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이씨 (固城 李氏) /이륙(李陸)1438년(세종 20)∼1498년(연산군 4). 조선 초기의 문신.
시호: 문광(文光) 문중자료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방옹(放翁), 호는 청파(靑坡).
좌의정 이원(李原)의 손자이며, 사간 이지(李墀)의 아들이다.
1452년(문종 2) 사마시에 합격한 뒤 지리산에 들어가 학문을 닦기에 힘썼다.
1464년(세조 10)춘방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겸예문에 선발되고, 성균관직강이 되었다.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급제, 이듬해 왕명을 받아 안효례(安孝禮) 등과 도성의 지도를 작성하였다.
1468년 중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응교를 지냈다. 예종이 즉위하자 장령이 되어 〈형국사목(刑鞠事目)〉을 작성하였으나, 피혐(避嫌)으로 물러났다.
1469년 성종이 즉위하자 겸예문에 다시 선발되고, 사헌부 재직시 시폐(時弊)를 진언한 공으로 자품이 올랐다.
1471년(성종 2) 장례원판결사에 등용되고 당상관에 오른 뒤, 이어서 대사성‧공조참의를 역임하고, 1477년 충청도관찰사에 부임하였다. 다시 예조‧이조‧호조의 참의를 역임하고, 병조참지‧형조참의를 지냈다.
1484년 가선대부로 승급, 경상도관찰사‧한성부우윤을 지내고, 1488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서반으로 옮겼다가 그해에 형조참판이 되었다.
이듬해에 강원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490년 예조참판이 되어 정조사(正朝使)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병조참판‧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
1494년 성종이 죽자 고부청시청승습사(告訃請諡請承襲使)의 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서 동지춘추관사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1495년(연산군 1)에 경기도관찰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대사헌에 등용되어 여러가지 시폐의 시정을 진언하였다. 그해에 다시 동지중추부사가 되었으나, 연산군 즉위에 소극적이었다고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았다.
그뒤 한성부의 좌윤‧우윤, 호조참판‧병조참판을 지냈다.
성품은 정한(精悍)하였으며, 행정수완이 있었고, 시와 문장에 능하였다.
저서로는 《청파집》‧《청파극담(靑坡劇談)》이 있다.
성종조의 명신 -연려실기술
이륙은 자는 방옹(放翁)이며, 호는 청파(靑坡)요,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좌의정 원(原)의 손자 무오년에 태어났으며, 정보(鄭保)의 외손자 이다. 세조 기묘년에 생원과와 진사과에 오르고 갑신년에 문과에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병술년에 발영시에 오르고 무자년에 중시에 합격하였다. 벼슬은 병조참판ㆍ대사헌에 이르렀다.
○ 젊었을 때 호방하여 무슨 일에나 구속을 받지 아니하였다. 나이 22세에 생원ㆍ진사과에 올랐다. 기묘년 집안 일은 제쳐 놓고 남쪽으로 내려가 지리산에 들어가서 3년 동안이나 나오지 않으니, 소문을 듣고 공을 따르는 이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드디어 《자서(子書)》 《사서(史書)》의 여러 서적을 열심히 연구하기에만 힘써 피로한 줄을 몰랐다.갑신년에 세조가 온양(溫陽)에 행차하여 선비를 뽑는데, 공은 영남에서 이곳으로 와서 여러 사람에게 호언하기를, “장원을 차지하지 못하면 맹세코 서울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하더니, 과연 장원으로 뽑혔다. 그후 명성이 드날려 특진되어서 직강(直講)으로 임명되었다.
○ 정유년에 충청 감사에 임명되니, 이때 공의 아버지 치(墀) 세조 정축년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도정(都正)에 이르렀다. 가 괴산 군수(槐山郡守)로 있었다. 이것을 안 임금이 전지를 내려 부르기를, “아버지가 군수로 있는데 아들이 감사가 되었으니 교대할 때에는 서로 받고 주는 일이 매우 난처하겠다. 빨리 서울로 올라오라.” 하였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를 영광스럽게 여겼다.
○ 천성이 총명하고 행동이 민첩하며, 품행이 단정하고 엄숙하여 기개가 곧았다. 뭇 서적에 널리 통달하였는데 더우기 역사에 관해서는 능통하였다. 저술한 책으로는 《청파극담(靑坡劇談)》이 있다.
靑坡碑銘 幷序○成俔
弘治十有二年夏。李君峽。以其先君行伏。使人請於俔曰。知先君事蹟者。莫如子。欲丐文銘諸隧。予其誌之。余於先君。非面明也。自齠雜。相從爲學。偕捷司馬拔英兩試。立朝三十餘年。有金石交契之密。雖不命。猶爲之。況命之勤乎。謹按。李氏出固城。爲高麗鉅宗。有諱嵒,號答林。登▓。官至門下侍中。諡文眞。爲詩簡古。筆法▓絶。與趙 松雪相埒。寔公皇高祖。有諱岡,▓平齊。登▓官至密直副使。▓文▓。寔▓▓▓▓。▓▓▓▓容軒。登第。事我太宗。參佐命功臣。官至議政府左議政。封鐵城府院君。寔公皇祖。有諱墀。寔公皇考。登第。官至敦寧府正。以公勛追贈禮曹參判。皇妣鄭氏。籍迎日縣。監察諱保之女。文忠公夢周之後。贈貞夫人。正統戊午四月十六日。生公。公諱陸。字放翁。自號靑坡居士。天順己卯。年二十二。中生員,進士試。公少時倜儻不羈。擺棄家事。有遊學四方之志。南入智異山。窮山水之樂。三年不出。聞風從之遊者雲集。人有誚其不習擧予業者。公曰士之榮悴有命。豈可留心於雕篆小枝。遂探子史諸書。矻矻忘倦。甲申。世祖幸溫陽取士。公自洛南至。楊言於衆曰。不占巍科。誓不入嶺。果擢第一。名聞騰翥。趨授成均直講。成化丙戌。中拔英試。戊子。又中重試。累遷世子文學,宗學司誨。皆帶藝文應敎。藝文。高選也。與選者皆一時名儒。朝夕昵侍帷幄。恩眷甚厚。睿宗卽位。擢爲司憲掌令。兼藝文典翰。成宗初。公猶爲臺官。言事讜直。皆切時病。特命陞堂上。階折衝。行虎賁衛大護軍。蓋奬之也。時論將擬公佐理。公辭以無勞。只賜原從功臣之號。拜掌隸院判決事。移拜成均大司成。掌成均試。取趙之瑞,申從濩等二百人。時稱得人。還拜判決事。申相叔舟啓曰。李某。以文翰之才。不宜久委簿領。宜授閑官。以展其業。上可之。御書注工曹參議。丁酉夏。御書出爲忠淸道觀察使。時府正公守槐山郡。有旨宣召。且諭之曰。父爲郡守。子爲當道監司。交代之際。授受甚難。其速上來。時論榮之。歷吏,戶,禮曹參議。上患獄訟淹滯。設斷訟都監。命公爲提調。公天性敏達。翰墨之餘。兼習吏事。裁決得當。故有是命。甲辰。以刑曹參議。陞嘉善。拜慶尙道觀察使。機務倍他道。公剖斷如流。一道稱美。乙巳。以疾辭。拜漢城右尹。丙午。丁父憂。服闋。累遷江原道觀察使,禮曹參判。庚戌。以正朝使赴京。歷同知中樞,刑曹參判。甲寅。成宗賓天。今上特命公爲請諡承襲副使。公有宿疾。親戚皆以跋涉之苦止之。公曰。人臣。義當夷險一節。況値國之大事。其敢顧一己之私。遂行。禮部問本朝世系。人無對者。公歷敍本末。辨對無少差。華士嘆服。以謂識事宰相。累遷京畿觀察使,司憲府大司憲,漢城左尹,戶曹參判。又遷兵曹參判兼同知春秋館事。預修成宗實錄。弘治戊午三月十七日。以病卒于弟。享年六十一。訃聞。賻祭有加。親朋僚屬。爭奔走弔祭。是年五月十九日。葬于廣州南面加次栗里先瑩之側。夫人朴氏袝焉。公性端嚴正直。自筮仕至爲宰樞。一心奉國。終始不,渝。少喪妣。事後母南氏。如事親母。定省不少廢。南亦待如己子。又與諸弟友愛。居家嚴肅。內外截然有範。對人接物。言笑不苟。稟然有不可犯之色。臨終。語諸子曰。兄弟一氣。當極親愛。諸子在傍泣。公曰。人誰不死。但有先後耳。何必掛慮。公博通群書。尤長於史。爲文。祖韓愈。富贍典實。所著有家集及靑坡劇談。自杏村,平齋,容軒。三世皆有稿。久幾泯滅。公綴緝之。行於世。卽鐵城聯芳集。公再娶。先夫人朴氏。籍高靈縣。交河縣監秀林之女。生三男二女。性醇愨溫淑。常誦孝經曁忠臣孝子烈女之事以敎。諸子承其敎。皆得成就。男長曰峓。漢城判官。次曰嶮。副司果。次曰嶪。進士。女長適直長安邦彥。次適別坐南惄。後夫人金氏。籍慶州。部將鉤之女。生一男一女。男曰嶠。將仕郞。女幼。判官娶僉節制使張賢孫之女。生三男二女。男長曰滉。承義副尉。餘幼。司果娶副正鄭沃之女。生一男。幼。進士娵郡守沈順道之女。生一男。幼。直長生三男四女。男長曰澮。女長適王子檜山君恬。餘皆幼。別坐生三男二女。皆幻。銘曰。鐵城之李。爲國大姓。赫赫諸賢。世篤其慶。乃至於公。優有德行。蒞官莅事。不失其正。孝友恭恪。自出天性。[文辭苕發。心手相]應。[談論懸河。人無與競。精明所照]。物[莫逃鏡]。其理刑獄。先辦五聽。其受言責。忠言有諍。出按四道。咸服善政。歷敭六部。▓有聲稱。經綸大手。宜付國柄。何富之德。而嗇其命。善慶所積。門閥轉盛。有巋豐碣。瞻者起敬。