마다 좋은 날'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영혼의 덫
'중론'과 '백론'의 '무아' 부분을 인용해 올린 글에 대해 댓글과 전화로 묻는 등 혼란스러워하는 사람이 많아 답을 해본다. 먼저 묻는다.
"영혼이 있어 윤회를 거듭한다면 새앙쥐의 영혼과 코끼리의 영혼이 크기와 부피가 같겠는가, 다르겠는가?"
물론 영혼이 물건이 아닌 이상 크기와 부피를 따진다는 게 우습게 들릴 것이다. 그러나 편의상 던지는 질문이고, 이에 대한 대답은 '같다'라고 답해야 한다. 왜냐하면 같지 않고 '다르다'라고 답한다면, 새앙쥐는 새앙쥐로 거듭 태어나야 하고 코끼리는 코끼리로서의 윤회를 거듭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은 후 49일에 이르면 49재를 치르게 되는데, 그 이유는 49일이 지나면 영가의 지은 바 카르마에 따라 윤회를 거듭하게 된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윤회의 주체가 사람뿐이 아닌 축생 등의 모든 생명체 있는 것들이 죽은 후 49일이 지나면 생을 바꿔가며 윤회를 거듭한다는 논리일 것이다.
북인도의 쓰리나가르에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단지역이 있다. 이곳에 만년설이 그대로 덮여있다. 원주민들이 녹아내리는 만년설의 빙벽에서 도룡농, 개구리 등이 갇혀있는 얼음덩이를 들고와,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매우 비싼 가격으로 팔고 있었다. 얼음덩이를 조심스럽게 부분부분 떼어내, 마침내 얼음 속 개구리가 양지 바른 곳에서 만년, 십수만 년의 잠에서 깨어나 움직이는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된다. 실지렁이를 준비해 개구리에게 주면 냉큼 받아 먹기까지 한다.
이쯤에서 다시 묻는다.
"만년설의 얼음덩이에서 생물학적으로 의학적으로 얼어죽어 있던 개구리가 얼음이 녹고 주변 환경의 변화와 조성에 의해 거뜬하게 되살아났다. 49재를 천 번, 만 번, 십만 번 치러야 할 시간적, 공간적 의문부호는 무엇이라고 답하겠는가?"
냉동상태로 죽어 있던 개구리의 영혼은 특혜를 누리거나 초능력이 있어 윤회를 멈추고 있었다고 궁색하게 답하지는 않을 것이다. 해외에서 머문 15년 중 인도에서 머물던 3년 동안 모기, 빈대, 이, 벼룩 등 헤아릴 수 없이 살생하며 지내왔다. 그러나 모기귀신, 빈대귀신, 벼룩귀신의 괴롭힘을 단 한 차례도 당한 적이 없다.
이쯤에서 부처님의 말씀으로 마무리하려 한다. 부처님은 '잡아함경', '상응부경전'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장미꽃은 장미 줄기나 잎이나 대궁이나 뿌리에서 찾을 수 없다.
뿌리와 줄기와 대궁과 잎이 건강할 때,
그리고 그 기능이 작동될 때 장미꽃이 피어오르는 것이다.
햇볕과 흙, 수분과 바람, 자양분이
알맞게 골고루 갖추어져 있을 때 장미 줄기는 자라고,
줄기가 건강할 때 장미꽃도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의 존재도 눈, 귀, 코, 몸, 뜻이 색깔과 소리, 향기와 맛, 느낌과 분별의 작용에 의해 생각의 윤회를 거듭할 뿐,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기능이 사라지면 사람의 존재도 사라짐을 일깨워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연기법칙과 무아는 둘이 될 수 없는 하나의 진리이다. 사람의 신체구조는 '흙, 물, 바람, 불'의 기운으로 이루어져 있다.이 기운이 서서히 기능을 상실해가면 뇌 작용과 신경세포도 멈추게 된다. 온갖 작용과 기능이 멈춘 상태에서 무엇이 실체로 남아 있어 윤회를 거듭한다는 것인지 살피고 또 살필 일이다.
무아가 정리되지 못하면 영혼의 덫으로 윤회의 수렁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다.
출처: 산골 노승의 화려한 점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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